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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7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4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3

 

앞에서 본 것처럼 창원신도시의 계획과정에서 제시되었던 원칙들은 어디 내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최초의 의도는 건설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건설 후 관리과정에서 더 손상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따라 백년대계가 되어야할 도시정책이 갈지()자 걸음을 걸은 탓이다.

대원2구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간대자본 투입이 용이치 못해 단지를 소규모로 나눈 것이 대원2구역의 가장 큰 문제였다.

소규모로 분절된 부지로서는 도시계획에서 내세웠던 아파트 단지 계획의 여섯 가지 원칙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획 당시 창원 신도시 조감도>

 

창원공단 조성 2년이 경과한 1976년 말에는 공단에 58개 업체가 입주하였고 그중 18개 업체가 가동에 들어가 6천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기타 건설관련자 등 인구 유입이 확대일로에 있었다.

이런 여건을 배경으로 주거지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77년 말경이었다. 택지개발을 착수 시기별로 나누어보면 197717개 지구, 197811개 지구, 19791개 지구, 19871개 지구 등이며 91년까지 39개 지구가 완료되었다.

대원2구역이 속한 두대지역은 이중 가장 먼저 시행되었으며 면적은 56.73였다. 두대지역의 택지조성은 773월에 시작해 819월에 완공하였으며 주용도는 단독주택 및 아파트 단지였다.

공단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과 공단에 입주한 기업체 직원들을 위한 주거용지였다.

개발방식은 전면매수에 의한 공영개발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저렴한 가격의 안정적인 택지공급에 역점을 두었다. 철거 원주민과 이주민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택지는 조성원가로 공급하였다.

택지조성이 가장 빨랐던 두대지역의 대원2구역 아파트들은 대부분 80년대 초중반에 지어졌다. 시범주택으로 77년 지어진 세플러 사원아파트도 있지만(법적 사용승인은 8493) 나머지 모든 아파트의 건축시기가 80년대 초중반이다. 택지조성이 가장 앞섰듯이 건축공사 시기도 빨랐다.

아파트가 주거문화로 정착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부터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의 홍수는 198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주택 2백만 호 건설공약 때문이었다. 대원2구역 아파트 건설이 대부분 끝난 뒤였다.

2백만 호라는 애당초 무리한 주택건설정책은 노태우 정권 내내 시행되었고 창원지역에도 영향이 크게 미쳤다.

비민주적인 권력의 행태가 언제나 그렇듯이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은 일선 행정기관으로 하달되었고 그에 따라 경남도청 및 각 시군의 담당국과에서는 매일 주택건설 독려에 혼신을 다했다.

자연히 도에서 한 해 지어야할 주택의 량이 할당되었고 그렇게 할당된 양은 각 시군으로 재할당되어 시군 주택건설 목표치가 되었다.

주택 2백만 호 건설로 열린 아파트 시대는 민간건설업체에 의한 브랜드아파트를 등장시켰고 이에 따라 각 건설사의 아파트들이 내용에서 약간씩 차별화되었다.

대량공급이 시작되면서 아파트들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건설에 효율적인 획일화된 블록배치가 대부분이었다.

주택 2백만 호 건설로 인해 아파트건설이 규모와 내용에서 많이 달라졌지만 대원2지역의 아파트가 80년대 초중반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직접 관련은 크게 없다.

  새롭게 사람들 앞에 나타난 아파트라는 주거양식이 미래에 어떤 가치를 가질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아파트가 우리 주택양식의 주류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전문가마다 의견이 달랐다.

아파트가 미래 한국사회의 주류 주거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고, 아파트는 단지 전환기의 주거수단일 뿐 장기적으로는 단독주택의 대체수단이 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대원2구역의 아파트들은 창원신도시 주거양식의 선도적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도 있다.

윤장섭은 아파트를 주택이 증가하면서 도시가 평면적으로 교외로 확장됨에 다라서 도시주변의 농경지가 침해될 뿐 아니라 도시의 급속한 확장에 다른 교통문제, ·하수도, 전기, 기타 각종 공공시설들의 해결안 등의 불합리한 점을 막기 위해서 주택을 고밀화 시킨 것 이라고 정의했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신도시 창원이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원2구역 일대를 시작으로 대량의 아파트를 공급한 정책은 시간과 공간적 측면에서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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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0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2

 

창원 신도시에 주거용 건물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며 한층 혹은 심지어 한층 반 씩 세를 놓을 수 있는 평면구조가 대부분이었다.

임대와 매매를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에 공간구조나 외형에서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역시 초기에 공공주택으로 건설한 반송동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기업이 참여해 지은 평범한 것들이었다.

이는 창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택이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한국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197691일 마산시가 설치한 창원지구출장소는 1977년 인구 30만 수용(1986년 기준)의 창원 신도시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197691일 창원지구 출장소 개소식 장면 /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산업도시로서의 창원신도시 기본계획의 목표에는 여섯 가지의 전제조건이 담겨있었으며 그 내용은 국내 및 국제사회와의 상호교류, 지속될 경제성장, 신도시와 기계공업단지와의 긴밀한 연계, 기계관련 공업의 타 도시 파급, 기계공업 육성 및 국내외 교역증진, 시민소득상승과 지방재정확대 등이었다.

1979년 완성된 도시계획은 이 여섯 가지를 토대로 성립되었으며 그 중 주거지역은 저밀도주거지역(단독주택), 중밀도주거지역(아파트+연립주택), 고밀도주거지역(아파트) 등으로 배분하고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였다.

단독주택의 배치는 남향과 동향을 원칙으로 하고 건폐율은 50%, 건축선은 3m, 주변건물과 조화롭게 함

연립주택은 복합형식의 배치를 원칙으로 다양한 형식의 배치를 통해 아늑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도록 함

아파트 단지 계획

. 병렬형은 가능한 지양하고 유기적인 경합방법으로 배치

. 단지 내 통과교통을 배제하고 보차 동선을 분리

. 학교 및 공원 등 주요시설과는 보행자 도로로 연결되도록 계획

. 충분한 오픈스페이스로 일조, 채광, 통풍 등이 양호하도록 계획

. 차음 및 주거환경보호를 위해 도로변에서 건축선을 6m 후퇴

. 적절한 규모의 공공주차장 설치

이러한 원칙들을 적용하여 개발하기 시작한 주거지역 중 대원2구역은 전체 도시계획에서 제시된 5개의 중생활권(상북, 중앙, 상남, 가음, 기타) 가운데 중앙 중생활권에 속하고 있다.

중앙 중생활권에는 6개 지역의 소생활권(반지, 두대, 중앙, 반림, 용지, 사림)이 포함되어 있다. 대원2구역은 이 6개 소생활권 중 두대지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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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주거시설의 형식도 변했다.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자연조건과 생산의 수단 및 관계 변화였지만 때로는 정치 사회의 변화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거형식이 가장 비약적으로 변한 시기는 소위 근대적 건축술이 등장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술도 들어왔다.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시행되었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주택과 점포를 겸한 단층 혹은 이층의 주상(住商) 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은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 등으로 나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등장한 주택으로 대개 전통주택에 일식(日式) 혹은 서양식을 일부 채용한 형식이다.

하지만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린 도시 빈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토막(土幕)이란 땅을 파서 주거공간(움집)을 만든 뒤 짚이나 거적을 덮어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집으로 가장 열악한 주거형태였다.

1945,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이어진 전쟁은 주거상황을 더욱 깊은 질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수출중심 경제정책을 택했고 그 결과 발생한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들은 집을 마련할 경제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도심지에 세()를 얻을 형편에도 미치지 못한 가구가 많아 이들 중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했다. 무허가 판잣집과 달동네의 출현이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3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도시계획법 및 건축법, 1963년에 토지수용법과 주택자금운용법 및 국토건설종합계획법 등을 제정하여 민간부분의 주택 건설을 촉진하였다. 1969년에는 주택은행도 설립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1979년에는 토지금고(한국토지개발공사)를, 1981년에는 국민 주택기금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이 모두는 국가의 공공 재정이 아닌 민간재정을 투입하는 주택정책이었다.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마산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창원기계공단 건설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로 인해 주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마산의 석전·양덕·합성동 일대를 아우르는 동마산 개발도 이 때문에 시작된 사업이었다.

이 시기의 주거는 대부분 단독주택이었다.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미된 개량형 주택으로 취사 및 난방연료는 주로 연탄이었다.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급속히 커진 주택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 집장사가 지은 주택, 건축가가 설계한 일부 고급주택, 무허가 주택 등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주택시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집만 지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심리 때문이었다.

수요급증으로 폭등한 집값으로 무주택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게 되자 1977년 정부는 주택 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고소득층에게는 아파트를 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여 되팔 수 있는 기회로 둔갑되어 투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분양가 상한제의 또 다른 부작용은 획일화된 아파트 공급이었다. 분양가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창의적인 건축보다는 정해진 값으로 똑같은 아파트 짓기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분양가 상한제 실시 1년 후인 1978, 공동주택을 시공 단계에서 분양할 수 있는 선분양 제도를 도입하였다. 건설업자들의 재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조감도 밖에 없는 그림 속의 아파트를 사고팔았고, 그림 속 아파트 분양 당첨을 위해 가족들이 교대해가며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선분양 제도가 기업의 재투자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주택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토지확보만으로 거액의 분양수익이 창출되었던 기형적인 시스템이 기업주의 과도한 이윤욕을 부추겨 유수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성 중인 창원공단 제1단지. 창원대로와 남천이 뚜렷하다. 사진의 왼쪽하단 일대가 대원1구역 / 1976년 항공촬영, 국가기록원 소장>

 

신도시 창원은 이러한 상황과 함께 탄생하였다. 하지만 창원 신도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에 정부가 바뀌었다.

국가중공업산업의 중흥을 꿈꾸며 창원벌판에 신도시 계획을 세웠던 유신정권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고 그 뒤를 이어 제5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유신정권은 끝났지만 또 다른 형태의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경제였다. 때맞춰 불어든 3(저유가, 저환율, 저금리)현상으로 좋아진 경제사정 때문에 국내건설업계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없었다.

따라서 건설업의 국민총생산 차지비율이 높았고 타산업과의 연계효과와 고용효과도 높았다. 거기다가 사회간접자본도 현저히 부족했던 때였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인식, 경기부양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건설경기부양책을 폈다.

60년대부터 산업화되기 시작한 마산은 물론, 1980년 독립 시()로 분리된 창원지역의 건설경기가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였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아파트의 대중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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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

 

<이번 포스팅은 창원 의창구 대원동에 재건축 중인 '꿈에그린' 아파트 부지(아래 그림의 붉은 밑줄친 부지)에 존재했던 현대사원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아파트들에 대한 내용이다. '마을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리했던 글이다.

 

 

목차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3. 공간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4. 외관의 변화와 대원2구역 아파트

5. 마치는 글

 

 

1. 시작하는 글

19721017일 유신헌법 체제로 시작된 제4공화국은 공업입국을 위한 기계공업의 요람지로서 1970년대 중반부터 창원공업단지(이하 창원공단)를 개발하였다.

창원공단은 국제적인 규모의 기계류 공장을 집단화함으로써 기술집약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관련 기계류 공장의 전문화와 계열화로 투자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계공업단지이다. 

당시 마산시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창원지역을 기계공업단지로 결정한 요인은 다음과 같다.

포항·울산·구미·부산·마산 등 다핵적 공업벨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고속도로 및 경전선과 진해선의 철도분기점이면서 마산항을 끼고 있어 물류이동이 유리하다.

표고 500800m의 구릉에 둘러싸인 1,500만평의 광활한 평지형 분지를 확보할 수 있다.

지반이 견고하여 중량물 공장 건설에 유리하다.

낙동강으로부터 송수가 가능하여 공업용수와 생활용수 확보가 유리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강우량 등 천연조건이 기계공업에 적합하다.

수림이 울창한 작은 구릉이 점재하고 있어서 경관이 아름답다.

 

이상과 같은 입지조건을 배경으로 시작된 창원공단에 건 제4공화국의 기대와 계획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국가의 기계공업을 이끌어갈 대규모 종합기계공업단지를 조성한다.

시험연구소 및 기술교육기관을 통해 우수한 기술자와 기능공을 양성하는 산업교육기지로 발전시킨다.

창원대로를 경계로 남서쪽에 공업단지를 건설하고 이와 조화시켜 창원대로 북동쪽에 새로운 산업도시(이하 창원신도시)를 건설한다.

 

이러한 기대 속에 세워진 창원신도시 건설의 기본방향은 건전한 도시기반의 구축, 쾌적한 환경 조성, 도시기능의 정비, 사회복지 및 후생의 증진, 교육문화 및 인력개발, 도시미관의 정비, 도시의 개발, 도시계획의 추진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작성된 기본구상도가 아래 그림이다.

<1973년 대통령비서실 문서 속의 창원기계공업기지 기본구상도 / 출처 ; 대통령기록관>

 

추진 일정은 1975년을 기준연도로 하고 77년을 계획연도, 86년을 목표연도로 잡았다. 경기도 반월, 전남 여수와 함께 무에서 유를 만든 신도시로 우리나라 도시발달사의 획기적인 사례였다.

신도시의 개발계획은 3단계로 나누어 시행하기로 했다. 그 중 주거시설은 제1단계(7779)18,190호의 주택과 공공시설, 2단계(8082)61,520호의 주택과 공공시설, 3단계(8386)94,076호의 주택과 공공시설을 건설하도록 계획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의해 도시 곳곳에 택지를 개발하였는데 대원2구역이 자리한 두대지역이 최초로 개발된 주거단지였다 

창원공단과 신도시 건설조성 과정에는 토지수용과 이주민대책이라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적절한 보상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지역주민의 피해가 컸다.

불가피한 진통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창원공단과 신도시는 이들 원주민의 피해 위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총규모 1,470만평에 달하는 전래의 전답·대지·임야·주택·생활시설·도로 등을 모조리 갈아엎은 뒤 공단과 신도시를 조성했기 때문에 토지매수와 지장물 철거, 그리고 대대적인 거주민 이동이 이루어 졌다.

외동·내동·남산동 일대 15개 마을이 걸쳐있던 주민은 용호동에, 적현단지 주민은 외동에, 삼동·완암·귀곡·안민단지 주민은 두대동에 각각 이주단지를 조성하여 택지를 분배하였다.

원주민들에게는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곳이자 생활을 기탁해온 보금자리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떠나야했기 때문에 시대가 요청한 이향(移鄕)은 이주민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는 심각하였다.

 

<19789, 실향민들과 공무원 사이에 벌어진 몸싸움 / 2001년 창원의 옛모습 사진전>

 

택지를 분양 받았다고 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건축비가 없어 집을 짓지 못하고 땅을 되파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 집을 짓다가도 돈이 모자라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제2의 이주민도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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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초기 유화 국면이다.

그러나 의거가 발생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정권과 특히 경찰 조직의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증언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315의거와 4월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었다(남부희, 1995; 이은진, 2004; 남재우, 2005).

다음, 1987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노태우 민선정부가 들어서고 뒤이어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여당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31019315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만 유공자 발굴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하상칠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2002년 이른바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증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해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자 국립묘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증언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10년에 “315의거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비로소 국가가 기념하는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정치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장기 지속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증언록, 478).

이 진술은 그의 진심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녹취를 풀어낸 사람이 지어낸 미사려구일 것이다.

 

<회갑연 때 아내 신을순과 함께 / 1985년>

 

필자는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염려되고 또 자신의 묘 자리에 관심이 커졌는데 유공자가 되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부언하기를 자신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자손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또 자손들에게 마지막 교훈도 남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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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6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쾌적한 환경까지 제공되는 주방으로 변했다. 주부의 의지에 아파트 분양의 성패가 달렸다는 사실을 간파한 건설업자의 전략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각종 기기들은 이와 조화를 맞춘 가구와 더불어 빌트인(builtin)시스템 방식을 탄생시켰다. 미디어·방재·교류 등 생활시설들도 획기적으로 변하였으며 모든 시설들이 자동 혹은 원격 조정이 가능하도록 변하고 있다.

 

<주방기구 생산업체의 빌트인 주방 시스템 광고화면>

 

이처럼 시설이 고급화 첨단화된 아파트는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삶을 점점 아파트 내부로 고립시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 외부와의 소통과 교류는 줄어드는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였다.

이런 문제는 가족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아파트는 부모 세대와의 동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마당과 마을이라는 외부공간과 함께 존재했던 옛 단독주택과 달리 노인의 활동반경은 좁아졌고, 생활습관과 생활주기의 차이로 노인은 가족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가고 있다.

자식이 사는 아파트에 잠깐 들른 부모는 주인 있는 침대 옆 한 쪽 바닥에 몸을 뉘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 성장과 함께 찾아온 실존에 대한 관심이 주거형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절대 빈곤시대에 시작된 양적 욕구가 질적 욕구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일터 보다는 삶터, 일보다는 여가가 소중한 가치임을 알게 하였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서 새로운 주택들이 등장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와 건강한 삶을 위해 아파트를 버리고 전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다 미래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실현하기 위해 생태건축을 실험적으로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 동안 집안에서 이루어졌던 가사활동들이 점점 집 밖에서 이루어지고, 교육 직업 등으로 가족이 분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 주거의 탈주택화 현상 또한 이미 시작된 변화다.

최근 일어난 특기할만한 일은 200710월에 공사를 시작해 2015년 말에 준공한 진주 혁신도시 건설이다.

면적 4,093,000에 계획인구 38천여 명(13,902)으로 계획된 신도시이다.

 

<진주 혁신도시>

 

친환경 미래도시를 목표로 건설된 혁신도시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중소기업진흥공단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주거시설과 함께 들어서있다.

단독주택은 물론 연립주택과 아파트 그리고 주상복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친환경을 내세우고 조성된 신도시인 만큼 미래주거발전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난 4월 16일부터 시작한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는 이번 14회로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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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경남의 주택보급율은 121.8%(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 보급율은 2010104.3%)에 이르고 있다.

주택의 절대량은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달리 자가 거주율은 전국기준 197071.7%, 8058.6%, 200054.2%로 점점 낮아지고 있다.

그간 지속적으로 공급된 주택이 수요를 고루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소유 편중 문제는 계층분리 문제와 함께 양적 공급에만 치우쳐온 잘못된 주택 정책의 결과라 하겠다.

2000년대에 들어서 기존의 도시 밀집지역과 노후 공동주택들에 대한 재개발 재건축 바람도 도시주거지의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하지만 재개발 재건축 사업은 소형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하위 계층을 주변부로 내몬다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통합 전 창원시가 시행한 반송동의 재건축 사례가 대표적이다.

원래 이곳에 있던 아파트는 창원 기계산업단지 노동자들을 위해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대 창원시 건설초기에 지은 소형 아파트였다. 반송주공아파트라고 불렀다.

총 규모 4,560세대에 연면적 54,450평이었다. 세대 당 평균면적 11.9평이었던 셈이고 용적률은 69.7%, 층수는 5층이었다.

단위면적도 작고 사용한 건축자재도 소박했지만 공간의 밀도가 낮아 환경이 나쁜 주거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건축 후에는 14-18층 총 5,316세대에 연면적이 지상만 190,616평으로 변했다. 지하까지 포함하면 239,893평으로 건물 면적이 대폭 늘어났다.

행정에서는 재개발 승인 이유를 주택 공급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지만, 늘어난 세대수는 756세대로 겨우 16.6%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면적은 지상 250%, 지하까지 포함하면 340.6%나 늘어났다. 용적률도 69.7%에서 243.9%로 상승해 공간의 밀도가 대폭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볼 때, 창원 반송주공아파트 재건축사업은 서민들의 생활 편익을 고려해 건설된 도심 소형아파트가 중상류층을 위한 아파트로 변한 것이다.

생활이 편한 도심지역은 부유한 계층이 차지하고 서민들은 점점 도시 외곽으로 내몰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말이다.

<재건축 후의 반송동 아파트 단지>

 

실제로 재건축 직전까지 이곳에서 임대를 얻어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인근 읍면 지역으로 흩어졌다.

개발이익을 염두에 둔 무분별한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도시공간은 물론 사회적 밸런스까지 무너뜨리는 역기능을 한 것인데 경남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창원 반송아파트의 사례는 향후 지속적으로 일어날 재개발 및 재건축사업이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 외에도 도시지역의 아파트 건설은 경관·교통 등 도시 관리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라는 주거형식은 택지가 좁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의 조건에서 쉽게 포기될 수 없는 대안이다.

향후 새로운 대안이 창출되지 않는 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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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라는 애당초 무리한 주택건설정책은 노태우 정권 내내 시행되었다.

비민주적인 권력의 행태가 언제나 그렇듯이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은 일선 행정기관으로 하달되었고 그에 따라 경남도청 및 각 시군의 담당국과에서는 매일 주택건설 독려에 혼신을 다했다.

자연히 각 광역단체에 한 해 지어야할 주택의 량이 할당되었고 그렇게 할당된 양은 각 시군으로 재할당되어 시군 주택건설 목표치가 되었다.

목표달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고밀도아파트가 대규모로 지어졌으며 여러 가지 폐해를 남겼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상처가 바로 시골 논밭 한가운데 서있는 속칭 나 홀로 아파트이다.

 

<논밭 가운데 서있는 속칭 '나홀로 아파트'>

 

2백만 호 건설은 진주지역에도 많은 변화를 남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이다. 진주시사에 기록된 평거지구 택지개발사업 목표의 첫머리에는 정부의 200만 호 주택건설에 필요한 택지를 공급 충족시키고로 시작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소자본을 갖춘 주택건설업자들도 도시 주거지에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했다.

이들 연립주택들은 주거생활의 편리성과 함께 외부공간과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층의 장점도 있었으나 대부분 소규모 단지로 이루어져 아파트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부유층들은 보다 질 높은 주거환경을 원했기 때문에 소위 빌라(Villa)’라는 이름의 고급 연립주택도 많이 보급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농촌주거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1987년 이후 행정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고 농민의 경제력 축적에 의해 자유 의지로 지어진 밀양·양산·울산지역의 농가주택을 연구한 자료(박경옥·유목희, 주민 자유의사에 의해 최근 신축된 농가주택의 건축적 특성 및 생활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이 농가주택들은 평균 145평의 비교적 넓은 대지에 앉아 있었다.

 

<평슬라브 지붕에 붉은 벽돌로 마감한 농촌주택>

 

대부분 남향으로 배치된 단층 평슬라브 지붕에 외벽을 붉은 벽돌로 마감한 주택들이었다. 평지붕에는 이전 주택에서 볼 수 없었던 옥상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건조대·장독대·농기구 보관 장소로 이용하였다.

모든 가구에 냉장고를 들였으며 80% 이상이 세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모든 가구가 입식부엌이었고 그중 55% 이상의 가구가 식탁에서 입식생활을 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취사열원은 전 가구 LPG가스를 이용하였고 난방열원은 기름보일러가 정착되어 취사와 난방 열원이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내 화장실은 세정의 기능과 함께 물을 쓰는 다용도실의 개념이 혼합된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부에 배치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부터는 소규모 공동주택으로 볼 수 있는 다세대주택 및 다가구주택이 많이 지어졌으며 사무실에 간단한 주거시설을 갖춘 오피스텔도 나타났다.

최근에는 주거용 건물과 상업용 건물의 혼합 형태인 주상복합건물이 공급되었다. 경남에서는 창원의 시티세븐이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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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아파트이다.

 

<재개발 이전의 창원 용지 주공1단지 아파트>

 

아파트라는 다소 특이한 주거형식의 시작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타운하우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심리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우리의 아파트는 계층 간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달리 취급되고 여가와 취미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아파트는 오직 현관문 하나만으로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하고 짧은 동선이 주는 편리함과 단열 및 보온이 주는 냉난방시설의 효율성 때문에 도시주거형식으로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량공급이 가능해 부족한 주택 량을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하면 매매도 용이해 교환가치도 높다.

이런 점들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범 계층적 주거형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경남은 2010년 기준으로 단독주택이 40.1%인데 비해 아파트가 54.1%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경남에서도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영리를 목적한 민간기업의 아파트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형 단지개발 보다는 기존 택지와 산업용지에 재개발 형식으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산 산호동 용마맨션 및 양덕동 정우맨션 같은 단일건물 형 아파트 혹은 산호동 용호·산호 아파트처럼 구획정리지구 내의 5층 규모 아파트가 당시에 건설된 아파트들이다.

비슷한 시기,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외국지원 주택건설 사례도 있다.

<마산 회원동 화란주택 / 최근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

 

옛 마산시 회원동의 화란주택이 그것으로, 1977년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네덜란드의 세베모라는 교회지원단체 협조를 받아 1981년에 완공하였다.

입주자는 수재민과 빈민 그리고 천주교가 추천하는 가구였으며 집과 마을의 설계까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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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꿀 것을 강압적으로 독려하여 옛 부터 이어 온 초가지붕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초가지붕 대신 들어선 울긋불긋한 원색의 낯선 지붕들은 자연경관과 부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초가지붕이 가지고 있었던 단열기능과 빗물처리의 능력을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가 대신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집이 되거나 비가 자주 새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시작된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1978년에 이르러 목표 대비 107%의 초과 실적을 올리게 된다.

목표를 초과달성한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국의 농촌주택을 새롭게 건설할 요량으로 1978년부터 표준농촌주택설계안을 마련하여 재정지원을 약속하며 권장하였다.

하지만 입식부엌과 마루를 중심으로 한 집중형 평면의 표준주택은 농촌지역의 풍토와 생활관습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융자금 상환에 대한 부담까지 작용하여 농민들로부터 외면 받아 실패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농민들의 자발성이 매우 두드려졌지만 해가 갈수록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통령의 최고관심사가 새마을운동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거둔 공무원들의 실적은 승진과 바로 직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들이 지붕개량을 하지 않는 집의 초가지붕을 갈고리로 뜯어내거나 통일벼를 심지 않은 못자리를 장화발로 짓밟는 일까지 빈번히 발생하였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경직된 분위기는 이런 상황을 묵인 방조하였다.

새마을운동이 농촌근대화의 징표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수백 년 이어온 집과 마을의 경관이 하루아침에 낯선 모습으로 일시에 뒤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타율적 존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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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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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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