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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6 07:30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공장전경 (출처 : 마산시청 포토자료실/역사)

-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가 1차 탐방시 장군동 양조장의 실체를 몰라서 답답해 하다가,  유대장님이 저에게 조사를 한번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듣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후 마산 역사사진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해서,
대조해보니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굴뚝과 건물의 지붕선을 보면 정확히 동일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빙고',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위 사진에서 모서리 가로수를 지우면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본 사진이 된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유장근대장 촬영 (09.10.24)


- 이건물은 1925년에 청주양조면허를 얻어 마산부 통정(장군동)에서 창립한 千島園 주조장으로, 창업주는 遠勝豊吉, 명주 彌生의 생산량은 연간 500석 내외였다고 한다.
(마산상공회의소 100년사)

- 천도원 주조장은 옛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삼광청주로 바뀌었으며,  해방이후 적산 청주공장들은 연고자들에게 불하하였는데, 손삼권씨가 인수하여 운영하였었다.
삼광 청주는1962년 기존 업체들이 문을 닫아 삼광과 백광 2개 양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을 생산하였던 양조장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상호 (사진출처 : 마산문화원 전시사진)


- 1971년도에 청주 제조업체는 백광, 신광, 삼광 등을 비롯한 5개의 양조장이 향토 명산의 청주를 제조하였으나,
1973년 정부의 군소 주조업체의 통합조치 이후 삼광주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백광 양조장 하나만 생산을 계속 하다가 이마저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酒都馬山의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경남신문에 인터뷰한 손삼권씨는 45년 10월 지시마엔 양조장을 당시 일본인 사장이던 엔도(遠藤豊吉)로부터 인수, 합포구 장군동 3-13번지 공장에서 삼강(三江)양조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공장 이름을 그대로 쓰고 술 이름도 「무궁화」로 정했으나 「나라 꽃을 마시면 되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공장은 「三江」(대동강 한강 압록강), 술 이름은 「三光」(해 달 별)으로 바꿨다. 45년 11월부터 청주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광복이후 한국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청주를 만들었다 한다.



-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자료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45년에 건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공장은 블록조 단층건물로 중앙에 벽돌조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주변의 주택은 2층 목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중정으로 열린 마당과 그 둘레에 2층의 주택들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경남신문 인터뷰 시기인 1999년 에서 경남의 근대문화유산리스트 정리시기인 2004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 같다. 그래서 목록화리스트에서 건물의 소유는 작고한 손삼권씨 앞으로 되어있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손삼권씨가 해방이후 적산가옥을 인수한 것을 감안할 경우,
1925년 천도원주조장 설립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현재 이건물은 개축되어 다가구 형태의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그나마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경남의 근대문화유산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이번 도시탐방대를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건물은 없어지더라고 기록은 남겨져야 된다.
물론 이 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 개인의 기억에 남아있기도 하고
어느 신문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지역사에서 이러한 양조 변천사와 근대 건축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미시사 부분의 정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문화시설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


본 건물은 진주가도변에 있는 건물로 주소는 장군동3가 1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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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6 1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또 그 당시에 사진을 찍던 이와 최근에 사진을 찍은 이의 생각과 구도가 같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게 누구라고는 말 못하겠구요^^

    한가지,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974년 마산상공회의소 인명록에 보니, 백광(이성훈, 마산시 홍문동 9, 1973.10월 설립, 종업원 33명), 신광(최동연, 마산 산호동 128, 1965.12.13일 설립, 종업원 10))은 있는데, 삼광은 없어요.

  2. 삼식이 2009.11.26 13: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삼광이 73년에 문들 닫고, 백광만이 남았다가 곧 없어졌다고 합니다.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탐방사진은 우리카페에서 복사를 했는데, 촬영자는 미처 확인을 못했읍니다. 확인후 수정하겠읍니다.)
    가능하면 개항이후 주조장의 위치 및 흔적들을 한번 정리하다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것 같습니다.

    • 옥가실 2009.11.26 20:23 신고 address edit & del

      아고고... 괜히 찍사 이야기를 했네. 농담인 것을..^^
      (제가 찍어 올린 것이라우)

  3. 이은진 2009.11.26 13: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노고에 감사드리고,
    이 사이트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배우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기대합니다.

    • 신삼호 2009.11.26 13:42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장근대장님 명령을 따르다 보니 ㅅㅅ
      이런 내용까지 나오게 되었읍니다.

  4. 허정도 2009.11.26 13:5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때요?
    이 건물은 원형도 크게훼손된 것 같지 않은데 '마산주류박물관'으로 하는 것이.
    즉석에서 청주 만들어 판매도 하면 수입금도 꽤 짭짤할 것 같은데.

    • 옥가실 2009.11.26 20:20 신고 address edit & del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짭잘 정도를 넘어서야 할 텐데...^^

  5. 유림 2009.11.26 18:1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긴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버린다고만 생각했는데..
    흔적은 어디에도 남게 되는 모양입니다.

    신기합니다.

    • 삼식 2009.11.26 19:1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 흔적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이 누군가 해야할 일이겠지요, 도시탐방대를 하는 큰 목적중에 하나이지요!

  6. 노치환 2009.12.01 14: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회장님,,,
    요사이 지역 특산물로 곡주가 많은 인기를 얻는 것 같은데
    정말 말씀처럼 주류 박물관 너무 괜찮을 듯 합니다...

    • 허정도 2009.12.01 16:19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네요.
      곡주라니 술 한잔 생각나네.
      언제 함께 한잔합시다.

  7. 최정건 2010.01.13 01:0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님 제가 그 건물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예전에 철도청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예, 저도 얼핏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2009.10.09 11:32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산호동 효자각이 도심 골목속에서 발견되고 난 뒤 관심이 있는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다시 방문 하였다.
비문의 해석과 비각건립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는 경남대 유장근 교수와 팀 블로거 허정도 박사를 통해 앞에서 대략 정리를 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판단을  통해 보존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본다.
우선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 양식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았다.

정려(旌閭)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많이 건립된 유교건축물이다.
정려를 받는 절차는 고을의 관청이나 대상자의 직계후손이나 고을 유림들이 중앙의 예조에 정려를 내려주기를 청하면 왕명에 의하여 명정을 받게 된다.
선조때 부터 고종 년간에 가장 많이 건립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에 엄청나게 많은 정려가 건립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신흥부호로 부상한 집안에서 가문 과시용으로 많이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려각의 종류
효자각 ;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
효열각 ; 부모에 대한 효행과 부인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

열효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열행과 자식 효행을 기리기위해 건립
효부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정열을 기리기 위해 건립
충효각 ; 임금에 대한 충절과 부모에 대한 효행을 기리기위해 건립
열녀각 ; 남편에 대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

산호동 효자각의 건립 시기
1927년으로 확인되었으며, 원래 석전동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1975년에 이전하였다.
이는 장소성이 가지는 가치는 부족하다 하드라도 목구조가 이축이 가능함 점을 감안할 때 구조의 원형은 원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정려각의 배치 및 형태
아무런 장치 없이 비만 서있는 기본유형과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설치한 유형이 가장 많으며, 특수한 경우 정려 앞에 홍살문이나 일주대문을 설치한 경우가 있다.
산호동 효자각은 일주문을 설치한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며 이는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유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평면은 주로 정면과 측면 1칸인데 반하여 정면 2칸 측면 1칸의 평면 형태이다.

정면을 2칸으로 한 것은 기둥상단에 공포장식을 설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벽면 구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통 4면 모두 홍살(붉은 살대)을 설치하는 경우와 정면만 홍살을 설치하고 주변을 판벽으로 막는 경우가 있는데, 산호동의 경우 4면 모두 판벽과 홍살을 혼합하여 배치한 특수한 형태이다.
그로 인해 비문을 읽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는 판벽 장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판벽과 홍살의 혼합식 벽면)

가구구조와 공포형식

공포는 장식을 최소화한 초익공식 또는 이익공식이며, 더욱 간략화된 민도리 방식도 있다.
기둥 위나 주간에 공포를 설치한 주심포식이나 다심포식 공포형식은 거의 사례를 찾기 힘들다.
공포는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 대규모 건물에 설치하는 양식인데 산호동의 경우는 소규모 건축에 공포를 설치한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

지붕형식과 처마양식
지붕은 주로 용마루를 전후로 경사진 간단한 맞배지붕이 주를 이루고, 우진각 지붕과 팔작지붕으로 된 경우는 드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비각의 경우 건물처마는 겹처마 보다는 서가래만 있는 홑처마형태가 많이 사용되는데 반하여, 산호동의 경우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설치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경우에 해당된다.
         
                               
                                                                
(선자형 서까래의 얼금단청)


단청

단청은 부재의 양끝에만 머리초문양을 그리는 모로단청이 많으며, 다음으로 기교 없이 가칠로만 마무리한 가칠단청, 그리고 가칠단청에 부재의 단획긋기를 한 긋기단청 순으로 나타났다.
산호동 효자각의 경우
모로단청보다 단계가 높은 얼금단청을 한 화려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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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자수선생효자각: 팔작지붕, 홍살벽면과 홑처마, 가칠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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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호동 효자각: 팔작지붕, 판벽+홍살벽, 주심포+다포식, 겹처마)

산호동 효자각의 건축적 가치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전통 목구조 양식이나, 전통적 비각의 규범을 벗어난 예이다. 그리고 유교건축물은 일반적으로 별도의 장식 없이 간결하게 설치하는데 반해, 인방 중간에 설치된 소로의 장식(거북이와 도깨비 얼굴)은 전통양식 규범이 와해되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형태로 보여진다. 
비석 비문의 경우 정밀 감정이 필요한 별도의 부분이라 하드라고, 비각의 경우는 전통 목구조의 구성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존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호동 효자각을 보존하기 위해서
전문가 집단에서 상세한 감정을 통해서 시도 지정문화재로 등록을 하는 방법과 혹 중요도는 부족하다 하드라도 보존의 가치가 있다면 문화재 자료로 인정받는 방법을 통해 보존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목구조의 경우 보수시기를 놓치면 원형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72년간의 묵은때를 씻어내고 길이 보존되길 바란다.

● 시·도지정문화재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이하 '시·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지방자치단체(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 4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유형문화재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 무형문화재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 기 념 물
패총·고분·성지·궁지·요지·유물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예술상,관람상 가치가 큰 것 및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를 포함한다),
식물(자생지를 포함한다),광물,동굴로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

- 민속자료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

● 문화재자료
시·도지사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시·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를 지칭한다.

- 등록 문화재
지정 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을 말함.

-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방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음.

- 비지정문화재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지칭한다.


● 마산의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 자료

- 시도유형문화재
합포성지, 의림사 3층석탑, 진해현 관아 및 객사, 만력34년 진해현 호적, 마산 광산사 목조보살좌상, 법성사 목조보살좌상

- 등록 문화재

구 마산 헌병분견대, 마산 봉암 수원지

- 문화재 자료
관해정, 몽고정, 위암 장지연묘, 경행재, 제말장군묘, 마산 성요셉성당,
마산 법성사 신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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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0.09 17: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연이은 포스팅이 문화재등록으로까지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 신삼호 2009.10.09 17:57 신고 address edit & del

      정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2009.10.06 17:12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팀 블로거인 건축사 신삼호 씨의 권유에 따라 추석에 마산 산호동 용마산 기슭에 있는 효자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역사학자 유장근 교수와 지역사에 밝은 박영주 선생이 동행했고 신삼호 건축사도 함께 했습니다.

2009/09/29 - [도시 이야기] -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자동차에 내리는 순간 우리 일행은 비각 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의 현란함에 놀랐습니다.

이미 신삼호 건축사의 글과 사진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감동과 놀라움에 전율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은 비각의 건축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신삼호 건축사에게 맡기고 저는 비각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효자비의 주인공인 그 효자는?-

한문에 능통한 유장근 교수가 읽어 내린 비문과 각기(閣記)에 의하면,
이 효자각은 일제시기였던 1927년에 건립하였으며 두 개의 비석에 새겨진 김해 김씨 선문(善文)과 중여(重呂)는 부자지간으로 현종(재위 1659-1674)기와 숙종(재위 1674-1720)기를 살다간 분이었습니다.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며 완월리(현 완월동)에 묻혔다는 걸로 보아 대대로 마산에서 살았던 분인 것 같았습니다.

선문(善文) 씨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원인을 알기 위해 어머니의 똥을 먹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어머니를 살려낼 정도로 효심이 극진한 분이었습니다.

비석의 주인공과 비각을 세운 이 사이에는 200여 년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일제시기에 크게 성공한 어느 집안에서 선조의 덕을 기리면서 가문을 은근히 내세우기 위한 정려각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성행했던 일로, 전국적으로 약 1,500개소 이상 건립되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효자각이라 적힌 비각의 현판>



비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이웃에 사는 통장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비각으로 올라온 통장 아주머니는

“비각을 관리하는 자손이 창원에 살고 있는데 가끔 비각에 찾아온다”
“명함 받아 놓은 것이 있으니 나중에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저녁식사 자리로 이동하던 중,
통장 아주머니가 비각을 관리하는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 왔습니다.
이름이 '김기석'이라고 했으며 나이는 나와 비슷해보였다고 했습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바로 전화를 했더니 현재 창원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과의 통화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산호동 효자각에 얽힌 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각은 원래 석전동 삼거리(현 석전사거리)에 있던 큰 은행나무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은행나무와 비각을 자주 본 탓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1975년에 회산다리에서 석전동으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산호동으로 이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축할 때 건물을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조립했는데 해체한 분량이 작은 트럭으로 열대 정도의 분량이었으며, 지붕부분 해체가 안 되어 경주불국사에서 전문가 한 분이 내려와 해체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김기석 씨의 말에 의하면,

비각을 건립한 이는 자신의 조부님들인데 일제기 마산 어시장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김두영, 한영, 기영, 준영 네 형제였다고 합니다.

전화통화에서 ‘어시장’과 ‘준영’이란 말이 나오자 함께 앉았던 박영주 씨가

“오래 전에 김준영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었으며 마산 어시장의 마지막 객주였던 분이다. 혹시 그 분 아닐까?” 라고 했습니다.

확인하고 싶어서 즉각 마산상공회의소 윤종수 부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준영이란 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밤에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 해방 후 마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김준영 -

지금의 마산상공회의소는 1900년에 발족한 ‘마산상호회’가 기원입니다.

해방이 되자 마산상공계 유지들은 일본인이 장악 주도하던 경상남도 상공경제회 마산지부를 접수하고, 해방직후인 9월5일 마산상공경제회로 조직 개편을 서둘렀습니다.

마산상공경제회는 김준영, 손성수(전 마산시장), 김종신(마산MBC사장), 이만희 등이 발기하여 10월5일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마산의 상공업자 1,348명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의원57명을 선출한 후 회두(지금의 회장)에 김준영, 부회두에 손성수를 선임하여 발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준영 선생은 마산상공회의소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1946년까지 회장을 지냈으니 사실상 일제 후 우리 자력으로 설립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네 형제 중 둘째인 김한영 선생은 1940년 12월 1일에 17명의 해산물 도매업자들이 자본금 13만 엔을 투자해 합동으로 설립한 마산해산주식회사의 사장이었으며 앞의 김준영 선생이 전무이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 -

김기석 씨의 친조부인 맏형 김두영 선생은 어시장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것 외에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두영 선생은 바로 본명이 김재우(金在宇)인 마산출신의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1915-1969) 선생의 부친이었습니다.

김해랑 선생은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현대무용과 고전무용을 두루 섭렵한 한국근대무용 1세대입니다.

우리나라 신무용 70년사를 뒤적이다 보면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 6.25동란 직후 한국무용 예술인협회(현 한국무용협회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이사장과 회장을 지낸 한국무용계의 대들보였던 분입니다.

마산지역 혹은 전국적으로 그의 예술에 관한 연구발표와 추모공연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0년 문예회관에서 열린 김해랑 추모공연 포스터>


그는 일제시기부터 마산에 무용소를 개설해 평생 마산에서 후진양성을 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마산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던 분입니다.

한 기록을 보니 그에 관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어려웠던 상황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 이갑선씨 사이에 1남 1녀(기석, 영선)를 두었던 김해랑은 춤을 사랑한 춤꾼이었을 뿐.........’

내가 통화한 분은 여기에 나오는 ‘기석’ 씨였습니다.

추석 지난 다음 날,

한 비각을 통해 밝혀진 마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효자비의 주인공들이 묻힌 완월동 무덤들은 마산고등학교에 편입되었다는 이야기와 선조들이 만날재 아래 월영리(현 월영동)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얼핏얼핏 해주는 김기석 씨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먼 나라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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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06 18:5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09.10.07 08:45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천부인권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에 대해 존중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비각은 김해랑 선생이 열두살 때 아버지의 형제들이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저런 정려각은 그 시기 전국에 수도 없이 세워진 시대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너무 예민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김기석 씨는 1951년 생이며 장애을 가진 분으로 가문의 명예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같습니다.
      제가 더 상세한 정보를 확보해보겠습니다.

  2. 괴나리봇짐 2009.10.07 08: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관심 하나로 여러 이야기들이 살아나네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관심들이 하나둘 모여 더 큰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면,
    마산의 새로운 명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09.10.07 15:06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우연하게 알게된 마산사람들 이야기라 정리해 본 것입니다.

  3. 2009.10.07 09:5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4. 김재현 2009.10.07 17: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되살리면 지역문화가 더욱 풍

    성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10.01 08:50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골목 효자비에서 발견한 건축적 장식의 화려함

얼마 전 산호공원에 산책 갔다가 내려오면서 우연히 건물 틈 사이로 기와지붕 용마루가 눈에 띄었다. 골목에 면하여 귀퉁이만 조금 보였다.
“도심 속에 웬 한옥이 있지 ?”하고 내려가 보았다.


▲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일주대문

정면에 일주문이 위용을 갖추고 서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솟을대문에 붙혀져 비각이 있는데 그 건축적 디테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내부에 들어가서 비문을 읽어보니 효자비를 보호하기 위한 정려각 임을 알게 되었다. 정려란 나라에서 충신·효자·열녀를 칭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던 문이나 비로서 이 동네에서 유명한 효자를 기리는 비각이었다.

보통 시골의 마을 어귀에 신도비나 효자, 열녀비가 서있는 경우는 많이 보았는지라, 도심 속에 효자비가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그 건축적인 용모 또한 많은 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려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만 있는데 반하여 산호동의 정려각은 앞에 일주대문 추가로 설치함으로써 후손들이 정성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화려하게 꾸민 것 같았다.

건축적 장식의 화려함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먼저 일주문은 기둥이 1열인 대문의 형식으로 폭은 한 칸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공포(기둥 위나 기둥사이에 지붕면을 떠받히는 구조재 역할과 장식을 겸한 부분)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 연꽃 모양의 화려한 공포장식


처마를 내미는 면이 기둥간격 보다 서너배 되는 지붕면을 받치기 위해 방사형으로 4단 내민 구조로 되어있었다. 지붕처마는 원형의 굴도리와 네모난 민도리를 내민 2단 겹처마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내민 부분은 화려한 연꽃모양과 줄기부분을 상세하게 깎아서 단청이 칠해져 있으며 서가래와 처마 밑판에도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이 아주 화려해 보였다.


▲ 공포와 화려한 단청의 서가래 장식


특히 기둥위의 공포사이에 있는 소로(기둥사이 보 중간에 설치되어서 지붕의 중량을 받혀주는 장식재)는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위에 귀여운 도깨비 얼굴로 장식되어 아주 재미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 인방보위에 얹혀진 거북이 등을 탄 도깨비 얼굴


정려각은 정면2칸, 측면 1칸으로 되어있었고 현판/편액은 孝閣이라고 적혀있었다. 내부에는 2개의 비석이 놓여있었다.

▲ 정면2칸 측면1칸의 정려각


▲ 비각 내부의 효자비

내부 두 개의 비석에서 하나는“孝子 金海金公重呂彰積碑”으로 적혀있고, 다른 하나는 “孝子金海金公善文彰積碑”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고 배면에는 상세한 치적내용이 적혀있었다.

공포는 정면과 측면에 세 개씩 설치되어 대문에 비해 훨씬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었다. 코너부분의 공포형태는 연꽃 문양 상단에는 닭머리 모양의 장식과 대각선 방향으로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조각하여 단청칠이 되어있었다.

▲ 공포상단에 여의주를 물고있는 용과 닭머리 장식


아쉬운 점은 정려각 주변에 담장이 쳐져 있어서 일부러 들어가기 전에는 목조구조의 화려한 장식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하여 관리상의 아쉬움이 남았으며, 비각 뒤편에서는 불을 지핀 흔적들이 남아있어서 자칫하면 화재의 위험도 있을 것 같았다.

▲ 주변의 담장과 무성한 잡초는 효자비 관람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해당 동사무소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현재 지방 문화재로 등록되어있지 않아서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문중의 소유라도 문화재로서 보호할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일주대문 앞에 약간의 자투리 공간이 남아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부분을 쌈지공원으로 만들고 담장을 투시형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즐겁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대문 용마루의 훼손된 기와도 보수하고, 비문을 해석하여 정문 앞에 조그만하게 설치 해둔다면 효자비의 원래 목적인 교훈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효자비의 위치는 용마고등학교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소는 산호동 530-1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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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09.10.01 09: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전문가적 시각이 확연히 드러나는 포스팅이네요.
    일일이 전화해서 확인하는 기자정신까지!
    정말 선생님 말씀대로 쌈지공원도 만들어지고,
    반듯하게 잘 관리된다면 명소가 될 것 같습니다.^^

    • 신삼호 2009.10.01 11:1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관리만 한다면 좋은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는 생각이 듭니다.

  2. 김주완 2009.10.01 11:4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걸 발굴하셨습니다. 저도 꼭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차! 이 아까운 글을 비로그인 상태에서 추천하고 말았네요. 나중 집에 가면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 신삼호 2009.10.01 11:53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가꾸어서 보존되도록 김기자님이 힘좀 쓰십시오

  3. 허정도 2009.10.01 13:1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틀리지 않네요.
    앉으나 서나 건축과 도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는 신삼호 씨의 눈에 이 보물 덩어리가 띄었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고 그냥 지나쳤는데 말입니다.
    재미 있었습니다.
    더 세밀히 조사해봐야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필자 말처럼 문화재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네요.

  4. 2009.10.01 17:4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신삼호 2009.10.01 22:48 신고 address edit & del

      현재 비문 내용 해석을 부탁해 놓았읍니다. 내용은 차후에 소개할 예정입니다.
      건축적으로는 규모나 용도에 비해 너무 화려한 장식을 사용한 특이한 유형인 것 같읍니다.
      그리고 정려각의 건물 년령이 최소 1세기는 넘어보입니다. 목구조와 단청의 상태로봐서는요---
      암튼 비문세운 시기와 내용이 확인하면 구체적인 상황이 파악될 것 같읍니다.

  5. 林馬 2009.10.01 21: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릴적 시골에서 많이 봐왔던 비석이지만 설명을 곁들어 감상하니
    정말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요즘은 이런 건축물 정말 보기드물지요.

    고건축 용어도 새롭고요.
    여기와서 건축관련 공부도 좀 해야겠네요.

    유심히 보지않으면 놓치기쉬운 것을 세삼 그 의미와 함께
    보게되어 새롭습니다.

    즐겁고 풍요로운 한가위 되십시요.

    • 허정도 2009.10.01 22:42 신고 address edit & del

      林馬님 반갑습니다.
      한국 고건축에도 관심이 많으시네요.
      말씀하신대로 상당히 가치 있는 건축물 같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기 바랍니다.

2009.06.04 10:15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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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이 2016.05.09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식인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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