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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팔룡산 상사바위와 불암사 현재 모습>

<불암사는 일본인들이 자안지장(지장보살, 어린아이들의 수호 보살)을 모신 곳이었>

 

주로 어미니, , 누나들과 같이 보았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다들 걱정 섞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도 저기에 있을 것이란 말들도 들은 것 같다.

또 수원지 들머리 계곡들에서 좌익수 처형이 몇 번 있었고 계곡 물이 벌겋게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형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수원지길쪽과 봉덕동쪽을 가르는 산등성이 일대에 백여 기 가까운 무덤들이 있었는데(그래서 우린 공동묘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 연고 있는 무덤은 없었기네, 그 처형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짐작들을 동네 형들이 주고받는 것도 들었다.

훗날 팔룡산을 오르내리면서 건너다본 무덤들에 여우가 파헤친 흔적 같은 것이 유달리 많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묘들이 부실하게 급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고향으로 모시고 갈 수도,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으리라. 몇 년 전에 우연히 팔룡산을 오르다가 생각나 보았을 땐 무덤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우리 동네와 양덕동(역시 팔룡산 자락 동네)은 마산의 다른 동네들과 격리되었었다.

그해 칠월 말쯤 마산지역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자 양덕천 둑에는 이 내()를 무단으로 건너는 자는 총살형에 처함이라는 내용의 경고판이 세워졌었다고 들었다.

마산시민들 대부분은 최후방 지역인 웅천으로 보내면서 이 두 동네만 떼어서 낙동강 인근의 한림정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보도연맹사건은 소문으로 다 알려져 있었고, 여러 지역의 학살사건도 풍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더구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수원지 입구 골자기의 참상까지 목격하였던 터라 공포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었을 터였다.

시내에 약간의 척분만 있어도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도와 시내로 잠입하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감행했었다. 그래서 얼추 주민 반 가까이나 동네를 빠져나갔다고 했다.

아버지의 넓은 친분 덕으로 열 명이 넘는 우리 가족들은 시내로 잠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짐은 곡식이었는데, 갓난아이였던 여동생만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이 양껏 나누어 졌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 친구 네 분의 집에 분산 기식(호구조사 때문)하고 있다가 열흘쯤 후 마산선창에서 웅천행 피난선을 타고 웅천국민학교로 갔다.

 

<당시 웅천국민학교와 주변 마을, 왼쪽 기와건물은 옛 웅천현 객사>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텐트에서 숙식하거나 동네 집 한두 칸을 세내어 들었는데 우리 집은 역시 아버지의 친분으로 어느 마당 넓은 집의 방을 두개나 얻어 생활할 수 있었다. 곡식도 가져간 것 외에 수시로 배급이 나왔다.

그런데 후에 들어본 한림정의 피난생활은 우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곡식배급은커녕 텐트나 간이화장실 같은 것도 없어 강 둔치나 모랫벌 등에서 짐승처럼 살았다고들 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끝났기에 망정이지 길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들을 몇 번 들었다. 아니 낙동강 전선이 돌파 당했다면, 훗날 읽어본 노근리 학살 사건등과 대비시켜 보니 섬찟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귀향 때도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았지만 열차를 내어주어 진해 경화동 역에서 타고 올 수 있었는데 그쪽에선 모두 걸어왔다고 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마을로 돌아온 뒤에도 양쪽으로 간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는 말들을 들었다.

특히 같은 동네에 살았던 외삼촌은 꽤 오랜 동안 섭섭했던 감정을 씻을 수가 없었던 듯했다.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종종 오금을 걸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우리 대식구 숨기기에도 벅찼노라고 애원하듯 설명했으나 외삼촌의 감정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던 듯, 후에도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였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도 흔쾌히 정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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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연습장처럼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암벽도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백여 미터 더 오르면 수원지지역 출입문이 나오고,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십여 미터 다리 너머(지금 운동기구 놓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산지기집 두 채가 있었다. 삼사십 평짜리들로 잘 지어진 집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이전 체제를 이어받아 산을 잘 관리하여 도회지 복판의 산인데도 많은 짐승들이 살았었다. 고라니, 노루, 여우, , 늑대, 오소리, 산돼지, 산토끼 등이었다.

정문에서 백 수십여 미터 안에 있는 둑 문 위엔 여천무극(與天無極, 댐 높이를 비유적으로 표한 듯)’이란 글이 시멘트 바탕에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써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1m 정도의 원통형 공간이 댐 꼭대기까지 뚫려있고, 그 벽엔 쇠사다리, 그 옆엔 눈금 따라 깊이 표시가 씌어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철판덮개를 밀고 나와 둑 위에 섰던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둑은 195312월에 증축되었는데 상단 직립부분이 그것이다.

수원지 길을 다 내려오면 마진국도와 맞닿는데, 왼쪽은 봉암다리로 오른쪽은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의 작은 공장들 사이 도로가 그것이다.

오른쪽 길 아래 이삼십 마지기 논 옆엔 청수들(청수淸水는 일본인 매축공사자의 이름으로 추정) 농수 공급용의 오륙천 평 저수지가 있었고(지금 영락원 일대), 서쪽으로 이십여 만 평의 논과 갈대밭이 양덕천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둑길은 저수지로부터 1km쯤 직선으로 뻗었다가 자동개폐식 수문(큰 수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100m50m 정도 가다가 팔룡산에서 오는 내()를 건넌다. 이어서 또 하나의 수문(작은 수문)을 거쳐 200m쯤 나간 후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끝난다(지금 자유무역지역 후문 근처).

 

<1951년 제작된 봉암동 일대 지도>

 

둑길은 바다와 갈대밭을 끼고 있어 거닐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2차 매립공사(현 봉암동과 자유수출지역 사이의 도로, 즉 옛 마진국도를 기준으로 위쪽을 1차 매립지, 아래쪽을 2차 매립지하고 표기)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은 듯 공사 현장이 1940년대 말까지 우리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팔룡산 자락에 흙 파는 현장이 넓게 있었고, 흙을 싣는 수레(우리는 그것 흙구루마라 불렀다)도 있었으며, 레일도 한길을 가로 건너 바다 둑 근처까지 길게 놓여있었다.

둑을 막고 팔룡산의 흙을 날라 갯바닥을 메우는 공사 방식을 짐작해 본 것은 내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그런 후에야 동네 동쪽의 팔룡산 자락이 급경사로 되어 있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수레를 위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는 아래로 밀면서 내려와 속도감을 즐겼는데, 속도에 욕심을 내다가 수레가 탈선하는 바람에 무릎을 깬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매립지 상단에 새로 닦다가 해방을 맞아 중단된 큰 도로로 있었다. 우리는 새 한질(새로 난 큰 길의 뜻)’이라 불렀다.

기존도로보다 넓었던 이 도로는 아직 덜 될 부분이 많아 개통은 안 되고 비어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이 타작마당으로 이용하거나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다녔던 떠돌이광대들이 공연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길은 1960년대 중후반에 개발되었고, 더 확장되어 지금의 마진국도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닦았던 도로는 봉암동 경남은행 뒤의 소방도로로써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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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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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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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2 07:08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9. 신고리 5,6호기 시민참여단에게 드리는 글

 

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을 이야기하면 사용후핵연료 처리비용 과소계상, 원전 해체비용과 환경 복구 비용 과소 계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고 보험 문제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 반드시 보험을 들어야하는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사고 보험을 들어야 하지만 보험회사는 보험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피해금액이 너무 커 여러 보험회사가 공동으로 운영해도 단 한 번의 사고로 보험회사를 파산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수원은 조건부 보험을 가입하고 있습니다.

보상금액 한도 5,000억원, 사고 후 10년이 지난 손해와 환경 관련사고는 정부가 보상하고 그 이외의 사고는 10개 보험회사가 공동으로 보상하는 조건입니다.

한수원은 한국전력이 100% 출자한 공기업입니다. 한국전력 주주는 정부 18%, 산업은행 33%, 국민연금 6.5% 외국인 30%, 일반인 12%로 구성되어 있는 공기업입니다.

외국인 투자자와 일반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 보험을 정부가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특혜인 셈이죠.

원자력은 단 한 번의 대형사고라도 피해규모가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 1천조 이상입니다.

후쿠시마는 피해금액이 정부발표 220조이지만 삼중수소 제거비용을 계산 안한 것입니다. 재미

과학자 강정민 박사는 이 비용까지 계산하면 690조라고 주장합니다.

고리원전 주변에 울산 산업도시, 부산항이 각각 19km, 28km 이내에 위치합니다. 고리 원전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수출이 전면 중단됩니다.

더구나 반경 30km 이내 380만의 주민이 거주하기 때문에 피해규모는 후쿠시마와 비교가 안 됩니다.

피해금액을 적게 잡아 500조로 계산하면 보험으로 5천억 보상해 줍니다. 피해금액 500조에 보상금액 5천억.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자동차사고 견적이 500만원 나왔는데 보험회사가 5천원 보상해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보험에 들지 않는 것과 같죠.

제대로 보험들고 보험료를 내면 어떻게 될까요?

1kwh100원 정도의 보험료를 내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1kwh1천원으로 계산했다.)

우리나라 원전 단가는 68원이니까 보험료를 보태면 168원이 됩니다. 가스보다 2배 비쌉니다.

원자력은 정부의 지원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습니다. 

몇 일전 우리나라 유력 경제지 증권뉴스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세계3대 신용평가사인 S&P앞으로 17년 내 미국 원전 절반이 없어지고 38년 내 모든 원전이 없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건설비용의 상승, 가스 가격의 하락과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의 하락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원전 관련 종목을 사지 말라는 뜻입니다.

시민참여단 여러분, 원전 건설 재개를 원하는 측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경제성입니다.

그런데 보험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원자력의 경제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탈핵경남시민행동 공동대표 박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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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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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2 00:00

마산해양신도시, 대통령 말씀대로

계륵 꼴이 된 가포신항이 구체화된 것은 2001년이었다. ‘마산항 제2차 무역항기본계획에서 20년 후 마산항 물동량이 54TEU가 될 것으로 예측해 성사된 사업이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며 매립을 반대했던 시민들에게는 일반부두와 달리 컨테이너 전용부두는 수익성도 좋고 환경적으로도 낫다고 설득시켰다.

장밋빛 환상 속에 컨테이너 부두 기공식을 가진 것은 2005년 말이었다. 민자 외에 수천억의 국민세금이 투입되었다.

부두가 완공이 되어 개장식을 가진 것은 2015년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입항되는 컨테이너 물동량이 애당초 정부 예측과 터무니없이 달랐다. 겨우 예측물량의 3% 밖에 채우지 못했다.

정부가 주도하고 국책연구기관이 예측했는데 겨우 3%라니, 충격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선가 더러운 손이 작용했다고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해수부와 사업자는 컨테이너 부두를 포기하고 일반부두로 바꿨다. 애당초 시민들에게 약속했던 건테이너 전용부두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아무런 해명도 없었다.

마산 앞바다에 떠있는 해양신도시는 이 가포신항 사업의 사생아이다. 필요해서 만든 땅이 아니라 가포신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땅, 항로수심확보용 준설공사에서 나온 준설토 투기장이었다.

34백억이 들어가는 해양신도시의 시행주체는 창원시(옛 마산시)이다. 정부 사업인 가포신항과는 주체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여름 창원시장은 해양신도시가 가포신항의 사생아라는 점을 들어 해수부 장관에게 3천억을 지원 요청했다.

장관으로서는 답하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결국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통보가 창원시에 왔다.

창원시는 해양신도시에 투입되는 비용 전액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따라서 국비 지원이 없을 경우 민간에 토지를 매각할 수밖에 없다. 역으로 그것은 국비 지원의 액수만큼 시민들의 공공공간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쉬운 일이 아니다. 정가에서는 말하기 좋아 정부지원을 주장하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정부가 지원할 법적근거가 없다는 것이 딜레마이다. 

다행히 지난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선거 막바지 마산에 온 현 문재인 대통령께서 유세 중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를 언급했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했고 해결방안을 올바르게 제시했다.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 사업이 난개발에 마산만 수질까지 악화시키고 있다. 사업의 전 과정을 철저히 평가해서 정부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확실하게 책임지고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겠다.”

진상을 밝힌 후 합리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뜻이었다.

더 첨삭할 것 없다. 대통령의 말씀대로 하면 된다. 납득할 수 없는 가포신항 사업의 전 과정을 철저히 밝혀서 평가하면 된다. 그 결과 정부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대통령의 약속처럼 책임지고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

해양수산부의 셀프 평가는 안 된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감사원에 감사 청구하는 것으로 대통령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 일을 두고 창원물생명시민연대에서 지난 달 초 이미 해양수산부 장관을 직접 면담하고 대통령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장관은 진중히 검토하겠다고 했다. 김영춘 장관의 결단으로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 사업의 전 과정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창원시에 당부 드린다. 해양신도시 비용 34백억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급히 판단할 일도 아니다. 지금은 대통령의 약속이 이행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지원금 요청 거절에 대한 돌파구는 이 하나 뿐이다.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가지 이야기를 갖고 있는 가포유원지였다. 도대체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그 소중한 자연유산을 없앴는지 묻고 싶다.

해양수산개발원의 엉터리 보고서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밝혀야 하고, 해수부와 사업자 간 협약서 변경이유도 밝혀야 한다. 해수부 퇴직간부들이 항만운영회사 사장이 된 것은 옳은 일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재정 지원에 대한 논의는 이 모든 과정의 전모가 드러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2017830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같은 제목의 글을 약간 첨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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