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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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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한일병합된 1910년 마산 모습>

도시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도시내부의 변화도 많았지만 도시외부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크게 세 갈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동쪽으로 창원․덕산․김해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약 120리 길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 진영을 거쳐 부산으로 연결되는 국도입니다. 이 길이 1909년 우마차가 쉽게 통행할 수 있는 신작로로 개수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넓은 길은 없었습니다. 많은 물량을 실어 나를 수레도 없었고,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넓은 도로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청일과 러일 양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군이 개통시킨 군사도로 경의․경인․경원선이 최초였으며 전국적으로 일반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도로의 확장공사는 매우 이른 편이었습니다.

또 다른 길은 서쪽으로 진동을 지나 진주로 가는 140리 길이었습니다.
좁은 오솔길로 여러 개의 험준한 산마루를 넘어야 했던 길이었습니다만 1908년 6월 폭 5m로 확장공사가 시행되어 1911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朝鮮總督府 官報 第211號, 1911. 5. 16)

세 번째는 북쪽으로 칠원․창녕․현풍․성주를 지나 서울로 연결되는 길이었는데 확장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 그림은 병합 당시(1910년) 마산일대 도시상황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직전의 마산일대 지도(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를 기초로, 개항기 동안 간행된 각종 문헌을 자료로 활용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지도의 아래 쪽 노란 색 칠한 부분이 신마산인데 노란색 중간 쯤 보이는 신월천(현 깡통거리)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하지만 개항 10년 후인 1910년 경, 이미 일본인들은 북쪽 원마산 방향으로 많이 뻗어나왔습니다. 근대식 도로도 현재의 장군천까지 건설되었습니다.

도시 중심에 길게 나있는 검은 선이 1905년에 개통한 철도 마산선입니다.
신마산 쪽에 마산역이, 원마산 인근(현 육호광장)에 구마산역이 있었으며, 이때 난 철로가 현 경남은행 본점 앞 중앙간선도로입니다.

지도처럼 마산포(원마산)와 신마산에만 도시가 형성되었을 뿐, 완월, 자산, 회원, 양덕, 석전, 합성지역 등은 그때까지 자그마한 자연취락이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달 29일 이 사실을 정식으로 공포함으로써 한반도가 자신들의 땅임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사회를 식민지 구조로 재편하였고, 그 과정에서 1911년 1월 1일 진해군항보호를 구실로 마산의 개항장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나 개항 당시에도 일본과의 교역 외에 타 국가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마산항은 폐항이 된 이후에도 한국산 쌀의 대일 수출과 일제 소비성 물자 및 군수품 수입항으로 계속 활용됨으로써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습니다.

개항과 함께 찾아온 인구의 증가와 근대적 도시시설 출현,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등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마산포의 도시구조는 급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듯이 성장 일변도의 길을 걸어온 마산도 1911년 진해에 군항이 설치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진해>

당시 진해 사정과 관련지어 마산도시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먼저 평정빈부(平井斌夫)가 쓴『마산과 진해만』의 기록입니다.

‘1911년 1월 마산의 개항이 폐쇄되면서 산업이 위축될 것 같았지만 원마산의 왕성한 교역과 상거래, 진해만 군사시설의 건축, 진해 신시가지의 건설 등에 의해 오히려 폐쇄 전보다 시장이 활발해졌다’ 고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최근 친일 문제로 시끄러운 장지연의 『마산기행』기록입니다.

‘한 때 번성의 극치를 이룬 마산은 진해에 군항을 설치한 이래 마산의 상인들이 진해 쪽으로 넘어가는 이가 많아 요사이는 오히려 1911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고 점포들도 활기를 과거에 비해 잃었다’
고 한 것입니다.

두 주장은 각각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항기 이후 발간된 자료들과 1911년에 시작되는 남성동 해안 매립공사 등을 보면 장지연의 글처럼 마산이 비록 ‘과거에 비해 활기를 잃었다’ 하더라도 마산도시 전체가 크게 위축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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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비 2011.05.02 10: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진해의 모습이 훨씬 정도되고 좋은 것 같네요.

    • 허정도 2011.05.02 20:57 신고 address edit & del

      일제의 진해 건설 초기사진입니다.
      잘 계시죠?

    • blokken 2011.05.13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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