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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7 00:00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는 내가 제시한 구르나 마을의 전경 사진을 보자 자신이 그 마을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는 Hassan Fathy Culture Place라는 입간판이 초라하게 서있었지만 그 앞을 지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회교사원 앞에 이르자 관리자로 보이는 한 사내가 나왔다. 키가 컸으며 순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이 건물을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선뜻 앞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동안 흠모 했던 대 건축가의 작품을 직접 보고 만진다는 것은 건축을 하는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복함이다.

나는 하싼 화티가 빚은 흙을 어루만지면서 그가 쏟아낸 거친 호흡과 땀방울을 느끼기도 하고 미리 준비한 도면과 사진을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포만감 가득한 건축체험에 빠져들었다. 감동의 시간이었다.

 

회교사원

회교사원에는 정면인 남쪽과 우측인 동쪽에 각각 출입구가 있다. 신자는 두 입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몸이 깨끗한 사람은 남쪽의 정문을 이용하지만 몸을 닦아야 될 사람은 곧 바로 목욕탕으로 통할 수 있는 동쪽입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곳에는 두 줄의 샤워가 있는 샤워장과 머리나 팔 그리고 다리만을 씻을 수 있는 작은 홀도 있다.

이런 모든 시설은 하싼 화티가 몸을 씻기에 가장 편리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 번 시험해 본 뒤 설치했다고 한다.

나는 외부 계단 밑에 뚫린 아치형의 정문을 통과해서 화단이 있는 작은 정원을 거쳐 다시 사원의 본 정원인 중정으로 들어갔다.

작은 정원의 왼쪽에는 양쪽 벽에 고정식 의자를 설치하여 교실로 이용하였던 긴 방이 있었다.

중정 오른쪽 편의 예배공간에는 왼쪽과 오른쪽에 회랑을 받치고 있는 사각형의 기둥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회랑 위에는 둥근 지붕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네 개의 삼각면 창을 통해 뜨거운 햇빛이 정제되어 충만함과 허()함을 미묘하게 배합시키고 있었다.

기도를 하는 동안 신자들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는 천창이다. 모든 것은 책에서 읽었던 그대로였다.

하싼 화티는 "명상과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고요하고 담백한 모습의 건물을 세우기 위해 빛이 벽 위에 어떻게 비치고 분산되는가를 알아야 했다"고 말했다.

"건축의 전통이 있는 모든 곳에서 주민들이 성스러운 것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지방의 종교적인 건축에서 재발견될 수 있고 따라서 그 건축을 보존하고 형태와 특징을 존중하는 것이 좋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이 회교사원의 첨탑에 이르는 계단을 급경사로 곧게 뻗게 만들고, 사원 위로 높은 설교단처럼 서 있는 외부 계단을 만든 것은 이집트 고원지대의 건축전통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 계단을 통해 건물 전면의 첨탑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이 건물의 지붕을 내려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가 그토록 집착했던 홍예틀 없이 세운 아치와 돔이 아름다운 원형을 간직한 채 뜨거운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첨탑은 구르나 마을에서 가장 높았기 때문에 마을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하싼 화티가 세웠던 당시의 건물들은 이미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상점과 극장, 그리고 한 채의 주택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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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00:00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들 서양식 건축은 이집트에서 흔한 흙 대신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싼 건축비를 감당 할 수 없었고, 서양식 공사를 할 수 있는 숙련공도 모자랐다.

콘크리트 건물은 단열성이 낮아 이집트의 기후조건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쪽으로만 몰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싼 화티가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전장을 냈다.

그는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과 나무, 갈대 등을 사용하여 직접 하나의 마을을 건설하고 세계와 이집트인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특히 이집트 시골에서 흔히 쓰이던 전통적인 건축 자재로 아름다운 아치형과 돔형의 건물들을 지어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이슬람 건축의 예술미를 품위있게 표현하여 서양 건축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구르나 마을의 흙 건축들>

 

그가 실험하고 검증했던 진흙 건축술은 현재 아랍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하지만 하싼 화티의 진흙 벽돌구조로 이루어진 전통적 양식의 개량 집단주택 건설은 성공하였으나 그에 대응할 주택 정책과 주민 계몽에 있어서는 실패하였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근대화란 전통적인 것을 버리고 서양식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하싼 화티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대 이집트 양식과 전통의 부활은 신() 구르나 마을에 사는 농민들이 살고 싶던 곳이 아니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이집트 시골사람들에게는 도시의 콘크리트 집이 부()의 상징이 되어 머리 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하싼 화티의 실용적 이론과 철학을 인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콘크리트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과 전통 진흙 벽돌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은 열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건축 비용이 비싼데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비실용적인 콘크리트 집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막연한 선망은 이집트의 주택 문제를 더욱 어렵게 했다.

또한 정부와의 관계가 항상 소원했던 하싼 파티는 언제나 정부로부터 외면당했다.

이집트 정부는 구르나 마을에 사는 지역 주민들에게 진흙집이나 건물은 가난의 상징이라고 매도하며, 낡은 집들을 보수하기는커녕 도리어 집을 뜯어내고 콘크리트 집으로 대체할 것을 은근히 장려하기도 했다.

오늘날 구르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의 팽창에 따른 수요와 공급을 이유로 모든 하싼 파티의 작업을 거의 무너뜨리고, 대신 비싼 콘크리트와 빨간 색 벽돌, 평평한 직선형의 지붕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주민들을 설득하고 계몽하여 정부의 무책임한 정책으로부터 구르나 마을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전 아랍 세계에 하싼 파티의 정신과 건축술을 소개하면서 서구화가 가져다 준 병폐인 전통의 말살을 전통의 계승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건축가 하싼 화티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구르나 마을의 건립에 관계하면서부터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도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건설에 관한 내용이 소개된 책 이집트 구르나 마을의 이야기이다. '말하는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고 정기용이 번역하여 1988년 초판 발행된 이 책은 열화당에서 출간하였다.

 

나는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면서 알게 된 하싼 화티의 건축가로서의 삶은 젊은 건축가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였다.

평범한 건축가에게 던진 이 위대한 건축가의 질타는 이른바 문화 충돌로 다가왔으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나는 이미 그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이후 강단에서 수없이 그의 삶을 소개하였고 종강 때는 언제나 이 책을 필독서로 권했으며 그를 주제로 어설픈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집트 여행을 위해 출발할 때만 하더라도 내가 구르나 마을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은 생각조차하지 않았다. 나의 머리 속에는 카이로와 나일강, 그리고 룩소르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여행 중 우연히 이스탄불 탁심거리의 한 서점에서 하싼 화티의 작품집 An architecture for people를 구입하면서부터 혹시 이집트에 가면 구르나 마을을 볼 수 있을까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막연한 기대가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하싼 화티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던 나에게 있어서 의미 있었다라는 투의 상투적인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놀라움이었다.

기적처럼 일어난 이집트에서의 구르나 마을 답사는 내 인생 최고의 우연이자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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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00:00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러본 그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집트 룩소 지방의 구르나 마을을 건축한 하싼 화티는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인 흙 건축가이다.

그는 자본과 관료와 기술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라 민중 자신의 토착적인 지혜와 창조성이 삶과 문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건축가이다.

하싼 화티는 1900323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층의 아들로 태어나 18세가 되던 해에 가족을 따라 카이로로 이사했다.

하싼 화티를 연구한 이성아의 논문 하싼 화티의 건축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그는 공업 고등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였으며 1926년에는 지금의 카이로 대학(University of Cairo)의 전신인 킹 후아드 대학(University of King Fuad)을 졸업했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영국에서 건축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처음 4년 동안 카이로의 건축 민원 부서에서 일하다가 1930년부터 1946년까지 카이로 대학의 교수로서 재직하였는데 건축과의 학과장으로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한 이집트 농촌 사람들을 위해 저렴하고 실용적인 집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아프리카와 이슬람 역사에 길이 남는 건축가이다.

이집트 제3왕조 시대의 사제이자 의사이면서 최초의 건축가로 알려져 있는 임호텝(Imhotep) 이래 이집트 최고의 건축가이다.

하싼 화티는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낙후되고 가난한 이집트 농민의 주택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스스로 나섰다. 그는 이것이 건축가로서 충분한 가치를 갖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흙이라고 하는 토착적 자연환경과 조상 대대로 이어온 건축기술 전통을 이용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다.

1937년에 처음으로 남부 이집트의 주택에 진흙 벽돌을 사용한 디자인을 선보인 하싼 화티는 1945년 구르나 마을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그는 언제나 소외 받는 이집트 사람들의 건축에 관심울 가졌다.

이런 관심은 그의 저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 건축』(Architecture for the Poor - 1973년 출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그가 구르나 마을에서 경험한 건축과정을 바탕으로 썼다. 진흙 벽돌의 사용과 전통적인 이집트 건축 기법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으며, 이 책으로 그의 작업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

1984년에 국제 건축가 협회에서 금메달(the Gold Medal of the Union of International Architects)을 받기도 한 하싼 화티는 1989년 카이로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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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00:0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끊일 새 없던 사천 평원은 천혜의 조건을 가진 땅이 될 수 있었다.

중국민족에게 극심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곳은 안온하게 민족을 보호하고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과장됨이 없이 이곳은 영원히 중국 민족에게 생명의 물을 대어 주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갈량과 유비의 지략이 꽃필 수 있었고 이백과 두보의 시문이 존재할 수 있었다.

가깝게는 이곳으로 인해 중국이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안정된 후방을 지닐 수 있었다.

<옥루산 사면에서 본 도강언 전경 / 사진의 오른 쪽이 상류 방향이며 아래쪽이 내강, 위쪽이 외강이다. 중앙의 긴 섬이 금강제인데 오른쪽 시작 부분의 어취와 왼쪽 말단부의 비사언이 뚜렷이 보인다>

 

이곳의 물줄기는 만리장성같이 화려하지 않지만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살며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끝없이 이어진다. 따라서 그 길이로 보면 결코 만리장성보다 짧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진다.

만리장성의 문명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조소(彫塑)라고 한다면, 이곳 도강언의 문명은 살아 숨쉬는 생활 그 자체이다.

만리장성은 마치 오래된 자격증을 내걸고 사람들의 수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 도강언은 구석 한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마치 전혀 빛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저 무엇인가를 베풀뿐이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물리적 원리를 응용하여 완벽한 수리시설을 만든 공학적 능력, 자연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강인한 도전정신, 목민관으로서의 신념.

도강언을 떠난 뒤 한참까지 이빙은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새벽녘, 불모의 땅을 바라보며 한숨 토하는 이빙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느덧 그는 내게 큰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내 딴에는 눈 넓힌다고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어떤 건축물 어떤 구조물에서도 이처럼 가슴 뛰는 경이로움을 맛보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인간에게 이만한 찬사를 보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짧았지만 긴 여행이었다.

누가 내게 한 인간의 열정이 역사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도강언에 올라 이빙을 바라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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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00:0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또한 경내에는 이 수리시설에 공을 세운 이빙에서부터 삼국시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언졸(堰卒)을 두었던 제갈량을 비롯하여 근대의 인물, 예컨대 청 말에 10여 년간 사천 총독으로 재직하였던 정보정(丁寶楨, 1820-1886)의 동상까지 죽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도강언은 단지 수리시설로서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역사가 압축된 현장이었다.

한 공간 속에 자연과 역사와 과학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도강언은 중화민족문화의 깊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진리를 사실로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수리시설은 22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천백성의 풍부한 농작물 생산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강언 때문에 얻은 사천성 민초들의 물질적 이익은 말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 사천성을 이른바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만든 것이다.

이빙이 관운장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추앙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대미문의 대 수리시설을 설계 시공한 이빙은 누구인가?

<1970년대에 출토된 이빙의 석상 / 큰 업적을 남긴 데 반해 정보가 많지 않은 이빙. 석상은 높이가 2.9미터이며, 양 소매 자락과 그 중간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 중간에는 故蜀郡李府君諱冰이라고 새겼다. 지금부터180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관한 어떤 자료도 남긴 바 없다. 단지 견고한 제방만 남겨두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을 추측케 할 뿐이다.

2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위대한 수리시설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지만 정작 이를 만든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이 촉()을 멸하여 이곳에 촉군(蜀郡)을 설치한지 60년 되던 해, 곧 기원전 256년 그가 촉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천문지리에 능하였고 실지 고찰을 중시하였다는 사실과 수맥에도 밝아 염정을 파서 촉군의 소금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보병구를 지나 세차게 흐르는 내강 / 복룡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하류 쪽에 지붕이 있는 남교가 보인다. 보병구 부근의 수로 최소 폭은 약 17미터 정도이다. 경치가 좋은데다 시원하기까지 해서 지친 몸을 쉬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도강언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이 위대한 시설 앞에서 한번쯤 물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언제 태어났으며, 촉나라 사람인지, 진나라 사람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저강(氐羌)족인지.

그에게 아들이 있어, 그 부자(父子) 2대가 40여년에 걸쳐 도강언을 완성하였다고도 한다. 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당 이왕묘(二王廟)도 도강언 경역 안에 당당하게 서 있다.

하지만 이규태 선생은 이빙을 신에게 외동딸을 바친 토로이 전쟁의 아가멤논과 구약성서의 에프타에 비교하였다.

이빙의 두 딸이 두 사나이로 둔갑하여 홍수를 몰고 오는 독룡을 퇴치한 후 상습수해의 황무지 수 천리를 옥토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들 이야기는 설화라는 뜻이다. 이 말을 뒷받침하듯 우리를 안내해준 이도 사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며 아들을 만들어 준 것은 후대 사람들이라고 했다.

신뢰할만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하거서와 동진 시대의 사천지방지 『화양국지』에 남아 있지만 일반적인 내용의 단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강심의 어취 앞에 서면, 2천여 년 전에 죽은 그가 여전히 살아 물의 흐름을 지휘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너는 이쪽으로, 자네는 저쪽으로”.

역사 속 누구도 이처럼 장수한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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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00:0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을 이루고 있다.

어취(魚嘴)란 말그대로 물고기의 주둥이를 뜻하는데, 아래 사진처럼 민강을 두 줄기로 가르는 분수제(分水堤)의 역할을 한다.

<도강언 3대 시설 중의 하나인 어취 / 이곳까지 흘러온 민강은 어취에서 내강과 외강으로 갈라진다. 왼쪽이 외강, 오른쪽이 내강이다. 예전에 이 어취는 죽롱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외부가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그림에서 보듯이 물고기 주둥이처럼 툭 틔어 나와 있는데 이 제방에 의해 민강이 본류로 흐르는 외강(外江)과 인공수로인 내강(內江)으로 나누어진다.

어취는 죽롱법(竹籠法)이라는 공법으로 시공되었다. 아래 사진처럼 대나무를 이용하여 죽롱을 만들고 그 속에 하천에 있는 돌을 넣은 다음, 이것들을 쌓아 물을 막는 방식이다.

<죽롱 /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끈으로 엮어진 죽롱 안에 하천변의 둥근 자갈들이 채워져 있다. 죽롱 한 개의 크기는 길이 10m, 직경 0.57m 정도이다. 채워진 자갈들의 형태가 알과 비슷하게 생겼다하여 난석(卵石)으로 불린다.>

 

 

 죽롱법과 함께 거친 강물을 막는 물막이공법으로, 마사법(榪槎法)이 고안되었다.

등변의 삼각시렁과 나무기둥을 엮어 세우고 죽롱으로 눌러 고정시켰으며 물이 흘러오는 방향에는 대발과 풀로 만든 자리를 세워 붙인 후 그 위에 점토를 두껍게 발랐다. 아래 그림처럼.

<마사법에 의한 물막이 둑의 형태 / 삼각 시렁들을 토대로 대발, 나무, 점토 등을 재료로 하여 조성된 물막이 둑의 모습이 잘 관찰된다>

<마사법에 의한 물막이 둑의 형태 / 삼각 시렁들을 토대로 대발, 나무, 점토 등을 재료로 하여 조성된 물막이 둑의 모습이 잘 관찰된다>

<이빙이 마사법으로 물을 막았다가 최초로 방수(放水)한 장면을 청명절 축제 때 재현하기 위해 도강언 경내 한쪽에서 일꾼들이 삼각시렁을 손보고 있다.>

<매년 청명절에 행하는 방수축제 / 도강언을 완성한 뒤 내강으로 물을 처음 흘러 보냈던 방수(放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지역 사람들은 매년 청명절에 방수의식을 거행한다. 물을 막았던 나무 둑을 터뜨리고 있는 장면이다. 물위에 떠 있는 돼지에서 우리는 이 의식의 종교성을 볼 수 있다>

 한편 비사언은 내강으로 들어온 수량과 토사를 조절하는 제방이다. 곧 내강 쪽으로 흘러온 물이 넘칠 경우 이 제방을 통해 다시 민강 본류로 흘러가도록 하는 자동 수량조절 장치인 동시에 상류로부터 내려온 흙과 모래를 내보내는 토사배출구이기도 하다.

보병구(아래 사진)는 인공수구인데, 북쪽 옥루산(玉壘山) 하부 사면의 암층을 인공으로 절단하여 만든 취수구이다.

<보병구와 이퇴 / 왼쪽의 산자락을 가로질러 물이 흐르는 곳이 보병구이다. 보병구 우측 언덕 위의 건물이 복룡관이며 그 아래쪽에 이퇴가 있다. 오른쪽이 비사언이다>

 

당시 옥루산의 형세가 민강이 동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동부지역의 넓은 들을 관개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뚫어야만 했다.

이빙은 암반에 고열을 가한 후 그 위에 냉수를 끼얹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암층이 갈라지게 했다. 그 후 다시 망치와 끌로 암층을 깨고, 쇠가래를 이용하여 긁어내었다.

지질의 풍화작용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을 해냈다. 이 작업은 도강언 공사의 절정이었다.

보병구(寶甁口)는 대략 폭 20m, 높이 40m, 길이 80m의 규모인데 형태가 꽃병의 목 부분과 같아 붙인 말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물은 인공 수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도강언시를 향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보병구와 비사언 사이에는 이른바 이퇴(離堆)라는 유수시설이 개착되어 있었다.

이곳은 물이 보병구로 들어가기 전 잠시 동안 머물게 고안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퇴는 퇴적물을 쌓이게 한 다음 그것이 비사언으로 넘어가도록 만든 인공유수지라고 할 수 있다.

 놀라웠던 것은 이퇴의 형상이었다.

유수에 부딪히도록 개착된 벽이 물의 방향과 직각이 아니라 凹凸형태의 곡면이 되도록 하여 유수에너지를 최소화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이 취수와 배수, 토사배출 등 도강언에 적용된 일련의 수리기술에는 강물의 곡류현상과 침식, 운반, 퇴적의 원리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앞서 말한 어취에서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진 강물은 네 갈래 여덟 갈래 식으로 총 5백여 갈래의 인공 강으로 변했다.

물은 성도 대평원을 옥토로 관개하였으며 내륙수운용으로도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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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00:0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유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지만 중국만큼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다. 기기형형한 자연은 물론이고 추측하기 조차 힘든 거석과 미금의 조형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천하제일이라는 만리장성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병마용도, 도강언처럼 가슴 요동치는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글을 포스팅하는 까닭도 그 때 요동쳤던 감동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마땅히 수리시설은 건축과 구분되지만 그것이 공익을 위한 구조물이란 점에서 공유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백성의 복리를 위해 도강언에 생을 바친 이빙(李冰)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우리와 우리 다음의 누구라도 도강언을 건설한 목민관 같은 위대한 천재 기술자나 목민관이 이 나라에 탄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미 도강언의 위대함을 아는 분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도강언 전경 / 어취에서 물이 나누어지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오른쪽으로 흐르는 것이 외강, 왼쪽이 내강이다. 멀리 도강언 시가 보인다.>

 

근대의 힘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위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대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수백 년 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황무지였던 성도평원을 일거에 옥토로 만든 이 수리시설은 진()나라의 지방 관료에 불과했던 촉군 태수 이빙(李冰)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강언은 사천성 서북 고산지에서 발원하여 양자강 상류로 흐르는 민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한 수리시설이다.

사천을 일러 흔히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부르지만 도강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도강언 기본 개념도 / 위로부터 흘러온 민강은 어취를 지나면서 내강과 외강으로 갈라진다. 내강을 통해 흘러온 물 중에서 넘치는 양과 퇴적물은 비사언을 통해 다시 외강으로 가고, 일정한 양의 깨끗한 물이 보병구를 통해 내강으로 흘러간다. 좁은 수로를 통과한 강물은 다시 시내에서 부챗살처럼 갈라져 비옥한 성도 평원을 만든다.>

 

사천지방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산지대에서 시작되는 민강은 심산협곡을 지나면서 점차 수량이 증가해 사천의 성도분지에 이르러서는 물결이 세지면서 강의 규모도 커진다.

포악해진 강물은 낮고 약한 제방을 무너뜨렸고 범람한 물은 성도 평원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었다. 상류로부터 내려 온 흙과 모래가 강 곬을 높인 탓에 강물이 제방을 넘었던 것이다.

아직 미개했던 백성들은, 민강에 탐욕스럽고 독한 용이 있어서 수마가 생긴다고 믿었다.

하여 독룡의 마음을 풀기 위해 매년 몸에 상처 나지 않은 깨끗한 처녀 둘을 산채로 물속에 떠밀어 희생시켰다. 사천 백성들에게 민강의 홍수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었다.

천형(天刑)처럼 피할 수 없던 자연의 섭리, 그 숙명 앞에, 민강의 물길을 조절하여 수해를 막아 성도평원을 옥토로 만들겠다고 태수 이빙(李冰)이 나섰다.

이것이 역사적인 도강언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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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30 00:00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난 곳은 창원 상남동의 한 식당이었습니다. 노동운동가였던 박성철과 여영국 도의원이 함께 했고 그날 먹은 음식은 갈비탕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의원님이라 불렀고 그는 저를 이사장님이라 불렀습니다. YMCA 이사장을 했던 제 경력 때문입니다.

출마를 앞두고 지역민들 얼굴을 익히는 자리여서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다. 저와 그가 다 잘 아는 노동운동가 황주석 최순영 부부를 이야기한 것이 기억납니다.

출마하려 창원까지 내려온 게 미안했던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으로는 거침이 없지만 사적으로는 과묵한 분이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 만남의 기억은 뚜렷합니다. 총선 직전인 그해 3월 말 경이었습니다.

선거운동본부 요청으로 만들어진 도시문제 지역현안 공부 자리였습니다.

갑자기 창원에 내려온 그에게 지역 사정을 자세히 알게 하고 TV토론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는 선거 사무실 안쪽의 후보사무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학습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다른 분들은 자리를 물리고 저와 노 의원 단 둘이 앉았습니다.

노 의원의 학습태도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약간 어색했지만 워낙 진지하게 제 설명을 듣는 노 의원의 자세 때문에 곧 공부 분위기가 잡혔습니다.

경기고 출신답게 노 의원의 집중도와 이해력은 탁월했습니다.

제 설명 사이사이 그의 질문이 섞이면서 알차게 진행된 공부였습니다. 한 시간 반쯤 걸렸던, 오래 기억될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만 노회찬 의원이 유독 관심을 가진 부분은 두 가지로 기억됩니다.

하나는 창원의 환경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사례로 꺼낸 슈투트가르트 바람길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듣는다면서 재미있어했고 몇 차례 질문도 던졌습니다.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구 사례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방대한 구상이라 쉽지 않겠다면서 더 늦기 전에 이런 시도가 필요하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구인 창원성산구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노 의원에게 "모든 구민들이 어디에서건 5분 이내에 숲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약이 어떠냐"고 했더니, 노 의원은 고개를 들어 날 빤히 쳐다보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성산구의 지형적 특성을 설명하며 제 생각을 말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공약 같다고 했습니다.

특히 숲길을 걷는 것은 신분이나 경제력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점이 마음에 끌린다고 했습니다.

실제 이 숲길 이야기는 선거 과정에서 노 의원이 구민들에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공부가 끝날 즈음, 이런 일들은 단체장의 손을 빌려야 가능하다는 점에 우리 두 사람 함께 동의했습니다.

언젠가는 창원시장도 바뀌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서로 나누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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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타깝고 그리워서 짧은 추억 글 한편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준 당신은 혼자 홀연히 떠나셨네요.

보고 싶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 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도종환의 시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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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3 00:00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에 실려 고향의 봄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을 때는 마치 꿈인 듯했다. 눈시울을 적신 이도 많았다.

거기다 북미정상회담에 종전협정, 평화협정 같은 말까지 나오니 벅차다 못해 오히려 두렵다. 쏟아지는 억측들만큼 넘어야 할 산도 많겠지만 열린 빗장이니 이대로 쭉 가리라 믿는다.

 

기왕 판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모습을 보자. 북한건축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일본사람 안도 타다오도 알고, 먼 나라 사람 르 코르비제도 알지만 가까운 북한의 건축가는 한 사람도 제대로 모른다.

생전의 설계도구가 조선혁명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건축가 김정희도 모르고, 조선건축사를 저술한 건축사학자 리화선도 모른다. 대학에서 가르쳐 주는 이도 없다.

최일룡이 설계한 평양 빙상관이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 대성당을 닮았다는 모방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89년 준공된 능라도 5.1 경기장이 충격흡수공법으로 그 해 제네바국제발명 신()기술전에서 금상을 받은 사실도 잘 모른다.

부유층이 모여 사는 거리가 화려하고 높아 평해튼(평양+맨해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는 사실도 모르는 이가 많다. 

<평양 대동강변의 미래과학자 거리>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북한의 건축은 통치수단이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북한건축에 대한 지식은 일목요연하다. 높으면 체제선전용, 화려하면 사회주의 우월의식 선전용, 형태가 남다르면 이념선전용 건축으로 구분한다. 우리가 이 정도이니 일반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는 질문할 때가 되었다.

사실이 그런가? 북한에서 이루어진 모든 건축적 성과를 통치수단으로 보는 것은 적절한 평가인가? 건축은 그렇게 서너 가지 개념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인가?

우리 눈에 익은 두 사례만 보자.

우선 평양의 옛 이름을 딴 105층 류경호텔. 디자인이 좀 과해보이는 이 호텔의 연면적은 무려 36이다. 1987년 착공해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이집트의 통신회사 오라스콤(Orascom)이 투자해 6~7년 전에 공사를 마무리시켰. 오라스콤은 5백만 명이 이용한다는 북한의 이동통신업에 진출한 회사다.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늘어선 여명거리는 어떤가? 김일성 부자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에서 용흥 네거리까지 약 3구간에 조성된 거리다. 20164월에 착공되어 1년 만에 완공, 작년 봄에 준공되었다.

착공 때 미제와 그 추종 세력들과의 치열한 대결전이라고 선전까지 한 개발사업이다. 70층짜리 건물을 비롯해 총 44, 4804세대에 달하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주로 학자·연구자 등 인텔리 계층을 위한 주거시설이며 태양열·지열 등 신재생 에너지는 물론 생태녹화기술까지 적용시켰다.

위의 두 사례, 류경호텔은 체제선전용이고 여명거리는 사회주의 우월의식 선전용, 맞는가?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프레임으로 우리의 것도 돌아보아야 한다.

123층 제2롯데월드는 어떤가? 강남의 테헤란로는 또 어떤가? 롯데월드는 아무리 높아도 체제와 상관없는 사기업 건물이고, 테헤란로는 도시발전과정에서 생긴 경제성장의 상징이라 북한 것과는 다른가? 

<류경호텔>

 

향후 남북은 각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건축계에서도 바람이 일 것이다.

남과 북의 진정한 교류는 상대방을 바로 알고 바로 이해할 때 가능해진다. 북한의 도시와 건축을 이데올로기 결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아야 건축이 건축으로 보인다.

'동질성의 공간'이었던 남북이 '분단된 시간' 때문에 '이질화된 건축'으로 양분되었다.

이제는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다. 건축계의 지난 시간을 반추해보면, 부끄럽지만 우리는 민족건축에 대한 어떤 노력도 없었다.

DNA처럼 각인된 이데올로기가 쉽게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민족''이데올로기'를 넘을 것이다.

남한이 '자본주의적 건축'이라면 북한은 '사회주의적 건축'이다.

따라서 우리의 시각으로 혹 납득되지 않는 건축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 즉 북한이라고 하는 지역의 문화로서 북한건축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에서는 북의 건축을 일인독재를 위한 도구로서의 건축이라 하고, 북에서는 남의 건축을 퇴폐적이고 변태적인 자본주의 건축이라는 양쪽의 인식이 변해야 한다.

왜곡되고 혼돈한 프레임을 통해 상대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체제 우위적 논리''동정론'은 건축적 접근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가 우리의 건축을 볼 때처럼 북한건축도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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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되는 주방으로 변했다. 주부의 의지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가 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건설업자의 전략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각종 기기들은 이와 조화를 맞춘 가구와 더불어 빌트인(builtin)시스템 방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방재·교류 등 생활시설들도 획기적으로 변하였으며 모든 시설들이 자동 혹은 원격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하고 있다.

 

<주방기구 생산업체의 빌트인 주방 시스템 광고화면>

 

이처럼 시설이 고급화 첨단화된 아파트는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삶을 점점 아파트 내부로 고립시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는 줄어드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는 가족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아파트는 부모 세대와의 동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마당과 마을이라는 외부공간과 함께 존재했던 옛 단독주택과 달리 노인의 활동반경은 좁아졌고, 생활습관과 생활주기의 차이로 노인은 가족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식이 사는 아파트에 잠깐 들른 부모는 주인 있는 침대 옆 한 쪽 바닥에 몸을 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 성장과 함께 찾아온 실존에 대한 관심이 주거형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절대 빈곤시대에 시작된 양적 욕구가 질적 욕구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일터 보다는 삶터, 일보다는 여가가 소중한 가치임을 알게 하였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새로운 주택들이 등장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와 건강한 삶을 위해 아파트를 버리고 전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다 미래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실현하기 위해 생태건축을 실험적으로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 동안 집안에서 이루어졌던 가사활동들이 점점 집 밖에서 이루어지고, 교육 직업 등으로 가족이 분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 주거의 탈주택화 현상 또한 이미 시작된 변화다.

최근 일어난 특기할만한 일은 200710월에 공사를 시작해 2015년 말에 준공한 진주 혁신도시 건설이다.

면적 4,093,000에 계획인구 38천여 명(13,902)으로 계획된 신도시이다.

 

<진주 혁신도시>

 

친환경 미래도시를 목표로 건설된 혁신도시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중소기업진흥공단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주거시설과 함께 들어서있다.

단독주택은 물론 연립주택과 아파트 그리고 주상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친환경을 내세우고 조성된 신도시인 만큼 미래주거발전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난 4월 16일부터 시작한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는 이번 14회로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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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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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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