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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아파트이다.

 

<재개발 이전의 창원 용지 주공1단지 아파트>

 

아파트라는 다소 특이한 주거형식의 시작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타운하우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념적으로는 19세기 서구사회에서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이상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심리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줄 것으로 기대했던 바람과 달리 우리의 아파트는 계층 간 분리라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 달리 취급되고 여가와 취미 등 삶의 질을 결정하는 생활방식도 달라졌다.

아파트는 오직 현관문 하나만으로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단순하고 짧은 동선이 주는 편리함과 단열 및 보온이 주는 냉난방시설의 효율성 때문에 도시주거형식으로 일반화된 지 오래다.

대량공급이 가능해 부족한 주택 량을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 하면 매매도 용이해 교환가치도 높다.

이런 점들 때문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범 계층적 주거형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경남은 2010년 기준으로 단독주택이 40.1%인데 비해 아파트가 54.1%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경남에서도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영리를 목적한 민간기업의 아파트 개발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형 단지개발 보다는 기존 택지와 산업용지에 재개발 형식으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산 산호동 용마맨션 및 양덕동 정우맨션 같은 단일건물 형 아파트 혹은 산호동 용호·산호 아파트처럼 구획정리지구 내의 5층 규모 아파트가 당시에 건설된 아파트들이다.

비슷한 시기,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외국지원 주택건설 사례도 있다.

<마산 회원동 화란주택 / 최근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

 

옛 마산시 회원동의 화란주택이 그것으로, 1977년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네덜란드의 세베모라는 교회지원단체 협조를 받아 1981년에 완공하였다.

입주자는 수재민과 빈민 그리고 천주교가 추천하는 가구였으며 집과 마을의 설계까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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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로 바꿀 것을 강압적으로 독려하여 옛 부터 이어 온 초가지붕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초가지붕 대신 들어선 울긋불긋한 원색의 낯선 지붕들은 자연경관과 부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초가지붕이 가지고 있었던 단열기능과 빗물처리의 능력을 시멘트 기와나 슬레이트가 대신 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집이 되거나 비가 자주 새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시작된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1978년에 이르러 목표 대비 107%의 초과 실적을 올리게 된다.

목표를 초과달성한 정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전국의 농촌주택을 새롭게 건설할 요량으로 1978년부터 표준농촌주택설계안을 마련하여 재정지원을 약속하며 권장하였다.

하지만 입식부엌과 마루를 중심으로 한 집중형 평면의 표준주택은 농촌지역의 풍토와 생활관습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융자금 상환에 대한 부담까지 작용하여 농민들로부터 외면 받아 실패하였다.

 

 

새마을운동은 초기에는 농민들의 자발성이 매우 두드려졌지만 해가 갈수록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통령의 최고관심사가 새마을운동이다 보니 그 과정에서 거둔 공무원들의 실적은 승진과 바로 직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들이 지붕개량을 하지 않는 집의 초가지붕을 갈고리로 뜯어내거나 통일벼를 심지 않은 못자리를 장화발로 짓밟는 일까지 빈번히 발생하였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경직된 분위기는 이런 상황을 묵인 방조하였다.

새마을운동이 농촌근대화의 징표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수백 년 이어온 집과 마을의 경관이 하루아침에 낯선 모습으로 일시에 뒤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타율적 존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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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로 파괴된 주택을 근근이 보수한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새로 짓는 주택들도 생활상의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새 유형이 출현하지 않았고 지방 목수들에 의해 재래식 건축기법이 전승되고 있었다.

농촌 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화한 것은 1971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새마을운동의 구호에는 그 때까지 있어온 농촌의 전근대적 시설들을 바꾸어 보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활환경개선이라는 선한 의지에 비해 정치적 의지라는 워낙 큰 힘이 내재된 탓에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우리의 친자연 주거문화가 일순간 시멘트로 바뀌어 버렸다.

아무런 논의와 비판 없이 오랜 세월 정들었던 흙벽과 초가지붕이 한순간 없애 버려야할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새마을운동 지붕개량사업 / 경기도 화성 / 농촌진흥청 제공>

 

그 뿐만 아니다. 그 시기 혹 권세 있는 양반이 내려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동네 모습이 변하기도 했고, 고속도로변에 위치한 마을 주택에는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도 않는 현란한 색상이 슬레이트지붕을 덮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농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던 이 혼란스러운 변화는 소위 농촌개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새마을운동은 정부가 농촌근대화를 목표로 주도한 여러 가지 사업으로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농촌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였다.

그중에서도 마을환경개선사업과 농촌주택개량사업은 마을과 주택의 형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생활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마을환경개선사업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확장하는 것으로부터 하천 보수, 상하수도 건설, 그리고 전기 설비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도로의 확장이나 정비는 교통수단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이웃 마을이나 도시와의 교류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1972년 서울 서대문구 마을환경개선사업 / 서대문구청 제공>

 

상하수도의 설치는 가사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전기 가설은 조명뿐만 아니라 가전제품이 농촌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기화로·전기밥솥·냉장고 등의 취사용품은 가사노동의 성격과 양을 바꾸었고 라디오나 TV 등 전파매체는 근대화된 도시문화를 신속하게 농촌으로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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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미된 개량형 주택이었다. 취사 및 난방연료는 주로 연탄이었다. 연탄이 들어온 주방에는 공간이용 패턴에 다소 변화가 생겼지만 바닥높이 등 구조형식은 재래식 그대로였다.

주택 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 집장사가 지은 주택, 건축가가 설계한 일부 고급주택, 무허가 주택 등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상황의 저변에는 모두들 집만 지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1981)에서 집합주택 건설의 양산체제를 확립해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 서민용 소규모 주택건설은 공공부문에서 맡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택 보급률은 높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주택에 대한 투기 붐도 꺼지지 않았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무주택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게 되자 1977년 정부는 주택 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본격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고소득층에게는 아파트를 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여 되팔 수 있는 기회로 둔갑되어 투기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분양가 상한제의 또 다른 부작용은 도시가 획일화된 아파트 숲으로 변한 것이었다. 분양가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건축가의 창의성은 무시되고 정해진 값으로 지어진 획일화된 아파트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정부는 분양가 규제 실시 1년 후인 1978, 공동주택을 시공 단계에서 분양할 수 있는 선분양제도를 도입하여 건설업자들의 확대재투자를 촉진시켰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가지는 것이 꿈이었던 서민들은 조감도 밖에 없는 그림 속의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청약통장에 몇 년 씩 돈을 부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파트 분양 당첨을 위해 가족들이 교대해가며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기업의 재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선분양제도는 기업주의 과도한 이윤욕을 부추겨 유수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974년 정부는 국가 중공업산업의 중흥을 계획하며 창원벌판에 기계공업단지와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였다.

<계획 당시 창원 신도시 조감도>

 

창원의 도시계획규모는 인구 30만이었고 저밀도주거지역(단독주택), 중밀도주거지역(아파트+연립주택), 고밀도주거지역(아파트) 등을 고루 배치하고 있었다.

창원 신도시에 단독주택들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며 한층 혹은 심지어 한층 반 씩 세를 놓을 수 있는 평면구조가 대부분이었다.

임대와 매매를 염두에 두고 지었기 때문에 공간구조나 외형에서 별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역시 초기에 공공주택으로 건설한 창원 반송동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대기업이 참여해 지은 고층 아파트들은 평범한 판상형으로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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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수출중심의 산업구조를 지향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빚은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家口)들은 주택을 마련할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도심지에 세()를 얻을 형편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름 하여 달동네라 부르는 산비탈에서 도시 빈민들은 천막이나 판자 혹은 함석을 이용해 거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인 달동네는 교통이 불편하고 상하수도나 전기시설들이 없었고, 벌통처럼 밀집한 탓에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수도와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나마 이런 식이라도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최하층 도시 빈민은 이곳에서도 세()를 주고 살았다.

<달동네 아크릴화 / 부산 해운대 한 미술학원의 작품이다>

 

3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그 일환으로 1962년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도시계획법 및 건축법, 1963년에 토지수용법과 주택자금 운용법 및 국토건설종합계획법 등을 제정하여 주택 건설을 촉진하였다.

또한 1969년에는 민간자본을 최대한 유치하여 민간주택건설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주택은행을 설립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1979년에는 토지개발공사를, 1981년에는 국민 주택기금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공공 재정이 아닌 민간재정을 투입하는 정책이었다.

경남은 1962년 이후 울산공업단지 건설과 진해4비료, 마산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창원기계공단 건설 등으로 도시인구가 급증(연평균4.7%)함으로써 주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경남도가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해가 지날수록 주택난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이후부터 한일합섬과 자유무역지역 등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된 마산지역의 택지난이 더욱 심각하였다.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퇴근 시간 / 1970년대>

 

이에 마산시와 민간사업자는 1967년부터 1985년까지 산호지구 외 12개 지역 623를 개발하여 부족택지 공급 및 공공시설용지를 확보하였다. 대부분 30-40평 규모의 단독택지로 분할된 이 구획정리지구 내의 택지들은 개인들에게 분양해 민간주택건설을 유도하였다.

이곳에는 조적조 1-2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셋방을 여러 개씩 둔 다중주택형식의 주택이 대거 건설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주거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의 수와 연령의 변화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해지거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셋방 한 칸이라도 놓을 요량으로 좁은 마당을 막아 블록 벽에 함석과 슬레이트를 얹어 방을 넣는 집들이 늘어났다.

이런 현상은 마산의 회원동·교방동·상남동·양덕동 등 자연발생취락지역에 많았는데 가뜩이나 집들이 빼곡했던 마을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 갔다. 그 중 상당량은 지금까지 잔존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진주시 여러 곳에서도 토지구획사업이 진행되었다.

68년에 시작된 상평 1차사업을 필두로 장대동, 서부, 칠암, 상평2, 나불천, 남강, 봉원, 상평3, 92년부터 94년까지 시행된 호탄지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토지구획사업들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토지구획사업 외에 주택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저리 융자금을 받아 초가지붕을 스레이트 혹은 기와로 개량하기도 했다.

한편, 진주시에 아파트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711121일에 세운 옥봉남강아파트(옥봉동 805-3번지)30세대 규모의 3층이었고 한 세대의 분양면적은 20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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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1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표출하려는 다수의 도시 빈민들 및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가 늘어나 주택수요에 비해 공급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다투어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화되었고, 19506월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해 그나마 있던 기존 주택마저 전란(戰亂)으로 파괴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주거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해방 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당시 한국전쟁 초기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었지만 인접한 마산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들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

갑자기 마산에 모여든 이들이 사용한 주거는 신포동과 월포동 및 중앙동 등에 있었던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 숙소였다.

회원동에 있었던 일본군 말 사육장의 마구간도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보통 10-20 가구가 한 창고 안에서 칸막이도 없이 함께 살았다.

<가운데 음영이 짙은 직사각형 세 건물이 마산 회원동 일본군 말 사육장이다>

 

밑바닥엔 헌 가마니나 짚 혹은 판자조각 등을 깔았고,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누더기 같은 이불이나 담요를 덮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판자를 주어다 칸을 막으니 마치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하여 하모니카 촌이라 불렀다.

하모니카 촌의 집이 이 정도니 주방 설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지혜를 발휘,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 한 부분을 깨내고 그 밑 부분의 흙을 넓게 파낸 다음 솥을 걸고 불을 때어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그리고 큰 깡통을 주워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편 것 여러 장으로 견고한 지붕을 만들고 시멘트부대나 비료부대 그리고 코르타르를 주워와 루핑을 만들어 창고 처마에 덧대어서 주거공간을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외곽지역에 난립한 판자 집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도시 미관은 물론 화재가 났다하면 대형 화재로 번졌고 소방 차량의 진입에도 지장을 초래하였다.

또한 판자집 밀집지역에는 오물 처리도 쉽지 않아 전염병을 쉽게 확신시킬 우려가 있었으며 도범(盜犯) 방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진주지역은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인 19528월부터 기존의 주택을 보수하거나 신축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2년까지 20여 년간 시행된 대안지구 토지구획사업이 그것으로, 수정남동·수정북동·평안동·대안동·동성동·계동·상봉서동일부·봉곡동일부·인사동일부·남성동일부·본성동일부·중안동일부·장대동일부·봉래동일부 등 총 14개 동에 걸쳐 25만여 평 규모의 대대적인 주거지 사업이었다.

전쟁 후 적극적인 주택정책을 세우고 있지 못하던 정부는 1957년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외국자금에 의존해 긴급히 건설했던 임시 구호성 주택에서 항구적인 주택을 짓도록 유도하기 위해 민영 ICA주택(미국 국제협조처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자금을 융자해주어 지은 주택)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정부는 이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러 타입의 표준형 공동주택을 제시하였고 이는 곧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58년 ICA주택 낙성식 후 주택을 둘러보는 참석자들>

 

이 정책은 시멘트 블록 벽에 외부는 시멘트 모르타르, 지붕은 슬레이트 기와를 이용한 현대적 감각의 주택들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게 했다.

단독주택의 규모는 대지 40평에 건물 15평 정도였으며 연립주택은 4세대가 한 동에 입주하는 2층이었다.

실내에 욕실을 배치하는 등 신개념의 평면구성 때문에 문화주택이라 불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마산의 교원동에도 이런 집합주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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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등장한 주택으로 대개 전통주택에 일식(日式) 혹은 서양식을 일부 채용한 형식이었다.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1920년대 초반까지 나타난 절충식 주택은 1925년 경 이후부터 점차 문화주택으로 대체되었다.

개량한옥은 1920년 전후 주택업자들이 지어 공급한 주거로, 당시에 요구된 주택 개량 안을 수용한 평면구성에 재래의 주택형식을 채용한 한옥이었다. 마루 앞에 유리문을 달아 마루를 거실로 바꾸고 대문채 혹은 살림채 내부에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 중반에 나타나 1930년대에 많이 건축되었는데, 한옥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평면형식을 갖춘 집이었다. 식당과 욕실 및 화장실을 주택 내부에 두고 거실을 생활공간의 중심으로 이용하였고, 건축자재도 콘크리트와 유리 등 새로운 재료를 적극 사용했다.

<당시 전형적인 문화주택이었던 소설가 지하련의 마산 산호리 주택>

 

영단주택은 급속히 팽창한 도시지역의 주택난을 해소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1941년 설립한 <조선주택영단>이 공급한 집합주택으로, 주로 서울 지역에 집중 건설되었다.

이런 분류 외에 개항이후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주택으로, 전통한옥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새로 유입된 재료와 기술을 적절히 구사해 공간구성·이용방식·입면 등에 변화를 보인 근대한옥이 있다. 주로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지방의 부농계층(또는 지주계층)이 지어 살았던 주택이었다.

2005년 이호열 교수(부산대 건축학부)는 경남의 밀양·창녕·의령·함안·고성·거창·산청·함양 등에 산재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축한 26개의 근대한옥을 조사 연구한 바가 있다.

이에 따르면 근대한옥 거주자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근대 지향적 사고를 바탕으로 유교적인 관습보다 실생활을 중시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외래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상류계층과 중인 계층의 주거를 중심으로 빠른 변화가 이루어지던 일제강점기에도 서민들의 주거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편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린 도시 빈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토막(土幕)이란 땅을 파서 주거공간(움집)을 만든 뒤 짚이나 거적을 덮어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집으로 가장 열악한 주거형태였다.

<일제강점기 빈민층이 거주했던 토막(土幕)>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토막(土幕) 및 불량주택 조사에 따르면 1942101일 현재 전국의 토막은 3,725호였고 불량주택은 29,408호였다.

이 조사에서 밝혀진 경남의 도시지역 사정을 보면 부산이 토막 34호에 거주자 128, 불량주택 1,984호에 거주자 8,984명이었고 마산이 토막 46호에 거주자 196, 불량주택 224호에 거주자 1,294명이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움집이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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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벽은 방바닥으로부터 색깔 있는 벽지에 이르기 까지 훌륭하게 치장되어 있다. 창문은 네모꼴이며 안이나 바깥쪽으로 살을 대었고 기름을 먹였거나 먹이지 않은 거친 종이를 바른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발은 창의 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다. 유리는 아직도 조선의 평민사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식품이다.

 

하지만 당시 문화를 주도했던 소수의 중·상류 계층의 주택을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초가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문화도 들어오게 되었다.

개항 이후 항구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부산·서울·인천을 비롯해 경남에서는 마산에 일본식 주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소위 신마산이라 불리는 마산의 개항장은 일본식 주택이 많이 지어져 마치 일본의 소도시 같은 도시 경관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해군기지와 함께 조성된 진해 신도시에도 나가야(長屋) 중심의 일본식 주택이 대거 건립되었다.

그런가 하면 1907년부터 통영시 도남동 일대에 조성하기 시작한 일본인 이주 어촌 오카야마무라(岡山村)는 나가야(長屋)를 중심으로 신사·학교·사당 등이 들어섬으로써 전형적인 일본 어촌 형태로 조성되기도 했다.

<창원시 진해구(구 진해시) 중원로터리 부근 일본인들이 살았던 목조 나가야(長屋) 전경>

 

<통영 도남동 오카야마무라(岡山村) 전경>

 

<오카야마무라 우편소(남포우편소, 1912년 건축)의 사택>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인의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주택과 점포를 겸한 단층 혹은 이층의 주상(住商) 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 같은 건축형식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외래적인 주거형식이었다.

온난 다습한 풍토에서 발달한 일본식 주택은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점차 다다미를 덜어내고 온돌방을 들이는 일본인들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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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라의 가사규제인 옥사조(屋舍條)와 가장 큰 차이는 택지 규모에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주택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자연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갖는데, 상류층의 주택은 기후가 구조에 영향을 적게 미쳤으나 서민주택의 경우 북쪽지방은 보온을 위한 겹집구조와 온돌이, 남쪽지방은 바람이 잘 통하는 홑집구조와 마루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전통가옥구조의 분포>

 

반가(班家)라 부르는 양반의 주택은 지역적 특성보다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와 유학자로서의 성리학적 규범에 따른 생활방식 등이 중요 요소로 고려되었다. 때문에 가문의 전통, 신분과 성별,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채() 단위로 공간을 구분하여 사당채·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채·곳간채 등으로 건물을 분리 배치하였다.

특히 기와로 이은 지붕의 처마를 길게 돌출시켜 날아갈 듯한 지붕선을 만들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었다.

2006년 김화봉 교수(경남과학기술대 건축학부)는 경남 하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반가 8채를 조사 연구하였다. 이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남부지방의 일반적 구성인 자형이었으며 내부공간은 부농층(富農層)에서는 근대적 특성이, 지배계층에서는 공간적 우위를 점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좁은 지역 임에도 불구하고 경남지역 나름의 계층성과 다양한 주거 유형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민가(民家)라 부르는 서민주택은 중·하류층이 살던 집으로, 경제적 이유는 물론 사회적으로 가사규제 때문에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권위적 혹은 유교적 표현보다는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주택, 즉 지역의 자연환경에 경제적으로 대응하고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이 공존하는 주거형식으로 발달했다.

또한 대부분의 민가는 건축주 스스로 짓거나 지역의 장인(匠人)에 의해 지어졌고 사용된 자재는 주변의 자연재료인 자연목, , , 짚을 이용하였다.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널리 쓰인 민가의 지붕 형태였다.

 

경상도 지방의 민가는 홑집계열겹집계열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소득 수준이 낮은 소농계층은 부엌··방으로 배열된 마루 없는 3자형 홑집, 경제 사정이 약간 나은 계층은 부엌··마루·방으로 배열된 마루 있는 자형 홑집이나 겹집에서 살았다.

서민주택의 외부공간은 몸채와 울타리,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마당으로 구성되는데, 마당은 동선과 작업의 공간이자 내부공간에서 부족한 주거 기능의 일부를 수용할 수 있는 매우 특징적인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86년 이상정 교수(경상대 건축학부)가 경남의 합천·산청·진양·사천지역 전통 농촌주택을 조사한 사례를 보면 안채·아랫채·부속채의 세 개 동으로 구성된 가옥이 많았으며, 건물의 평면형태는 자형 홑집으로 산간지역은 직교형 배치가, 해안지역은 병렬형 배치가 다수였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부엌++방의 유형이 경남 전 지역에 널리 분포했으며, 각 실의 출입문은 마당을 향해 나있었다. 각 채의 중심에 배치된 마당은 협소한 내부공간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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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로 해석된다.

구들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먼저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남에서도 초기철기시대 의 구들유적이 출토되었다.

사천시의 늑도에서 발굴된 주거지에 보이는 구들유적이 그것이다. 이 구들유적은 온난한 한반도 남단의 경남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삼한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늑도의 구들유적은 타원형의 주거지 내부에 아궁이 시설을 만들고 외벽을 따라 외줄의 구들 고래를 시설한 것으로, 구들 고래의 끝에서 집 밖으로 연기가 배출되도록 만든 것이다.

한편 초기철기시대 경남지역에는 고상주거(高床住居)가 널리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고상주거지로는 옛 가야지역인 김해 부원동 주거지를 들 수 있으며, 그밖에 삼천포 늑도, 김해 봉황대, 창원 가음정동에서도 고상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이밖에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고상형 가형토기(家形土器)도 고상식 주거 또는 고상식 창고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김해 봉황대 고상식 주거유적 복원지>

 

한반도의 고대국가는 기원 전후로 시작되었다. 북방에서는 고구려가 기원전 1세기경에, 남방에서는 기원 후 2~3세기경에 백제와 신라가 국가체계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주거 형식도 원시단계에서 벗어나 목조 형식을 기반으로 새롭게 발달하게 된다.

삼국시대 초기에도 서민들의 집은 대체로 움집이었으나 점차 초옥(草屋) 토실(土室)의 초가집으로 발전하였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지붕제인 기와가 도입되면서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의 공공건물은 기와집으로 건축되었다. 이는 기와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지반조성기술과 함께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정교한 건축기술이 도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실내에 쪽구들을 설치하여 난방과 취사를 하였으며, 상류층은 구들과 함께 철제 화로와 같은 별도의 난방시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아궁이>

 

백제나 가야는 구들보다는 습기를 피하기 용이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고상식 주거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T자 형태의 쪽구들이 사용되긴 했으나 상류층은 집의 내부 바닥에 마루를 설치하고 고구려처럼 화로와 같은 별도의 난방시설을 사용했다. 신라는 옥사조(屋舍條)를 제정하고 백성에서부터 진골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별로 주택의 규모와 치장, 사용재료 등을 제한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귀족 계층은 침상과 평상을 이용하는 기와집을 짓고 살았지만 서민들은 토탑(土榻 : 흙 침상)’이라는 부분 온돌이 설치된 초가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생활이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중기 이후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오늘날의 온돌과 같은 전면온돌과 마루가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부분온돌과 전면온돌의 차이는 불을 때는 아궁이가 실내에 있느냐 실외에 있느냐의 차이다.

온돌과 마루의 공존은 이후 우리나라 주거 문화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남쪽에서 발달된 마루와 북쪽에서 발달된 온돌이 결합되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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