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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9)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4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푸른 및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남암(南庵)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 남창(南窓) 빈자리에 머물고 가오. /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삼국유사』권 탑상(塔像)편에는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수도와 성불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위의 찬문(贊文) 가운데 앞의 것은 백월산 북암(北庵)에서 수도했던 달달박박을, 뒤의 것은 남암(南庵)의 노힐부득을 찬한 것이다.

어두운 밤 백월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온 낭자-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달달박박은 자신의 청정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낭자를 한 발자국도 용납하지 않는다.

면 노힐부득은 오갈 곳 없는 낭자를 위해 잠자리를 내주면서 오히려 잠 못들까 걱정까지 하고 있다.

누가 더 진솔한 모습일까?

이 설화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백월산 정상부 전경>

 

-백월산의 전설-

창원시 북면과 동읍 사이에 백월산(白月山)이라 부르는 명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 동쪽으로는 대산평야, 서쪽으로는 북면평야가 펼쳐져 있고, 동쪽 기슭에는 겨울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해발 40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세가 사방 1백여리에 뻗치며, 특히 봉우리가 빼어나 옛부터 명산으로 꼽혀왔다.

『삼국유사』에서도 백월산에 대해 ‘산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며 자리잡은 넓이가 수백 리에 뻗쳐서 참으로 큰 진산이라할 만하다’고 하여 찬탄해 마지 않는다.

백월산의 유래는 매우 전설적이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팠는데, 매월 보름 전에 달빛이 밝으면 못 가운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산 그림자가 은은히 화초 사이로 비치면서 나타났다고 한다.

황제가 화공을 시켜 그 모양을 그린 다음 사신을 보내어 온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이 바위를 찾게 하였다.

그 사신은 우리 나라에 와서 백월산에 큰 사자바위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산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화산(花山)이라 부르는 삼산(三山)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산이라 한 것은 몸체는 하나이고 봉우리가 셋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신은 이 산이 그림과 비슷하다 여겼으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신발 한 짝을 사자바위 꼭대기에 걸어두고 돌아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때 신발의 그림자 역시 못에 비쳐 나타나자, 황제가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이름을 백월산이라 지어주었더니 그 후 못에 그 산의 그림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백월산이라 한 것은 보름 전인데도 달빛이 환하게 밝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백월산 북사 삼층석탑>

 

-수도의 길에 나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백월산 동남쪽 3천 보쯤에 자리잡고 있는 선천촌(仙川村)에서 태어나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의 이름은 모두 우리말로 지은 것이다.

노힐부득의 아버지는 월장(月藏),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으며, 달달박박의 아버지는수범(修梵), 어머니는범마(梵摩)라 하였다.

두 사람은 20세 때 마을 동북쪽의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서 함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이들은 다시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으로 옮겨, 노힐부득은 대불전(大佛田)의 회진암(懷眞庵)에, 달달박박은 소불전(小佛田)의 유리광사(琉璃光寺)에 각각 자리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처자를 데리고 농사지으면서 수도하였고, 아직 속세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어느 날 신세의 무상함을 느껴 다음과 같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땅과 풍년 든 해가 참으로 좋지만, 의식이 생각하는 대로 생기고 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가옥이 참으로 좋지만, 연화장(蓮花藏)에서 여러 부처님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 공작새와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군다나 불도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고 진심을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버리고 더할 나위 없는 도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風塵)에 골몰하여 세속의 속된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렇게 다짐한 두 사람은 마침내 세속을 등지고 백월산 깊은 산골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노힐부득은 남쪽 암자에서 미륵불을 염원하였고, 달달박박은 북쪽 암자에 자리잡아 아미타불을 경건히 염송(念誦)하였다.

 

-부처가 된 두 사람-

두 사람의 행로는 수도한지 3년쯤 되었을 때 갈리기 시작하였다. 신라 성덕왕 8년(709) 48일 밤 그들이 수도하고 있던 깊은 산골에 아리따운 낭자가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낭자는 먼저 달달박박이 수도하고 있던 북암(北庵)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주면서 하룻밤 재워 주기를 청했다.

 

날저문산속에서갈길이아득하고          行逢日落千山暮

길없고인가머니어찌하리요                路隔城遙絶四隣

오늘밤은이곳에서자려하오니             今日欲投庵下宿

자비하신스님은노하지마오                慈悲和尙莫生嗔

 

달달박박은 낭자의 말을 듣고 단호히 거절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암자는 깨끗해야 하니, 여자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낭자는 어쩔 수 없이 노힐부득이 수도하고 있는 남암으로 가서 잠재워 주기를 청했다.

낭자는 야밤에 깊은 산골에 온 것을 미심쩍어 하는 노힐부득에게 “어진 선비의 지원(志願)이 깊고 덕행이 높단 말을 듣고 보리(菩提)를 도와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넌지시 자신이 이곳에 온 까닭을 암시하고게송(偈頌) 한수를 지어 바쳤다.

 

첩첩산중에날은저문데                                     日暮千山路

가도가도인가는보이지않소                               行行絶四隣

송죽(松竹)의그늘은한층그윽하고                       竹松陰轉邃

냇물소리는한결더욱새롭소                               溪洞響猶新

길을잃어찾아왔다마오                                     乞宿非迷路

요체(要諦)를지시하려하오                                尊師欲指津

부디이내청만들어주시고                                  願惟從我請

길손이누구인지는묻지마오                               且莫問何人

 

노힐부득은 이 말을 듣고, “이곳은 부녀와 함께 있을 데가 아니지만,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입니다”라고 하면서 낭자를 암자 안으로 맞아들였다.

밤이 깊어가자 노힐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으면서 쉬지않고 염불하였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지자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멀쩡했던 낭자가 산기(産氣)가 있다고 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출산 준비를 부탁하고, 아이를 낳자 목욕시켜 달라는가 하면, 그에게 들어와서 목욕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승려인 노힐부득으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러나 그는 낭자의 처지가 가엾고 불쌍하여 출산을 돕고, 물을 끓여 정성껏 목욕까지 시켜 주었다.

낭자가 목욕통 속에 들어가자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빛 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낭자의 권유에 따라 함께 목욕한 노힐부득의 살결도 금빛으로 변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옆에는 연화대(蓮花臺)도 놓여 있었다.

낭자는 그에게 거기 앉기를 권하면서,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어준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노힐부득은 낭자의 도움으로 성불하게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달달박박은 남쪽 암자를 찾았다. 노힐부득이 지난 밤에 계(戒)를 더렵혔을 것으로 생각하고 비웃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채를 내뿜고 있었으며, 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달박박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마음에 장애가 너무 겹쳐서 부처님을 만나고서도 알지 못했음을 탄식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자신도 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미 성불한 노힐부득은 목욕통에 아직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달달박박도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이 될 수 있었다.

목욕물이 모자랐던지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남아 있었다.

 

-백월산 남사의 창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다는 소식은 곧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백월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마침내는 서울에까지 알려져 왕실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경덕왕은 왕 14년(755)에 이 이야기를 듣고, 2년 뒤인 16년(757) 이곳에 사신을 보내어 대가람(大伽藍)을 조성케 하였다.

이 절은 이로부터 7년 뒤 경덕왕 23년(764) 715일에 완성되어 ‘백월산 남사(白月山南寺)’라 이름지었다.

사찰의 완공과 함께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액호(額號)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강당에는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액호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이렇게 조성된 이 대가람의 전각과 불상은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절터만 남아 있다.

창원시 북면 백월산 계곡에 들어서면 대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드러난다. 이곳에는 옛 기와와 토기조각이 이곳저곳 널려 있어 절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근에 ‘반야동(般若洞)’, ‘사리터’, ‘중산골’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유명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백운암(白雲庵)이 있는데, 이 암자에 있는 석등은 본래 남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절터에서‘남사(南寺)’라는 명문이 박힌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그 절터였음이 분명하다.

<백월산 남백사지에서 출토된 '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  >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는 백월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남사의 창건 설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백월산을 당나라 황제와 연관시킨 것은 이 지역이 갖는 국제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농사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지역 주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신앙층이 매우 넓게 확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초기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가와 승려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관음보살이 지닌 여성성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녀의 안내에 따라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하고 있다는 점, 미륵불은 전신이 금빛으로 남사의 금당에 봉안되었고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있는 데다 강당에 봉안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는 당시 신앙형태가 관음·미륵·미타신앙 등 여러 신앙이 혼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시기나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차별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창원을 비롯한 신라 남부지역의 불교신앙은 관음신앙과 미륵신앙이 우세한 가운데 미타신앙은 그보다는 부차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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