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4.11.17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26) -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고인돌은 지배층의 무덤이었나?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출현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무덤을 통해서 그 생각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들어 시신(屍身)을 따로 모시는 것 자체가 ‘죽음’은 삶의 연장이었으며, 내세관(來世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시신을 별도의 장소에 모시는 것은 물론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은 것으로 보아 내세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무덤이 만들어졌던 예가 가끔 있기는 하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의 무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석기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춘 초기적인 형태의 매장시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무덤 역시 그 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무덤의 구조 또한 매우 단순하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시신을 매장하는 습속이 일반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 하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무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창원 덕천리 11호 무덤 (석곽묘)>

 

-마산·창원지역에도 고인돌이 있었다-

고인돌 또는 지석묘(支石墓)라 불려지는 무덤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던 여러 종류의 무덤 가운데 대표적이다.

땅 속에 돌로써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큰돌을 얹은 것이 보통인데, 무덤 속에는 시신과 함께 돌칼이나 화살촉, 토기, 장신구 등을 함께 묻는다.

땅 위에 드러난 큰 돌을 상석(上石)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을 굄돌 또는 지석(支石)이라 한다.

‘고인돌’ 혹은 ‘지석묘’라는 이름은 상석 아래에 받쳐진 작은 돌에서 유래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 고인돌의 가장 큰 특징은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에 있다.

이 상석으로 말미암아 고인돌의 존재 그 자체를 쉽게 파악할 수가 있으며, 상석의 크기 또한 몇 톤에서부터 수십 또는 수백 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무덤 위에 그토록 큰 상석이 필요한지가 의문의 시작이다. 상석은 무덤을보호하는 동시에 뚜껑돌(蓋石)의 역할을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상석 아래에 있는 무덤에는 대부분 별도의 뚜껑돌이 덮혀 있으며, 상석 때문에 무덤이 찌그러진 경우도 많아서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풀어야할 첫 번째의 문이다.

수십 톤 이상의 큰 돌을 옮겨와서 무덤을 만드는데에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런 까닭으로 고인돌을 한 집단의 장(長)의 무덤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 사람의 시신을 묻기 위해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다면,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타당성이 있지만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고인돌을 집단의 장, 즉 수장(首長)의 무덤으로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상석의 크기에 비해 부장품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상석이 아주 큰 무덤의 부장품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데 반해 조그마한 상석을 가진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상석의 크기와 부장품의 질이나 양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고인돌에 관한 연구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풀어야 할 두 번째의 숙제이다.

마산·창원지역에 있는 고인돌 관련 유적은 모두 20개소 이상으로, 100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부터 상석이 없었거나 한 개의 상석 주위에 여러 기의 무덤이 배치되어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실제 무덤의 수는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할 때, 마산 창원지역의 고인돌 분포는 크게 3개의 지역군(地域群)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해안지역으로서 삼진(진동, 진전, 진북)과 구산면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진동만을 끼고 있으면서 그 주위의 평지나 산기슭에 분포하는 유적들로, 진동 진동리 유적과  고현리유적, 진전 곡안리·오서리유적, 구산 반동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 진북 신촌리유적에서는 3기의 주거지와 30여 기의돌상자무덤(石棺墓)이 조사되었고, 진동 송도와 다구리에서는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지금의 자동차운전 면허시험장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괴된 진동리 유적은 마산·창원지역에서는 드물게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반동리 고인돌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청동검이 출토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발굴조사된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둘째는 내륙지역으로서 내서읍과 북면, 동읍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하천 주위나 산지에 인접한 평지이다. 함안 오곡리유적, 북면 외감리유적, 동읍의 덕천리·용잠리·봉산리·신방리·봉곡리·화양리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오곡리유적은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안군에 속하나, 내서읍을 가로지르는 광려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 포함시켰다.

이 유적에서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곽무덤(石槨墓), 돌상자무덤, 움무덤(土壙墓) 등 모두 3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내서 안성리에서는 손잡이의 모양이 특이한 돌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읍 일대에는 3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곳은 덕천리유적 한 곳 밖에 없다. 덕천리유적은 모두 5기의 고인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주위에서 모두 2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1호 고인돌은 주위에 56×17.5m의 돌담장(石築)이 돌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무덤은 8×6m 크기의 구덩이를 4.5m 깊이까지 파고 돌로써 쌓은 것인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무덤 가운데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1호 고인돌의 상석 무게는 35톤 정도이다.

2호 고인돌에서는 160여점의 대롱옥이 출토되었으며, 이것과 인접한 작은 무덤에서 청동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인접한 용잠리에서도 크기나 구조상 이것과 비슷한 고인돌이 도굴된 채 발견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동읍 일대의 고인돌이 대체로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갖춘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이처럼 대규모의 무덤에 묻힌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창원 덕천리 유적 1호 지석묘 전경>

 

셋째는 창원분지이다.

마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되어있는 창원분지는 얕고 완만한 구릉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창원시내의 가음정동, 외동, 내동, 상남동, 남산동 등 곳곳에는 다양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남동에서는 고인돌과 함10여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되었고, 외동의 고인돌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2단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구조의 무덤방이 조사되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남산유적에서는 환호(環濠)라고 하는 방어용 도랑으로 둘러싸인 대규모의 취락이 조사되어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창원 외동 지석묘(창원 남고등학교 내)>

 

이상으로 마산, 창원지역에 분포하는 고인돌을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묶어서 살펴보았다.

고인돌의 분포에 비해 주거나 취락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점이 아쉽다. 그러나 고인돌은 상석이 땅 위에 드러나 있으므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반해, 주거지나 취락은 모두 땅 속에 있으므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발견된 주거유적이 전부라고는 할 수가 없으며, 무덤이 있으면 인접한 곳에 당연히 주거지도 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고인돌과 같은 무덤은 아니지만 독특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마산 가포동유적을 들 수 있다.

가포유원지의 뒷산 경사면에 위치하는 이 유적은 동검(銅劍)과 동모, 동과(銅戈) 등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의 급경사면에 자연적으로 굴러 내린 바위틈 사이에 청동기를 끼워 넣어둔 이 유적은 청동기를 이용한 제사유적(祭祀遺蹟)으로, 흔히 청동기 매납(埋納) 유적으로 불려진다.

청동기의 매납은 집단의 수장이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후 그것을 바위틈에 감춰 둔 것인데, 이러한 유적이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것은 가포동유적이 처음이다.

-고인돌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까지 확인된바로는 마산, 창원지역에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특히 마산, 창원지역은 넓지는 않으나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하천변에 형성된 평지가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거의 전지역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진동만 일대의 삼진지역과 내서읍, 창원분지 등은 모두 거의 비슷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농경사회와 관련된 거석(巨石) 기념물로 알려져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착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한 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동안에 조상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조상의 시신을 모셔두고, 그곳을 관리하고 참배하는 풍습은 오늘날 농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땅 위에 드러나 있는 상석은 지금의 무덤에 있는 봉분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보호하는 동시에 무덤의 표시였다.

이러한 점은 덕천리유적이나 상남 고인돌 등과 같이 상석을 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일정하게 무덤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창원 남산유적의 취락은 대규모의 저장시설, 수확용 반달돌칼이나 목제 농기구를 가공하기 위한 돌도끼의 존재 등으로 보아 농경을 위주로 하는 취락이었다.

더구나 대규모의 방어용 환호는 집단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는 만들거나 보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의 공동 작업은 큰 돌을 옮겨서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인돌이 반드시 수장의 무덤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품앗이와 같은 공동의 노동으로도 가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덕천리 1호 고인돌과 같이 엄청나게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무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무덤에 묻힌 주인공은 그 신분이 매우 특별났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포동유적에서 청동기를 이용하여 제사를 지낸 수장(首長)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고 이상길 / 경남대 역사학과 교수

 

 

 

신고
Trackback 2 Comment 0
2014.07.1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8) -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1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연일 계속되는 고성과 난투장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 언제 그랬냐는 듯 품위와 위엄으로 재무장(?)하고 마치 일월의 야누스인 양, 두 얼굴로 웃고 화내고, 타협하고 뒤돌아 서고...........

누구의 일상일까? 아마도 현재만이 아닌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진 이래 계속되어 온 평상의 모습은 아닐까. “정치집단” 혹은 “정치제”하고 명명되는 이러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일까?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이들의 역할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그 존재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 될 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원시 공동체사회라고 얘기하는 집단과 “정치집단”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가장 먼저 언급될수 있는 것이 그 사회 내에서의 계급의 유무이다. 즉, 한 사회 조직에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느냐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헌기록이 거의 없던 시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겨놓은 물질자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물질자료는 무의식적으로 남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전래된 사례도 적지 않다.

즉, 어떤 집단이 한 지역에 살다가 이동하였거나 화재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나 외부침입등과 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더 이상 원래의 터전에 머물지 못하였을 때 그곳에 남겨진 흔적들이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무덤이나 제단 등에 바쳐진 물건들은 후자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질자료는 생산물의 잉여가 가능해지면서 더욱 증가하였을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위협수단으로서의 도구, 즉 무기의 본격적인 생산과 그 기능의 증대는 한 지역 내에서의 우월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담하였을 것이다.

우월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더 많은 부의 추구를 위해 그 조직을 공고화시켰을 것이고, 그러한 모습의 일부가 발굴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인 것이다.

유적과 유물은 무덤이나, 사람들의 주거, 생산과 관련된 삶의 터전을 보여주며,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수준, 사회적 위치, 문화적 맥락이나 계통 등 삶의 상태를 추론하고 복원할 수 있다.

 

- 나라가 들어서다 -

마산과 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의 형성을 보여주는 유적은 어디에서 확인 될 수 있을까?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었던 고인돌을 통하여 정치집단의 형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양태가 너무 개별적이어서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나 의식을 위한 본격적인 이익집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정치집단의 모습을 추론하기는 쉽지 않다.

1988년 우연한 기회에 알려지게 된 주남저수지 인근의 창원시 동읍 다호리 무덤군(사적 327호)은 정치집단 형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호리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남긴 이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유구가 거의 무덤이기 때문에 무덤이라고 하는 매개물이 지니는 특징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생전의 삶의 일부를 옮겨 놓기를 희망하던 고대인들의 습속으로 인해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을 통해 우리는 훌륭한 물증을 찾을 수 있다.

영생의 관념은 각 개인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들을 통해 생전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우열의 차이를 보여주게 하였다.

무덤의 크기나 축조방법의 차이, 그 안에 매납된 유물의 질적,양적 차이는 거의 그대로 묻힌 사람들의 생전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만 하는 거대한 구조에,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축조방법, 그리고 휘황찬란한 고급의 부장유물들을 간직한 무덤들. 이에 반해 간단한 구조에 껴묻거리가 거의 없는 초라한 무덤들.

이러한 인위적 등급차를 지닌 무덤들은 같은 무덤구역 내에서 뒤섞여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부류의 것들끼리만 무리 지어 분포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여러 등급의 무덤들이 존재하였던 사회라면 그 사회적 분화 정도가 상당히 고도화된 경우일 것이다. 반면, 단순히 상급과 하급 등으로 단순 분류될 수 있는 무덤들을 양산해 낸 사회라면 그 분화정도가 미약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산.창원지역의 고인돌 자료를 통해서는 후자의 면이 강한 반면, 경주지역의 신라고분이나. 공주.부여지역의 백제고분을 비롯하여, 저 유명한 장군총을 간직하고 있는 집안지역의 고구려 고분들에서 전자의 모습을 유추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창원 다호리 일대>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묘에서 1988년 출토된 통나무 목관. 20년간의 보존처리 및 복원과정을 마치고 2008년 11월 24일 공개됐다. 다호리 1호묘는 기원전 1세기 전후 한반도 남부 철기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분으로 이 통나무 관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관이다. 참나무로 만든 관이 2000년 넘게 썩지 않은 것은 저습지 토양에 묻혀 있어 밀봉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7차에 걸쳐 조사된 다호리유적은 불과 너비 약 30〜40m, 길이 약 150m의 범위인데도 불구하고, 목관묘, 옹관묘 등 7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상당부분 도굴과 경작 등으로 훼손되었으며, 또한 한정된 지역만이 정식조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적은 구룡산(433) 북서 줄기에서 이어지는 약 20m 정도의 야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대로 조사 당시에는 논으로 경작되던 곳이었다.

입지조건과 발견된 유구의 모습에서 보듯이 이 곳은 인근에 있었을 정치집단의 공동무덤구역이며, 당시로서는 지배계층의 무덤들이 주로 조성된 구역 이였다.

아직까지 이들 무덤을 축조한 집단들의 생활근거지(주거지, 생산유적 등)와 또 다른 등급의 무덤유적을 찾지 못하여 당시 정치제의 명확한 모습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덤자료가 지니는 장점으로 인해 이들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당시의 모습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 곳에서 주로 확인된 목관묘는 우리나라 고대의 무덤양식 변천과정에서 본다면 고인돌이나 석관묘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여 다음 단계의 목곽묘로 이어지는 중간단계의 무덤형식이다.

이 곳에서 함께 출토되는 토기에서도 전시기의 무문토기와 그를 뒤이은 이른바 고식와질토기가 동시에 수습되고 있는 것은 이 유적을 남긴 집단의 발전 단계상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특히, 통나무를 반쪽으로 쪼개어 만든 관의 형태는 이채롭다. 또 관 밑바닥 아래 중앙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많은 유물을 넣은 대나무상자를 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예이다.

다호리유적에서 수습된 유물은 재질에 따라 칠기류, 목기류, 청동기류, 철기류 및 토기류 등 다양하다. 칠초동검을 비롯하여 동검, 철검 등 다양한 무기류와 철제의 따비, 철부 등의 농공구, 우리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훗날 가야 고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칠기 제기, 그리고 붓 등의 존재는 이들이 상당한 문화적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조금 뒷 시기에 등장하는 목곽묘는 구조가 훨씬 복잡. 고도화되고 부장유물도 대량화되어 그 피장자가 상당한 세력을 지닌 대군장 또는 왕이라 할 만한 지배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호리유적과 같이 보다 이른 시기의 목관묘를 조성하면서, 철기와 더불어 아직도 청동제품을 쓰던 사람들은 흔히 ‘소국’이라고 알려진 초기단계 정치제의 지배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덤구조와 그 부장유물들로 보아 이들 다호리유적의 피장자들이 활동한 시기를 주로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남부지방에 존재한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 갈대밭 속의 나라, 그 모습은? -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활동하였을 이들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알려줄 수 있는 옛 기록이 없어 부득이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지금의 경상도 일원지역에 변한.진한 24국이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얘기하는 삼한사회의 모습은 대부분이 이 책이 편찬되었던 무렵의 상황, 즉 기원 후 3세기만 전후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의 중심시기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에서 전하는 사회단계보다 약간 덜 발달한 모습을 상정해 보면 다소나마 다호리유적 조성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지』에서는 변한과 진한의 소국 안에는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그 우두머리를 거수라 했다. 그 중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 그 다음으로 험측, 번예, 살해, 그리고 읍차가 있었다고 한다.

큰 나라는 4,000〜5,000가, 작은 나라는 600〜700가였으며, 변한. 진한에 총 4〜5만가가 있었다고 한다. 변한만을 생각한다면 약 2만여가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의 인구변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아마도 전단계인 다호리유적 조성시에도 비슷한 인구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집단의 규모는 위에서 얘기하는 작은 나라의 정도, 혹은 그보다 약간 작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하는 3세기말의 변한의 정치집단은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작은 정치체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안에 있다는 여러 작은 별읍들이 바로 전시기의 개별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구를 5인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작은 나라의 경우 약 3,000〜3,500명의 인구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체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겠지만, 대략 인구 3,000명 내외의 규모를 가지고 다호리를 중심지로 하여 인근을 지배하면서 존재하였다가 나중에 목곽묘를 주 묘제로 하는, 보다 큰 인근의 정치집단으로 발전하였거나, 혹은 그러한 집단에 통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다호리의 정치집단은 그들이 남긴 유물들에서 살펴보건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과 같은 유물의 존재는 이들이 중국문화와 밀접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또 다른 연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한나라시대 화폐 오수전. 오수전(五銖錢)은 동전의 앞면에 ‘오수(五銖)’라는 글자가 표기된 화폐이다. 수(銖)는 무게 단위이며, 1수(銖)의 무게는 약 0.65g으로 오수(五銖)는 3.25g이다. 오수전은 B.C. 118년 중국 한(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에 주조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수대(隋代)를 거쳐 621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오수전은 무늬의 위치에 따라 천상·천하·천방으로 분류되고, 무늬의 형태는 월아문·일성문·사결문 등으로 분류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전한시대 청동거울인 성운문경. 중국 전한경(前漢鏡) 가운데 성운문경은 전한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청동거울이다. 성운문경은 한국에서 평양 정백동 3호묘·토성동 4호묘, 창원 다호리 1호묘, 밀양 교동 3호묘, 경산 임당 E-58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거울 뒷면의 중앙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그 바깥으로 16개의 연호문(連弧文)이 시문되어 있다. 그 바깥의 주문양대에는 4개의 유(乳)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원추형의 소형 유가 7개씩 서로 연결된 성운문이 시문되어 있다. 외곽 테두리 주연부는 16개의 연호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 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인근의 성산패총은 당시 이 지역에서 직접 철을 다루었던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가야라는 대규모 정치집단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다호리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던 초기 정치집단들이 그 기반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지병목 / 당시 문화재청 학예관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2010.04.12 07: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무학여고 뒷산에서 나온 붉은 항아리>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
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위에 산화철을 바른 토기입니다.
회원동에서 멀지않은 자산동 환주산성에서도 이와 같은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이 균형미 좋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항아리는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3,000년이라는 그 아득한 과거의 시간에 누군가가 남긴 이 작은 항아리 한 개가 마산이라는 도시에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마산·창원·칠원지역을 일러 삼한시대의 변한 13부족 중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김해)과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함안)의 사이에 있었던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원대 남재우 교수는 주조마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
창원 다호리와 덕천리에서 발견된 묘와 그 부장물로 보아 이 지역이 변한제국(弁韓諸國) 중 하나의 나라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은 이러하지만,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마산지역의 정치집단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는 원시적 부족국가 '골포국(骨浦國)'입니다.

포상팔국은 글의 뜻처럼 바닷가에 자리한 여덟 개 나라였습니다.
그 중 골포(骨浦)는 마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으며, 칠포(柒浦)는 진동만을 중심으로, 고사포(固史浦)는 현재의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습니다.
이 외에도 사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물국(泗勿國)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보라국(保羅國)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국가는 기록에 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가라(加羅=阿羅, 함안)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응한 신라에 의해 포상팔국이 패퇴합니다.
3년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복수를 준비한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固史浦) 세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킵니다만 또 다시 신라에게 철저히 괴멸 당하고 맙니다.

이 처절한 전사(戰史)를 통해,
비록 패하긴 했으나 강대국 신라를 상대로 보복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골포, 칠포, 고사포 3국도 상당한 세력을 갖춘 나라였다는 추정은 가능한 것 같습니다.

3세기말에 발생한 이 '포상팔국 전쟁' 이후 마산지역에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재편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탁순국(卓淳國)'이라는 정치집단이 마산 창원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이 국가는 진해의 웅천지역과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고자 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도 활발했습니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끝임 없는 세력 확장정책에 밀려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탁순국은 스스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라에 자진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시기는 신라가 김해의 금관국을 복속시킨 532년 이후에서 541년 이전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있었던 포상팔국의 '골포국'과 뒤를 이은 '탁순국',,,,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살았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


<이전 글>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 도시변천사 - 여는 글

 

신고
Trackback 0 Comment 4
  1. 후배유림 2010.04.13 12: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제 시작이네요..
    흥미진진합니다.
    마산의 과거...다음편을 기다립니다

    • 허정도 2010.04.13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지겨운 글을 기꺼이 '흥미진진'이라는 용어로 포장해 주어 고맙습니다.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올려볼 생각입니다.
      후배님, 봄꽃맞이 안가세요?

  2. 이진규 2010.04.13 17: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의 고대사는 수많은 가능성의 시대이자 다양성의 시대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가야를 비롯한 포상팔국은 그 건국과정에서부터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이는듯 합니다. 위치적으로도 한반도 남단에서 바다와 접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지금 제가 컴터를 두들기고 있는 이곳 용마산 도서관 언덕은 저 아득한 선사시대를 거쳐 골포국의 누군가가 마산만을 바라보며 한세월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정도 회장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충성!

    • 허정도 2010.04.13 18:1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가워.
      용마산 도서관에는 왠일로?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웅천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8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8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廣輿圖 ● 漆原縣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8.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가능한가?

이 글은 지난 달 박종권 탈핵경남시민행동 대표가 오마이 뉴스와 대담한 기사입니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가능한가? 정부가 신고리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의 계속 진행 여부를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결정키로 하자 논란이 뜨겁다..

고지도로 보는 창원 23. - 진해현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3. - 진해현 廣輿圖 ● 鎭海縣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조의문(弔倚文) : 의자를 보내며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건축사(建築士) 모씨(某氏)는 두어자 글로써 의자(倚子)에게 고(告)하노니, 사람의 몸을 편하게 받아주는 물건 가운데 중요로운 것이 의자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2. - 웅천현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2. - 웅천현 廣輿圖 ● 熊川縣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러시아 탐방기 4. -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 이르쿠츠크 도시 개요 - 인구 587,900명, 동시베리아의 사실상 수도로 유서 깊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와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전 구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위치는 바이칼 호(湖)의 서쪽..

고지도로 보는 창원 21. - 창원부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1. - 창원부 廣輿圖 ● 昌原府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러시아 탐방기 3. -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호수

러시아 탐방기 3. -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호수 ● 바이칼 호수 개요 - 시베리아의 진주 : 바이칼호는 수정처럼 맑고 푸르다. 바이칼 호수의 형성과정은 지각판이 융기하면서 형성된 곳이다. 남북의 길이가 636Km에 폭이 6..

고지도로 보는 창원 20. - 칠원현 지승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0. - 칠원현 地乘地圖 <?xml:namespace prefix = "v" /> <?xml:namespace prefix = "o" /> <?xml:namespace prefix = "w" /> ● ..

러시아 탐방기 2. - '체험 삶의 현장' 시베리아 대륙횡단열차

러시아 탐방기 2. - '체험 삶의 현장' 시베리아 대륙횡단열차 ● 시베리아 횡단철도 개요 -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구간을 전통구간이라고 말한다. 추가로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추가하여 ..

고지도로 보는 창원 19. - 진해현 지승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19. - 진해현 地乘地圖 ● 鎭海縣 지승지도(奎15423)/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지승은 군사요지인 일부의 관방처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러시아 탐방기 1. - 러시아의 征東行省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러시아 탐방기 1. - 러시아의 征東行省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 여행 개요 지난 7월 15일부터 25일까지 창원지역에서 도시건축에 관계하는 분들과 러시아 동부권을 여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은 세부일정..

고지도로 보는 창원 18. - 웅천현 地乘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18. - 웅천현 地乘地圖 ● 熊川縣 지승지도(奎15423)/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지승은 군사요지인 일부의 관방처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

고지도로 보는 창원 17. - 창원부 地乘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17. - 창원부 地乘地圖 ● 昌原府 지승지도(奎15423)/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지승은 군사요지인 일부의 관방처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