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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0) -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3 창원은 가야의 탁순국이었다

 

가야 후기에 창원지역에는 탁순국(卓淳國)이 자리잡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나온다.

 

-다양하게 남아 있는 유적들- 

창원 지방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은 발견된 바 없고, 청동기시대 유적은 더러 발견되었다. 즉, 창원시 남산 유적, 외동, 가음정동 민무늬토기 포함층과 진해시 성내동(웅천) 출토민무늬토기 등을 비롯하여, 창원시외동, 토월동, 가음정동, 용지동, 동읍 덕천리, 용잠리, 화양리, 신방리, 남산리, 북면 외감리 등에서는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었다.

창원시 남산 유적은 마을이 야산의 구릉에 높이 조성되어 있고 그 전체가 사람 두길 이상되는 환호(環濠)에 둘러싸여 있는 방어성 취락 유적으로서, 이미 청동기시대에 창원 지방에 농경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3년 사이에 걸쳐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덕천리 1호 지석묘는 길이 8미터, 폭 6미터, 깊이 4.5미터의 토광 하단에 석곽을 설치하고 그 위를 판석과 괴석으로 3단에 걸쳐 덮은 후 다시 흙을 덮고 지석과 상석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 외곽에는 방형의 주구(周溝: 주위를 도랑으로 판 것)가 만들어져 있고 안쪽으로는 높이 40∼50센티미터의 석축이 쌓여 있었다. 유물로는 민무늬토기 평저옹, 홍도, 대롱구슬(管玉) 일괄, 간돌검, 간돌화살촉,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묘역을 갖춘 대형 지석묘 유적이 발견되기는 최초의 일로서, 지석묘 유적 단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계급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 이후의 유적으로는 분묘와 성지가 있는데, 목관묘 및 목곽묘 유적으로는 창원시 가음정동, 반계동, 도계동, 봉곡동, 봉림동, 불모산동, 서상동 고분군, 동읍 다호리 고분군, 북면 화천리, 동전리 고분군, 진해시 성내동(웅천) 고분군 등이 있고, 옹관묘 유적으로 삼동동 고분군이 있다.

 

<창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계동 유적>

 

창원시 토월동 진례산성(進禮山城), 동읍 무성성지(武城城址), 북면 화천리성지(花川里城址) 등은 해당시기의 성지로 추정된다.

위의 고분군 중에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다호리 1호분인데, 봉분이 없고 길이 278센티미터, 너비 85센티미터, 깊이 205센티미터의 토광에 길이 240센티미터의 통나무형 목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부장품으로는 세형동검, 철검, 철제 고리자루손칼[鐵製環頭刀子], 청동투겁창, 쇠투겁창, 판상철부, 쇠따비, 성운문 거울[星雲文鏡], 청동띠고리[靑銅帶鉤], 오수전[五銖錢], 청동말종방울[銅鐸] 등의 금속기와, 휴대용 화장품곽을 비롯하여 검집, 원형두(圓形豆), 방형두(方形豆), 원통형 칠기,뚜껑, 각형(角形) 칠기, 붓, 부채 등의 칠기류, 유리구슬, 민무늬토기와 와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에서 성운문 거울, 오수전, 띠고리, 청동말종방울, 유리구슬, 칠기 화장품곽 등의 중국 한나라식(漢式) 유물은 평양 정백동이나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서, 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낙랑과의 교섭이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목관의 형태나 청동기, 철기 및 칠기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다른 독창적인 세형동검 문화의 전통을 보인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경남 해안 지대에서 창원 지방에 가장 선진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창원시 도계동 및 다호리 분묘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기원 후의 시기에 이들은 다호리 초기와 같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다고 보인다. 이는 같은 시기에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이 번성하던 것과는 대조된다.

4세기경의 창원 도계동18호 목곽묘는 길이 350센티미터, 너비 160센티미터, 잔존 깊이 55센티미터의 토광 안에서 철제 손칼 2점, 투겁창 2점, 미늘쇠[有刺利器] 1점, 도끼 2점, 낫 1점, 끌 1점 등의 철기류와 적갈색 양이부소호(兩耳附小壺) 2점, 회청색고배 2점, 원저단경호 1점, 유개대부호(有蓋臺附壺)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창원 지방의 중심지가 아닌 도계동 고분 축조 집단도 어느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김해 양식의 고배, 즉 아가리 부위가 급격하게 바깥으로 꺾여있고 굽다리가 팔자형(八字形)으로 퍼지되 투창이 없는 외반구연 무투창 고배(外反口緣無透窓高杯)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이들은 김해의 가락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패총 유적으로는 창원시 외동 성산패총, 가음정동, 남산동 패총, 진해시 웅천 패총, 진해 패총, 용원동 패총 등이 있다.

특히 용원동 패총에서는 움집(수혈주거지) 14기, 고상가옥(高床家屋) 4기, 저장공, 승석타날문(새끼줄로 두드린 무늬)이나 무문의 평저단경호, 고배, 장경호, 단경호, 옹, 하지키 뚜껑(土師器蓋) 등의 적갈색 연질토기, 타날문 단경호, 고배류, 대형 단경호, 평저단경호, 화로형토기, 원통형 기대 등의 회청색 경질토기, 철정, 쇠손칼, 쇠화살촉, 소형 쇠도끼, 녹각제 자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원통형기대는 원통의 중간 부위가 주산알 모양으로 약간 부풀어 오르고 하단부의 곡선이 불룩하게 내려가는 것으로서, 4세기 후반의 김해 대성동 41호분, 양동 9호분, 230호분, 부원동 패총, 부산 복천동 95호분 출토품과 같은 양식이므로, 해당 시기의 그 지역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긴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의 교류- 

『일본서기』신공 섭정 46년(366) 조에서 백제는 창원의 탁순국(卓淳國)을 매개로 해서 왜국과 통교하기를 원했고, 탁순국 말금한기(末錦旱岐)는 왜로 통하는 길을 묻는 백제사신에게 자문해 주고 왜국사신에게 백제 사신의 말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탁순 사람 과고(過古)를 보내 왜국사신의 시종을 백제로 인도해 주기도 했으며, 탁순국은 왜국 사신 일행이 귀국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신공기(神功紀)」49년(369) 조의 기사에서, 탁순국은 왜군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전하는 이런 기사들이 얼마나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창원 탁순국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정치집단이었음은 확실하다.

4세기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창원지역에 탁순국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틀림없다. 『양직공도(梁職貢圖)』백제국사 전의 ‘탁국(卓國)’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탁순국(卓淳國)’이 바로 그것이다.

창원 반계동 고분군은 6세기의 것으로서 25호분에서 쇠망치, 쇠집게 등의 단야구가 출토되어 이들이 제철집단 임을 알 수 있으며, 23호분에서는 고령양식의 유개대부 장경호, 단추형꼭지 뚜껑 단각고배, 개배, 유개대부 파수부발(有蓋臺附把手附鉢) 등이 출토되어, 이들이 대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창원 탁순국의 왕 또는 유력자로 추정되는 아리사등(阿利斯等)은 대가야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소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522년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 당시 따라온 수행 인원 중 창원 지방에 배치된 사람들이 돌연 신라 관복으로 갈아입자, 그 수행 인원들을 신라로 쫓아 보내는 자주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트집 삼아 탁순국을 공격하고, 백제군이 함안 안라국 주변의 걸탁성까지 진주해오자, 탁순국은 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왜국의 사신단도 구사모라((久斯牟羅)=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에 머물면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자, 아리사 등은 백제, 신라에게 사신을 보내 회의를 요청했다.

백제는 군대를 더욱 전진시켜 칠원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고 주둔하면서 탁순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탁순국 내부에서는 백제에게 투항하자는 일파와 신라에게 투항하자는 일파가 있었는데, 그 왕이 신라에 종속되기를 원했다. 그 멸망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53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추정된다.

신라는 탁순국을 복속시켜 굴자군(屈自郡)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현(領縣)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合浦縣: 마산시), 웅신현(熊神縣: 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이는 멸망 시기 탁순국의 영역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준다. 혹은 멸망 직전의 탁순국이 신라에게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전쟁 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군현 편제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탁순국 당시보다 넓은 영역을 신라로부터 배정받은 때문일 수도 있다.

김태식 /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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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마산인근을 ‘합포(合浦)’라 부르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구역명칭입니다.

스스로 몸을 굽힌다는 뜻을 가진 '굴자(屈自)'를 군명(名)으로 한 것과 포상팔국시대에 국명()이었던 '골포(骨浦)'를 행정체계 최하단위인 현명(縣)으로 사용한 것에 눈길이 갑니다.
혹시 전쟁에서 골포국을 굴복시킨 승리자 신라가 고의적으로 지은 이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마산에는 2천 년이나 되는 ‘골포’가 아직도 살아남아
골포 라이온스클럽’ ‘골포 부동산’ ‘골포 갯마을식당’ ‘골포 스크린골프’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행정구역을 새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때의 군현개편은 군과 현의 명칭개정을 비롯하여 군현의 승격과 강등, 영속관계의 조정 등 행정질서의 개편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명을 한화(漢化)시켰습니다.

이 정비 때 지금의 진주지역인 청주(菁州)는 강주(康州)로, 지금의 양산지역인 삽량주(歃良州)는 양주(良州)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양주의 의안군(義安郡)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안은 창원시에 의안동이라는 동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만 몇 해 전 창원시가 동을 합치면서 인근 몇몇 동과 함께 의창동으로 변하면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의창동주민센터 의안민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아직 연명은 하고 있었습니다.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바뀔 때 현의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마산의 골포현(骨浦縣)은 합포현(合浦縣)으로,
칠원의 칠토현(柒土縣)은 칠제현(漆堤縣)으로,
웅천의 웅지현(熊只縣)은 웅신현(熊神縣)이 되었습니다.

이 때 탄생한 합포(合浦)라는 지명은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 직후인 고려 충렬왕 8년(1282년)까지 마산지역의 행정구역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정구역명이 바뀐 뒤에도 '합포'는 지명이나 포구의 명칭으로는 계속 사용되어 마치 '마산' 지명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합할 합(合)’자를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대합조개 합(蛤)’자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합포라는 지명에 대해서,
아래 그림(1833년 제작된 고지도의 일부)처럼 마산의 산호천과 삼호천 그리고 창원의 창원천과 남천이 팔룡산을 가운데 두고 창원과 마산 양쪽에서 흘러내려 마산 앞바다에서 합쳐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양쪽의 큰물이 합쳐지는 곳, 그래서 이곳을 ‘합포(合浦)’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이 합쳐진 합포가 아니면,
‘대합조개 합(蛤)’자의 합포(蛤浦)도 병용했다하니 마산 앞바다 갯벌에 대합조개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까요?

하지만 보다 정확한 분석은 따로 있습니다.




동아대 김광철 교수에 의하면,
합포는 단순히 포구의 모양이나 물산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위 두 개의 그림에서 보는 중국 남부지역 광서장족자치구 연해지역에 있는 '합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중국의 '합포'는 대륙 최남단인 베트남 국경 부근, 곧 요즈음 한국사람들이 골프여행 많이 간다는 해남도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해안의 작은 도시입니다.
한대(漢代) 이래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수천 년된 유서 깊은 지명입니다.

합포군은 후한시대 맹상(孟嘗)이라는 사람이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면서 유명해졌답니다.
따라서 마산이 합포로 개칭된 것은 청렴한 수령이 다스리는 고장으로 인식되어 왔던 합포의 상징성을 고려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곧 '골포'에서 '합포'로의 개칭은 지방관을 비롯한 관료의 선정과 민생의 안정을 바라는 국가 염원이었다는 설명입니다.

환주(還珠)가 합포의 별호로 사용된 것도 이런 상징화 작업이었다는 설명도 곁들여 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돌아왔다'는 뜻이 담긴 '환주(還珠)'는 곧 선정을 펼친 수령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합포’라는 명칭은 마산에 구청이 있을 당시 ‘합포구’로도 사용되었지만 ‘합포초등학교’ ‘합포여중’ ‘합포고등학교’ 등의 학교이름과 ‘합포만’ ‘합포문화동인회’ '합포만의 아침' ‘합포우체국’ ‘합포동’ 등 지금도 마산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마산시민에게는 아주 친숙한 지명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신라시대,
이미 마산에는 부산, 울산 등과 함께 항만이 있었습니다.
(사)한국건설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항만건설사/1978년』를 보면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항만으로 이용된 지역을 소개하면서 마산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불 때 당시의 항만건설은 공법상 원시적인 개발에 불과했지만 백제와 신라의 축항기술은 당시 아시아지역 최첨단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기술자들이 와서 신라의 조선기술과 축항기술을 습득해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의 축항기술은 천연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과 해상조건에서 오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풍랑 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시설은 석축돌제식(石築突堤式), 석주잔교식(石柱棧橋式) 또는 목재를 이용한 잔교(棧橋) 등 이었습니다.

당시 선진공법으로 축조되었던 신라시대 항만은 지금 이 도시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신라시대 마산의 부두에서는 어떤 분들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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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0.04.19 10: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

    • 허정도 2010.04.19 11:00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소.
      설명을 하려니 글이 조금 기네요.

  2. 후배유림 2010.04.21 14: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선배님.
    다음 글 기다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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