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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3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0) -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5  공기 좋은 마산의 표본, 결핵병원

 

흔히들 마산을 두고 공기 좋고 물 맑아 인심이 후한 곳으로 일컬어져 왔다.

맞는 말이다. 온난한 해양성 기후를 접하고 살아가는 마산시민들은 잘모르지만 타지사람들이 마산에 오면 안온한 기후에다 살기 좋고 쾌적한 도시임을 실감한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일찍이 일제가 마산을 강제 개항시키고 나서 온난한 날씨에다 더 없이 맑은 물과 공기에 착안하여 거점도시의 기틀로 삼은 점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이다.

먼저 기후부터 보자.

마산은 중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안에서 길게 뻗은 한반도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기후의 특색을 보면 먼저 온대 몬순기후로 겨울철에 한랭 건조한 대륙성 극기단에서 발생하는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엔 고온다습한 열대기단에서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기후 특색과 거의 유사한 기후현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쓰시마(對馬島)의 난류가 옥포만과 합포만에 겨울에도 유입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나라 내륙지방에 비해 기온의 연교차가 적어 이른바 해양성 기후에 속하고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마산의 연평균 기온은 고위도에 위치한 대구·서울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위도상에 의한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마산과 거의 같은 위도상의 도시들과 비교해도 기온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남단의 제주시의 14.7°C보다는 다소 낮지만 남해의 도서지방을 제외한 한반도의 기온분포로서는 통영시 다음으로 마산시가 높은 기온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포 전경>

 

-천혜의 자연환경, 가포-

일제는 이같은 기후의 호조건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살려 요양원을 차렸다고 볼 수 있다.

입지적 여건만 보더라도 구한말, 러시아가 가장 탐냈던 율구미(栗九味)였다는 점이다.

요양원으로서 터전을 잡은 이곳은 나지막한 부용산(芙蓉山) 자락 일대로서 삼면에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있고 동쪽으로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합포만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다.

80을 훨씬 넘긴 노인들이 보통학교에 다닐 적에 원족(소풍)을 가면 으레 요양소가 위치한 가포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당시 자복동을 지나 자복고개를 넘으면 송림이 울창해 숲에서 뿜어내는 송진향에 흠뻑 취했다고 회고한다.

어디 그뿐인가 일제가 마산의 물로 빚은 정종을 최고로 꼽은 사실이 있다.

정종을 ‘마사무네’라 하여 일본 천황한테 진상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감칠 술맛은 일본·만주전역까지 꽤 유명했었다.

또 있다. 간장·된장을 생산하여 일본 ‘끼꼬망’을 견줄만한 상품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러한 제품들이 일본열도 전역은 물론 군용으로 만주까지 수송하여 소비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산 전역에 걸쳐 술과 간장 양조장과 통조림 공장으로 즐비하다보니 마산을 주도(酒都)라 하여 한동안 명성을 떨쳤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듯 일본 뿐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공기가 맑고 기후가 온난한 이점을 살린 일제1941년, 이곳 가포에다 ‘상의군인요양소’를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국립결핵요양원의 모태가 된 것이다.

1940년대, 가포의 결핵요양원과 월영 홍골(지금의 경남대) 언저리에 철도(교통)병원이 자리잡게 되었다.

1950년대 들어와 자북동에 위치한 일본병참부대가 육군군의학교와 제36군 병원으로 바뀐 것도 천혜의 자연환경 때문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1960년대는 국립결핵요양원, 군의학교, 36군 병원, 철도병원을 잇는 ‘호스피탈·벤트’가 형성돼 그야말로 전국에서 제일 이름난 휴양도시로 부상되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1941년 상이군인요양소로 개설된 것이 해방과 함께 완전히 우리 손으로 넘어온 것이다.

해방 후 기존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건물을 신축하여 초기에는 200병상의 수용능력을 갖추었다.

이어 194661일 ‘국립마산요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되었음은 물론이다.

국립기관으로 개원하기 전 해방 후 과도기에는 신마산에서 저명한 의사였던 제길윤 박사가 마산시 의사회장 위임으로 책임을 맡아 일본인 요양소장으로부터 제반 물건과 인원을 접수하고 운영책임을 받아 자치관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질서유지를 하면서 60%의 공사가 진척되다가 해방으로 인해 중단된 신축병동 재건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또한 도난·분산된 건축자재를 회수·보관하는데도 진력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제길윤 박사와 간부직원이 상경하여 해방과 함께 급작스레 몰려온 귀환동포 중 결핵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요양원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국립마산요양원은 오늘날 명실상부한 결핵전문치료센터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결핵병원 전경 / 최근 신축 때문에 철거되었>

 

-머물다 간 사람들-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마산요양원은 광기 넘친 일제의 마지막 단말마인 태평양전쟁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함께 갖은 풍상을 겪어온 역사의 표상이요, 결핵퇴치의 요람으로 그 구실을 다해온 것만은 틀림없다.

숱한 애환이 서려있는 요양원에 말못할 곡절과 애틋한 사연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곳을 거쳐간 유명인사도 있었고 요양원을 주제로 한 가요와 영화까지 나와 한때나마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암울했던 일제시절 요양원을 거쳐간 문인으로서 임화(林和:19081953 / 사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본명이 이현욱(李賢郁)인 그는 약관의 나이에 KAPF를 조직, 서기장이 될 정도로 무산계급을 대변하는 문인으로서 일약 유명하였다.

월북한 그는 1953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는데, 억울하게도 미제간첩의 누명을 쓰고 어이없이 희생되고 말았다.

임화의 아내 지하련(池河連)은 마산출신 문인이었다. 둘은 요양소에서 로맨스를 꽃 피웠는데 폐결핵환자였던 임화를 위해 지하련은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다.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하였다. 이 둘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무대가 바로 요양원이었다.

한국전쟁 때 만주에 소개해 있던 지하련은 임화의 사형소식을 듣고 미치광이가 되어 끝내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지하련은 1940년 <문장>지에 <결별>을 발표, 문단에 데뷔했다. 단편 <결별>·<가을> 등을 대표작으로 남겼는데 그 누구보다도 여성의 심리를 이성적으로 관찰한 작가로 주로 소시민의 상극적인 심리상태를 잘 묘사했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 있네 /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

나홀로 재생의 길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리/

 

1956년 마산방송국에 재직하고 있던 반야월(박창오)이 가장 절친했던 친구 이재호(李在鎬)를 찾아 마산요양원에 문병을 갔다.

그 날 위문공연도 함께 했다. 요양원은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장을 연상시켰다.

그때 마침 하얀 소복을 한 묘령의 여인이 호젓한 숲길을 거닐고 있음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수심이 가득찬 이 여인 역시 폐결핵환자였다.

완쾌된다는 보장도 없이 그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외로운 모습이 서녘하늘에 타는 붉은 노을마저 애처로운 분위기를 더욱 자아내고 있었다.

반야월은 당장 만년필을 뽑아들고 청순 가련한 이 여인의 비감 어린 심정을 아는 듯이 노랫말을 적었다. 제목은 <산장의 여인>으로 정했다.

폐결핵환자였던 이재호가 즉시 곡을 붙였다. 이런 사연으로 만들어진 노래를 당시 KBS전속가수로 활약하던 권혜경이 취입했다.

권혜경은 이 노래 한 곡으로 1950년대의 톱싱어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가사를 쓴 반야월은 마산출신으로, 진주 출신인 이재호가 곡을 붙인 <꽃마차>, <넋두리 20년>과 같은 자신이 부른 노래에 가사를 지었다.

작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추미림, 박남포 등 여러 필명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5000편에 달한다고 하며 작곡가의 손에 넘어간채 미발표된 가사만도 25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서슬퍼런 유신독재의 공포가 절정에 달했던 1975년 그 해 사상계 잡지에다 <오적>의 시를 실어 일약 유명해진 김지하 시인도 한때나마 요양원을 거쳐간 사실이 있다.

김지하가 요양원에 머물렀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의 집요한 감시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실례를 든다면 75쯤, 일본 문예춘추잡지가 주관하여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아꾸다가와(芥川)상을 그해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재일교포작가 이회성(李恢成)이다. 그는 수상작품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해서 탁월한 문학가로서 장래가 촉망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

이 무렵 한국일보가 주선하여 모국을 방문하였는데 이회성이 김지하를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는 바람에 마산까지 내려왔다.

이회성은 끝내 김지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당시 극심했던 감시와 인권유린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밖에도 문인이었던 권환, 이영도, 구상 등과, 재야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진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때 요양원에 머물다 가기도 했다.

병원은 영화의 무대이기도 했다.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넘긴 올드 팬들은 기억해 낼 수 있는 <3천만의 꽃다발>이라 하겠다.

<영화 (삼천만의 꽃다발) 연습 장면>

 

195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촬영 8개월로 완성된 16mm판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한국전에나가 부상을 당해 실명한 자식에게 자기 눈을 빼내 각막이식으로 광명을 찾게하여 다시 출전시킨다는 단조로운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모성애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관제군사영화였다.

출연진은 당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조미령, 마산출신 시인 정진업, 김수돈을 비롯해 이규숙, 박영 등이 등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주로 요양원을 위주로 하고 앵기밭골에 있는 무학농원, 육군군의학교 등지에서 촬영했다.

이 영화에 친일기업인 한일봉이 능수능란하게 말을 몰고 달리는 모습은 눈길을 끌만하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신경균(申敬均)이었으며, 촬영은 김찬영이었다. 이 영화의 기획·연출 분야는 제2육군병원이 맡았고, 마산결핵요양원이 후원을 맡기도 하였다.

어디까지나 쾌적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상징하고도 남을 국립결핵요양원은 결핵으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키는 재활의 둥지요, 삶의 윤기를 더해주는 안식처이기도 하였다.

국립결핵요양원 뿐만 아니라 신생 국립결핵요양소, 철도요양소 등 3개소가 밀집되었던 것은 그만치 마산의 따뜻한 기후와 맑은 공기가 바로 건강을 되찾는데 가장 알맞은 요양지였기 때문이다.<<<

홍중조 / 당시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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