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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1 00:00

마산YMCA회관 설계

 

랜만에 해본 일입니다.

 

2005년 경남도민일보 입사 후에도 간혹 이일 저일 만졌지만, 기획 단계부터 개입해 마무리한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습니다.

'마산YMCA회관 건축설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1980년 건축사 시험에 붙어 다음 해 6월 마산 창동에서 건축사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개업 후 적지 않은 건축물을 설계하였습니다.

볼만한 건물도 간혹 있었지만 부끄러운 건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건축설계는 천직처럼 제 몸에 착 붙었습니다. 재미있게 만족하며 일했습니다.

 

2005년 봄 뜻하지 않게 언론사 대표가 된 후 손을 놓았다가 '마산YMCA회관 건축설계' 때문에 다시 펜과 종이를 들었습니다. 작년 늦여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지만 워낙 몸에 배였던 터라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1946 창립한 마산YMCA는 뿌리가 깊은 시민사회단체입니다.

 

저는 1975년 입회했습니다. 20대 초에 시작해 올해로 42년째니 YMCA는 제 인생 한복판을 관통한 셈입니다.

 

자체회관이 없었던 마산YMCA가 지난 70여 년간 회관 때문에 겪은 부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91년부터 근무한 이윤기 사무총장이 지난 520일 개관식 날 이번 이사가 10번 째하는 이사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건축비가 모자라 빚은 좀 남겠지만 70년 만에 가진 자체회관이라 마산YMCA 회원들은 요즘 많이 즐겁습니다.

 

토지를 구할 때부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YMCA는 시민사회단체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도 주된 목적 중 하나입니다.

YMCA는 자연을 매개로한 인성교육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자연환경적 입지조건을 염두에 두고 땅을 찾았습니다.

 

1~2 걸려 마침내 찾은 곳은 마산 회원동 앵지밭골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뒤로 700m 거리에 편백 숲이 있고 옆으로 300m 쯤에는 수백 년 된 마을 숲과 회원천 상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뒤편으로 무학산이 버티어 섰고, 왼옆으로는 시인 이선관이 마산 민주정신의 발현지로 꼽았던 봉화산이 눈 앞이었습니다 

 

 …… 가부좌한 참 스님답게 턱 버티고 / 앉아있는 봉화산의 돌 틈새에 /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살아있는 불씨 / 식어질 줄 모르는 그 불씨 ……

 

터의 모양새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주변의 자연조건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반풍수 눈에도 좌청룡 우백호에 남주작 북현무까지 어느 정도 갖춘 길지다 싶었습니다.

 

200여 평이라 넓지는 않지만 인접한 낙락장송이 땅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어서 아이들과 엄마들이 좋아할 곳이었습니다.

이사장과 이사들도 터를 본 뒤 선뜻 동의해 거금(?)을 치르고 매입했습니다.

 

계는 제 몫이었습니다.

 

어떤 건물을 앉힐지 구상이 시작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마산YMCA회관을 꼭 내 손으로 설계하고 싶었던 젊었던 시절도 떠올랐습니다.

좋은 건물을 짓고 싶은 마음과 넉넉하지 않은 자금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습니다.

 

순리대로 공간을 자르되 치수를 아꼈습니다.

비용 때문이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랐습니다.

루이스 설리반을 추종했다기보다 기능에 충실하면 단순해지고 단순해야 오래가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범함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사람 눈에 익숙하고 안정감을 주는 사각형 몇개를 엮어 정면을 완성시켰습니다.

 

집의 가치는 좌측의 낙락장송과 병풍처럼 뒤에 선 무학산에서 나오도록 했습니다.

건물은 그저 먹물로 찍은 한 점 손장난에 불과합니다.<<<

 

 

epilogue

 

공사는 태림건설 박현관 이사가, 감리는 마산Y 이사인 류창현 건축사가 맡아 고생했습니다.

그 덕에 집이 잘 지어져 지난 달 20일 개관식까지 가졌습니다.

 

본관은 진작 옮겨왔고 교방동 유치원도 이사를 마쳤습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와 함께 마산YMCA의 하루하루가 활기차게 열리고 있습니다.

 

당분간 공간문제 때문에 어려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턴 시민사회단체 역할을 다하는 데만 집중하면 될 일입니다.

 

앞으로 이 집에서 마산YMCA 사람들이 무슨 일들을 해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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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7.06.01 16: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사장님...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해 주신 덕분에 넉넉치 않은 자금으로도 멋진 건물을 완공하였습니다.

  2. 워킹마미 2017.06.01 18: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멋진 건물 감사합니다♡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사님의 고민과 애정이 느껴지네요. 최대한 많이 활용하고 아끼며 살겠습니다.

  3. 회원 2017.06.01 21:0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윤기총장이 빈 그릇을 잘 채울겁니다

  4. 허정도 2017.06.02 09:0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설계를 제가 했을 뿐, 이 집을 있게 한 것은 마산YMCA와 관계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죠.
    감사한 일입니다~

  5. 안희정 2017.06.02 14: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몰랐던 사실을 알게됐네요
    고생많았습니다.
    시간되면 함 들렸다 감상하고싶네요
    오랫동안 좋은일들을 많이했네요
    축하합니다

2017.03.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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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29 13: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하셨습니다. 고향 마산의 숨은 역사를 이렇게 조감해 주시니 평범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많은 마산 시민들이 역사의 깊음을 음미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은 일부 일급 교양인들만이 음미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은 황폐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1.02.09 00:00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일본국민 대다수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 교수의 말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세계평화의 길을 찾는 미국인 정치사상학자이자 평화운동가'입니다.

오키나와-일본-미국, 다시 돌아와 한반도-중국-동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그의 지식은 넓고 깊었으며 그의 자세는 진지했고 겸손했습니다.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한 1920년대 일본지도를 보여주고 있는 러미스 교수>

두 시간의 강연과 뒤풀이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았던 말 중, 내 귀를 가장 진하게 울렸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섬에 머무는 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살펴봤습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어디를 가나 한국의 조중동처럼 눈에 띄었던 ‘아요마’(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요마’ 대신 오키나와의 두 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와「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식당, 호텔로비, 주점, 공항에서까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미군정 시기였던 1948년 창간되었고,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9세기 말인 1893년 창간된 오키나와 최초의 신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정부발행 「한성순보」창간이 1883년이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창간이 1896년인데, 작은 섬 오키나와의 민간발행 「류큐신보(琉球新報)」가 1893년 창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거기에다 12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제호도 바꾸지 않고 발간되고 있어서 더 놀랐습니다.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즈>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두 신문 모두 1면에는 전국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고 나머지 모든 면은 우리처럼 지역기사였습니다.
순간 '웬 전국소식?'하고 의아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요마’를 읽지 않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당연한 편집이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를 반드시 읽는 우리에게는 지역소식만 있더라도 아무 문제없지만 러미스 교수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만 보니 전국소식을 지역신문이 다루는 건 당연했을 터입니다.

지역관련기사들도 우리와 사뭇 달랐습니다.
미군철수니 오키나와 정체성회복이니 하는 소위 오키나와평화운동의 동력이 지역신문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지면 곳곳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제사회와 오키나와의 관계 등에 관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본토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오키나와평화문제에 대한 기사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예민한 반응이었는지 몰라도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오키나와가 진정 오키나와다워지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이 신문활자 한자 한자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단체의 회원인 히카료코 씨가 태평양전쟁 때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동굴 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던 도중, 일본정부의 오키나와 전쟁 왜곡의도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집회를 보도한 류큐신보 호외판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은 정부입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
오키나와 전쟁 60주년이던 지난 2005년에 류큐신보는 「오키나와 전쟁신문(沖繩戰新聞)」이라는 특집을 발간하였다. 사진은 2005년 4월1일자 특집7호 신문 1면.
신문의
왼쪽 상부에 오키나와 전쟁 60년 -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정보와 시점에서 구성이라는 제작의도가 밝혀져있고  그 곁에제7호-1945년 소화(昭和)20년 4월1일 일요일」이라고 적혀있다. 기사 큰 제목은 '본 섬에 미군상륙' 작은 제목은 '병력18만3천명 투입' '일본군 반격않고 각지에서 집단사'라고 적혀있으며 사진은 '미군상륙장면'을 사용하였다.
1945년 4월 1일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최초로 상륙했던 날로, 참혹했던 오키나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
>


지난 달, 합포문화동인회가 주최한 김두관 도지사 초청 강연에서 김 지사는 “옛날 제가 대학 갈 때만 해도 부산대학과 경북대학이 상당한 명문이었습니다만 요즈음은 서울의 대부분 사립대학보다 입학이 쉽다고 들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지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습니다.
어디 참석자뿐이겠습니까. 서울사람을 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생각일 겁니다.

그 동안 수도권은 마치 아귀처럼 지역을 삼켰습니다. 수도권 빨대현상을 생각하면 정말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한국의 서울집중현상에는 언론이 능동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제대로된 지역소식은 다룰 수도 없고 다루지도 않으면서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신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의 중앙집중현상(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집중현상)은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점점 더 넓힐 뿐만 아니라 지역을 피폐화시키는 원인이기도합니다.

오죽 심했으면 부산일보 모 논설주간이 서울언론의 태도를 두고 “지역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지역민의 자존심까지 상습적으로 추행 당하게 될 것”이라 경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전국지라 부르는 서울지는 공짜 신문에다 자전거, 가전제품, 심지어 현금까지 뿌려대며 독자를 사들이는 통에 돈이 없는 지역신문들의 위축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경남도민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경, 우리나라 지역신문 구독률은 평균 6%를 밑돌았습니다.
그나마 경남지역은 16%대로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높은 편이었지만 충청 호남 강원지역은 3-6%에 그쳤고 경기지역은 1%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은 93%, 프랑스가 73%, 영국이 67% 정도를 지방지가 차지했으니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잘 비교되실 겁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지역신문발전을 위한 지원 조례’도 만들고 위원회까지 구성했습니다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주민들의 자발적 관심이 없으면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보는 생각입니다.
오키나와주민에게 배우는 건 어떨까요.
설령 정보량과 편집과 서비스가 조금 미흡하다하더라도, 우리자신이 우리 문제와 우리 사정을 잘 알아야 우리다워지고, 그래야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지역 언론 사랑하기, 어떻습니까?

몸은 지방에 있으면서,
아침마다 서울시내 출근길 도로사정 TV방송을 보고, 화장실에 앉아 여의도 소식만 담긴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점심 먹으며 되새김질하고, 밤에는 강남 부자이야기 연속극을 보며 살아가는데, 지방의 정체성과 자생력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관심한데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일본국민 대다수는 요미우리 마이니찌 아사히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의 작은 미술관에서 들었던 벽안의 노(老) 교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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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11.02.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02.27 07:30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이야기 하나,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금 그 곳에 없다.
이십여 년 전 봉암동 골짜기로 이전한 후 그곳에는 덩치 큰 판상형 아파트만 덩그러니 몇 채 있을 뿐이다.
교복을 입은 채 까까머리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운동장도 없어졌고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낙엽청소를 시켰던 그 큰 활엽수와 그 아래 나무벤치도 사라졌다.
봉암동에 새로 지은 학교에서 지금의 아이들이 40년 전 나보다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는지 모르지만 나의 추억이 녹아있는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의 고등학교는 생각 속에만 있고 찾아가볼 장소는 없다. 새로 지은 학교에 갈 일이 더러 있지만 행사만 있지 추억은 없어 여느 학교를 찾았을 때와 감흥이 다르지 않다.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회원동 구 창신학교 본관>

이야기 둘,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길 끝의 낮은 양철지붕 조그만 집에서 27년 쯤 살았다. 흙 놀이에서 축구경기까지 가능했던 그 골목길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회상 장치다. 전에는 컬러였는데 지금은 흑백으로 보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쯤 그곳을 간다. 혼자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다.
내 어린 날의 흔적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 작은 집과 좁은 골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재개발로 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것이라 걱정이다.

장소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곳. 과거 속에서 지금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추억이 깃든 교정과 옛집 그리고 좁은 골목이 그럴 진데, 하물며 시민 전체가 기억하는 장소, 위대한 예술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역사와 문화의 현장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문화와 예술’로 도시공간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도시 곳곳에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장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장소라고 하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렇다. 커피숍에서 나누는 연인의 속삭임도 서울시청 앞 광장의 정치집회도 장소를 전제하지 않은 행위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은 극복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지만 ‘지나간 시간’이라는 그 절대적 영역을 피라미드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시와 건축, 그리고 ‘장소’의 위대함이다.
장소와 시설이 사라지면 기억과 역사는 결정적으로 훼손당한다. 시간을 담은 장소 앞에서 필요한 것은 당장의 개발이익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다. 우리는 시간과 역사와 문화를 돈으로 대체할 만큼 빈곤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마산의 자랑 '문신'을 볼 때, 예술의 흔적을 담고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시도되어야 할 것은 문신에 대한 연구다. 이미 많이 이루어진 그의 예술세계 연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세계와는 별도로 그의 생애사가 보다 깊이 보다 세밀히 연구되어야 한다.
구술로 문신의 삶을 회고해 줄 수 있는 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구는 매우 시급하다.

그가 어디를 걸었는지, 그가 즐겨 다닌 찻집과 식당은 어디며, 그가 지인들과 자주 찾았던 주점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즐겨 불렀던 노래는 무엇이었는지, 어디에 서서 아름다운 마산만 정경을 그윽이 바라보았는지, 또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의 흔적이 녹아 있는 장소와 공간이 그를 도시문화산업과 연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문신의 이름으로 이 도시를 부상시킬 수 있는 기회의 통로다.
‘노예처럼 작업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며 신처럼 창조한다’는 그의 신념을 느끼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단지 남긴 작품만으로 문화산업과의 연계를 모색하기에는 도시공간이라는 거대한 사이즈가 받아내기에 부족함이 많다.

그런 점에서 경남도민일보가 세 명의 연구자에게 의뢰, 작년에 문신 생애사 『그리움의 바다 위에 영혼을 조각하다』를 낸 것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문신의 생애사를 통해 그와 관련 있는 시설과 공간이 밝혀졌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문화산업과 연관시킬 것인가라는 최종과제가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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