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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1) - 강점제3시기

<토지의 소유 - 점점 넓어지는 일본인들의 땅>

1940년 2월에 創氏改名이 실시됩니다. 따라서 토지소유주의 이름만 보고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이 글에서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때 확인한 이름 중 대부분의 한국인은 개명이 되지 않았지만 개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이름의 형태을 보아 국적을 판단하였고 그 다음은 한국인이 개명을 하여 실제로 사용했던 사례, 그리고 일본인들이 보통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이들을 한국인이라고 자의로 판단하여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니 약간 틀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래 표는 1910년, 1920년, 1930년, 1945년의 원마산 토지에 관한 비교표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18   1,157
 비(%)  0.4 0.9   73.7 23.4   1.6 100.0 
 면적 5,783.54  1,299.18  107,051.13  53,228.14  2,105.79  169,467.77 
 비(%) 3.4  0.8  63.2  31.4  1.2  100.0 
 필지평균  1,156.71 129.92  125.50  196.41  169.99  146.47 

 필지수 10  981 274 12  1,286
 비(%)  0.7 0.8  76.3  21.3   0.9  100.0
 면적 760.99  2,714.05  116,320.88  65,000.11  1,323.64  186,119.67 
 비(%) 0.4  1.5  62.5  35.0  0.7  100.0 
 필지평균 84.55  271.41  118.57   237.23 110.30  144.73 
             

 필지수 54 34  916 365 8 1,377
 비(%) 3.9 2.5 66.5 26.5  0.6  100.0
 면적 3,240.67 7,120.70 100,749.45 70,812.08 483.96 182,406.86
 비(%) 1.8 3.9 55.2 38.8 0.3 100.0 
 필지평균 60.01 209.43 109.99 194.01 60.50 132.47
             

 

 필지수

59

35

1,074

379

5

1,522

 비(%)

3.8

2.3

69.2

24.4

 0.3

 100.0
 면적

4,323.95

11,919.99

109,307.24

71,246.50

446.28

196,973.96

 비(%)

2.2

6.1

55.3

36.2

0.2

100.0 
 필지평균

73.29

340.57

101.52

187.99

89.26

126.92

             

 

위의 표에서 보듯이 1945년을 기준으로 일본인 소유의 대지는 196,973㎡ 중 71,247㎡ 36.2%로서 1930년에 비해 다소 낮아졌습니다. 이에 반해 한국인 소유의 대지는 1930년의 100,749.45㎡에서 1945년에는 109,037.24㎡로 약 8,300㎡ 정도 늘어났습니다.

일본인들이 매립을 통해 상당한 면적의 부지를 확보하였음에도 435㎡ 밖에 늘어나지 않은 것에 비하면 큰 차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립을 통해 일본인들이 많은 땅을 차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 원마산 대지의 상당 부분이 한국인에게 다시 매매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930년대 이후부터 한국인들의 상업 진출이 두드러져 많은 소 점포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산상공회의소 100년사』에 의하면 1939년 당시 마산에서 제조업과 운수업을 제외한 판매업․금전대부업․토목업․건축업 등에 종사한 개인영업자의 숫자가 247개에 달하는데, 이 중에는 원마산 지역이 아닌 곳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이 원마산 일대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강점 후반기로 가면서 도시구조가 마산 전역에 광역화되는데 비해 일본인의 수는 비교적 정체되어 있었던 일본인들이 도시 전역으로 흩어졌던 것도 원인이 되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로써, 1931년부터 1941년까지 경상남도에서 편찬한 『경상남도 통계연보』, 『경상남도 도세개람』 등에 의하면 강점후반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의 수는 31년 5,265명 32년 5,138명 35년 5,387명 36년 5,427명 38년 5,496명 41년 5,689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지 싶습니다.

또 하나, 이미 오래 전 포스팅한 글  (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의 내용처럼 한국인 202명 중에서 191명이 원마산에서 영업한 반면 일본인은 총 130명 중 원마산에 49명, 중앙마산에 35명, 신마산에 46명이 각각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도 합니다.

위의 표를 보면 강점 후반기로 갈수록 일본인․중국인․한국인 모두 토지의 1필지 평균면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업중심지의 성격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소규모 점포가 다수 출현한 점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의 변화 과정도 각국 사람마다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 평균면적은 1912년에 196.4㎡이던 것이 1945년에 188.0㎡이었지만 이에 비해 중국은 170.0㎡에서 89.3㎡로, 한국인은 125.5㎡에서 101.5㎡로 줄어들었습니다. 곧 중국과 한국에 비해 일본인들의 필지 평균면적 축소가 가장 적었던 겁니다.

특히 중국인 소유 토지의 1필지 평균면적은 약 50%가 될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1945년에는 5필지, 446.28㎡로서 단 0.2%밖에 되지 않습니다. 합방 초기인 1912년의 18필지, 1,518.68㎡, 1.2%에 비하면 급격히 줄어든 것입니다.

개항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중국인의 원마산 거주 흔적의 일단은 지금까지도 마산지역에 남아있다.

1912년 만들어진 사정토지대장에 소유권자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소유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개항기부터 소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인 소유의 남성동 163번지에는 마산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쌍흥관」이란 이름의 중화요리점이 십여 년 전까지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원마산 전체의 대지 필지 당 평균면적도 점점 줄어 강점 마지막 해인 1945년에는 필지 당 평균 126.9㎡로서 강점기 중 가장 적은 규모로 나타납니다.

이런 결과는 자투리땅의 발생 외에 도시가 고밀화되었고 건축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사용가치가 높은 대지를 소규모로 분할하여 적절히 사용한 사례도 많았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기업과 정부 소유 대지가 많아졌는데 그 중 기업소유의 대지는 35필지, 11,919.99㎡, 6.1%가 되어 1910년의 10필지, 1,299.18㎡, 0.8%와 1920년의 10필지, 2,714.05㎡, 1.5%에 비해 급격히 늘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1920년대 이후 시행된 대대적인 매립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 계속된 산업화와 병참기지화로 공장과 창고 등이 건설되거나 다른 지역의 기업들이 지사형식으로 원마산에 진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기업의 소유자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45년의 토지상황과 1930년의 토지상황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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