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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8 00:00

건축의 외형 - ‘액자’ (frame)

 술의 역사 만큼이나 액자의 역사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회화의 전시, 보존 등을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한 액자는 사진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등으로 현재는 picture frame 만이 아니라 photo frame, digital photo frame 등으로 영역이 넓어졌으며, 액자 자체가 예술품이 되는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액자의 형태와 재질, 방식 등이 달라져도 '평면의 어떤 것을 담는 장치' 임은 변하지 않을 듯 합니다. 건축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인간의 삶' 을 담아내겠지요. 그러한 나름의 유사성을 생각해 보며, 오늘의 주제는 '액자' 로 잡아보았습니다.


 - 김옥길 기념관 (대한민국 서울, 1999)

출처 - 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8/2014032801975.html


 1998년 작고한 김옥길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건물입니다. 강남 교보문고 맞은편의 '어반하이브' 로도 잘 알려진, 건축설계사무소 아르키움 대표 김인철 건축가의 설계입니다. 

출처 - www.vmspace.com

 

 건축의 이름은 '김옥길 기념관' 이지만, 1층과 2층은 카페이며 지하 1층은 전시 밑 공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독특한 외관과 내부의 느낌 덕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 건축상을 수상 하기도 한 김옥길 기념관에 대한 도면 밑 더 많은 사진들이 담긴 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AURUM)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www.aurum.re.kr/Bits/BuildingDoc.aspx?num=250#.WkMiU1SFjOQ


 - Frame House (호주)

출처 - www.lifespacesgroup.com.au 


 건축, 인테리어, 산업디자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Auhaus architecture + interiors 에서 설계한 frame house 입니다. (frame house 는 목조 가옥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호주 멜버른 인근 해안에 위치한 이 2층 주택은 김옥길 기념관 의 경우 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액자' 에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의 삶을 은근히 '전시' 하고픈,  건축주의 욕망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부에서 외부를 본다면 호주의 풍경이 '전시' 되겠지요.

 호주의 고급 주거 개발 전문 회사인 Life Spaces Group 에 게재된 frame house 포스팅을 링크합니다.

https://www.lifespacesgroup.com.au/frame-house/


 - Dubai Frame (두바이, 2018 1월 오픈 예정)

출처 - gulfnews.com/

 

 정말 '액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완공되어 내년 1월 개관 예정인 Dubai Frame 입니다. 

 2002년에 건축회사 OMA 소속으로 베이징 CCTV 사옥을 디자인한, 현재는 건축회사 DONIS의 수장인 Fernando Donis가 설계하였습니다.

 150 * 93미터 의 규모이며 (아파트 45~50층 정도 높이), 지상층에는 낚시마을이었던 과거에서부터 거대 도시가 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들어섭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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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군에서 불하된 차들을 개조한 것이었다고 했다. 화물차는 약간만 고쳐서 다니는 것으로 보였고, 버스는 엔진만 쓰고 껍데기는 드럼통 등을 두드려 맞춘 것이었다고 들었다.

<전쟁 직후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펴서 만든 한국 최초의 버스>

 

어떤 차든 그때 우리들 사이에선 차타본 경험이 큰 자랑거리가 될 정도로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봉암동에서 양덕동으로 조금 나오면 양덕교(수출자유지역후문앞)로 오르는 고개가 지금보다 높게 있었는데, 당시 화물차의 엔진 힘으로는 그 정도의 고개에서도 힘들어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거기에서 차에 기어 올라타고 가다가 오동동다리 고개에서 뛰어내려 학교로 가는 행태에 재미를 붙였었다.

차타는 재미에 허기졌던 아이들처럼, 때로는 차위에서 조수에게 꿀밤을 맞아 가면서도 그 행위에 재미가 들어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삼 일내내 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호기였다할 만큼 뜻밖이기도 했다.

행선지는 경주, 차는 트럭이었다. 과정은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를 활용하겠다.

 

행비는 아주 쌌지만 그것도 부담할 수 있는 상당수는 못 갔다. 차는 한반에 한대씩 배정되었다.

60명 중에 40명 안팎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되었는데, 체격이 작은 애들이었지만 3톤 트럭에 40명이 앉으니 너무 비좁아서 앞사람의 엉덩이에 뒷사람의 다리를 꽉 붙이고도 제일 뒤의 두어 줄은 앉지 못하여 선생님들이 더 붙어 앉으라고 고함을 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다음의 과정들은 더 뚜렷한 영상으로 남아 있다.

차가 출발한지 10분도 안되어 뒤에 앉은 우리들이 신기함에 놀라 웃어댔던 일이다. 그렇게 좁던 자리가 등 뒤에 4~50cm 남을 정도로 넓어진 것이었다.

굵은 자갈들이 어지럽게 깔린 길을 털털거리며 달리니 짐칸이 키질을 하여 짐들(우리들)을 모두 앞쪽으로 쓸어버린 것이었다.

당시는 마산시내도 중심 간선도로 한두 곳만 엉성하게 포장이 되어있을 정도였으니 경주까지는 물론 이런 험한 도로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시속 30~40km를 넘지 못했을 속도였으련만 그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큰 돌에 바퀴가 튀어 뒤에 앉은 우리들은 한참동안 공중에 떴다가(기분에) 쿵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일이 거의 연속되다시피 했지만, 그것을 괴로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엉덩이에 멍도 들고 멀미난 친구들도 있었으련만 그런 것을 보았거나 느낀 기억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처음 경험하는 쾌감에 웬만한 고통은 묻힐 만 했으리라는 생각을 나이 들어서도 한번 씩 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열차로 진영 정도만 갔다 와도 다음날 친구들로부터 큰 부러움의 눈길을 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칙칙푹푹 내달렸던 옛날 기차>

 

창밖으로 팔을 내미니 팔꿈치가 부러지는 것 같더라 느니, 전봇대가 뚝 부러지는 것 같더라 느니, 말도 안되는 뻥을 쳐도 신기함과 부러움으로 넋을 놓던 친구들의 모습에 더욱 신이 나서 점점 더 부풀려 떠들어 대던 시절이었다.

저기 가는 저 아가씨 유우에엔 사아모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어디서 배웠는지 시속을 풍자하는 노래나 유행가 등을 한 사람이 선창하면 대부분이 따라 불렀다.

레코드나 라디오를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어떻게들 익혔던지 목이 터져라 잘들도 불렀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흙먼지를 퍼부어도 노래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먹밥을 먹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입엔 흙먼지가 덮여 간혹 모래가 씹혀도 뱉어내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차가 튀어 오르면 밥 뭉치가 뺨이나 턱을 쳐 발리기도 해 서로 보며 웃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먼지 묻은 밥 알갱이지만 말끔히 뜯어 먹었다. ……

 

고적 관람시의 느낌은 기억나는 게 없고, 첨성대와 다보탑 앞에서 찍은 명함크기의 학급 단체사진이 있었는데 그것도 보관 못 한 내 처신이 아쉽다.

그리고 올 때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피로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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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00:18

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인공적인 형태라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 수가 있습니다현재에 와서는, 흔한 형태라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규모의 건축물에서 다양한 이유로 차용되고 있습니다.



치첸이트사  카스티요 피라미드 (El Castillo, Chichen Itza, 멕시코, 8~12세기)

출처 - en.wikipedia.org


 마치 거인의 야트막한(?) 전망대 같기도 , 피라미드 카스티요 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도 등재된 고대 마야족 도시의 대유적 치첸이트사 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건축물이며, 관광명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마야의 뱀신 쿠쿨칸의 신전이기도 건축물은 밑면은 55.3m, 높이는 30m 규모이며, 4면에 91개의 계단이 있고, 상부의 신전을 포함하면 1년을 뜻하는 365 됩니다.



 - Stairs-House by Y+M Design Office (일본, 2009)

출처 - www.dezeen.com


 계단의 형태 라기보다는 계단 자체를 집의 메인 테마로 잡은, 일본 디자인 스튜디오 (y+M design office) Stair House 입니다. 


출처 - www.dezeen.com



 남향으로 향하는 계단 형태(이면서 실제 계단) 입면은 디딤판(tread) 사이의 틈을 포함한 다양한 개구부로 내부 공간에 자연광을 침투시키며, 내부에서는 파사드의 형태가 그대로 천장의 형태가 되면서 재미있는 공간감을 연출해 냅니다.


 쌍둥이인 아이가 있는 30 교사 부부 가족을 위해 설계된 집은 아래의  가지 요구사항 테마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1. 교사로서 학생들의 방문을 반기기에 “people gathering”

 2. 따뜻하고 밝을

 3. 프라이버시 지켜줄


 한적하고 바람이 강한 바닷가에 지어진 집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실린 포스팅을 링크합니다

 -> https://www.dezeen.com/2010/11/15/stairs-house-by-ym-design-office/



 - 아크로스 후쿠오카 (ACROS Fukuoka Prefectural International Hall, 일본, 1994)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일본 후쿠오카현의 복합문화시설인 아크로스 후쿠오카 는 "Green over the gray"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아르헨티나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즈(Emilio Ambasz) 가 수장으로 있는 Emilio Ambasz & Associates,inc. 의 작품입니다. (http://emilioambaszandassociates.com/

 본인 이름을 딴 산업디자인 회사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 http://emilioambasz.com/


출처 - www.greenroofs.com/

출처 - http://architectureyp.blogspot.kr/2011/05/acros-fukuoka-hall.html


 건물 전체를 덮는 녹지 덕에 외부 열기를 90% 수준으로 차단하며, 텐진 중앙공원 과의 조화가 좋아서 친환경 건축 분야에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크로스 후쿠오카 정면에는 외벽을 따라 60m 높이의 건물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식 정원이 있는데, 누구나 접근 가능하여 후쿠오카의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거대한 '계단형 정원' 은 관광 관련 사이트에 소개되기도 합니다. 


 비교적 상세한 정보가 있는 greenroofs.com 의 포스팅을 링크해 봅니다.  

 -> http://www.greenroofs.com/projects/pview.php?id=476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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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기억은 없다.

아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하여 상황인식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정부에선 백두산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하자고 했는데 유엔이 정전을 강행했다는 것만 알았다.

혼자서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 밑으로 들어가 산화한 전쟁영웅 열 명의 사진에 간단한 설명을 붙인 소의 육탄 십 용사포스터가 교실 벽마다 붙었고, 그들은 한동안 반공웅변대회의 중심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육탄 십용사' 충용탑>

 

그리고 이때부터 각 학교에서 반공강연회가 수시로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에 비해 훨씬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소위 양키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쏟아져 나왔던 깡통식품들에 대한 기억과 쉽게 만질 수 있을 정도로 흘러 다녔던 총탄과 그걸 이용한 총 놀이, 그리고 군에서 불하된 트럭들로 인한 차타기 경험들이었다.

부림시장을 국제시장이라 부르기도 했고, 거기에 있었던 극장을 국제극장이라 명명했던 이유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미군물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던 곳이 그 시장이었다. 지금 부림지하도 근처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양쪽 시장이 중심지였다.

깡통식품뿐 아니고 옷, 구두, 야전침대, 공구 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나왔었다고 기억되는데 거의 모두가 군수품들이었다.

전쟁 중에는 몰래 빼돌려진 물건들이 조금씩 나왔었지만 정전이 되어 미군이 대다수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전쟁잉여물자가 되어 시중으로 범람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정전 두어 달 후가 되겠는데, 집집마다 깡통 배급이 나왔다. 한 되 남짓들이 깡통이었다. 전쟁용 비축식품들이었는데 잉여 물품들이 되어 전 국민들에게 배급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3개였다. 따보니 콩과 쇠고기로 만든 통조림이었는데 처음 먹어볼 때의 그 고소하고 진한 맛에 대한 끌림은 그 후에 국제시장을 더 찾게 했다.

그러나 그 기름진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설사에 시달리기도 했었다고 후에 들었다.

 

<미국에서 온 구호품을 보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이렇게 깡통제품들이 흔해지니 우리들 생활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나무로 만들어졌던 두레박이 양철제품으로 바뀌었고, 나무함지도 가볍고 튼튼한 양철다라이(다라이는 대야의 일본 말)로 대부분 바뀌었다.

웅덩이 물 두레도 그랬고, 각종 그릇들도 강통이 대신했다. 가을 논의 참새 떼 쫓는데도 수많은 깡통이 동원되었다. 또 깡통차기라는 놀이도 생겼다.

전에는 자치기나 비석놀이, 일제잔재인 다스께또놀이(술래잡기와 비슷) 등을 주로 했는데 이 놀이가 나온 뒤로는 역동성과 소리의 효과로 해서 이걸 많이 했던 것 같다.

술래보다 먼저 달려가 깡통을 차서 소리와 함께 깡통이 날아가고, 잡힌 동료들이 해방될 때의 쾌감은 큰 즐거움이었다.

정전 후 군대 내의 무기 관리체계가 좀 엉성했던지 이상할 정도로 총알들이 많이 굴러다녔었다.

주로 칼빈 탄환이 많았었는데, 탄알을 뽑아내고 뇌관 부분에 구멍을 뚫어 장난감 총 만드는 데에 많이 활용했다.

꼭 우산대만한 쇠파이프가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었는데, 그걸 10센티 남짓 끊어 칼빈 탄피에 끼우면 맞춘 듯이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걸 당시 가게에서 많이 팔았던 나무권총의 총신에 홈을 파 묶었다. 파이프 안에 딱지화약을 까서 넣거나 총탄에서 빼낸 화약을 재어 넣는다.

그 뒤에 잔돌이나 철사 조각 따위를 넣고 그 뒤를 진흙이나 물에 적신 솜 같은 것으로 단단히 봉하고, 탄피 구명에 딱지화약을 붙인 뒤 고무줄에 걸린 공이를 튕겨주면, 공이가 피스톤처럼 나아가 화약을 쳐서 폭발이 일어나고 그 불이 파이프 안에 전달되어 폭발이 일어나서 잔돌이나 철사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갔는데 그 위력이 제법 컸다.

총신을 좀 길게 해서 잘 만든 것으로는 둑에 가깝게 온 오리 잡는데도 사용했었다.

이 파이프를 우리는 댓(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라 불렀기에 이 총을 댓방총이라 했었다.

그리고 총탄과 관련된 참으로 무지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기억도 있다.

당시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회충검사를 하고 구충약을 나눠줄 정도로 회충구제가 골칫거리였는데, 구충에 좋다는 말이 돌아 상당수의 아이들이 총탄 화약을 뽑아 씹어 먹고 다녔던 것이다.

나도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 무미 무취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배탈 났단 말도 못 들었던 것 같다.

차타기 이야기는 수학여행과 더불어 해야 좋을 것 같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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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4 06:13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상징 이기도 한 초승달의 형태를 건축에서 차용한 예를 소개해 봅니다.



 - The Crescent House (영국, 1997)

출처 - www.makearchitects.com/


 1977년부터 2004년까지 foster and partners 의 파트너 로 재직하다가 Make architects 를 설립한 Ken Shuttleworth 본인과 그 가족을 위해 설계한 Crescent House 입니다. 

 아무래도 건축주와 건축가가 동일인 이다보니 여러 건축상을 수상한 이 건축의 독특한 형태가 실제로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Make architects의 프로젝트 소개 페이지를 링크합니다.

http://www.makearchitects.com/projects/crescent-house/



 - The Crescent Hotel (아제르바이잔, 2019 완공 예정)

 출처 - www.skyscrapercity.com 


  Azerbaijan Baku 지역의 카스피해 에 건설중인, The crescent Development Project 중 호텔 부분인 The Crescent Hotel 입니다. 

 2007년에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에 의해 'Full Moon Bay' 와 'Caspian Plus' 두 개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풀문베이 프로젝트는 사라지고 카스피안 플러스 프로젝트가 The crescent Development Project 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진행중 입니다. 

 33+4(포디움 층)개층 으로, 230개의 객실, 74개의 아파트, 16개의 빌라 로 구성될 것이며, 높이는 166m 로, 의외로 진행중인 세 건물 중 높이는 가장 낮습니다 (오피스와 쇼핑몰을 담당하게 될 다른 두 건물의 높이는 170m와 210m 입니다). 

 이슬람권 국가이기 때문에 실제로 지어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이 되는 프로젝트 입니다. 실제로 지어지고 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군요.



 - Crescent Moon Tower (두바이, 2009 디자인, 2016년 승인 심사중)

출처 - www.zingyhomes.com

출처 - blog.naver.com/design_hoya/220976451905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인 그룹 Transparent House 작품으로, 독일 엘리베이터 회사 티센크루프 에서 두바이를 배경으로 진행한 11th thyssenkrupp elevator architecture award 출품작 입니다.

(프로젝트 링크 -> http://www.transparenthouse.com/project/crescent-moon/#/)

 The Crescent Hotel과 함께, 종교의 힘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실감이 되는 프로젝트 입니다. 정말로 지어지게 된다면 말 그대로 두바이의 '아이콘' 이 될 수 있겠습니다.

 실내에서 렌더링 한 이미지를 보면, 창 프레임은 별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냅니다. 그야말로 이슬람 그 자체로군요. 

 단면도를 포함한 추가적인 정보가 있는 해외 블로그 링크를 첨부합니다.

https://www.livinspaces.net/projects/architecture/under-the-moon-the-crescent-moon-tower-by-transparent-house/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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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이들에겐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2주에 한번 씩 하는 검사는 대체로 손발의 때 검사만 했기에 부담이 덜했지만 매 달하는 총검사는 팬티만 입혀놓고 했기에 그 전날부터 대비하느라 많은 고생들을 했다.

 

<'대추나무골님의 블로그'에서 빌려왔습니다>

 

한 학년 차이의 내 여동생에게 들어서 알고 있거니와, 여학생들에게만 실시한 머릿니 검사도 역시 생활환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다.

영양상태가 좋은 아이들은 피부에 윤기가 돌고 때도 잘 끼지 않을뿐더러 씻어내기도 쉬운데, 당시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반대였다. 이삼일만 돌보지 않아도 손발에 누룽지 같은 때가 끼기 마련이었다.

합포초등학교 구역 동네가 오동동, 산호동, 상남동, 양덕동, 봉암동이었는데 오동동의 상당수 학생들과 산호동 상남동의 일부 학생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대체로 여기에 해당되었다. 거기다 공중목욕탕도 거의 없어 용의검사 대비에 더 애를 먹었다.

당시 구마산에는 남성탕(남성동, 현재 신한은행에서 남성동지구대 쪽 2~30미터 거리 위치)이 유일했고, 내가 육학년일 때 오동동에 은하탕(오동동 다리 안쪽 4~50미터 거리 오른쪽 골목 안)이 생겼는데, 용의검사 전날엔 자리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복잡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나마 목욕료가 부담스러워 못 가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봉암동의 친구들 중엔 가본 사람이 삼분의 일에도 못 미쳤을 성싶다.

목욕탕 내의 풍경도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나무로 된 개인용 물대야가 모자라 친구끼리 함께 사용했으니까 탕 안에 들어갈 때도 대야를 가지고 들어가다 시비가 생기곤 했다.

물엔 때가 둥둥 떠다녀 종업원이 수시로 들어와 족대로 때를 떠서 밖에다 털어내곤 했다. 더운물 달라는 손뼉소리와 고함소리가 수시로 나왔고, 남녀 탕 중간에 있는 맑은 물 칸에서 물 다툼 시비가 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때를 벗겨낼 수 있는 친구들은 이튿날까지도 마음들이 참 홀가분했었다.

목욕탕에 못 가는 친구들은 쇠죽이나 돌맹이 등으로 때를 벗겼다. 쇠죽은 소를 먹이는 집에만 있기에 많은 친구들은 평소 냇가에서 구해둔 곰보돌맹이를 주로 썼다.

따끈한 쇠죽에 수십 분간 손발을 담가 불어난 때를 겨와 짚여물의 마찰력을 이용해 문질러 벗겨내면 상당히 효율적이긴 했으나 등배의 때는 그것으로 안 돼 목욕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찰력이 있는 돌멩이로 문지르는 것도 효율은 짚여물보다 더 떨어지기에, 손발에 피가 삐짓삐짓 내비칠 때까지 문지르고도 말끔히 벗겨 내지를 못 해 땟발이 트실트실 일어나면 검사직전 침을 발라 눌러두기도 했었다.

그러니 등배의 때는 아예 포기하고 이튿날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늦가을부터, 그러니까 내의를 입기 시작할 때부터 무명 올 사이에 끼어서 피를 빨며 겨울을 나고, 봄에 내의를 벗을 때 사라지니 추위가 오면 이는 사람과 공생했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겨울 저녁에 화롯가에 둘러앉아 내복을 화로 위에 펼쳐들고 이를 잡는 광경은 1960년대까지도 한국 가정의 일반적 풍경의 하나였다.

빈대나 벼룩은 가려운데다 부르트기까지 해서 고통을 더 주었지만, 그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귀찮기로는 이가 더했다.

빡빡 깎은 남자아이들 머리엔 없었는데 여자아이들 머리엔 이가 참 골치였다. 가려운 것도 괴롭거니와 이가 슬어놓은 서캐가 하얀 점을 보이니 남 보기에 창피한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이었는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DDT(흰 분말 살충제)를 구해서 내복에도 뿌리고 여아들 머리에도 뿌렸었다.

 

<아예 서울역에서 줄을 세워 DDT를 뿌리던 시절이었죠>

 

그래도 모자라서 용의검사 전날엔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에 식초를 발라 붇게 하고는 빗살을 실로 죄어 빗살들 사이를 더 촘촘하게 만든 참빗으로 긁어내기도 했었다.

그런 노력들을 하고도 검사 날 모욕감에 울상을 지은 여학생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난리 통인데도 학력경쟁을 심하게 부추겼던 당시의 학교풍토는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대학교들이 모두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우리들은 중학교 입시 성적 경쟁에 동원되어 성적 순 줄서기를 했던 것이다.

매월 종합 모의고사를 쳤고 성적우수자라며 1등부터 50등까지의 명단을 학교게시판에 붙였고, 전교생에게 박수까지 치게 했었다.

봉암동 양덕동 친구들의 상당수는 중학교 진학조차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학교현실은 이듬해 본 중학교 입시 합격자 발표에서도 나타났다. 판자가교사 벽에 길게 붙었던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이었다.

그 통에 합격하고도 끝머리 즈음에 간신히 붙은 경우엔 부모로부터 구박을 받거나 온 동네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런 합격자 발표 방식은 당시엔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들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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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00:02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실한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도형입니다. 건축에 대입해도 마찬가지 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은 삼각형 - 하나의 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소단위 이기 때문에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서 기본 단위가 되기도 하는 이 평면도형이 건축과 접목된 사례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Allandale House (미국 , 2010)

출처 - blog.wanken.com

출처 - www.archdaily.com/


 MIT 건축과 부교수 이면서, 케임브리지에 사무소를 둔 WOJR의 수장인 윌리엄 오브라이언 주니어 (William O’Brien Jr , http://www.wojr.org/ ) 의 A 자형 혹은 삼각형 입면의 주택 렌더링 이미지들 입니다. 건물 전체가 삼각형인 것은 아니며, 특정 각도에서만 보여지는 이미지 입니다.

 특이품 감정가 (원문으로 idiosyncratic connoisseur 인데, 일반적인 직업은 아닌 듯 하네요) 와 그녀의 가족들을 위한 집임과 동시에, 여러 수집품들을 보관, 전시하는 역할을 겸해야 하는 다소 독특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별장' 이라고 보아도 다소 독특한 공간 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듯 싶습니다. 

 2010년 4월에 archdaily 에 소개되었으며 (링크는 여기를 클릭) 도면을 포함한 여러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영어가 부담스러우시다면, 아키데일리 기사를 우리말로 잘 풀어놓은 블로그를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블로그는 여기를 클릭 - 이곳에는 자료는 없습니다).


 - Infinity Chapel at Conrad Bali (인도네시아 발리, 2013) 

출처 - www.flyingbride.com/

출처 - www.conradbali.com/


 주택처럼 일상을 담는 건축도 있지만, 특정한 행동이나 혹은 특수한 때 를 위한 건축도 있는 법이죠. 콘래드 발리 호텔 부속 Infinity Chapel 이 바로 그런 경우 중 하나, 보통은 일생에 단 한번뿐인 '결혼' 을 위한 건축입니다.

 Hospitality (환대 - 호텔 리조트 등의 산업을 의미합니다) 분야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는 세계적 디자인 컨설턴트 WATG (http://www.watg.com/) 에서 콘래드 발리 전체의 디자인을 진행하였습니다. 2017년에 개장한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 시티 또한 이들의 작품입니다.

 

 - VIA 57 WEST (미국 뉴욕, 2016)

출처 - anotherangle.eu

출처 - www.archdaily.com/

 

 덴마크 건축 그룹 BIG - Bjarke Ingels Group 이 그 이름에 '걸맞는' 사이즈의 주상 복합 건물을 내놓으면서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이들 홈페이지에 가면 실제로 큰 대 자 아이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클릭하시면 BIG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원룸 타입에서 4 베드룸 타입까지 709세대를 포함하는 VIA 57 WEST 는 BIG 의 프로젝트 설명에 의하면, skyscraper 에 대응하는 "Courtscraper" 라는 새로운 형태(typology) 를 제안한다 라고 하는군요.

 건물 전체를 볼 수 있는 위치에서는 누가 보아도 삼각형의 형태를 띄지만, 평면과 여러 렌더링 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프로젝트 입니다. 아키데일리에 소개된 글을 첨부합니다 -> https://www.archdaily.com/794950/via-57-west-big


 - Bruder Klaus Field Chapel (Mechernich, 독일, 2007)

출처 - www.swissinfo.ch


 다른 세 프로젝트와는 삼각형이 표현된 방식이 다른 작품을 하나 소개합니다 - 건축계의 노벨상 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 2009년 수상자이기도 한 스위스 건축가 피터 줌토르 (Peter Zumthor)의 작품, Bruder Klaus Kapelle 입니다.

 외관만 보아서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내부를 상상해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부 사진들을 같이 올려봅니다. 

출처 - www.archdaily.com/

출처 - akau694.blogspot.kr/


 15세기의 스위스 성인 클라우스 수사 (Nicholas of Flüe  or  Bruder Klaus) 를 기린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예배당은 신도들의 예배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건축주인 이 지역 농부의 개인 기도실 이라고 합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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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들의 신경질이 있었겠고, 지금도 매질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성격도 작용했던 것 같다.

여름이 가까웠을 때는 오동동 선창 끝머리에 있었던 어물창고로 갔다. 여기서의 두세 달은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추억을 남긴 시간이었다.

이때 또 바뀌어 오신 선생님의 어진 품성도 그런 기억을 더 도왔다. 매일을 넘어 보통 하루 두세 번씩 교실 앞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한두 명에 그쳤던 피난민 편입생이 그 해 갑자기 불어 이때엔 십여 명이 되었었는데 물놀이에서 우리들과는 좀 다른 이들의 양태를 보고 어린 마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토박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물로 뛰어 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수영복이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는 장난으로 그 팬티를 벗기곤 했었지만 솔직하게는 좀 부러운 눈치들을 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는 다들 이러고 놀았죠,, ㅎㅎ>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친구는 평소 바다에 한사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 날은 친구들의 강권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수영팬티 윗줄을 꼭 잡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러나 장난 끼 많은 친구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팬티를 잡아 내려버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매우 낭패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팬티를 내리는 순간에 나도 얼핏 본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순둥이 친구의 낭패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라던 그 친구는 그때 이미 포경수술을 한 후였는데 포경이란 말조차도 모르던 우리들 눈엔 그 남근 모양이 우습고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것으로 하여 꽤 오랫동안 친구들 놀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으레 이런 말도 곁들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괴기”.

출신지역에 따라 억양 차이가 뚜렷했을 텐데, 그때 우리들 귀엔 다 비슷하게 들렸던 것 같다.

늦여름쯤, 전에 있었던 산호동으로 갔다가 늦가을에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본 교사는 징발된 그대로였으나 운동장 가운데를 철조망으로 막고 이쪽에 빙 둘러 판자 가교사를 교육당국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운동장에서 뛰 수도 있었고, 철봉대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며 모래밭에서 뒹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학내 행사도 활성화됐다.

기름 먹인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교사에 반쪽짜리 운동장이었지만 그래도 야외나 창고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때부터 학교생활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져갔던 것 같다.

겨울엔 난로도 피울 수 있었다. 난로는 군부대에서 폐기한 드럼통을 잘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땔감은 간혹 학년 전체가 팔룡산으로 가서 솔방울이나 삭정이를 주워 와서 교실 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했다. 또 등교 시에 두세 토막씩의 나무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게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입시경쟁이 상당히 의식되었었는데 여건상 준비를 못하다가 이때부터는 오후까지 수업을 했다.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식은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난로 밑자리잡기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밑자리 도시락만 데워지지만 밥시간 기다리며 모두 즐거웠죠,,  ㅎㅎ>

 

이때부터 정식 체육시간이 생겨 달리기 시합도 했고 철봉의 기본동작을 배우기도 했다. 높이뛰기나 넓이뛰기 요령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비록 운동장은 좁고 학생은 많아 좀처럼 공에 발을 대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공 따라 다니다가 운 좋으면 한 번 차보는 재미도 맛보았다. 우리가 차고 놀았던 고무공은 군에서 나온 폐타이어를 녹여 재생한 고무로 만든다고 들었다.

소위 반공웅변대회란 행사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반에서 뽑아 학교대회에서 입상하면 시 대회, 나아가 도 대회까지 진출시켰었는데, 피를 토하듯 한 열변이 아니면 등위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런 대회의 성격상 봉암동, 양덕동 등의 촌아이들은 한 사람도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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