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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5

 

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맸다느니, 어떤 처자는 사후에 아예 양색시(미군 상대 매음부)로 변신했다느니, 회원동 난민촌에선 미군의 횡포에 대들던 청년이 총 맞아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참 한참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내 큰누님과 육촌형수가 집 앞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둘 앞에 세우는 방구쟁이 차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미군병사가 따라 들어와 권총을 빼들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질리게 했던 일도 있었다.

 

<6.25전쟁 때 미군부대로 위문공연 온 마럴린 몬로>

 

그들로 인한 폐해는 산과 바다의 사냥질에서도 많이 보였다.

봉암동 양덕동 등의 산전(山田) 두락들은 고라니, 노루, 산돼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어왔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짐승들 쫓고 울타리 강화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 왔기에, 산짐승은 귀찮기는 해도 항상 같이하는 존재였었다.

그런데 미군들의 사냥질이 있고나서 어느 때인가부터 짐승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오륙 명씩 무리를 지어 와서 등성이마다 점거하고는 총소리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들을 여러 마리 잡아 방구쟁이 차에 싣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노루 배를 목덜미에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가는 미군을 보면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착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청수 들 둑에선 아주 특이한 사냥 행태도 경이의 눈으로 보았었다.

청수 들 둑에선 적현리나 귀산마을이 가깝게 건너다 보였다. 겨울이 되면 그 앞바다엔 오리 떼가 까맣게 보일만큼 많이 노는 풍경이 으레 연출되었었는데, 그 오리들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잡는 광경이었다.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일단이다.

 

그들은 모터보트 두어 척에 두세 명씩 타고서 귀산 쪽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나와서는 적현리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굉음을 발하며 최고 속도로 오리 떼를 향하여 돌진했다.

놀란 오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떠오르는데 그때 미군들의 총구에선 콩 볶듯이 총성이 일었다. 느리게 물을 차고 떠오르는 오리 떼를 향하여 조준 없이 산탄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멀리서도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맞은 놈은 수직으로 빗맞은 놈은 날갯짓을 하며 비스듬히 떨어졌다.

보통 서너 명이 육칠 초 동안 그렇게 쏘아서 잡는 오리가 많을 때 십여 마리도, 적어도 대여섯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어둑살이 짙어갈 무렵엔 바다 둑에 앉아, 팔룡산으로 자러 가는 오리들을 조준하여 떨어뜨렸다. 좀 멀리 떨어지는 놈은 그들이 데리고 온 개들이 물고 오는 광경도 보았다.

그들의 총의 위력은 어린 내 눈에도 참 놀라워 보였다.

전쟁 전에는 국방경비대 대원들이 간혹 들고 다니던 구구식 장총을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전쟁 나고부터는 엠원이니 카빈이니 하는 현대식 총들을 무시로 보았다.

 

<카빈소총(위)과 엠원소총(아래)>

심지어 휴가 나온 동네 형도 총을 지니고 온 걸 보았고, 유엔군 따라 다니다 잠시 쉬러 온 당숙도 엠원 소총과 탄알 수십 발을 들고 와 집안에 우스꽝스러운 사고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께 인사차 들렀을 때 가지고 온 총을 아랫방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점심 먹던 머슴이 멋모르고 방아쇠를 건드려 격발시켜 버렸던 것이다.

우레 같은 소리에 큰방에 있던 아버지와 당숙과 우리들이 아랫방 문을 열어젖히니 방안은 먼지로 컴컴한 상태인데, 놀라서 뒤로 눕듯이 허리를 젖히고 있는 머슴 발끝에 놓여있는 총구 앞에 큰 구덩이가 보였다.

그리고 깨어진 구들장 조각도 늘려 있었다. 나는 그 후 종종 친구들한테 그 장면을 들려주며 엠원 총의 위력에 대하여 떠들었었다.

이러한 총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가게에도 화약과 나무총이 많이 있었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총탄의 알을 분리해 추출한 화약과 탄피를 이용하여 목제 장난감 총을 만드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발전시켜 철파이프로 방총(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란 것도 만들어 오리사냥을 시험해본 기억도 있다. 그런 놀이는 전후에는 더 빈번해졌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들 대화의 중심엔 미군과 총 이야기가 항상 자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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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4

4.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미군들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졸저 상식의 서식처에서 빌어 오고자한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날부터 나는 참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땅 흔들림을 발로 느낄 정도로 요란스레 굴러가는 탱크와, 탱크 위에 달린 대포보다 훨씬 큰 포를 끌고 가는 차, 엄청나게 크면서도 쇠뭉치로 만든 것 같이 견고해 보이고, 그러면서 간혹 꽝하고 큰 방귀를 뀌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는(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방귀쟁이 차라 불렀다) 큰 군용차 등이 모두 신기하게 보였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그 위에 앉은 모든 군인들이 희고 검은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사실이었다. 우리 집은 마진국도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광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진해항에 싣고 온 군인과 장비들을 수송하는 일이 내 기억엔 한 달 이상 지속되었던 것 같다. 낮엔 마루와 방을 덮은 흙먼지 때문에 지겨워했고, 밤엔 귀가 멍하고 어깨가 털썩거려 몇 번씩이나 깨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6.25때 미군이 탔던 GMC 군용트럭>

 

열 살 나이에도 전쟁의 심각함이나 우리들의 앞날에 대한 염려 같은 건 염두에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처음 보는 피부색들과 생김새들이 신기했고, 굉장하고 다양한 무기들과 장비들에 경이의 눈길을 주었던 기억들만 남아 있다.

이웃 양덕동에 제법 큰 규모의 미군부대가 들어섬으로써(양덕시장 일대) 우리들이 미군들을 보고 대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의 일상사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우리 또래들이나 서너 살 위아래까지도 미군차가 지나가면 손을 내미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간혹 던져주는 껌이나 비스켓 등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좀 큰 형들은 세차를 하는와시와시꾼이나 구두를 닦는슈샨보이로 나서기도 했다.세차는 주로 어린천이나 양덕천에서 했고 구두닦이는 부대 근처에서 했다.

 

지금 사보이 호텔 조금 아래쪽이나 양덕오거리 정도가 되겠는데, 사오 명씩 조를 이루어 대기하고 있다가 미군 차가 오면 와시와시하면서 다가가고 운전수가 얕은 곳에 차를 세우면 물세차를 해주고 돈이나 물품을 받았다.

대체로는 나온 순서를 지켜 일거리를 받았는데 간혹 어거지를 쓰는 패들이 있어 미군 앞에서 볼썽사나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부대 주둔 얼마 후부터 위안부들이 부대 근처로 접근하면서 다방이나 술집들이 많이 생겼는데, 구두닦이들은 이 업소들에 다니면서 일을 한다고들 했다.

또 큰 형들 중엔 미군 보급품 수송차들이 어두울 때 지나가면, 속도가 느려지는 길이 험한 곳에서 뛰어 올라 물품을 훔치는(‘도꾸다이라고 불렀다) 위험한 짓까지도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런 한편, 일반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일도 참 많이 일어났다.

 

길가에 서 있는 방구쟁이차 앞자리엔 흑백 병사 둘이 탔고, 뒤 칸엔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혹인 병사가 창턱에 걸친 군용화 옆구리에 뭘 대고는 찍 긋자 불이 붙었다.

아무 것에나 마찰만 시키면 불이 나는 대가 굵은 성냥을 그때 처음 봤다. 그는 그걸로 담뱃불을 붙인 뒤 바로 옆 초가지붕 위로 휙 던졌다. 대가 굵어서 그런지 성냥불은 꺼지지 않고 지붕에 떨어져 초가을 날씨에 잘 말라있는 초가를 삽시간에 살라버렸다.

집주인 김 씨 아저씨네 식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웃사람 서너 명이 뛰어 나왔으나 손쓸 엄두도 못 내었다. 물 한두 통 끼얹다가 그만두고 집과 미군들을 번갈아보며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저희들끼리 손뼉까지 쳐가며 깔깔대고 웃더니 껌과 과자가 든 깡통 몇 개를 던져 놓고는 꽝하는 큰 방귀소리를 한번 낸 뒤 떠나가 버렸다. 가면서도 그들은 연방 호쾌한 웃음소리를 남겼다.

 

함지 이고 가는 부녀자 옆에 다가가 자동차로 폭발음을 내어, 놀란 부녀자들이 함지를 팽개친 채 논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깔깔대는 광경 정도는 다반사였다.

수레 옆을 지나면서 굉음을 내어 놀란 소가 폭주하는 바람에 수레가 도랑에 빠지거나 농부와 소가 다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전쟁 전에 집에서 합포초등학교까지 2남짓 가는 동안 자동차 10대 이상 보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즈음해서는 차 소리 그칠 새가 거의 없었다.

수레에 올라앉아 고삐를 느직하게 잡고 소 가는대로 맡겨놓던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당시엔 진해나 상남에서 다니는 버스는 없었고 상남에서 오동동까지 정기적으로 다니던 열 서너 명까지 합승할 수 있는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안 다닌 것도 이런 도로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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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팔룡산 상사바위와 불암사 현재 모습>

<불암사는 일본인들이 자안지장(지장보살, 어린아이들의 수호 보살)을 모신 곳이었>

 

주로 어미니, , 누나들과 같이 보았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다들 걱정 섞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도 저기에 있을 것이란 말들도 들은 것 같다.

또 수원지 들머리 계곡들에서 좌익수 처형이 몇 번 있었고 계곡 물이 벌겋게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형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수원지길쪽과 봉덕동쪽을 가르는 산등성이 일대에 백여 기 가까운 무덤들이 있었는데(그래서 우린 공동묘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 연고 있는 무덤은 없었기네, 그 처형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짐작들을 동네 형들이 주고받는 것도 들었다.

훗날 팔룡산을 오르내리면서 건너다본 무덤들에 여우가 파헤친 흔적 같은 것이 유달리 많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묘들이 부실하게 급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고향으로 모시고 갈 수도,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으리라. 몇 년 전에 우연히 팔룡산을 오르다가 생각나 보았을 땐 무덤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우리 동네와 양덕동(역시 팔룡산 자락 동네)은 마산의 다른 동네들과 격리되었었다.

그해 칠월 말쯤 마산지역에도 소개령이 내려지자 양덕천 둑에는 이 내()를 무단으로 건너는 자는 총살형에 처함이라는 내용의 경고판이 세워졌었다고 들었다.

마산시민들 대부분은 최후방 지역인 웅천으로 보내면서 이 두 동네만 떼어서 낙동강 인근의 한림정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보도연맹사건은 소문으로 다 알려져 있었고, 여러 지역의 학살사건도 풍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더구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수원지 입구 골자기의 참상까지 목격하였던 터라 공포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었을 터였다.

시내에 약간의 척분만 있어도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도와 시내로 잠입하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감행했었다. 그래서 얼추 주민 반 가까이나 동네를 빠져나갔다고 했다.

아버지의 넓은 친분 덕으로 열 명이 넘는 우리 가족들은 시내로 잠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짐은 곡식이었는데, 갓난아이였던 여동생만 제외하고 모든 가족들이 양껏 나누어 졌다.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 친구 네 분의 집에 분산 기식(호구조사 때문)하고 있다가 열흘쯤 후 마산선창에서 웅천행 피난선을 타고 웅천국민학교로 갔다.

 

<당시 웅천국민학교와 주변 마을, 왼쪽 기와건물은 옛 웅천현 객사>

 

학교 운동장에 설치한 텐트에서 숙식하거나 동네 집 한두 칸을 세내어 들었는데 우리 집은 역시 아버지의 친분으로 어느 마당 넓은 집의 방을 두개나 얻어 생활할 수 있었다. 곡식도 가져간 것 외에 수시로 배급이 나왔다.

그런데 후에 들어본 한림정의 피난생활은 우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곡식배급은커녕 텐트나 간이화장실 같은 것도 없어 강 둔치나 모랫벌 등에서 짐승처럼 살았다고들 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끝났기에 망정이지 길었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들을 몇 번 들었다. 아니 낙동강 전선이 돌파 당했다면, 훗날 읽어본 노근리 학살 사건등과 대비시켜 보니 섬찟한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귀향 때도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았지만 열차를 내어주어 진해 경화동 역에서 타고 올 수 있었는데 그쪽에선 모두 걸어왔다고 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마을로 돌아온 뒤에도 양쪽으로 간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는 말들을 들었다.

특히 같은 동네에 살았던 외삼촌은 꽤 오랜 동안 섭섭했던 감정을 씻을 수가 없었던 듯했다.

아버지와의 술자리에서 종종 오금을 걸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우리 대식구 숨기기에도 벅찼노라고 애원하듯 설명했으나 외삼촌의 감정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던 듯, 후에도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였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도 흔쾌히 정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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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연습장처럼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암벽도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백여 미터 더 오르면 수원지지역 출입문이 나오고,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십여 미터 다리 너머(지금 운동기구 놓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산지기집 두 채가 있었다. 삼사십 평짜리들로 잘 지어진 집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이전 체제를 이어받아 산을 잘 관리하여 도회지 복판의 산인데도 많은 짐승들이 살았었다. 고라니, 노루, 여우, , 늑대, 오소리, 산돼지, 산토끼 등이었다.

정문에서 백 수십여 미터 안에 있는 둑 문 위엔 여천무극(與天無極, 댐 높이를 비유적으로 표한 듯)’이란 글이 시멘트 바탕에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써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1m 정도의 원통형 공간이 댐 꼭대기까지 뚫려있고, 그 벽엔 쇠사다리, 그 옆엔 눈금 따라 깊이 표시가 씌어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철판덮개를 밀고 나와 둑 위에 섰던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둑은 195312월에 증축되었는데 상단 직립부분이 그것이다.

수원지 길을 다 내려오면 마진국도와 맞닿는데, 왼쪽은 봉암다리로 오른쪽은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의 작은 공장들 사이 도로가 그것이다.

오른쪽 길 아래 이삼십 마지기 논 옆엔 청수들(청수淸水는 일본인 매축공사자의 이름으로 추정) 농수 공급용의 오륙천 평 저수지가 있었고(지금 영락원 일대), 서쪽으로 이십여 만 평의 논과 갈대밭이 양덕천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둑길은 저수지로부터 1km쯤 직선으로 뻗었다가 자동개폐식 수문(큰 수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100m50m 정도 가다가 팔룡산에서 오는 내()를 건넌다. 이어서 또 하나의 수문(작은 수문)을 거쳐 200m쯤 나간 후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끝난다(지금 자유무역지역 후문 근처).

 

<1951년 제작된 봉암동 일대 지도>

 

둑길은 바다와 갈대밭을 끼고 있어 거닐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2차 매립공사(현 봉암동과 자유수출지역 사이의 도로, 즉 옛 마진국도를 기준으로 위쪽을 1차 매립지, 아래쪽을 2차 매립지하고 표기)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은 듯 공사 현장이 1940년대 말까지 우리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팔룡산 자락에 흙 파는 현장이 넓게 있었고, 흙을 싣는 수레(우리는 그것 흙구루마라 불렀다)도 있었으며, 레일도 한길을 가로 건너 바다 둑 근처까지 길게 놓여있었다.

둑을 막고 팔룡산의 흙을 날라 갯바닥을 메우는 공사 방식을 짐작해 본 것은 내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그런 후에야 동네 동쪽의 팔룡산 자락이 급경사로 되어 있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수레를 위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는 아래로 밀면서 내려와 속도감을 즐겼는데, 속도에 욕심을 내다가 수레가 탈선하는 바람에 무릎을 깬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매립지 상단에 새로 닦다가 해방을 맞아 중단된 큰 도로로 있었다. 우리는 새 한질(새로 난 큰 길의 뜻)’이라 불렀다.

기존도로보다 넓었던 이 도로는 아직 덜 될 부분이 많아 개통은 안 되고 비어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이 타작마당으로 이용하거나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다녔던 떠돌이광대들이 공연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길은 1960년대 중후반에 개발되었고, 더 확장되어 지금의 마진국도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닦았던 도로는 봉암동 경남은행 뒤의 소방도로로써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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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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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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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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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8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칠원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의 실정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을 위해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시대 관찬지도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지도의 방위를 위로 구산면을, 아래로 낙동강을 두어, 북측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면

좌측면에 창원을 경계로 무릉산, 작대산, 천주산이 연이어져 있다.

위쪽으로는 창원땅을 30리를 지나서 구산면에 이르고 있다. 구산면에 청량산아래 구산진이 설치되어 있다.

우측으로는 함안을 경계로 여항산을 끼고 있으며, 남측으로는 영산강을 경계로 창녕과 면해있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동리명

設津里, 於令里,

2

자연지리

산천, 고개

광려산, 무릉산, 작대산, 천주산, 청량산,

盜賊峙, 東田峙, 白山嶺, 本邑葛峙, 龍谷峙,牛項峙, 松峙, 新塘峙, 栗田峙

14

島嶼, 나루터

昆川, 大川, 영산강, 창원강, 함안강,

江浦津, 蔑浦津, 上浦津, 松津,

猪島, 甑島,

11

인문지리

읍성

남문, 동문, 서문

3

교육

성황당, 厲壇, 향교,

3

사찰

長春庵

1

鎭堡

구산진,

1

역원, 烽燧

安咨山烽臺, 餘浦烽臺

靈浦驛, 昌仁驛,

4

고적

景釀臺, 古牧場, 古山城, 德淵書院址, 社壇, 西門樓, 烈女金氏李氏閭, 烈女申良今閭, 烈女安燕閭, 義士周宰成閭, 孝子康季欽閭, 孝子金世漢閭, 孝子金承樂閭, 孝子周道復閭

14

기타

구산면사창, 북면사창, 上里面社倉, 西面사창,

牛頭店, 邑場市, 해창

7

 

도로망을 살펴보면

읍성 서문을 나온 길은 아래로 향하여 강포진과 송진 두 개의 나루터로 향하고 있다.

함안으로 가는 길은 서문을 지나 창인역을 지나고, 여령리 마을을 지나 도적치 대로를 넘어 함안으로 갈 수 있다. 함안으로 가는 소로는 위쪽 상리면을 지나서 신당치 고개를 넘어서 가는 길이 있다.

또 다른 방향으로 송치를 넘어 영포역을 거쳐 멸포진 나루터로 가는 길이 있다.

구산면으로 가는 길은 읍내 갈치고개를 넘어, 다시 30리를 지나서 창원의 율전치 고개를 넘어야 구산면에 이를 수 있다. 고개를 넘어 서측으로 10리를 가야 해창에 이를 수 있으며, 곧장 올라가면 우항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구산진에 이르고 계속 올라가면 진해로 가는 동전치에 이르게 된다.

창원 북면으로 가는 빠른 길은 동문을 나와서 용곡치를 넘어서 가는 길이 있으며, 아래고 우항치를 넘어 창원으로 가는 소로도 있다.

주요 건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읍성 남문 아래에 향교, 사단이 있으며, 덕연서원지와 상리면 사창도 있다.

읍성 서문 방향으로 나오면 려단과 고산성, 서면사창이 있다.

동문방향을 성황당과 북면사창, 장춘암이 있다.

구산면에는 구산진과 해창, 구산면사창이 있다.

특이 하게 정려각이 8개나 표기하고 있다.

고적지로 영산강변에 정자인 경양대와 고산성과 고목장 등이 있다.

 

>>> 이상으로 전국 군현지도에 포함된 창원주변지역의 고지도 1차 해제작업은 마칩니다. 2차 작업은 이후에 지리지 및 읍지, 역지 등에 첨부된 지도를 찾아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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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진해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의 실정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을 위해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시대 관찬지도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지도의 구성은 중심이 되는 읍성을 지도 중심에 크게 배치하고, 주변에 도로망과 산세, 물길을 표현하고 있다. 진해읍성은 남북을 가로 지르는 4개의 물길 사이에 읍성이 위치하고 있어서 우선 물길부터 소개하고 도로망에 의해 마을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길을 살펴보면

읍성 우측의 하천은 입곡저수지에서 내려오는 태봉천이다.

읍성 좌측의 하천은 3개의 줄기가 합류하여 내려오고 있다. 좌측의 물길은 진북면 인곡 및 정곡저수지에서 내려오는 인곡천이며, 가운데 물길은 영학리의 학동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덕곡천이다. 우측 하천은 여항산과 광려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동천이다.

가장 왼편의 하천은 진전면에서 내려오는 진전천이다.

 

도로망의 구성을 살펴보면

읍성의 동문을 통과한 길은 태봉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가 입곡면에 이르러 칠원계(구산면)를 지나 창원부로 향하는 길이다.

서문을 빠져나온 길은 진동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 함안군 여항면 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남문을 나온 길은 마을의 보호수림인 서림을 통과해 진동천을 통과해 북면을 경유하여 서면을 지나 진전천을 따라 우회전하여 진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진전천을 넘어 직진하는 길은 고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인접 군현으로 향하는 길은 충분히 설명이 된 듯하다. 그런데 동면일대와 서면에 있는 마을로 향하는 길은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진해읍성의 주산은 도쪽에 있는 鷲山이다, 현재 교통마을 뒷산으로 해발은 400미터이며, 현재 산의 이름은 없는 상태이다.

서면의 중앙에 있는 牛山은 현재 율티면 뒤에 있는 해발 200미터의 낮은 야산이다.

북측면에 함안을 경계로 여항산이 있으며, 창원부와 경계하는 곳에 광산이 있다.

 

읍성의 배치를 살펴보면

동서남 방향으로 3개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중안에 관아를 배치하고 민가들이 다수 표현되어 있다.

읍성주변에 보호수림대인 동림과 서림이 표기되어 있으며, 남문 아래 ‘洋夷斥和碑’가 표기되어 있다. 대원군이 설치한 척화비중 하나로 보인다.

읍성 주변 건물로는 읍성 서문 태봉천 건너편 동면에 향교와 양사제, 동면사창이 설치되어 있다.

북면에는 려제단과 사직단, 북면사창이 설치되어 있다. 북면에서 상류로 올라가면 상령역이 있으며, 馬堂은 역원에서 관리하는 마구간으로 보인다.

서면에는 우산 아래 성황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어변정과 선소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북측 임곡리에 權氏旌閭가 설치되어 있다.

사찰은 의림사가, 봉수는 취산아래 봉수(가을포)가 표기되어 잇다.

 

지방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동리명

 

-동면, 서면, 북면

古縣里, 谷安里, 敎洞, 求禮里, 斤谷里, 錦山里, 內浦里, 多龜里, 大谷里, 大峙里, 大坪里, 道萬里, 東田里, 동촌, 木花里, 鳳谷里, 夫山里, 社洞里, 서촌, 船頭里, 城山里, 小浦里, 時落里, 巖下里, 鹽田里, 盈谷里, 永洞里, 禮谷里, 月安里, 栗峙里, 義谷里, 耳明里, 梨木里, 林谷里, 場基里, 鼎谷里, 酒島里, 竹田里, 倉浦里, 秋谷里, 塔洞里, 胎封里, 入谷里, 平村里, 鶴洞里, 檜洞里

46

자연지리

산천, 고개

匡山, 餘航山, 牛山, 鷲山,

4

島嶼, 나루터

蓋坐島, 弓島, 大水牛島, 小酒島, 松島, 水牛島, 羊島, 燕尾島, 猪島, 錢島, 竹島

11

인문지리

읍성

 

 

교육

社稷壇, 성황단. 養士齋, 勵祭壇, 鄕校

5

사찰

義林寺

1

鎭堡

禦邊亭, 전선,

2

역원, 烽燧

봉대, 常令驛

 

고적

權氏旌閭, 東林, 馬堂, 鳳橋店, 西林, 洋夷斥和碑

6

기타

東面社倉, 북면사창, 서면사창, 蓼場(蔘場), 이일장시, 칠일장시, 統倉

7

 

50개에 달하는 마을 명칭과 위치가 표기된 유일한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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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웅천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8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8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제를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의 실정파악은 시급한 과제였고 이을 위해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사업을, 이듬해인 1872년에는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제작 사업을 추진하였다. 조선시대 관찬지도 제작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아쉽게도 창원부의 지도는 없으며, 웅천현, 진해현, 칠원현의 지도만 소개하게 되었다.

 

 

지도의 구성은 중심이 되는 읍성을 지도 중심에 크게 배치하고, 주변에 도로망과 산세, 물길을 표현하고 있다.읍성을 중심으로 4대문을 관통하는 도로망에 의해 마을들이 나타나고 있다.

 

도로망의 구성을 살펴보면

북문을 통과한 도로는 北川을 지나 북산을 거쳐 八阪洞에 이르게 된다.

동문을 통과한 도로는 廣川橋를 馬川里를 거쳐 주막에 해당되는 洛水院店을 지나 김해계에 이르게 된다. 마천리에서 북측으로 이어지는 길은 大將洞을 거쳐 성흥사에 이르고 있다. 남측으로는 永吉里, 寶蓋山을 지나 主浦, 夫人堂場市에 이르고 있다. 다시 남하하는 길은 東面社倉과 安骨鎭에 이르고 있다.

남문을 통과한 도로는 講武亭을 거쳐 薺浦鎭을 지나 沙火郎烽燧와 禦邊亭에 이르고 있다.

서문을 통과한 도로는 邑內面社倉을 지나 完浦, 牧丹浦, 安谷里를 거쳐 飛鳳里, 飛巖洞을 거쳐서 西面社倉에 이르게 된다. 완포에서 북으로 향햐는 도로는 小峙를 거쳐 將軍里와 豐德里 場市 및 中面社倉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창원계로 향하는 두 갈레 길이 있다. 安民嶺으로 향하는 길과 馬也嶺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북쪽방향 창원부 경계면에 高山烽燧가 있으며 주변에 高山城이 표기되어 있다. 고산봉수가 있던 곳은 지금 현동에 해군기지내에 있는 山城山(해발 400M)이다.

동으로 長福山이 있으며, 좌우로 마야령과 안민령이 있다. 모두 창원으로 향하는 고개길이다. 장복산에 연이어 望雲臺과 천자봉(웅봉)이 동서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읍성 남측으로 內南山과 外南山이 있으며, 외남산은 古倭城이다.

 

읍성의 배치를 살펴보면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대문이 설치되고, 건물로는 중앙에 동헌과 객사가 좌우로 배치되어 있으며, 읍성 내에는 場市라고 표기되어 있다.

읍성 주변 건물로는 읍성 서문 인근에 慮祭壇과 鄕校가 있으며, 남측 내남산 아래 城隍祠, 講武亭, 社稷壇이 있다.

그리고 晴川鎭과 新門鎭은 權罷(잠시 멈춘 상태)되었다.

가덕도에는 加德鎭과 天城堡가 설치되어 있다. 사찰은 窟庵과 聖興寺가 있다.

봉수는 가덕도에 煙臺烽燧, 沙火郎烽燧, 高山烽燧 등 3개소 설치되어 있다.

 

웅천현 내의 물길(하천)을 살펴보면

크게 읍성 우측면을 감아도는 북천(현재 하천명은 동천)으로 천자봉에서 발원하여 하류로 흐르고 있다. 저수지는 읍성 남서측에 堤堰이 크게 표기되어 있다.

 

주요 군사시설을 살펴보면

웅천현의 지형적 조건은 전형적인 배산임해 지형으로 볼 수 있다. 북쪽방향 창원부 경계면에 長福山에 연이어 웅암산과 망운산, 가리산이 동서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지형이며, 중간 부분에 지금의 산지명으로 보면, 웅산에서 시루봉으로 다시 천자봉으로 연결되는 남북방향의 산세가 마산만을 향해 남북방향으로 가로지르는 형국이다.

이러한 지형적 여건에 의해 군사시설에 해당하는 鎭堡(陳)가 설치되었다.

가장 남덕에 위치한 가덕도에 天城鎭과 2개의 선소와 2개의 봉대가 설치되었으며, 안골포에는 安骨鎭과 新門陳, 晴川陳 그리고 加德津舍와 船所가 설치되었다.

읍성 남측에는 제포진과 2개의 선착장 (縣船所, 薺(浦)船所)과 사화랑 봉대가 있다.

내만인 하서면 일대에는 豐德領(鎭)과 西倉 그리고 高山烽臺가 설치되어 있다.

 

지승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동리명

八阪洞, 馬川里, 洛水院店, 大將洞, 永吉里, 主浦, 完浦, 將軍里, 豐德里.

9

자연지리

산천, 고개

고산성, 장복산,천자봉(웅봉), 내남산, 외남산

馬也峴, 小峴, 安民嶺

8

堤堰

堤堰

1

島嶼, 나루터

거제경도, 대마도, 만산도, 백산도, 병산도, 부도, 사리도, 수도, 연도, 이슬도, 전모도, 흑산도

12

인문지리

읍성

동헌, 객사, 4대문

6

교육

향교, 려제단, 성황사, 사직단

 

사찰

굴암, 聖興寺

2

鎭堡

제포진, 가덕진, 천성보, 권파청천진, 권파신문진

講武亭, 禦邊亭

7

역원, 烽燧

(가덕)연대봉수, 사화랑봉수, 고산봉수

3

고적

古右水營, 古倭星, 降仙臺,

3

기타

동면사창, 읍내면사창, 중면사창, 서면사창, 서창,

부인당장시, 읍내장시, 풍덕리장시

8

 

전체 지도의 구성의 특징은 타 지도에 비해 부내 소략하게 표현하였다. 읍성내 시설, 군사시설이나, 역원명, 도서명 등이 많이 생략되었다.

생략한 요인은 웅천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군사시설에 해당되는 시설은 별도로 군사지도가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웅천현 내의 군사시설지도로는 가덕진도, 안골진지도, 제포진지도, 청성진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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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廣輿圖

 

漆原縣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광여도 전체의 구성은 비변사 지도와 유사하다. 영조대 중반부터 계속되던 관찬 회화식 전국 군현지도집 편찬의 전통은 19세기에 사라지게 된다. 기호식 지도집의 등장으로 국가가 합리적인 윤곽을 가진 기호식 지도집을 편찬에 활용하게 되면서 과거의 회화식 관찬 군현지도집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비변사 지도와 비교해 보면

표현방식상 비변사지도는 방안 위에 그려져 축척에 의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방안식지도이다. 광여도의 경우 거의 배치형태가 동일하지만, 방안이 표기되지 않은 이유로 회화식으로 분류하였지만, 사실상 방안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전체 산의 배치와 읍면의 위치 등은 거의 같으나, 각 면을 연결하는 내방도로와 인접 군현으로 가는 외방도로가 생략된 것이 큰 차이다.

 

칠원현은 현재의 함안군 칠원읍, 칠서면, 칠북면 지역에 해당된다.

칠원현의 읍치는 현재 칠원초등학교 주변일대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을 표현하였다.

읍치을 중심으로 남측에 상리면, 북면과 서면 그리고 구산면으로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 상단에 있는 수계는 영산계에 면한 낙동강으로 篾浦津, 金浦津, 亏叱浦津 3개의 나루터가 있다.

중앙에 남북방향으로 읍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은 현재의 광려천에 해당되며, 읍성을 경계로 분기되는 상단의 하천은 운곡천, 하류의 하천은 칠원천에 해당된다.

 

주변의 지형은 읍치 북측에 德山이 등장한다. 칠원현의 주산은 동측에 있는 청룡산이나 지도상 표기가 누락되어있는 반면 덕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된다. 방안식 조선지도에는 청룡산과 城山이 나타나는데, 위치상으로 성산과 덕산은 같은 산일 가능성이 높다.

장춘암을 품은 산이 무릉산으로 창원부 북면에 면한 산이다.

서측에 있는 안곡산 봉대 주변의 산 이름은 생략하였으며, 남측 구산면에 청량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임해군방둔소 에 면하여 大峙山封山이 나타나고 있다.

대체적으로 주요 산세는 비변사 지도를 참조하여 그렸으나 대부분의 산지명은 생략하였다.

 

공공건물은 읍치 인근에 향교와 내원암, 묵사, 장춘사가 있으며, 상리면에는 덕연서원이 있다.

구산면에는 구산진과 선소와 해창 그리고 (수정포)稅所와 淑媛房屯所와 臨海君房屯所가 배치되어 있다.

봉화는 구산면의 창원봉대에서 안곡산 방대를 거쳐 영산계로 연결된다.

역원은 창인역이 있으며, 주요 교통로는 생략되었다.

인접 군현 길목의 고개를 살펴보면, 동측으로 내서면 감천으로 넘어가는 甘溪峙, 서측으로 함안으로 넘어가는 於嶺峙險阨, 구산면에서 서측 진해현으로 넘어가는 東田峙險阨 등이 있다.

 

구산면에서 해창의 위치는 현채 덕동 하수종말처리장 위치로 판단되며, 구산진이 설치된 곳은 현재 구산면 수정리 일대로 보이며, 선소의 위치는 STX에서 조선소를 설치하려고 했던 ‘수정 일반산업단지’ 위치에 해당된다.

지도 남측의 저도는 구복리 저도로, 최근 콰이강의 다리에 설치된 바닥투시경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는 명소이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上里面, 西面, 北面, 龜山面

4

자연지리

산천

德山, (구산면) 淸凉山,大峙山

3

고개

於嶺峙險阨, 甘溪峙, 東田峙嶺阨

3

나루터

蔑蒲津, 金浦津, 亏叱浦津

3

기타

穴岩, 猪島

2

인문지리

공해

龜山鎭, 海倉, 船所, (水晶浦)稅所, 臨海君房屯所, 淑媛房屯所

6

교육

향교, 덕연서원

2

사찰

長春寺, 墨寺, 內院庵

3

역원 등

靈浦驛, 昌仁驛

2

烽燧

안곡산봉, 창원봉

2

 

 

칠원현 광여도 地志

 

- 별도의 地志에 수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2,970호

- 인구 : 10,551명 (남자 5,140명, 여자 5,411명)

2

군병

- 京各司諸色軍 : 564명

- 監營屬 : 90명

- 統營屬 : 541명

- 右兵營屬 : 282명

- 金海鎭屬 : 609명

= 합계 2,086명 

 5

지리

시설

기타

시설

- 구산진 : 官距 53리, 전선1척, 병선1척,

- 덕연서원 : 사액서원

- 昌仁驛 : 대마1필, 기마2필, 복마10필

- 靈浦驛 : 대마1필, 기마2필, 복마9필

- 船材封山 : 청량산, 선두산, 대치산, 시궁산, 저도주면

4

경제

量付

- 전 1,736결36부, 실결 966결 23부

- 답 877결60부, 실결 593결92부

 

곡물

- 別餉米 : 514석 9두, 租10석 13두

- 元會米 : 44석 7두, 잡곡 434석 9두

- 常賑米 : 264석 10두, 잡곡 1,887석 4두

- 監營米 : 5두, 잡곡 6,259석

- 統營米 : 253석 12두, 잡곡 1,662석 13두

- 浦項雜穀 : 469석 5두

- 私賑雜穀 : 1,077석 1두

- 帖價牟 : 326석 9두

- 備荒租 : 551석 3두

- 儲置米/저치미 : 782석 6두

- 除留米 : 70석 6두

- 各樣軍作米 : 119석 9두

- 射軍作牟 : 590석 14두

12

 

비변사지도에 수록된 지지내용과 동일하다. 1760년 제작된 비변사 지도와 19세기 초반사이에 약 40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인구 및 군사, 조세 및 경제 지표의 변동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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