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0.10.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마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땅으로의 이식은 국부의 증진 도모에 크게 족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도 또한 이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조선도항자편리(朝鮮渡航者便利) 22편-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국 땅에 이주한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인 거류지가 장차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함께 1911년에 펴낸『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개항하던 해에 33호 103명이었으며 이들은 생업 때문에 대부분 원마산(마산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80호에 259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가 개항이후 12년 간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들의 수 입니다.

년도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호수

33

70

80

99

95

154

340

677

868

989

1,132

1,548

인구

남자

87

189

160

203

191

359

717

1,233

1,826

2,009

2,360

3,163

여자

16

61

99

130

136

270

531

937

1,393

1,678

1,961

2,778

합계

103

250

259

333

327

629

1,248

2,170

3,219

3,687

4,321

5,941


이 통계를 보
면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인은 불과 77명밖에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3년에 327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04년에는 629명으로 302명이 증가하였고 이어서 1905년에는 619명, 1906년은 922명, 1907년은 1,049명, 1908년은 468명, 1909년은 634명, 1910년은 1,62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항 당시 103명이던 마산의 일본인이 1910년에 무려 5,941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1905년경부터 시작된 급격한 일본인 증가현상은 1905년 10월 노일전쟁 승리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1906년 2월 1일 마산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종래 창원감리가 행사하던 지방통치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해 9월 1일「일본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마산의 일본거류민회는 「마산일본인거류민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마산일본인거류민단이 발족할 당시의 일본인 거류민 수는 660호에 2,433(남자 1,452명, 여자 981명)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미곡상을 주업으로 하는 송원조장(松原早藏), 구중감작(久重勘作), 산본호장(山本好藏) 등을 비롯하여 216호 700명이 원마산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개항 다음해인 1900년 마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송원조장 씨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해온지 29년 뒤인 1929년 발간된 '마산현세록'에 실린 것입니다.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으로보아 꽤 젊은 나이에 마산으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산포(원마산)에 거주했던 까닭은 그들의 주업종인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영업 활동 때문에도 개항 이전부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마산포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 ) 안은 겸직입니다.

무역상 1

중매상 6(4)

약종상 5

잡화 27(6)

술소매 2(1)

도기 (5)

일상잡화 (1)

주물상 (1)

옷가게 3(2)

부엌잡화(1)

양주(2)

담배 (4)

과자상 3(2)

설탕상(2)

석유상(1)

장유상(2)

의사 2

문옥(問屋)1(1)

회사 2

여인숙(1)

야채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예기 1

선원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1)

철력세공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2)

일용노동 22

토목청부 1

정미상 (1)

식빵 1

대궁(大弓)(1)

페인트칠 1

작부 3

선두(船頭) 3

광업 2

 

러시아 : 호텔업1, 잡화상1

중국 : 잡화상7,잡화행상3

독일인 : 선교사


이 표는 1902년 당시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과 그 외 외국인들의 직업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 중 건설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가 50여명이나 되어 새롭게 조성되는 조계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겸직이 많았다는 사실과 직업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이주가 극히 초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짐작하기로는 문옥(問屋)은 건설관련, 일고(日雇)는 일용노동, 대궁(大弓)은 조선목공, 선두(船頭)는 선박업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거류지 내에서 일기 시작한 각종 건설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아래 사진이 본전추오랑 씨와 천해신시 씨입니다.
이런 일본인들이 개항된 마산을 휘어잡았습니다.


당시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수에 대한 통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인구와 일본인 인구를 나타낸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총인구

일본인

기타

한국인(추정)

출처

1899년

 

103

 

호수 : 2,000여호

香月源太郞, 韓國案內

1907년

11,881

3,219

80

8,582명

손정목, 도시사회경제사연구

1909년

11,022

4,321

 

6-7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1910년

16,657

5,941

52

10000-11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당시 마산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을사조약 전후에 6,000-8,000여명이었다가 1910년 경에 10,000여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친 총 16,000여 명의 마산 인구는 1910년대에 내내 14,000명에서 16,000명 정도로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Trackback 0 Comment 1
  1. 2012.08.31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