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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아파트이다.

 

<재개발 이전의 창원 용지 주공1단지 아파트>

 

아파트라는 다소 특이한 주거형식의 시작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타운하우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심리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우리의 아파트는 계층 간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달리 취급되고 여가와 취미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아파트는 오직 현관문 하나만으로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하고 짧은 동선이 주는 편리함과 단열 및 보온이 주는 냉난방시설의 효율성 때문에 도시주거형식으로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량공급이 가능해 부족한 주택 량을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하면 매매도 용이해 교환가치도 높다.

이런 점들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범 계층적 주거형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경남은 2010년 기준으로 단독주택이 40.1%인데 비해 아파트가 54.1%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경남에서도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영리를 목적한 민간기업의 아파트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형 단지개발 보다는 기존 택지와 산업용지에 재개발 형식으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산 산호동 용마맨션 및 양덕동 정우맨션 같은 단일건물 형 아파트 혹은 산호동 용호·산호 아파트처럼 구획정리지구 내의 5층 규모 아파트가 당시에 건설된 아파트들이다.

비슷한 시기,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외국지원 주택건설 사례도 있다.

<마산 회원동 화란주택 / 최근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

 

옛 마산시 회원동의 화란주택이 그것으로, 1977년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네덜란드의 세베모라는 교회지원단체 협조를 받아 1981년에 완공하였다.

입주자는 수재민과 빈민 그리고 천주교가 추천하는 가구였으며 집과 마을의 설계까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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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꿀 것을 강압적으로 독려하여 옛 부터 이어 온 초가지붕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초가지붕 대신 들어선 울긋불긋한 원색의 낯선 지붕들은 자연경관과 부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초가지붕이 가지고 있었던 단열기능과 빗물처리의 능력을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가 대신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집이 되거나 비가 자주 새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시작된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1978년에 이르러 목표 대비 107%의 초과 실적을 올리게 된다.

목표를 초과달성한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국의 농촌주택을 새롭게 건설할 요량으로 1978년부터 표준농촌주택설계안을 마련하여 재정지원을 약속하며 권장하였다.

하지만 입식부엌과 마루를 중심으로 한 집중형 평면의 표준주택은 농촌지역의 풍토와 생활관습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융자금 상환에 대한 부담까지 작용하여 농민들로부터 외면 받아 실패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농민들의 자발성이 매우 두드려졌지만 해가 갈수록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통령의 최고관심사가 새마을운동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거둔 공무원들의 실적은 승진과 바로 직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들이 지붕개량을 하지 않는 집의 초가지붕을 갈고리로 뜯어내거나 통일벼를 심지 않은 못자리를 장화발로 짓밟는 일까지 빈번히 발생하였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경직된 분위기는 이런 상황을 묵인 방조하였다.

새마을운동이 농촌근대화의 징표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수백 년 이어온 집과 마을의 경관이 하루아침에 낯선 모습으로 일시에 뒤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타율적 존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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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로 파괴된 주택을 근근이 보수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새로 짓는 주택들도 생활상의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새 유형이 출현하지 않았고 지방 목수들에 의해 재래식 건축기법이 전승되고 있었다.

농촌 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화한 것은 1971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새마을운동의 구호에는 그 때까지 있어온 농촌의 전근대적 시설들을 바꾸어 보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활환경개선이라는 선한 의지에 비해 정치적 의지라는 워낙 큰 힘이 내재된 탓에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우리의 친자연 주거문화가 일순간 시멘트로 바뀌어 버렸다.

아무런 논의와 비판 없이 오랜 세월 정들었던 흙벽과 초가지붕이 한순간 없애 버려야할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 지붕개량사업 / 경기도 화성 / 농촌진흥청 제공>

 

그 뿐만 아니다. 그 시기 혹 권세 있는 양반이 내려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동네 모습이 변하기도 했고,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마을 주택에는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도 않는 현란한 색상이 슬레이트지붕을 덮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농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던 이 혼란스러운 변화는 소위 농촌개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새마을운동은 정부가 농촌근대화를 목표로 주도한 여러 가지 사업으로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농촌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였다.

그중에서도 마을환경개선사업과 농촌주택개량사업은 마을과 주택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생활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을환경개선사업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확장하는 것으로부터 하천 보수, 상하수도 건설, 그리고 전기 설비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도로의 확장이나 정비는 교통수단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이웃 마을이나 도시와의 교류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1972년 서울 서대문구 마을환경개선사업 / 서대문구청 제공>

 

상하수도의 설치는 가사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기 가설은 조명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이 농촌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기화로·전기밥솥·냉장고 등의 취사용품은 가사노동의 성격과 양을 바꾸었고 라디오나 TV 등 전파매체는 근대화된 도시문화를 신속하게 농촌으로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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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미된 개량형 주택이었다. 취사 및 난방연료는 주로 연탄이었다. 연탄이 들어온 주방에는 공간이용 패턴에 다소 변화가 생겼지만 바닥높이 등 구조형식은 재래식 그대로였다.

주택 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 집장사가 지은 주택, 건축가가 설계한 일부 고급주택, 무허가 주택 등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저변에는 모두들 집만 지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1981)에서 집합주택 건설의 양산체제를 확립해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 서민용 소규모 주택건설은 공공부문에서 맡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택 보급률은 높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주택에 대한 투기 붐도 꺼지지 않았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무주택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게 되자 1977년 정부는 주택 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본격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고소득층에게는 아파트를 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여 되팔 수 있는 기회로 둔갑되어 투기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분양가 상한제의 또 다른 부작용은 도시가 획일화된 아파트 숲으로 변한 것이었다. 분양가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건축가의 창의성은 무시되고 정해진 값으로 지어진 획일화된 아파트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정부는 분양가 규제 실시 1년 후인 1978, 공동주택을 시공 단계에서 분양할 수 있는 선분양제도를 도입하여 건설업자들의 확대재투자를 촉진시켰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가지는 것이 꿈이었던 서민들은 조감도 밖에 없는 그림 속의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청약통장에 몇 년 씩 돈을 부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파트 분양 당첨을 위해 가족들이 교대해가며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기업의 재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선분양제도는 기업주의 과도한 이윤욕을 부추겨 유수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74년 정부는 국가 중공업산업의 중흥을 계획하며 창원벌판에 기계공업단지와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였다.

<계획 당시 창원 신도시 조감도>

 

창원의 도시계획규모는 인구 30만이었고 저밀도주거지역(단독주택), 중밀도주거지역(아파트+연립주택), 고밀도주거지역(아파트) 등을 고루 배치하고 있었다.

창원 신도시에 단독주택들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며 한층 혹은 심지어 한층 반 씩 세를 놓을 수 있는 평면구조가 대부분이었다.

임대와 매매를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에 공간구조나 외형에서 별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역시 초기에 공공주택으로 건설한 창원 반송동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기업이 참여해 지은 고층 아파트들은 평범한 판상형으로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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