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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00:00

진해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1908년 행정구역변경 때 진해군이 현재의 진해지역이 포함된 웅천군과 함께 창원부로 통합되면서 ‘진해’라는 지명은 사라졌습니다.

2년 뒤인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면서 이 일대도 마산부에 속했다가 1912년 지금의 진해군항과 배후도시였던 신도시 지역을 ‘마산부 진해면’으로 결정합니다.
4년 동안 이름이 없어졌던 진해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진동 쪽의 지명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되살아 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지명으로 역사에 나타난 '진해'는 1914년 3월에 '창원군 진해면'으로 바뀌었고, 1931년 4월 1일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진해가 독립 시로 승격된 것은 해방 10년 후인 1955년 9월 1일이며, 그때부터 진해는 한국 최고의 군항도시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과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100여 년 간 ‘진해’라는 명칭이 겪은 부침이 참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명칭의 변화와 달리, 일본군부에서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거제군과 웅천군 및 고성군까지를 포함한 넓은 해역 전체를 ‘진해만’이라고 불렀습니다.

빠르게는 1898년 육군대신 가쓰라의 문서와 1903년 해군작전계획서에서도 이 해역을 ‘진해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진해현’ ‘진해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명칭이기도 했지만, 이 해역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시킬 수 있는 해군근거지라는 뜻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는 우리 선조들이 만든 명칭이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진해’는 일본군부가 지은 것이어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지명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일본인 죽국우강(竹國友康)의 저서 『ある日韓歷史の旅』에서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 해방 후에 실은 진해라는 이름은 바꾸어야 되는 것이었으나.......”라며 진해라는 지명 사용에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명한 도시사학자 손정목 교수도 황정덕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진해라는 지명은 해방 후 바뀌었어야 했다’ 고 합니다.

일견 수긍되는 측면도 있지만, '진해'라는 지명이 지금의 진해와 멀지 않은 진동지역에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진해시민으로 살고 싶다”면서 통합창원시에서 진해가 분리되기를 원하는 주장도 나왔는데, 생명체처럼 변하는 것이 도시니 미래에 진해는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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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2.01.25 10: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와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진해현이 부활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진해를 창원시에서 분리하자는 이야기는 이름에 기인하기보다는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위를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규모의 효율성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주민들이 참여하고 스스로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가꾸어 가는 자치제도의 정착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진해사는 사람도 잘 모르던 진해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허정도 2012.01.25 11: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설령 일본의 뜻대로 진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도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에서 따온 것은 분명합니다.

  3. 노상완 2012.01.25 13: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동면사무소 옆에는 조선시대의 진해현청이 아직 남아있는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를 다스린다는 의미의 진해... 욕심낼만한 이름이군요......

    • 허정도 2012.01.25 17:12 신고 address edit & del

      해군기지가 있는 도시 명칭으로는 최고의 이름이 진해입니다. '바다를 진압하다' 대단한 이름 아닙니까?

  4. 실비단안개 2012.01.25 21: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진해시민 -

    • 허정도 2012.01.25 22:28 신고 address edit & del

      진해시민 '실비단안개'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올 한해 좋은 글 많이 쓰시고 몸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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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 [감춰진 도시이야기]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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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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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00:00

아! 경화동,,,


100여년 전, 일본군부에 의해 강제로 조성된 진해신도시는 식민지 시대 여느 도시처럼 기존 시가지에 일본인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해안·비옥한 농토와 함께 평화롭게 살던 마을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뒤에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국인들의 신도시 ‘경화동’이라는 음지가 있었습니다.

진해 현지조사단이 해군대신 재등실(齋藤實) 앞으로 보낸 ‘진해군항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라는 서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수부·공창·수뢰단·화약고·대포발사장·병원·연병장·관사·시가·정차장·묘지·학교 등 제반시설의 위치와 규모를 결정하고 그 이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보고서 끝에 「실지조사를 바탕으로 각 조사원의 소견이 일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라며 6개 항을 붙여 놓았는데 그 4번째에 ‘한국인 처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용은 「한국인을 일본인과 함께 살게 하는 것은 위생 등의 문제로 불가하다, 격리하는 것이 맞다, 격리시킬 위치는 신시가지 동쪽에 있는 덕산방면이 좋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덕산방면’은 최종결정 때 신도시와 덕산 사이의 중간지점(속칭 한일거리)으로 바뀌었습니다.
시가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에 조선인 거주지를 만들면 신도시조성과정에 필요한 노동력공급이 불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책에 의해 일제는 1907년 3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마을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값싼 지대에 불만을 품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땅값지불은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진해에 일본군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진해주민들의 저항이 많았습니다.
도만이 개(도만포) 부근에서 측량하던 일본해군을 쫓아내기도 하고(1905. 5), 토지보상비를 거부하기도 하고(1906. 10), 한국인 소유의 산림을 집어 먹으려는 마산부윤 아들의 횡포를 돌리(석동)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기도 했습니다(1910).
하지만 힘 없는 주민들이 일본군부의 강제력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390여 호 2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일구고 살았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일본군들이 이미 준비해둔 신도시 동쪽 약 2.5키로 지점의 ‘한일거리’라고 불렀던 벌판에 강제로 집단이주 당했고, 이들에게는 가구당 45평 정도로 구획된 택지를 받았습니다.
격리당한 한국인들의 땅 한일거리는 이후에 ‘경화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역이 되었습니다.

경화동에는 약 4m내외의 좁은 도로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었고, 아래 그림처럼 길 중간 중간에 소방 목적의 7개 공터가 주어졌습니다.

이 공터는 후에 일본의 군사시설(비행장) 때문에 열지 못하게 된 풍호동 ‘풍덕개장’이 옮겨와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 장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7개의 공터는 각각 장터로서의 기능이 달랐는데 ①은 나무전, ② 8일 싸전, ③ 3일 일용잡화, ④ 8일 일용잡화, ⑤ 3일 고기전, ⑥ 3일 싸전, ⑦ 8일 고기전이 열렸습니다.
이런 전통으로 경화동에는 지금도 5일장이 열리며 상설재래시장도 열리고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1945년에 경화동을 찍은 항공사진과 현재 위성사진입니다.

식민지 도시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생활공간이 격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해의 경우처럼 기존마을 주민들을 내쫓아 격리시킨 후 그곳에 지배자만의 도시를 건설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화동’은 비극적인 공간입니다.

격리명분이 위생문제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치안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화하는 일본의「내선별학(內鮮別學)」통치원리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군사기밀이 필요한 군항도시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강제력으로 건설한 진해신도시는 ‘빼앗은 자의 도시’였습니다.
경화동은 쫓겨나간 한국인들의 격리구역, 즉 ‘빼앗긴 자의 도시’였습니다.
마치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한 뒤 원주민들을 격리시킨 ‘인디언보호구역’과 같았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일제가 경화동의 위치를 신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즉 ‘자신들을 위해 일하러 오기에 적절한 거리’에 둠으로써 지배자로서의 도시공간배치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비극의 땅, 진해 경화동.
국운이 꺼져가던 이 나라의 처참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든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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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11.10.26 01:1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고모가 경화동에 지금도 살고 계시죠.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슬픈 동네 경화동..

2011.09.28 00:00

누가 이 나무를 모르시나요?

<진해 중원로터리 팽나무>

일제에 의해 계획된 진해 신도시의 한복판 중원로터리에는 늙은 팽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무입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해군은 이 나무 아래서 행사도 많이 했습니다.(1930년대 사진)


1950년대 중반에 제 수명을 다해 고사(枯死)했는데 당시 수령이 1,200여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팽나무는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를 지켜본 진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만합니다.

이 늙은 노거수(老巨樹)는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1899년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 및 부근」이라는 지도에 의하면 당시 웅천군 웅중·웅서 양면이 자리 잡은 진해신도시지역은 넓은 평야였습니다.
북쪽은 장복산이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야트막한 산과 오목조목한 해안을 낀 살기 좋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중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9개 마을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는데, 이들 2천 여명을 벼락같이 내쫓고 만든 것이 진해신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팽나무는 쫓겨난 마을주민들과 달리, 진해 신도시의 중심에 살아 남아 신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까지 했습니다.

중평마을에서의 팽나무 위상을 확인해보기 위해 팽나무의 위치와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진 9개 마을의 위치를 추정해보았습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7월에 일본식 동리명칭을 우리 식으로 다시 고치는 작업이 있었고, 1955년 8월 진해읍이 ‘진해시’로 격상될 때 다시 동명조정이 있었습니다.
이때 위 9개 마을의 명칭이 대부분 되살아났습니다.
현동·도만·도천·중평(이상 중앙동)·안곡·속천(이상 태평동)이 법정동으로 되었고, 여명리(余明里)의 ‘余’자와 통자되는 ‘餘’를 취하고 좌천리(左川里)의 ‘左’와 자음이 같은 ‘佐’를 취해서 여좌동(餘佐洞)이 되었습니다.

이 동(洞)들의 명칭을 정할 때 옛 마을 위치에 맞추어 결정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살펴보았더니, 창원대 민긍기 교수는 옛위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하지만 진해·웅천향토연구회 황정덕 회장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군사지역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현재 동의 위치는 옛날 리(里)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2011년 8월 8일, 황정덕 회장에게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황정덕 회장이 쓴 『우리고장문화유적길잡이』에 실린 ‘옛 중평마을 일대 추상도’에도 도만리·도천리·여명리는 현재 도만동·도천동·여좌동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옛 이름을 가진 현재의 동과 팽나무를 함께 앉혀본 도면입니다.
황정덕 회장의 견해가 맞다고 볼 때,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중평들판 중앙에 두고 각 마을들이 둘러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거당한 마을주민들은 물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중평들판에 있어서 팽나무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진해라는 일본인도시 한복판에 오랜 세월동안 9개마을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팽나무가 있었던 겁니다.

뿐만아니라 이 나무 주변에 일본제국을 과시하는 시설들도 들어섰습니다.
러일전쟁기념탑과 진해신사를 비롯하여 진해역·진해우체국·진해면사무소 등이 그것들입니다.

신도시가 완성되고 정착된 1920년경의 도시전경인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도시중심에 앉은 중원광장 팽나무(화살표 방향)는 크기가 대략 폭 30m 높이15m 정도로 짐작되는 도시의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엽서 4장을 연결해 만든 겁니다.
대정10년(1921년) 9월 3일자로 소인된 엽서라 1920년경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보시죠.

 


일본해군은 이 팽나무를 중원로터리 중심에 두면서 방사상(放射狀) 신도시 디자인의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추정해 보면,
진해신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사전현장조사과정에서 팽나무의 크기·모양·위치·앉은 높이를 비롯하여 나무에 얽힌 역사와 주민들과의 관계까지 충분히 조사 분석하였을 겁니다. 
그런 후, 팽나무가 앉은 위치에 맞추어 중원로터리를 배치한 후 북원광장, 남원광장과 크고 작은 도로들은 그에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설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해신도시계획의 전체 틀은 바로 이 팽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 오래된 팽나무를 신도시계획의 모티브로 삼았을까요?

강제로 철거당한 마을의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신도시의 중심기점으로 삼은 것은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당산나무단순히 나무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어 신목(神木)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산수를 베거나 해를 입히면 큰 재앙을 입게 되며 천재지변으로 나무가 죽거나 쓰러져도 마을 전체가 큰 화를 입는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산나무는 마을주민들의 대소사를 치렀던 행사장으로, 때로는 지친 심신을 품어주는 휴식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런 나무를 남겨 도시설계의 모티브로 삼은 것을 두고 생태와 경관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고, 벌목에 대한 미신이 작용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급하게 토지를 수용했던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런 이유보다는 군항건설과정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민심을 우려하여 선택한 수습책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내쫓긴 9개마을 주민들의 '고향의 상징' 당산나무마저 베어냈을 때 생길 후환을 고려했다는 뜻입니다.

이 추정은 물리적인 도시구조에 대한 결과론적 담론보다는 식민도시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수탈의 과정에 대한 담론으로 진해신도시를 조명해보자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늙은 팽나무의 위치가 신도시의 상징공간이었던 중원광장 한복판이라는 점은 ‘비록 마을은 없어졌지만 그 역사와 전통은 존중한다’ 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강제토지수탈을 ‘부득이한 조치’ 로 위장하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래된 나무는 신도시건설 이전의 한국전통마을과 신도시건설 이후의 일본인 전용도시를 아우르는 상징이었습니다.

수령 1,200여년을 채워 천수를 다한 나무를 대신해
현재 중원로터리에는 작은 나무들과 조형물이 들어서있습니다.
어차피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
역사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이것들 대신, 잘 생긴 팽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는 것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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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9.28 15: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대단한 글입니다.
    어제저녁 포커스경남 시청 잘 했습니다^^

  2. 대자연어머니 2016.04.04 18: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얼마전 진해를 방문하여 나무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글 마음에 남기고 마지막 말씀 저도 같은 생각이라 말하고싶습니다.

2011.08.31 00:00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는 진해 중원광장

제국주의 일본 군부가 강압적으로 건설한 계획도시진해(구 진해시청 부근, 서부지역)가 탄생한지 100여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인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된 도시이지만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군부가 외부전문가에게 의뢰했지 않았겠느냐' 라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당시 설계된 진해시가지 계획도입니다. 

보는 것처럼 진해는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도시입니다. 북원(北苑)·중원(中苑)·남원(南苑)광장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강점기에는 이 세 광장을 북십(
北辻) 中辻(중십) 南辻(남십)이라 했습니다. 십(辻, 쯔지)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인데 '네거리, 큰길'이라는 뜻입니다.

방사형가로구조로 설계된 도시가 또 있습니다.
진해와 비슷한 시기인 1907년 시작된
함경북도 나남시입니다.
아직 원형광장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았더니 나남시에는 방사형가로구조의 원형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비록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이었지만 진해는 근대기 초에 디자인된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한반도 유일의 도시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도시사적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이 20세기초에 일제가 계획한 나남시의 도시계획도면(재 작도)과 며칠 전 제가 확인해본 '같은지역의 위성사진'입니다. 광장의 흔적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진해 도시설계의 특징을 두고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중원광장에 모이는 8개의 도로, 즉 방사동심원형광장(放射同心圓形廣場)이 일본군의 깃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모방했다는 해석입니다.

일제시기에 건설된 진해도시계획을 설명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며,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알고 있고 그냥 그렇게 전하고 있는 이야깁니다.

최근에 진해도시를 주제로 논문을 한편 쓰다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제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글은 ‘진해중원광장의 욱일승천기 모방설’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아래 사진은 현 진해 탑산 정상에 일본해군이 세운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입니다. 해방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욱일승천기가 탑꼭대기에서 펄럭이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혐오스럽기까지한 깃발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대로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중원광장과 같은 방사동심원형광장은 도시가로망계획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법으로 유럽의 도시가 근세에 들어와서 많이 채택한 형식입니다.

대표적 도시로서는 파리를 들 수 있으며 유럽전원도시에서 이 형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동방에 건설한 중국의 대련과 심양에도 이런 원형광장이 나타나며, 계획도시 뉴델리와 캔버라에도 방사동심원형이 나타납니다.
멀리는 로마시대에서도 이 형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방사동심원형광장의 디자인은 욱일승천기와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형광장을 중심으로 도로를 뚫으면 이 모양 외에 어떤 그림이 나오겠습니까?

굳이 따져보면 욱일승천기는 깃발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선이 16개라 도로가 8개 밖에 안 되는 중원광장과는 차이도 많습니다.
오히려 개선문이 자리잡고 있는 파리의 드골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더 가깝습니다.

각 도시의 원형광장과 욱일승천기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순서는
욱일승천기  / 진해중원광장
파리 드골광장 /  로마의 광장
뉴델리의 광장 / 워싱턴 뒤폰트 광장 입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군부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그 빛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 즉 태양의 한복판 지점에 일본인들이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당산목 팽나무가 강점기 내내 심겨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 진해시가지도에 나타나는 중원광장에도 자세히 보면 이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사진이 중원광장에 심겨져있던 팽나무입니다. 1920년 경 찍은 사진 같습니다.

 

 
중원로터리 디자인이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면, 
한국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신목(神木)이라고까지 부르며 제를 올리기도 했던 당산목 팽나무를 왜 그 한복판에 두었을까요?
설명이 참 어렵습니다.

중원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단순히 도시디자인을 방사동심원형광장형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일제의 악의를 포장해주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그 진실여부를 밝힐 수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이든 사물이든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감정개입 없이 사실(fact)에만 근거해 설명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올리는 글입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되면 ‘아팠던 역사’조차 극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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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종 2011.08.31 20: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좀 찜찜했는데 읽고보니 정리가 되었습니다.

    • 허정도 2011.08.31 23:45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올려보았습니다.

  2. 2011.09.14 11:5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타논 2015.03.27 14: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당산나무를 그대로 둔 이유가.. 혹 없앨 경우 조선인들의 예상되는 반발, 일본이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정신을 배려한다는 위장술의 일종이거나, 또 자신들 스스로를 위한 종교상의 호신책 등으로 일정 시간 그냥 놔둔 것은 아닐까요? 아무 생각없이 당산나무를 그냥 놔두었다고는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치밀한 것으로는 일본인을 못 따라가니 말이죠.

    • 허정도 2015.03.30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당연한 말씀입니다.
      말슴하신대로 '예상되는 반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4. 홍이표 2016.05.25 15: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홍이표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블로그 내용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이 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조금 적을까 합니다. 물론 서양의 도시 계획 모델이 비슷한 게 많으니, 그것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규정돼 있지 않던 천황의 상징인 국화의 잎 수를 1868년 경, 메이지 유신 직후 '16엽'으로 공식 제정합니다. 욱일승천기가 총 16개 빛줄기로 뻗어나가게 설계된 것도, 천황의 상징인 국화 잎 숫자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렇다고 16개의 방사형을 도시계획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 상징을 보완하는 개념이 바로 '핫코우이치우'(八紘一宇) 이념입니다. 천황의 세계가 동서남북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집,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일본제국의 무한팽창 이념입니다. 여기서는 '팔'(八)이 명확히 강조되어 있지요... 진해의 해양기지로서의 상징성은, 도시계획 때에도, '4', '8', '16'으로 이어지는 일본인들의 팽창 욕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운데 당산나무를 가운데에 살려 둔 것은, 그들이 절대자로 모신 '천황'이란 존재도 신도의 오야붕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시신도가 근세에 이르러 '복고신도', '근대에 이르러 '국가신도'(근대천황제)로 변화돼 왔지만, 그 뿌리는 결국, 자연물(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과 정령숭배의 '에니미즘' 등을 기반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오랜 세월 숭배되어 온 자연물에 대한 경외는 '신도'라는 종교 체계 안에서는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건 '조선민족', 혹은 '대한제국의 국가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순간, 곧바로 '국가신도'의 하나의 자산으로서의 '영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 의견이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근현대의 다양한 종교상징과 국가상징, 민족상징의 상호 역학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yipyo.hong.5

    • 허정도 2016.05.27 06:4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홍 선생님의 글을 읽고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이 글을 쓴 까닭은 극일을 위해서는 역사를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고 과대해석을 해도 안된다는 소박한 생각 때문입니다.
      진해중원광장에 여덟 길이 만들어진 까닭을 지금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겠죠?

  5. 숧봉-진용옥 2017.06.08 0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동아시아 유학의 중심사상인 태극론은 음양오행과 4상과 8괘의개념이 있습니다 중국의 4해 동포나 천원지방처럼 네거리에 중앙을 두는 오행 개념이 기봉이며 대체로 4거리 로타리를 두든개념과 유사 합니다 태극기는 8괘에서 4괘만 이용하고 그보다 3태극을 선호했습니다 상세보다 포괄성을 중시하나는 성향으로 보입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상세 분석을 선호하여 일장기에 8괘를 구현한 것이 욱일 승천기이고 8굉 일우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6. 숧봉 진용옥 2017.06.08 00: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의 발생은 환웅 한를에서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여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아라고[광장]가 원형으로 보입니다 마차와 자동차가 다니면서 도로가 나타나고 교차로가 나타나며 로나리가 생기는 으로 볼수 있고요. 서양에서 먼저 로타리 구조가 생긴다 해서 일본을 모방했다가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도로 진화과정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며 다만 선호하는 성향에 따라 4괘 로타리 또는 5행 로타리를 구성되며 8괘 로타리로 세분화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진해 한들[중평] 노타리는 지형 구조로 보아 자연스레 8괘 로타리로 조성되고 이는 일본인의 의식 구조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도 별도 거부감이 없는 로나리 구조였다고 보여 집니다
    제나가 도천초등하교에 다닐때 충무로가 욱일승천기의 깃대이며 북원로타리[이순진장군 동상] 는 깃대의 봉으루라 했습니다 그럴싸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음모론적 시각이 강한 것 같으며 욱일 승천기를 가상하여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근거를 찾기가 힘든다고 생각합니다 허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좁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2010.09.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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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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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2 00:00

건축가 정기용과 '진해 기적의 도서관'

한가위 즐겁게 보내십시오! ^^

며칠 전, 어린이전용도서관인 '진해 기적의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MBC '느낌표'가 탄생시킨 '기적의 도서관'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시민단체에서 주관한 도시문제토론회 당일, 진해도시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건물도 훌륭했지만 건물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 작은 도서관이 사용되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도서관 내부에 흐르는 짙은 사람냄새에 놀랐습니다.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과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낡은 흑백사진처럼 기억에만 남아 있는 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적의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와 TV  앞에만 앉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내 기우가 편견이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기뻤습니다.
진해의 한 언저리 '기적의 도서관'에서 기적이 솟고 있었고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개인적 인연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나의 존재조차 모릅니다.
나는 그와 관계가 있지만 그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기용을 처음 알게된 것은 저널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정기용이라는 이름이 내 머리에 각인된 것은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열화당에서 출판한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라는 번역서 때문입니다.
오래 전 이야깁니다.

그 책은 '구르나'라는 작고 가난한 마을에 바친 이집트 카이로 대학 건축과 교수이자 세계적인 흙건축가 '하싼 화티'의 자서전입니다.
두 번 읽었고, 이집트를 여행할 때 직접 '구르나 마을'을 찾아 가보기도 했으며, 대학원 세미나 때 요약해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건축을 공부한 정기용은 역자서문에서 이 책을 일러 '70년대 유럽의 건축학도들이 마치 건축성경처럼 읽었던 책'이라고 했습니다.
내용도 철학도 없이, 그저 크고 사치스러운 것들만 쫓는 한국 대학의 건축교육을 비웃듯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싼 화티는 나에게 건축가가 사회 속에서 존재해야할 가치를 심어주었습니다.
건축가의 존재이유와 건축가의 사회적 사명에 대해서 가르친 그는, 젊은 건축가였던 나를 깊은 감동에 빠뜨렸습니다.
모든 것이 건축가 정기용, 그의 덕분이었습니다.

'진해 기적의 도서관'을 찾아간 것도 이 도서관의 설계자가 정기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축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의 건축세계를 음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대했던대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잘게 잘라 놓은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좋았고, 자유롭게 앉고 누워 책을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한 장치들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자연광을 받되 직사광선을 피했고, 권위와 형식 대신 호기심과 편안함이 흐르는 인간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씁쓸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건축가에 대한 이야깁니다.
도서관을 소개하는 자료에도, 홈페이지에도, 도서관을 구경한 뒤 쓴 여러 글들에서도,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디자인한 건축가가 누군지 말하지 않은 점입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도서관 홈피였습니다.
아래 표가 홈피의 도서관 연혁부분입니다.

                           
도서관 홈피에서 건축가를 꼭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건설회사는 밝히면서 건축가를 말하지 않는 무지한 현실이 너무 씁쓸했습니다.
내가 건축가라서가 아닙니다.
'앙드레 김' 대신 봉제사를 알리는 무지가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소문에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투병 중이라 합니다.
가까운 김해에 그가 설계한 '김해 기적의 도서관'이 건축 중입니다.
지난 봄 착공식에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참석했는데 매우 수척해보이더라는 말을 전해들었고, 그 후로 한 번도 직접 내려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자연과 인간의 상생'에 자신의 건축을 던진 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남긴 그의 작품들에서 내가 받은 메시지입니다.
최근 들어 생태건축이 각광 받는 현상을 보면,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의 건축가입니다.

위대한 건축가가 오래 머문다는 것은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크게 유익한 일입니다.
그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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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세이동 2010.09.23 17: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추석 잘 쇠셨는지요.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10.09.23 22:13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추석 잘 지내셨죠?
      날씨가 선선해져 참 좋습니다.
      좋은 계절에 좋은 일들 많이 생기시기 바랍니다.

  2. 김종국 2010.10.01 13:5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공감합니다.
    우리와 동떨어진 디자인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진실함이 사라지고 있어 슬픕니다.

    • 허정도 2010.10.01 18:48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정기용 선생의 건축가정신은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3. 연희 2010.12.31 20: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일민미술관에서 정지용선생님의 <감응>전시를 보고왔어요. 넘 넘 좋은 전시였답니다. 이렇게 한번도 글을 남겨본적이 없는 저였는데....너무 좋았기에 그 분의 이름과 건축에대한 생각을 생각하며 몇자 적어봅니다. 그 어떤것 보다 삶이 우선이라고...나무는 많이 배우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맺고 곤충들의 놀이터가 되고....정지용선생님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작품을 통해 그 분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려구요...

    • 허정도 2011.01.01 11:22 신고 address edit & del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정기용 선생의 책을 읽어 보신다니 반갑군요.
      '사람 건축 도시'를 권하고 싶습니다.

  4. 안상범 2012.03.13 13: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우연히 ........
    뭐, 다 인연이 있어서이겠지요마는
    정기용선생의 작품을 써핑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아는 허정도 건축가님이 맞으신다면 제이름도 아실것이기에
    설명 드리지 않습니다.

    자는 캐나다에 있습니다.
    마침 제가 조선일보에 블러그를 하나 가지고 있지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아뭏턴 반갑습니다.
    부디 좋은집 많이 설계 하십시요.
    세월이 좋아 지면 뵈올날 있겠지요?
    그날 만 기다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http://blog.chosun.com/blog.screen?userId=arkitect

    • 허정도 2012.03.13 13:51 신고 address edit & del

      안 형, 이게 얼마만입니까, 건강하시죠?
      캐나다 있다는 이야기는 풍문에 들었습니다.
      이렇게라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내려온 뒤부터 지금까지 고향 마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 형, 늘 평안하십시오.

2010.09.15 00:00

거꾸로 보는 그림, 건축 그리고 도시


얼마전 이태리 작가인 쥬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건축가, 무대설치가, 엔지니어 등의 일도 겸직했던 그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뛰어넘는 기교와 사람살이의 모습을 독특한 관점으로 꿰뚫어 보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가장 주목했던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종 야채가 담긴 그릇의 정물화를 그린것 같지만, 거꾸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지없는 사람얼굴의 또다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또하나의 그림이 있습니다.(작가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윗그림은 한 젊은이의 못습인데 비해, 그 그림을 거꾸로 놓으면, 아래와 같이 나이든 노인의 모습니다.


이러한 맥락의 풍자는 또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그림이지만, 웃는 모습과 찡그린 모습을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앞서의 그림들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눈매의 모양에 따라 받아들이는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도시의 건축에도 적용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폴란드의 거꾸로 하우스입니다.



지붕. 아니 바닥(?)에서 음악연주회를 하는 모습입니다.

일본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파주에 있는 유비파크입니다.



거꾸로 세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그림들과 집(House)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단순한 흥미만의 의미는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지도를 이렇게 돌려서 보면 어떨까요.
바다가 중심이 되나요?




마산 위성사진도 돌려놓고, 도시가 아니라 바다를 중심에 놓아보겠습니다.
마산만을 중심에 두고 마산시내와 두산중공업 등 공업지대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보니 "마산만이 살아야 마산이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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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3:00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청주는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양주못지 않은 고급술로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최근들어 젊은층에서 일본수입산 청주, 본토말로 사케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마산이 청주 생산의 원조도시로서의 아픈(?)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시기에 마산은 청주주조장의 집산지에 해당되었다. 마산에 존재했던 청주공장들을 찾아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의 한계로 내용상 명료하지 않은 부문과 오역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혹 관련자에 대한 제보를 주시면 내용을 보완해 정리할 계획이다. 블로거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일제 강점기의 주세령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시하였던 일이 토지조사와 주류조사였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전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조선조에는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다양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세령이 강제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양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체가 정비되면서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한 반면 일본의 청주는 마산에 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부터 청주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세법에 의해 가양주의 전통을 전면 금지한 반면 일인들에 의한 청주공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마산을 청주의 도시로 변경시켰다.

청주의 도시 마산
마산에서 청주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통계에서 보면 주조공장이 6개, 장유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로 나타나 있다. 개항이후 약 10년에 걸쳐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펌프자리에 아즈마 주조장(1905)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주주장을 만들었다.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천 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생산실적에서 부산업계를 제치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변천과정
1900년도에 설립된 청주주조장은(상공회의소 100년사, 마산시사 1996 참조) 최초의 주조장은 신마산 일성펌프자리에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酒造場이 있으며, 원마산 서성동에서 1905년에 설립된 이사바시(石橋) 주조장, 장군동에 06년에 설립된 五反田 酒造場,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永武 주조장, 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08년 상남동의 岡田 주조장, 지시마엔(千島園) 酒造場은 장군동에 09년에 설립되었다.
이미 1900년대에 7개의 청주주조장이 신마산, 중앙마산, 원마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연도가 중복되는 공장이 2개 있는데 이시바시 주조장과 지시마엔 주조장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과 1925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 년대가 앞선 자료를 기원으로 보아서 정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량 보다 20% 즐인 1만 7천 여석만을 제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동란기에 불하를 받은  공장들은 12개의 공장들은 운영부실로 60년대 초반에는 7개의 주조장만 남아 생산을 하다가, 다시 5개의 공장이 없어지고, 3개의 공장이 생겨나서 5개의 공장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지방의 중소주류업체 통합법에 의해 백광청주만 홍문동에 남아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하나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역사

1. 아즈마(東)주조장(1904) - 하라다(原田)주조장(1923) - 동화주조(정기운)(1946-60? )
 마산에서 최초로 생긴 청주주조장이며 마산의 4대 양조장의 하나이다. 개항기인 1904년 마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던 아즈마(東) 양조장을 1923년 하라다(原田淸一)가 매수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연간 양조량은 1천석 내외이고 상호는 명주「한목단」(寒牧丹, 간보단)이었다.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1,000석 내외였다. 월남동 5가 1번지에 위치하며 해방이후 구.일성펌프(46.7.1, 최성주)공장이 일부 설립되었으며, 하라다 주조장은 미군정청에 접수된 이후 정기운이 불하를 받아서 동화주조라는 상호로 청주를 생산하였다. 이후 1955년 공장명부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1961년 상공회의소의 공장명부에 없는 점으로 보아, 50년대 후반쯤에 청주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조장 부지는 일성펌프 공장과 유남상가로 지속되다가 2000년에 신축건물 일성프라자가 공장부지에 들어섰으나, 얼마 후 소유권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재 상가도 폐가처럼 비어있다. 특이 이 땅은 개항초기에 마산 최초의 러시아 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로 유명세를 가진 땅인데, 땅도 주인을 잘만나야지, 옛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최초의 청주 아즈마(東)주조장의 현재의 모습)

 2. 이시바시(石橋) 酒造場 (1905.10)- 대흥주조(문삼찬) (1946-60년대?)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2천엔으로 1905년 10월 서성동 16번지에서 석교시태랑(石橋市太郞)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이시바시(石橋市太郞)가 설립하여 1926년 아들에게 계승된 이후 마산부 幸町(현 서성동)에 공장을 신축해서 연간 500석 가량의 청주를 생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표「大典正宗, 다이덴 마사무라」이었다.
해방이후 이시바시(石橋)주조는 문삼찬이 불하를 받아 상호를 대흥주조로 바꾸었다. 당시 직원은 6명이 소규모 공장이였으며, 1970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6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를 芙蓉으로 사용)

*우리가 흔히 정종이라하는 것은 일본의 청주 상호중에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청주가 많아서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은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호 예 : 대전정종, 학정종 등)
(현재의 위치는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필지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공장의 위치는 덕천상가아파트에 포함됨)

                                                                 
3. 고단다(오반전/
五反田) 酒造場 (1906.10)
장군동에 06년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청주주조장으로 마산야화에 의하면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파산하였다고 함. 파산시기는 해방이후 귀속주류업체 현황(1953)에 없으므로 해방 전후 시기로 판단된다.
(위치는 마산야화에 의하면 96년에 관광센터가 있던 '푸른집'자리라고 한다.)

3. 엔무(영무/永武) 주조장(1906.11)
신마산 조계지내 청계동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주조장으로 인접한 부지에 적문장유양조장(1906)이 있었다. 당시 생산한 정종은 학정종(鶴正宗)이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종전(52년) 당시까지 정종을 생산하였다고 하였으며, 1953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지번은 없지만 청계동이 몇필지 않되는 적은 동임을 감안하여 추정할 때, 공장의 위치는 현재 문화동 주민센터이거나 인접 주택필지로 보인다.

4.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7)- 삼성주조(신봉희)(1946) - 백광주조(이우현/이성훈)(60-79?)
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이다. 창업주 일본인 니시다(西田木摠市)에 의해 자본금 2만엔으로 1907년 11월 설립되어 마산부 영정(榮町: 현 홍문동9)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양조량은 1926년에 600석에 불과했으나 3년후인 1929년에는 2배가 넘는 1천300석의 실적을 올렸다. 생산한 청주상표는 「鷄林」(계림, 게이링)이였다. 해방이후 신봉희가 불하를 받아서 삼성주조로 상호를 바꾸어 청주를 생산하였다. 종전(1952년)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1961년 쥬류제조업체 현황에 의하면 동일 위치에 백광주조장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백광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 대표자는 이우현이었으나 1973년 주류업체의 통폐합에 따라 73년 10월 18일 백광주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으며, 대표도 이성훈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이 33명이었다. 한편 인접한 지역 홍문동 6번지 상의 염록주조장 인수하여 동시에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양조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하나만 남아 있다가 연생산량이 3,500kl 내외에 지나지 않아서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산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청주를 생산한 마산 최후의 공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공장건물은 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서 롤러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가. 90년대(?)에 신동아 빌라 공동주택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조장의 조감도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전경,중앙상단이 서전주조장, 하단의 공장은 녹수주조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주장은 현재 신동아빌라가 들어서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백광청주 상표)

5. 강전(岡田) 주조장 (1908.9 - ?)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나타나는 공장이다. 상남동에서 자본금 1만2천엔으로 설립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해방 이전 양조장이 폐업했거나 용도변경(탁주, 소주, 장유)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위치확인은 불가능하다.

6.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1909.10) - 삼광주조장(손삼권)(1946-73)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5천엔으로 1909년 10월 마산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서 엔도우(遠騰豊吉)에 의해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25년 창립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생산한 청주는 명주 「彌生」(미생, 야요이)의 상표로 연간 500석 정도를 생산 판매했다.

해방이후 지시마엔(千島園)주조는 손삼권씨가 불하를 받아서 그대로 천도원주조로 했다가 뒤에 삼광주조로 변경하였다. 이후 손삼권씨는 인접필지에서 염국모가 운영하는 칠성주조장을 인수하여 삼강주조로 변경하고 2개 공장 삼광, 삼강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19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엽체 통합조치에 의해 폐업하였다. 다행히 공장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창고 및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공장의 규모는 삼강주조장이 더 컸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주조장의 60년대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삼광청주 상표)

7. 이데(井手) 주조장(1911.10) - 칠성주조장(염국모) - 삼강주조장(손삼권)(1946-197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강주조장의 현재모습, 삼광주조장과 같이 운영되었다.)

 1911년 10월 井手倬次郞에 의해 창업, 마산부 개정(신흥동)에서 연간 500석 정도의 청주 ‘總督’을 생산.1930년부터 상표를 朝乃灘(조내탄, 아사노나다)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이데(井手)주조는 칠성주조(염국모)로 바뀌어 청주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61년 이후 인접필지에 있는 삼광청주의 권삼문에 의해 상호를 삼강으로 바꾸어 유지되다가 73년 폐업된다. 공장건물의 외부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칠성/삼강주조장과 현재의 후면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생산된 삼광청주, 삼강청주)


8. 미요시(三好) 주조장(1913) - 삼일주조장(이우식-정명갑-문병대)
(1952-196?)
마산부 부정(富町: 현 부림동 103)에서 미요시(三好彌三郞)가 1913년에 설립했다. 연간 생산량은 400석 내외이고 상표는 松乃色. 해방이후 - 미요시(三好)주조는 휴전 이후에 삼일주조(이우식)이후 정명갑으로 바뀜 (三一주조장/ 鄭明甲/ 부림동103/ 7), 당시 생산한 청주의 상호는 觀海였으며, 1961년 이후 폐업되었으며, 위치는 부림시장 아래편쪽에 1969년 설립된 백광소주(문삼찬)과 인접한 공장이었다. 지금은 위치는 부림동 구.화남상사건물이 있던 위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일주조장의 50년대 모습)



9. 히라이(平井) 주조장(1914.4) - 조해주조(서준보)(1946-196?)
1914년 4월 히라이 (平井政太郞)에 의해 창업되었다.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공장을 갖고 명주「취향」(醉香, 스위꼬)을 생산했다. 연간 양조능력 2천석의 대형 양조장이었다.
해방이후 히라이주조는 조해(朝海)주주식회사로 서준보에 의해 불하되어 운영되었다. 위치는 중앙동 2가6번지로 그 터에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1961년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마산역옆의 조해주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모습, 마산역은 아파트로 변하였고--)

           
10. 합자회사 시미즈(淸水)
(1927.6) - 대동주조(이병진)(1946-60) - 무학주조(최위승)(1973-84)
마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양조장이었다. 1921년 시미즈(淸水篤行)에 의해 창업되어 1927년 6월 사원공동 출자15만엔(円)의 법인체로 바꾸었다. 시내 야나기마찌(柳町:신창동13)에 자리한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만 3천500석 1928년에는 당시의 마산의 양조업계 총생산량인 1만석의 25%에 해당하는 2천500석을 생산했다. 이 회사 생산품인 청주 「대정앵」(大正櫻, 다이쇼 사꾸라)과 <井筒平>은 만주와 중국대륙에까지 판매했다.

해방이후 시미즈 :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해방이후 대동주조(대표 이병진)로 명의가 변경되었다. 당시 대표 이병진은 중앙동에 마산주조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온다. 마산주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공장을 가동하였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 진주 가도변으로 판단되며,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주조도 같은 기간 동안 생산을 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1973년에 무학주조가 경남지역 36개 소주회사를 통폐합하여 본 대동주조공장으로 이전하여 무학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984년 무학이 봉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무학빌라 공동주택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미즈(淸水)주조장의 흔적은 인접한 창원천의 다리이름 청수교(淸水橋)에서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장, 대동주조장, 무학주조로 변경된 공장의 과거와 현재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에 인접한 청수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주조, 1945-60, 이병진)


11. 하마다(濱田) 주조장 (1923) - 옥포주조(이태익)(1946-60)
마산부 신정(新町 : 현 추산동)에서 하마다(濱田慶治)가 1923년에 설립, 연간 양조량은 500석이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청주 金盃濱鶴
(금배빈학, 긴빠이 하마쯔루)의 명성은 꽤 높았다.
해방이후
하마다(濱田)주조는 옥포주조(이태익)로가 인수
1961년 당시 공장등록대장에 없으므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는 중앙극장 우측 내림길에 있다고 전하며, 현재 지번이 없어 찾을길이 없다.
 
    
12. 무라자끼(村崎)주조장(1925) - 염록주조(김상현)(1946-60)
1925년 당시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있던 다무라(田村) 주조장을 무라자끼 (村崎仁三郞)가 인수하여 영정(營町: 현 홍문동6)에 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옛 상표 摠富士였는데 새로「艶綠」(염녹, 쯔야미도리)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무라자기(村崎)주조는 엽록주조(김상현)로 되었다. 인접한 홍문동 9번지에 백광주조장을 가동하던 이우현에게 인계하여 두 공장에서 백광청주를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하였다. (염록은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주조장의 현재모습)

00 녹수(錄水)주조장/ 李雨鉉/ 홍문동3/ 8-(1950?-1965)
녹수주조장은 53년 공장등록명부에는 없으며, 61년 주류업체 현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5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위치는 홍문동 3번지로 백광주조장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이후 1965. 11. 10에 청주공장은 최계정에 의해 백광장유양조장으로 전업하여 영업(마산 홍문동 3-4, 최계정)을 개시하여 간장, 된장, 식초를 생산하였다. 당시 직원은5명이었다. 이후에 공장부지에 배진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녹수주조, 백광양조 공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3. 마쯔모도(松本) 주조장 (일제말기 -1945) - 금포주조?(김행도)(1950?-1960)
마산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양조장이다. 일제말기 마쯔모도(松本通)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 새 공장을 세우고 명주 月乃浦를 생산했다. 이외 특별한 기록이 없으며, 해방이후 쯔기노우라(月浦)주조가 김행도에게 불하되어 금포주조로 바뀌었다. 둘 다 장군동인 점을 감안하며, 월내포가 월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허나, 금포주조 역시 5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61년 주류업체현황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으로 추정한다.

00 이 외에 나타나는 주조장은 중앙동에 동성주조(주)가 이만희에 의해 해방이후 설립되어 60년도 이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14. 야마무라(山邑)주조 마산공장- 동양주정(1952)-무학주정 -유원산업 창업(동양주정과 합병, 1960)
일본에 본사를 두고 청주 櫻正吉」(앵정길, 사꾸라 마샤요시)을 생산하는 야마무라(山邑)주조 주식회사가 1929년 4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월남동)에 마산공장을 세워 만주와 중국에 수출할 청주를 생산했다. 해방이후 야마무라(山邑)주조는 무학주정으로 개칭하며 주정과 소주를 생산하였으며, 65년이후 주정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15. 쇼와(昭和) 주류공업사
일본 야마무라(山邑) 주조의 계열사로 1929년 4월 10일 자본금 50만엔(円)으로 설립된 종합주류회사이다. 1929년 9월부터 본정(本町 :현 월남동) 해안 매립지에 신축한 공장에서 주류생산을 시작했다.
창업 초기에는 년간 청주 1천석정도 생산했으나 1935년부터 청주는 야마무라주조에 넘기고 기타주류(소주, 미린주, 포도주,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하였다. 이외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였다. 해방이후 유원산업으로 변경, 1952년부터는 증류주만을 생산하였으나 이후 1965년부터 희석식 소주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해방 직후 주조장 현황
시내 13개 청주양조공장들도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 청주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새로이 출발한 청주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청주의 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청주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 되었다.
6·25사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던 마산의 청주업계는 휴전이 되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이 결과 업자들은 서로 합의하여 서울지역에의 진출을 위해 서울지역 출고분에 한해서
銘花라는 한가지 상표로 공동 판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자 서로간의 이해에 얽힌 불신과 갈등으로 공판제 실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업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덤핑판매가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低質酒가 나돌아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경영적자가 누적되면서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 1961년 겨우 7개 양조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60년대 이후 현황
1971년 마산의 청주생산량은 청주86만2,100L 이고, 합성청주는 17만1,790L였다. 69년의 생산량 청주 125만2천L, 합성청주33만 1,560L에 비하면 크게 감량된 것이었다. 그 후 1974년 생산량은 더욱 감소되어 청주 71만6,470L, 합성청주 29만4,789L를 생산했는데 70년대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들어 마산 청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설립된 청주주조장
1. 寒牡円/한목단 양조장 : 하리다 주조장의 상호를 사용(최태수, 산호동 17-3, 62. 11. 28) : 원조격에 해당하는 하라다주조의 '한목단'상호명을 패러디하여 설립되었으나 73년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2. 신광양조장 (최동렬, 산호동 128, 65. 12. 13)
3. 성광주조장 (손정길, 신포동 2, 69. 1. 3)
상기 3개의 공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백광청주에 의해 통폐합되어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광청주 역시 70년대 후반에 세태의 기호변화에 의해 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외 알아내지 못한 청주공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생산하였던 청주들의 상표 및 상호라도 수집되어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이러한 자료를 가진분이 계시면 협조 보완하여 잘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로서 마산의 청주생산은 1904년 시작하여 1979년(?)까지 75년간 세월의 영욕 속에 사라졌다.
그나마 장군동과 신흥동에 인접해 있는 삼광청주, 삼강청주 2개의 공장은 원형이 점차 삭아져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의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Trackback 0 Comment 5
  1. 오유림 2010.01.22 11: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와....
    논문같아요..멋집니다.
    이런 자료들 다 어디서 찾아요 ㅎㅎ
    사진속 건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정말 신기합니다.
    더 삭아지기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좋겠구만..
    잘 보고 갑니다 신선생님 ^^

  2. 옥가실 2010.01.22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거의 다 찾아낸 셈이네요.
    마산의 술만 연구해도 박사논문은 거뜬하겠는걸요..^^

  3. 삼식 2010.01.22 2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불확실한 부분이 아직 많은것 같읍니다.
    지역 어른들의 협조를 받아서
    어찌 해볼까 합니다.
    술을 좋아한 죄로
    시간나는 대로 자료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4. 감사 2013.10.09 19: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할아버님 이름이 보이는군요 잘보았습니다

    • 허정도 2013.10.09 21:0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조부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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