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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8.첫 맥주 양조장 109.비어홀 110. 일주박래

108. 첫 맥주 양조장

 

시내 수성동 소재 김동조 이비인후과의원 건물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로 유명한 숭양산인(嵩陽山人) 위암 장지연 선생 우거처이며, 그 전에는 박우길의 소유였으나 또 그 앞에는 맥주 양조장이기도 했다.

 

규모는 미미하여 얼마만한 양의 양조를 하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밀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맥주 양조를 하는 일방 경성에서 선전 포스터를 인쇄하여 출입하는 대문과 도로변에도 붙여 선전에 노력도 했으나 자금과 기술 관계인지는 모르나 설치된 미구(未久)에 해산되고 말았다.

 

 

109. 비어홀

 

전 제() 내과의원 천변 건너편에 있는 댄스홀은 대정 초기 경 일본 본전(本田)이란 사람이 최초로 맥주홀을 개점하였다.

 

입구는 지금 그곳인데 문 앞 간판에는 서양인 선부(船夫) 비슷한 비대한 사람이 거품이 넘쳐흐르는 커다란 컵을 들고 있는 그림에다 일본 가나(假名)비야호-라고 쓰여져 있어 처음으로 맥주를 파는 집의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집에 그 후 일인들의 금융조합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적옥(赤玉)카페라는 술집으로 환원하여 해방 후 지금까지 줄곧 그런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니까 가옥도 처음 주인을 잘못 만나 출발이 불행하면 두고두고 그런 운명의 구렁에서 헤매고 마는 것인 듯하다.

 

 

110. 일주박래(日酒舶來)

 

일주(日酒)를 총칭하여 청주라 한다.

어찌어찌해서 종전 전후로 일주는 정종으로 호칭되었는데 기실 정종이라는 것은 명검(名劍)을 말하는 것이고, 정종이 일부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은 다만 양조장에서 술 이름으로 ××정종, △△정종이라는 상표를 등록하여 애호가들에게 자기 집 술 이름을 선전한데 불과한 것이다.

이 나라에 양조장을 두기 전만 해도 마산에 제일 먼저 일조(日酒)가 박재(舶載)되어 요정에 나타난 술은 금로주(金露酒)라는 상표였으며, 조선인들은 금로주 ××라 하던 것이 어느새 아동주졸(兒童走卒)까지도 정종이라는 개명을 부르게 된 것이다.

근간 정종 대신 ××수복(壽福), ××금복(金福), ××특주(特酒)로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생산되었던 일본 청주들>

 

 

 

 

 

 

Trackback 0 Comment 2
  1. 박진섭 2016.08.30 13:1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 당시의 분위기가 더 풍미가 있어보이는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탓이거나, 지금이 오히려 더 무미건조한 탓이겠지요? 사진의 술도자를 보니 어릴적 옛 감회에 젖게 됩니다.

    • 허정도 2016.09.08 17:19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신가요? 오래된 것들의 힘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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