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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1)

지금까지 210회에 걸쳐 1945년까지의 마산 도시의 변천과정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살펴본 마산 도시의 변화과정을 각 시기별로 요약․정리합니다.

 

<개항 이전의 시기>

고려의 정종(靖宗, 1035-1046년 재위)대에 이르러 정부는 마산 해안에 조창인 석두창(石頭倉)을 설치하였습니다. 창(倉)의 위치는 오늘날의 남성동 부근에 있던 해안 지역으로서, 근대기까지 존속했던 동굴강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의 이런 추정과 달리 산호동 쪽이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충렬왕 원년(1274년)에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정동행성을 두면서 이 도시는 군사 항구 도시로 변했으며,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도시로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조선의 영조 36년(1760년)에 조선 정부는 대동미를 운송할 목적으로 남성동 해안에 조창인 마산창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산창 설치 이후 마산포는 지형적인 조건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발판 삼아 번성하기 시작하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시대에 항구도시로 발전하던 마산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곧 조선 정부가 1899년 5월 1일로 이 도시를 개항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조창이 있던 마산포로부터 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에 각국공동조계지를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중심건물이었던 유정당입니다.

 

<개항기(1899-1910년, 식민지화 준비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취락의 마산포(이하 원마산)는 6개의 마을과 2천여 채의 가옥이 있었으며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한국인 도시였습니다.

개항 이후에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민족구성이 다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의 이주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급증하였습니다.

이주한 일본인들은 그들만을 위한 신도시를 각국공동조계지 일대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소위 신마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신마산의 도시 범역은 애초의 각국공동조계지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도시형성과 함께 식민통치에 필요한 관아 중심의 근대식 목조 건물들이 신마산 지역을 위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조선시대부터 상권이 집중되어 경제적 가치가 높았던 원마산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획득하면서 이곳에도 진출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의 원마산 일본인 수요 부지 현황입니다. 붉은 색의 토지가 일본인 수요입니다.

 

<강점 제1시기(1911-1920년, 식민지배 기반 구축기)>

1914년, 일제는 식민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마산을 부(府)로 승격시켰습니다. 이 때 개편된 행정구역으로 오늘날 마산 도시의 기틀이 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개항기에 이루어졌던 급속한 투자와 인구성장이 일단락되어 성장일변도였던 신마산은 정체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건축공사도 신축보다는 개항기에 지은 건축물을 증축하는 경우가 많았고, 벽돌조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산의 경제 중심지였던 원마산 지역에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해안이 매립되고 도로가 개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760년에 건축된 후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조창(漕倉)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한복판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조창부지는 몇 개의 조각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원마산 지역에서 진행된 해안의 매립․도로 개설․조창 철거 등은 일제가 식민도시의 지배기반을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한 도시정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달라졌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인은 원마산의 상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확정한 최초의 마산부가 경계지도입니다.

 

<강점 제2시기(1921-1930년, 산업수탈기)>

일제가 조선회사령을 폐지하자 산업 활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산업용지 확보와 경제적 잉여 창출을 위해 마산부의 일본인들은 해안 여러 곳을 매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인의 토지 지배는 이전보다 더 대형화․집중화되었습니다.

철도 교통의 발전과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원마산 일대의 시역(市域)이 확장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망도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러일전쟁의 산물로서 원마산과 신마산 사이에 철도용지로 수용되어 있던 중앙마산지역이 시구개정 계획에 의해 시가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는 산업과 교육 관련 시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건축물은 콘크리트조가 나타나는 등 구조와 형태 면에서 과거보다 발전된 형식의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에 건축된 원동무역 사옥입니다.

 

<강점 제3시기(1931-1945년, 병참기지화기)>

경제적 잉여를 위한 매립공사와 병참기지를 목적으로 한 항만시설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동교 이남의 전 해안이 직선호안으로 변화하는 등 마산의 도시구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원마산의 도로망은 1920년대만큼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시가지는 크게 넓어져서 인근 자연취락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건축물은 개항 후에 지었던 각종 시설을 보다 진일보한 수준으로 개수하거나 혹은 변화된 사회에 필요한 시설을 신설하였습니다. 한때 마산은 건설 호경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중앙마산지역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시점인 1935년에 신포동지역의 매립도 완공되었습니다. 이로써 원마산과 신마산은 지형적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도시가 연담화되어 하나가 되었고 시역(市域)도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이 중앙 지역에는 도시 전체를 관장하는 공공업무시설이 집중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지배력도 도시 전체에 확대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중앙마산지역의 매립설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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