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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00:00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난 곳은 창원 상남동의 한 식당이었습니다. 노동운동가였던 박성철과 여영국 도의원이 함께 했고 그날 먹은 음식은 갈비탕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의원님이라 불렀고 그는 저를 이사장님이라 불렀습니다. YMCA 이사장을 했던 제 경력 때문입니다.

출마를 앞두고 지역민들 얼굴을 익히는 자리여서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와 그가 다 잘 아는 노동운동가 황주석 최순영 부부를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다.

출마하려 창원까지 내려온 게 미안했던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으로는 거침이 없지만 사적으로는 과묵한 분이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만남의 기억은 뚜렷합니다. 총선 직전인 그해 3월 말 경이었습니다.

선거운동본부 요청으로 만들어진 도시문제 지역현안 공부 자리였습니다.

갑자기 창원에 내려온 그에게 지역 사정을 자세히 알게 하고 TV토론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는 선거 사무실 안쪽의 후보사무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학습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분들은 자리를 물리고 저와 노 의원 단 둘이 앉았습니다.

노 의원의 학습태도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약간 어색했지만 워낙 진지하게 제 설명을 듣는 노 의원의 자세 때문에 곧 공부 분위기가 잡혔습니다.

경기고 출신답게 노 의원의 집중도와 이해력은 탁월했습니다.

제 설명 사이사이 그의 질문이 섞이면서 알차게 진행된 공부였습니다. 한 시간 반쯤 걸렸던, 오래 기억될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만 노회찬 의원이 유독 관심을 가진 부분은 두 가지로 기억됩니다.

하나는 창원의 환경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사례로 꺼낸 슈투트가르트 바람길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듣는다면서 재미있어했고 몇 차례 질문도 던졌습니다.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구 사례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방대한 구상이라 쉽지 않겠다면서 더 늦기 전에 이런 시도가 필요하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구인 창원성산구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노 의원에게 "모든 구민들이 어디에서건 5분 이내에 숲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약이 어떠냐"고 했더니, 노 의원은 고개를 들어 날 빤히 쳐다보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성산구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하며 제 생각을 말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공약 같다고 했습니다.

특히 숲길을 걷는 것은 신분이나 경제력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점이 마음에 끌린다고 했습니다.

실제 이 숲길 이야기는 선거 과정에서 노 의원이 구민들에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공부가 끝날 즈음, 이런 일들은 단체장의 손을 빌려야 가능하다는 점에 우리 두 사람 함께 동의했습니다.

언젠가는 창원시장도 바뀌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서로 나누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

.

.

  

안타깝고 그리워서 짧은 추억 글 한편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준 당신은 혼자 홀연히 떠나셨네요.

보고 싶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도종환의 시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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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3 00:00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에 실려 고향의 봄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는 마치 꿈인 듯했다. 눈시울을 적신 이도 많았다.

거기다 북미정상회담에 종전협정, 평화협정 같은 말까지 나오니 벅차다 못해 오히려 두렵다. 쏟아지는 억측들만큼 넘어야 할 산도 많겠지만 열린 빗장이니 이대로 쭉 가리라 믿는다.

 

기왕 판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모습을 보자. 북한건축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일본사람 안도 타다오도 알고, 먼 나라 사람 르 코르비제도 알지만 가까운 북한의 건축가는 한 사람도 제대로 모른다.

생전의 설계도구가 조선혁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건축가 김정희도 모르고, 조선건축사를 저술한 건축사학자 리화선도 모른다. 대학에서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최일룡이 설계한 평양 빙상관이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 대성당을 닮았다는 모방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89년 준공된 능라도 5.1 경기장이 충격흡수공법으로 그 해 제네바국제발명 신()기술전에서 금상을 받은 사실도 잘 모른다.

부유층이 모여 사는 거리가 화려하고 높아 평해튼(평양+맨해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르는 이가 많다. 

<평양 대동강변의 미래과학자 거리>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북한의 건축은 통치수단이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북한건축에 대한 지식은 일목요연하다. 높으면 체제선전용, 화려하면 사회주의 우월의식 선전용, 형태가 남다르면 이념선전용 건축으로 구분한다. 우리가 이 정도이니 일반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질문할 때가 되었다.

사실이 그런가? 북한에서 이루어진 모든 건축적 성과를 통치수단으로 보는 것은 적절한 평가인가? 건축은 그렇게 서너 가지 개념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인가?

우리 눈에 익은 두 사례만 보자.

우선 평양의 옛 이름을 딴 105층 류경호텔. 디자인이 좀 과해보이는 이 호텔의 연면적은 무려 36이다. 1987년 착공해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이집트의 통신회사 오라스콤(Orascom)이 투자해 6~7년 전에 공사를 마무리시켰. 오라스콤은 5백만 명이 이용한다는 북한의 이동통신업에 진출한 회사다.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늘어선 여명거리는 어떤가? 김일성 부자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에서 용흥 네거리까지 약 3구간에 조성된 거리다. 20164월에 착공되어 1년 만에 완공, 작년 봄에 준공되었다.

착공 때 미제와 그 추종 세력들과의 치열한 대결전이라고 선전까지 한 개발사업이다. 70층짜리 건물을 비롯해 총 44, 4804세대에 달하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주로 학자·연구자 등 인텔리 계층을 위한 주거시설이며 태양열·지열 등 신재생 에너지는 물론 생태녹화기술까지 적용시켰다.

위의 두 사례, 류경호텔은 체제선전용이고 여명거리는 사회주의 우월의식 선전용, 맞는가?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프레임으로 우리의 것도 돌아보아야 한다.

123층 제2롯데월드는 어떤가? 강남의 테헤란로는 또 어떤가? 롯데월드는 아무리 높아도 체제와 상관없는 사기업 건물이고, 테헤란로는 도시발전과정에서 생긴 경제성장의 상징이라 북한 것과는 다른가? 

<류경호텔>

 

향후 남북은 각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건축계에서도 바람이 일 것이다.

남과 북의 진정한 교류는 상대방을 바로 알고 바로 이해할 때 가능해진다. 북한의 도시와 건축을 이데올로기 결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아야 건축이 건축으로 보인다.

'동질성의 공간'이었던 남북이 '분단된 시간' 때문에 '이질화된 건축'으로 양분되었다.

이제는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다. 건축계의 지난 시간을 반추해보면, 부끄럽지만 우리는 민족건축에 대한 어떤 노력도 없었다.

DNA처럼 각인된 이데올로기가 쉽게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민족''이데올로기'를 넘을 것이다.

남한이 '자본주의적 건축'이라면 북한은 '사회주의적 건축'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으로 혹 납득되지 않는 건축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 즉 북한이라고 하는 지역의 문화로서 북한건축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에서는 북의 건축을 일인독재를 위한 도구로서의 건축이라 하고, 북에서는 남의 건축을 퇴폐적이고 변태적인 자본주의 건축이라는 양쪽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

왜곡되고 혼돈한 프레임을 통해 상대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체제 우위적 논리''동정론'은 건축적 접근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가 우리의 건축을 볼 때처럼 북한건축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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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되는 주방으로 변했다. 주부의 의지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가 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건설업자의 전략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각종 기기들은 이와 조화를 맞춘 가구와 더불어 빌트인(builtin)시스템 방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방재·교류 등 생활시설들도 획기적으로 변하였으며 모든 시설들이 자동 혹은 원격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하고 있다.

 

<주방기구 생산업체의 빌트인 주방 시스템 광고화면>

 

이처럼 시설이 고급화 첨단화된 아파트는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삶을 점점 아파트 내부로 고립시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는 줄어드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는 가족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아파트는 부모 세대와의 동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마당과 마을이라는 외부공간과 함께 존재했던 옛 단독주택과 달리 노인의 활동반경은 좁아졌고, 생활습관과 생활주기의 차이로 노인은 가족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식이 사는 아파트에 잠깐 들른 부모는 주인 있는 침대 옆 한 쪽 바닥에 몸을 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 성장과 함께 찾아온 실존에 대한 관심이 주거형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절대 빈곤시대에 시작된 양적 욕구가 질적 욕구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일터 보다는 삶터, 일보다는 여가가 소중한 가치임을 알게 하였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새로운 주택들이 등장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와 건강한 삶을 위해 아파트를 버리고 전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다 미래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실현하기 위해 생태건축을 실험적으로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 동안 집안에서 이루어졌던 가사활동들이 점점 집 밖에서 이루어지고, 교육 직업 등으로 가족이 분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 주거의 탈주택화 현상 또한 이미 시작된 변화다.

최근 일어난 특기할만한 일은 200710월에 공사를 시작해 2015년 말에 준공한 진주 혁신도시 건설이다.

면적 4,093,000에 계획인구 38천여 명(13,902)으로 계획된 신도시이다.

 

<진주 혁신도시>

 

친환경 미래도시를 목표로 건설된 혁신도시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중소기업진흥공단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주거시설과 함께 들어서있다.

단독주택은 물론 연립주택과 아파트 그리고 주상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친환경을 내세우고 조성된 신도시인 만큼 미래주거발전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난 4월 16일부터 시작한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는 이번 14회로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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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경남의 주택보급율은 121.8%(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 보급율은 2010104.3%)에 이르고 있다.

주택의 절대량은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달리 자가 거주율은 전국기준 197071.7%, 8058.6%, 200054.2%로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간 지속적으로 공급된 주택이 수요를 고루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소유 편중 문제는 계층분리 문제와 함께 양적 공급에만 치우쳐온 잘못된 주택 정책의 결과라 하겠다.

2000년대에 들어서 기존의 도시 밀집지역과 노후 공동주택들에 대한 재개발 재건축 바람도 도시주거지의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하지만 재개발 재건축 사업은 소형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부로 내몬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통합 전 창원시가 시행한 반송동의 재건축 사례가 대표적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아파트는 창원 기계산업단지 노동자들을 위해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대 창원시 건설초기에 지은 소형 아파트였다. 반송주공아파트라고 불렀다.

총 규모 4,560세대에 연면적 54,450평이었다. 세대 당 평균면적 11.9평이었던 셈이고 용적률은 69.7%, 층수는 5층이었다.

단위면적도 작고 사용한 건축자재도 소박했지만 공간의 밀도가 낮아 환경이 나쁜 주거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건축 후에는 14-18층 총 5,316세대에 연면적이 지상만 190,616평으로 변했다. 지하까지 포함하면 239,893평으로 건물 면적이 대폭 늘어났다.

행정에서는 재개발 승인 이유를 주택 공급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지만, 늘어난 세대수는 756세대로 겨우 16.6%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면적은 지상 250%, 지하까지 포함하면 340.6%나 늘어났다. 용적률도 69.7%에서 243.9%로 상승해 공간의 밀도가 대폭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볼 때, 창원 반송주공아파트 재건축사업은 서민들의 생활 편익을 고려해 건설된 도심 소형아파트가 중상류층을 위한 아파트로 변한 것이다.

생활이 편한 도심지역은 부유한 계층이 차지하고 서민들은 점점 도시 외곽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말이다.

<재건축 후의 반송동 아파트 단지>

 

실제로 재건축 직전까지 이곳에서 임대를 얻어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인근 읍면 지역으로 흩어졌다.

개발이익을 염두에 둔 무분별한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도시공간은 물론 사회적 밸런스까지 무너뜨리는 역기능을 한 것인데 경남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창원 반송아파트의 사례는 향후 지속적으로 일어날 재개발 및 재건축사업이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 외에도 도시지역의 아파트 건설은 경관·교통 등 도시 관리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라는 주거형식은 택지가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의 조건에서 쉽게 포기될 수 없는 대안이다.

향후 새로운 대안이 창출되지 않는 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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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라는 애당초 무리한 주택건설정책은 노태우 정권 내내 시행되었다.

비민주적인 권력의 행태가 언제나 그렇듯이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은 일선 행정기관으로 하달되었고 그에 따라 경남도청 및 각 시군의 담당국과에서는 매일 주택건설 독려에 혼신을 다했다.

자연히 각 광역단체에 한 해 지어야할 주택의 량이 할당되었고 그렇게 할당된 양은 각 시군으로 재할당되어 시군 주택건설 목표치가 되었다.

목표달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고밀도아파트가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여러 가지 폐해를 남겼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상처가 바로 시골 논밭 한가운데 서있는 속칭 나 홀로 아파트이다.

 

<논밭 가운데 서있는 속칭 '나홀로 아파트'>

 

2백만 호 건설은 진주지역에도 많은 변화를 남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이다. 진주시사에 기록된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 목표의 첫머리에는 정부의 200만 호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를 공급 충족시키고로 시작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소자본을 갖춘 주택건설업자들도 도시 주거지에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했다.

이들 연립주택들은 주거생활의 편리성과 함께 외부공간과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층의 장점도 있었으나 대부분 소규모 단지로 이루어져 아파트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부유층들은 보다 질 높은 주거환경을 원했기 때문에 소위 빌라(Villa)’라는 이름의 고급 연립주택도 많이 보급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농촌주거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1987년 이후 행정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고 농민의 경제력 축적에 의해 자유 의지로 지어진 밀양·양산·울산지역의 농가주택을 연구한 자료(박경옥·유목희, 주민 자유의사에 의해 최근 신축된 농가주택의 건축적 특성 및 생활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이 농가주택들은 평균 145평의 비교적 넓은 대지에 앉아 있었다.

 

<평슬라브 지붕에 붉은 벽돌로 마감한 농촌주택>

 

대부분 남향으로 배치된 단층 평슬라브 지붕에 외벽을 붉은 벽돌로 마감한 주택들이었다. 평지붕에는 이전 주택에서 볼 수 없었던 옥상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건조대·장독대·농기구 보관 장소로 이용하였다.

모든 가구에 냉장고를 들였으며 80% 이상이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가구가 입식부엌이었고 그중 55% 이상의 가구가 식탁에서 입식생활을 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취사열원은 전 가구 LPG가스를 이용하였고 난방열원은 기름보일러가 정착되어 취사와 난방 열원이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내 화장실은 세정의 기능과 함께 물을 쓰는 다용도실의 개념이 혼합된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부에 배치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부터는 소규모 공동주택으로 볼 수 있는 다세대주택 및 다가구주택이 많이 지어졌으며 사무실에 간단한 주거시설을 갖춘 오피스텔도 나타났다.

최근에는 주거용 건물과 상업용 건물의 혼합 형태인 주상복합건물이 공급되었다. 경남에서는 창원의 시티세븐이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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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