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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情)이란 영화에서도 큰 흥미는 못 느꼈었다. 영국 명우 로렌스 올리비에감독·주연의 명화였으나 선생님들은 좋았겠지만 중1짜리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폭발시킨 영화는 중2 때 본 셰인(SHANE)’이었다.

 

부림동에 있는 국제극장(1948년 부림극장으로 개관했다가 1950년 국제극장, 1956년 강남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폐관하였고 2008년 건물도 헐려 지금은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에서 본 그 영화는 그 후 한참동안 그 감동에 필적할 만한 영화가 나오지 않아 거의 독점적으로 회자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미남스타 알랜 래드의 고독한 영상(특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서 극장 안에 울려 퍼진 주제음악과 어우러져), 그러면서도 악당에겐 강한 주먹을 날리는 의협심, 특히 아역 배우의 다급한 외침에 돌아가면서 악당 두목 잭 팰랜스를 단 번에 쓰러뜨리는 극적인 장면 등은 몇 년을 두고 우리들의 화젯거리 1호였다.

권총 발사 시 왼손을 오른손에 든 권총 노리쇠 부분으로 가져가면서 쏘는 흉내를 우리들이 경연할 정도였고, 극중의 어린아이가 셰인하고 정겹게 부르는 음성 흉내도 역시 그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이후로 서부활극은 청소년 선호 오락물 1위였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들 생활상에 준 영향도 컸으니, 그것 때문에 부모들에 대한 거짓말 횟수들이 늘었고, 심지어 영화 단체관람이 예고된 후부터 관람까지의 4~5일 동안 부모들에게 관람투쟁을 벌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서부극들 때문에 우리들의 장난 유형이나 싸움 패턴이 달라졌다.

그전엔 대체로 싸움이 시작되면 도리깨질하듯 팔을 원형으로 휘두르다가 몸이 맞닿으면 잡고 쓰러뜨리고, 그래서 위에 올라탄 사람이 대체로 이기게 되고.... 이런 식의 싸움이었는데, 이 영화들 이후 언제부터인지 주먹을 직선으로 내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어느 쪽이 쓰러지면 옆에 있던 입회인 친구들이 일으켜 세워 다시 시작하게 하는....

이렇게 영화 붐이 일자 학생들은 학교에서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까지 정학당할 위험도 무릅쓰면서 소위 도독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들키면 다음날 교문 앞 게시판에 학년, , 번호, 이름이 명기된 유기정학 혹은 무기정학(유기정학 3회 이상) 공고가 나붙고.... 그런 중독을 더 부추기는 것은 매일 한낮이 가까워오면 극장 지붕 위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호객용 유행가소리.... 특히 날씨가 더워져 교실 창문을 열어 놓았을 땐 그 소리에 반해 고개는 선생님 쪽으로 향하고 있어도 발은 그 노래 장단에 맞추고 있어.... (이상 『상식의 서식처에서)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 화제의 중심엔 알랜 래드, 빅터 마추어, 로버트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 게리 쿠퍼, 룩 허드슨, 제인스 딘 등이 오르내리는 일이 참 많았다. 그러니 서부 사나이들이 정의의 사도로 인식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도 붐을 일으켰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밀림의 왕자.

 

아프리카 상공을 지나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흑인 부족들 손에서 길러진 한국소년 철민과 미국소녀 케에트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권씩 약 2년에 걸쳐 나온 그것은 그 어간에 나온 것으로 기억되는 타잔, 킹콩 시리즈들과 더불어 이국정취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었다.

철민과 케에트 둘을 아끼고 보호하는 추장 제가’, 추장 자리를 탐내어 둘까지 미워하는 구레’, 둘의 수호천사 뱀 다나’, ‘다나와 라이벌이라 둘까지 헤치려드는 공룡(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들이 어우러져 펼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다나와 공룡이 혈전을 벌이다 둘 다 화산분화구로 떨어져 들어가기 직전 분화구 위쪽에 있던 큰 나뭇가지에 다나가 급히 꼬리를 뻗어 감으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생들이 많이 본 잡지로는 학원이 유명했었는데 특히 거기에 오랫동안 연재된 조흔파의 명랑소설 얄개전은 인기를 많이 끌어 생명력이 긴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그때는 물론이었고, 지금도 우리 나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심심찮게 키 작은 사람보고는 꺼꾸리’, 키 큰 사람에게는 장다리란 말을 붙이는 일이 있는데, 그 말들은 얄개전의 두 주인공 남학생의 별명이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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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마산의 상업 및 유통·저장산업 등>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회사 11개사 등 모두 34개로 9개가 늘어났습니다.

1920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원동무역회사가 이때까지 건재하였습니다.

일제강점 제3기에는 이전까지 주로 도소매업의 판매업에만 진출해 있던 한국인들도 제조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회사령 폐지 이후 꾸준히 지속된 한국인들의 자본축적의 결실이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회사는 합자회사환천(丸天)상회(1933년, 남성동 93-1번지, 미곡․자동차부품 판매 및 정미업), 신정상사주식회사(1935년, 창동 123번지, 해륙물산 위탁판매와 무역업 및 잡화 등 판매), 합명회사 낭화(浪花)양품점(1937년, 동성동 254번지, 양품점), 석산상사주식회사(1939년, 창동 49번지, 초자(硝子)․철물 및 페인트 도소매업) 등이었습니다.

원마산의 중심 상가와 부림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는 곡물과 해산물,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으며, 일본 상인들은 주로 신마산 상가에 점포를 가진 자가 많았으나 원마산 지역에 진출하여 크게 사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 보관․창고업도 성행하였는데, 기존의 마산창고주식회사 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마산지점이 대표적인 창고였습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30년 11월 경성에서 설립된 회사로, 1943년 신포동 1가 해안매축지(현 마산시 의회 청사 건너 편)에 임해창고를 건립하여 산미증산계획과 군량미 조달에 전략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후 오랫동안 대한통운 창고로 사용되다가 몇 년 전 철거되었습니다. 해방기와 전쟁기를 거치면서 피난민 거처로도 사용된 건물로 격동기 마산의 역사를 온 몸에 담았던 건물이었는데 그만 사라져버려 아쉽습니다.

다음 사진이 조선미곡창고건물입니다.

 

1930년 4월 1일 경성에서 설립한 조선운송주식회사도 마산에 지점을 두었습니다. 위치는 중앙동 2가 8번지에 있었으며 철도국 지정으로 철도화물을 취급했습니다.

이 외에, 정미업은 1924년 당시 25개소였으나 193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가 점차 쇠퇴하여 1939년에는 전체 정미업소는 16개였습니다. 그 중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는 3개소뿐이었습니다.

1907년 마산철공소에 의해 처음 시작된 마산의 철공업은 1939년에는 10여개의 중소 철공소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는 2개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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