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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情)이란 영화에서도 큰 흥미는 못 느꼈었다. 영국 명우 로렌스 올리비에감독·주연의 명화였으나 선생님들은 좋았겠지만 중1짜리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폭발시킨 영화는 중2 때 본 셰인(SHANE)’이었다.

 

부림동에 있는 국제극장(1948년 부림극장으로 개관했다가 1950년 국제극장, 1956년 강남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폐관하였고 2008년 건물도 헐려 지금은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에서 본 그 영화는 그 후 한참동안 그 감동에 필적할 만한 영화가 나오지 않아 거의 독점적으로 회자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미남스타 알랜 래드의 고독한 영상(특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서 극장 안에 울려 퍼진 주제음악과 어우러져), 그러면서도 악당에겐 강한 주먹을 날리는 의협심, 특히 아역 배우의 다급한 외침에 돌아가면서 악당 두목 잭 팰랜스를 단 번에 쓰러뜨리는 극적인 장면 등은 몇 년을 두고 우리들의 화젯거리 1호였다.

권총 발사 시 왼손을 오른손에 든 권총 노리쇠 부분으로 가져가면서 쏘는 흉내를 우리들이 경연할 정도였고, 극중의 어린아이가 셰인하고 정겹게 부르는 음성 흉내도 역시 그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이후로 서부활극은 청소년 선호 오락물 1위였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들 생활상에 준 영향도 컸으니, 그것 때문에 부모들에 대한 거짓말 횟수들이 늘었고, 심지어 영화 단체관람이 예고된 후부터 관람까지의 4~5일 동안 부모들에게 관람투쟁을 벌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서부극들 때문에 우리들의 장난 유형이나 싸움 패턴이 달라졌다.

그전엔 대체로 싸움이 시작되면 도리깨질하듯 팔을 원형으로 휘두르다가 몸이 맞닿으면 잡고 쓰러뜨리고, 그래서 위에 올라탄 사람이 대체로 이기게 되고.... 이런 식의 싸움이었는데, 이 영화들 이후 언제부터인지 주먹을 직선으로 내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어느 쪽이 쓰러지면 옆에 있던 입회인 친구들이 일으켜 세워 다시 시작하게 하는....

이렇게 영화 붐이 일자 학생들은 학교에서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까지 정학당할 위험도 무릅쓰면서 소위 도독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들키면 다음날 교문 앞 게시판에 학년, , 번호, 이름이 명기된 유기정학 혹은 무기정학(유기정학 3회 이상) 공고가 나붙고.... 그런 중독을 더 부추기는 것은 매일 한낮이 가까워오면 극장 지붕 위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호객용 유행가소리.... 특히 날씨가 더워져 교실 창문을 열어 놓았을 땐 그 소리에 반해 고개는 선생님 쪽으로 향하고 있어도 발은 그 노래 장단에 맞추고 있어.... (이상 『상식의 서식처에서)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 화제의 중심엔 알랜 래드, 빅터 마추어, 로버트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 게리 쿠퍼, 룩 허드슨, 제인스 딘 등이 오르내리는 일이 참 많았다. 그러니 서부 사나이들이 정의의 사도로 인식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도 붐을 일으켰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밀림의 왕자.

 

아프리카 상공을 지나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흑인 부족들 손에서 길러진 한국소년 철민과 미국소녀 케에트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권씩 약 2년에 걸쳐 나온 그것은 그 어간에 나온 것으로 기억되는 타잔, 킹콩 시리즈들과 더불어 이국정취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었다.

철민과 케에트 둘을 아끼고 보호하는 추장 제가’, 추장 자리를 탐내어 둘까지 미워하는 구레’, 둘의 수호천사 뱀 다나’, ‘다나와 라이벌이라 둘까지 헤치려드는 공룡(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들이 어우러져 펼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다나와 공룡이 혈전을 벌이다 둘 다 화산분화구로 떨어져 들어가기 직전 분화구 위쪽에 있던 큰 나뭇가지에 다나가 급히 꼬리를 뻗어 감으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생들이 많이 본 잡지로는 학원이 유명했었는데 특히 거기에 오랫동안 연재된 조흔파의 명랑소설 얄개전은 인기를 많이 끌어 생명력이 긴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그때는 물론이었고, 지금도 우리 나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심심찮게 키 작은 사람보고는 꺼꾸리’, 키 큰 사람에게는 장다리란 말을 붙이는 일이 있는데, 그 말들은 얄개전의 두 주인공 남학생의 별명이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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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2 09:34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다.

우선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미술관, 테이트 모던 (Tate Modern) 의 이미지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Tate Modern seen from the River Thames : 출처 - www.geograph.org.uk


 직접 가 보진 못했을 지라도 이름은 한번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테이트 모던은 연간 4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영국 런던의 명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미술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화력발전소 건물 겸 수련 기계공 및 전기공 양성기관이었습니다. 


Bankside B Power Station, London, England, around 1985 : 출처 - en.wikipedia.org


 하지만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석유 가격이 3배 수준으로 폭등했던 1970년대의 석유 파동 등을 이유로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1981년 가동을 중단하게 되며, 20년 가까이 런던의 흉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철거 및 재개발을 노리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과 Tate Gallery의 결단으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 하였습니다.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테이트 모던의 모습을 보면 화력발전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기둥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에서 기존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가 계속 방치되었다면 여전히 흉물로 남았을 것이고, 철거 후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면, 예전의 발전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보아왔던 풍경은 그들의 기억속에만 남게 되어 결국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능을 가지되 기존 건물의 형태적, 공간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여 과거의 시간을 품은 채로 현재와 공존하게 하는 것이 재생 건축으로서,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과도 다르고 고건축과도 차별되는 독창적 공간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재생 건축' 과 유사한 의미도 있지만 똑같지는 않은 용어들이 있고, 다른 의미지만 언뜻 듣기에는 유사한 의미처럼 들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아래 단어들은 영어권 국가에서도 의미가 모호한 부분들이 있고,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도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해 보려는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 싶어 적어봅니다.


 - 재건축 :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30년 이상 지난 아파트 단지를 완전 철거한 후 신축 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안전상의 문제 해결과 경제적 이득 발생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단순 번역인 reconstruction 은 일부 혹은 완전히 파괴된 건물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행위를 뜻하는 경우가 많으며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습니다), 복원 이라는 단일 의미를 가지는 rebuild 라는 단어 또한 사용됩니다.

 - 리모델링 :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15년 이상 지난 아파트 단지를 골조를 유지한 채로 수직 또는 수평으로 증축하는 행위를 뜻하며, 목적은 재건축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리모델링이라는 단어는 사회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건축 분야에서는 건물의 규모와 상관없이 내,외관 변화 혹은 용도의 변화를 주는 경우 관습적으로 사용됩니다. 영어 표현인 remodelling 또한 건축의 내,외관이나 구조의 변경 등을 행할 때 사용되며, 아래의 리노베이션 (renovation) 과 비교됩니다.

 - 리노베이션 : (보통은 오래되어 낡은) 기존 건축물을 헐지 않고 개보수하여 사용한다 는 뜻이며, 영어 표현인 renovation (낡은 것을 좋은 상태로 수리하는 것) 과 거의 같다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리노베이션을 리모델링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모델링' 이라고 하는 표현은 주로 '경제 논리' 가 힘을 발휘하는 작업이며, 투자 대비 수익을 계산하여 실행하게 됩니다 (개인 주택의 리모델링 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재생 건축' 은 테이트 모던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외형적으로는 리모델링에 가까운 작업이라 볼 수 있지만, 방향성과 목적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버려지게 되었지만 유,무형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품고 있는 많은 건물과 장소가 있습니다. 재생 건축은 그러한 것들을 현재에,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주고자 하는 생각이 담겨 있는 작업입니다. 또한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의 리모델링 비용은 1995년도 당시에 약 1.4억 파운드, 한화로 2,000억원에 이릅니다. 경제논리에 의하면 철거 되었어야 했을 화력발전소는 테이트 모던 이라는 '재생 건축' 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결국에는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이득을 지역사회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여러 형태의 '재생 건축' 사례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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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9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57일이었다) 3년 동안엔 거의 매일 바냇들 길로 다녔었다. 등교 땐 공군병원 스리쿼터를 많이 탔지만 하교 땐 거의 빠짐없이 그 길로 다녔다.

당시엔 모든 학교가 오후 세시경이면 파했기 때문에 부림시장, 철로, 바냇들에서 구경하고 장난칠 여유가 좀 많았었다.

바냇들은 용마산과 문둥산(반월산을 두고 그 땐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한센일들 집단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 꽤 넓은 들을 말하는데 동쪽 끝은 국도2호선, 서쪽 끝은 회원동 창신농업고등학교(현 회원동 한효아파트)까지를 대강 그렇게 불렀었다.

동쪽 끝에는 신흥방직주식회사(일제 때부터 있어온, 짐작에 만여 평이 넘었던 듯한 공장. 지금 신세계백화점 남쪽)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존속했던 큰 회사였다.

1956년쯤 시내쪽으로 인접해 신한가공이라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바로 옆으로 새 길이 남으로써 산호동에서 회원동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벌판길이 형성되었다.

들 동북쪽, 지금의 종합운동장 위치 정도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남쪽 칠팔십 미터 쯤에 네댓 채의 집과 두세 채의 집이 각각 있었을 뿐 주로 논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들판에 대한 기억으로 배배꼬인 벼 잎이나 갈라진 논바닥이 거의 전부이고, 누렇게 물든 풍요로운 들판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들판 규모에 비해 수로가 너무 빈약하여 가뭄을 많이 탔던 것 같다. 수원(水源)은 무학산 밖에 없겠는데 수로가 몇 안 되고 작아 벌판 남북을 횡단해 나 있었던 철로(3·15대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얼마 안 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0년대 바냇들 지도와 현재>

 

우리 동네에서 선배 세 명, 동기 네 명, 후배 한 명이 함께 다녔으므로 으레 등하교 때 두세 명이나 네댓 명이 함께 다니기 마련이었다.

학교 파하면 몽고정에서 두레박 물을 얻어 마셔가면서 철로변(3·15기념탑 옆 도도록한 지역이 구마산 역이었던 현 육호광장에서 신마산 역이었던 월포동 벽산블루밍아파트로 가는 철도 부지)를 따라 부림시장을 지났다. 시간에 쫓길 땐 철로 따라 바로 갔지만 대부분의 경우 볼거리가 많은 시장 길로 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정전 후에는 더 많은 군용물자들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거기에다 온갖 약장수, 마술사 등이 재주와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기웃거렸고 때론 넋을 잃기도 하면서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배워 흉내 내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생각나는 하나가 있다.

사오십 센티 정도의 철로 조각 위에 돌을 올려놓고 수도(手刀)로 내려쳐 깨는 위력에 감탄하며 한참 보다가 집으로 향했는데, 구마산 역을 넘어 철로타고 오다가(철로 위로 걷기를 즐겼었다) 한 친구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어리둥절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왼손바닥 오른쪽 끝으로 돌 끝을 잡고, 왼손 등을 철로에 붙이고, 돌이 철로에서 일 센티 정도 떨어지게 하고는 오른손 수도로 돌을 내려치면 순간적으로 돌이 쇠에 부딪치면서 깨어진다. 사실상 속임수였는데 우린 그걸 또 후배들한테 써먹으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부림시장에서 구마산 역으로 가다 들렀던 환상적인 맛집도 생각난다.

지금 백제삼계탕 앞 주차장에 있었던 중앙중학교 담벼락에 붙여 지은 판잣집 가게였는데, 젠자이(단팥죽의 일본말)에 국화빵을 찢어 넣어 먹는 맛은 그때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었다.

<합천 5일장에 가면 지금도 국화빵 넣은 단팥죽을 사먹을 수 있다>

 

구마산 역에서 삼사백 미터 가다가 용마산 끝자락쯤에서 벌판길로 들어서는데(지금 운동장 방향의 길) 거기에서 왼쪽 길로 가면 한센인들 집단촌을 거쳐 율림동, 합성동(그때는 창원군)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곧장 가면 신한가공 쪽이었다. 이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어린교로 통했는데(현 백화점 북쪽 옆길 쯤) 이 길 외에도 군데군데 논두렁길 길들이 많았다.

들 가운데쯤에 삼사기 정도의 묘역이 있었는데, 지금 추상으로 이백여 평은 족히 되었음직한 넓이였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갖 장난질을 다하며 놀았다.

무릎치기, 말놀이 등을 많이 했고, 긴 풀잎끼리 맺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소위 결초놀이도 했다. 감정을 못 푼 친구끼리 혹은 타교생끼리 한판 겨루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동중이나 창신중에 다니는 동네친구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 속여 모은 돈으로 부림시장에서 깡통(미군용 휴대식품 통조림) 몇 개 사서 파티 장소로도 거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한센인들과 애기들을 연관시킨 무서운 소문들이 떠돌았던 때라 어둑살이 지면 그쪽으로 두려움의 눈길이 가기도 했고, 용마산 북쪽비탈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도 비 오고 컴컴해질 땐 공포감을 주기에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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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이 흉내 내는 데 따라 짚 뭉치 잡고 던지고 뺏으면서 듣기만 한 럭비를 한답시고 빈 밭고랑과 둑을 쓸던 기억도, 푸석푸석한 밭이라 살이 아프지 않아 좋았던 느낌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고무로 된 공을 본 건 전쟁 중 반쪽 운동장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고, 가죽으로 된 공을 만져본 건 정전 전후였던 것 같다. 군용물자들이 대거 민간에 불하되어 시중에 나오면서 고무제품이나 가죽제품들이 가공되어 우리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까만 고무주머니에 바람만 넣은 공이었지만 보통 아이들이 가지기엔 아직 귀한 것이었기에 운동장에 한두 개만 튀어 다녀도 백여 명의 아이들이 공 따라 뛰어 다니던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공 가진 아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과 후에 벌어지는 축구시합에 선발되려면 그 아이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기 때도 그 친구는 주장 노릇을 했고 모든 멤버들이 그 아이에게 패스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합포초등학교라 잘못 세게 차면 종종 공이 바다에 빠지기도 했었는데(지금 학교 동쪽 길 건너 라이온스 회관부터 바다였다) 그때도 다투어 바지를 걷거나 벗고 들어가 공을 건져왔다. 심지어 겨울에도 그랬다.

<공을 잘못하면 바다에 빠졌다는 당시 합포초등학교와 현재 상황 비교>

 

가죽공이 눈에 익은 건 정전 이듬해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8·15체육대회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기 전부터 방과 후에 하는 선수들의 연습 때도 많이 보았거니와 중학교 진학 후엔 체육시간에도 농구공이나 배구공 등은 만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별 실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축구공차기는 마산중학교가 가졌던 운동장 여건 때문에 3년 내내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

마산고등학교도 운동장 반쯤에 판자 가교사를 지어 교실로 쓰고, 나머지에 농구장, 배구장, 철봉시설 등을 하였으니 축구는 엄두도 못 낼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야구 연습도 공 던지고 받기 정도만 하는 걸 보았고 배팅연습이나 실전훈련은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을 빌어 하는 걸 보았다. 체육시간에 배구공도 멋모르고 세게 쳐서 공 찾아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을 헤매는 일도 종종 일어났었다.

그런데 전후에 활기를 띈 운동 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중고교 팀들과 군인 팀들에서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계기를 준 것은 당시 마산에 와있었던 헌병사령부 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팀에 국가대표 유명선수들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선수로는 골키퍼 함흥철과 센터포드 최정민이다.

함흥철은 50년대 한국축구계에선 보기 드문 국제수준의 골키퍼로 평가 받은 선수였다.

 <함흥철 (1930 ~ 2000) / 한국축구1세대 수문장이자 국가대표팀 감독 역임>

 

우리는 마산상고 운동장에서 골문을 지키는 그의 유니폼 꿰맨 부분과 방귀소리(그가 옆으로 날면서 내는 방귀소리는 당시 우리들의 화제로 돌아다녔다.)에 낄낄거리기도 했지만 몸을 수평으로 날리면서 강슛을 쳐내는, 그때로선 상상도 못한 묘기를 실제로 보면서는 경이감을 금치 못하기도 했었다. 그때 그의 유니폼은 긴 바지 긴 소매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잔디구장이 없었던 여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정민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였다는 평가만 머리 속에 있다. 그 외에도 우상권 등 국가대표급 선수가 두세 명 더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195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리며 한국 축구를 대표했던 최정민 전 축구대표팀 감독(1930~1983)>

 

그들이 연습상대가 없어 진해 해군사관학교 축구팀이나 통제부 팀, 아니면 마산고, 마산상고 팀들과 어울렸던 것 같은데 그 팀들로선 과분한 상대 덕에 전력도 향상시키고 학생들의 관심도 더 받았던 것 같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우리 초등시절에 신화처럼 화제에 올라있던 마산 출신 대표선수, 이름은 안종수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그가 쏜 슛이 상대 골키퍼를 기절시켜 상대국 응원자가 권총을 빼들어 쏘았는데 그가 총알을 피했다느니 하는, 지금이라면 유치원생이라도 믿지 않을 소리들을 그때 우리들은 다투어 떠들곤 했다.

내가 성인이 된 언젠가 일간지에서 읽은 한국축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가 마산 출신임은 확인되었으나 그의 실력은 교체 멤버 정도의 위치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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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시내만 사오천 명 되던 중고생들이 학교 위치에 따라 두 시간 정도 행진을 벌였는데, 맨 앞엔 당시 거의 모든 남자고교에 두고 있었던 밴드부가 서고 그 뒤를 학생들이 중대·소대별로 행진했다.

초등학생들은 행진 대열의 앞과 옆을 오가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겠지만 시민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성황을 이루었다.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곤 시내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맨 앞줄에 선 악장들의 지휘봉을 이용한 재주피우기와 멋 내기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여고로선 유일하게 있었던 제일여고 고적대의 인기도 상당했다. 날씬한 몸매의 고적대가 드럼을 치면서 행진해 갈 때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따르면서 발을 맞추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고 고적대 퍼레이드는 당시 큰 인기였다>

 

행진이 끝나면 오후부터 이틀 반 동안의 체육대회로 들어갔다.

마산시내 모든 중고교들이 그 학교에 두고 있는 체육종목에 참여함은 물론 통제부 팀, 81항공창 팀(공군) 등의 군부대 팀과 초등교사 팀, 신흥방직 팀 같은 직장 팀 등도 종목에 따라 참여해 그야말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축제였다.

그러니 경기 장소도 모든 학교운동장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인기 있는 종목 경기가 많이 열렸던 마산상업고등학교(용마고 전신), 무학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국수, 국밥, 비빔밥 등과 막걸리를 파는 천막식당들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마라톤 경기(1962) / 마산시내 수성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때도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몇몇 친구들은 국수와 아이스케키 값 정도를 어떻게든 마련하여 아침 먹고 만나 경기장으로 갔다.

이 학교 저 학교 관심 가는 데를 골라 다니며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 돌아다니다 해거름 쯤 집으로 돌아오면서 게임이야기와 선수들 잘잘못 이야기로 신났던 기억은 지금도 즐거운 상념을 불러온다.

그때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대스타가 잊혀 지지 않는다.

정재문이라는 2년 선배였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들로부터 이름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날 대대장으로서 구령을 붙이던 때였는데, 그때 본 모습은 소문대로 참 훤칠했다. 키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준수했다. 대대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당시 마산시내 중학교 최고의 투수에다 공부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으니 명성이 자자했던 건 당연했다.

특히 8·15경축기념체육대회에 대비하느라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휴식시간엔 가교사로 된 합숙소 앞 그늘에 책걸상을 내어놓고 공부하던 모습과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마산동중과의 야구경기에서 강속구를 뿌려 열 몇 개의 삼진을 잡아 우리를 열광시키던 모습은 워낙 인상이 깊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 선생님들의 권유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얘기하여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투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올라갈 때는 수석 했다는 소식도 같은 경로로 들었다.

그 후 40년도 더 지난 뒤 듣게 된 후일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갔고 장성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고 했다.<<<

(편집자 주 ;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재문 씨는 월남전에 참전(1969~1970)하였고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쌍용그룹에 입사하여 쌍용건설 전무이사를 지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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