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6.05.1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2. 묘락좌의 화재사건

92. 묘락좌(妙樂座) 화재 사건

 

1931310일은 일로(日露) 전쟁에 승전한 육군기념일로 진해 군항에서는 아침부터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읍내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인 영화관 묘락좌(妙樂座)에서는 무료 영화를 공개하는데 조선인을 제외한 일인, 읍민, 군인, 소학생만으로 소위 대입(大入)’ 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되어가고 있을 때, 2층 영사실에서 돌연 화재가 일어났다.

그 당시의 필름은 가연성 물질이어서 가끔 인화의 화를 입게 되었으므로 필름을 취급하는 자는 각별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그날 묘락좌(妙樂座)의 경우를 보면 무료 입장이라 장내는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영사 도중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비상구는 물론 출입문까지 꼭 잠가버린 뒤에 불이야소리가 났으니 장내의 소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화재는 삽시간에 사방으로 점화하여 연기에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목조 2층 건물은 완전 소진되었는데, 성인 몇 사람이 겨우 탈출하여 생명을 건졌을 뿐 일인 소학생 150명이 모조리 소사(燒死)하였고, 그 중에는 아기를 보는 조선인 여아가 단 한 사람 희생이 되었다.

<희생자를 150명이나 낸 진해소학교>

 

그 후 소사자(燒死者)의 수는 더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당국에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은폐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 화재사건을 보도하기 위한 일본 국내 양대지(兩大紙)의 치열한 경쟁을 여기에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동종의 사업 치고 경쟁이 없는 것은 없었듯이 국내의 동아·조선지도 그랬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대 조선신문(일본 야당계 수산경장收山耕藏 주간)도 그랬다.

일본의 양대지 대판매일과 자매지 동경매일(지금은 지명을 붙이지 않고 매일신문으로 발행)은 정부 어용지로서의 대신문이지만 동경 대판의 조일신문(朝日新聞)은 지사적인 인물만 모인 절대 자유주의적인 신문이란 점만 보더라도 하나에서 열까지 대립될 소지가 많았다.

전기(前記) 진해 극장 대화재를 예를 든다면,

당일 이 급보를 대판매일 부산지사에 제1신을 알린 부산일보 마산지사장 겸 매일신문 통신원 고교무웅(高橋武雄) 기자는 진해 현지에서 취재 즉시 그 시간에 부산지사에 출근하고 있던 김근호와 접선, 부산 체신국으로 달려가 부산, 일본간 해저전선을 대절함으로써 김근호 특파원발 특급 전보가 매일(每日) 본사로 입전(入電)하여 지급(至急) 호외가 되어 도하 각지에 살포되었으며, ·석간에 호외 재록(再錄)까지 할 수 있었으니 본사 간부 일동은 보도 승리를 자축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오직 조일지(朝日紙)의 청산(靑山) 특파원은 도경찰부에 들어오는 현황 보고에만 의존하여 전신과에 당도하니 경쟁지의 특파원은 벌써 본사에 연락하고 난 뒤라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타전코자 하면 여전히 전보선 대절이란 방해에 부닥쳐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매일(每日)의 전격적인 선수에 위축된 것은 조일 외 제국통신 등 2,3개 전신사로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진해사건은 매일(每日)이 완전 독점함으로써 치명상을 입은 특파원 청산(靑山)에 대해서는 경고 또는 퇴사론까지 대두되었다고 하며 김근호 특파원에게는 본사가 표창을 한 것은 물론 정사원으로 임명됨으로써 언론계의 한 때 화제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1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