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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이권이 노·일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외인(外人)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구마산 항민(港民)들은 꾸준히 그들의 상권을 투쟁으로 수호 유지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적인 뒷받침은 물론 축적된 상업자본의 힘에서 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인()이 되고 과()가 되어 더욱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갔고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 대해서도 투쟁의 현실적인 실력을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외인(外人)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개항 이후 그들이 노리는 중요한 이권 가운데 하나가 창탄(漲灘, Water frontage)의 매축권이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창탄은 매매가 허락되지 않았고, 외국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일 양국은 이 창탄의 탈취를 둘러싸고 무섭게 대립하였던 것이니, 이는 매축권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산의 본거지인 구마산의 해안지 즉 서성리, 중성리, 동성리, 오산리 지선(地先)의 창탄지는 구마산 항민들로 보아서는 그들의 상권, 어업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들에게는 생존권과도 결부되는 중요한 터전이기도 했다.

 

구마산의 시장권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한 일본인들은 그 후 다시 이곳 창탄지 매축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이 낌새를 알게 된 구마산 항민들은 분연히 궐기, 꾸준한 항소 투쟁을 벌여 끝까지 이를 수호했던 것이니,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들의 근대적 투쟁으로서 높이 평가됨직한 것이었다.

 

마산포 개항 후 이를 둘러싼 노·일의 각축은 날로 치열해 가고 이에 따라 외국 선박의 마산항 출입도 빈번해 갈 무렵, 1899(광무3) 51, 구마산 동성리에 살던 김경덕은 만국의 통상이 성해지고 앞으로 구마산포에 있어서도 상여(商旅)의 집회와 화물의 풍비(豐備)가 예측되므로 구마산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의 매축권을 창원감리서에 신청하여 감리의 인허를 받게 되었다.(189910)

 

 

<아래 그림은 김경덕이 매축청원서에 첨부한 도면. 이 도면을 현 도시공간에 표시한 것이 두번째 그림이다>

 

 

 

그 후 김경덕은 당시 일본육군성 자금으로 노국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방간방태랑(부산을 거점으로 암약暗躍하던 일본인 식민재벌-편자주)과 같이 마산포 투지 매수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인 홍청삼(弘淸三, 오백정五百井 상점 마산 지배인)으로부터 15,000냥을 매삭 매양두 삼분식(每朔 每兩頭 參分式)의 이자로 광무 6(1902) 정월 회내(晦內)’를 기한으로 본전과 이자를 환부한다는 조건 밑에 매축 인허문권(認許文券)을 전집(典執)하고 빌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한이 지날 때는 매축인허문권을 영원히 허급(許給)한다는 차용증을 작성해 주었던 것이다.(홍청삼 주장)

 

그 후 얼마 안 되어(1902년 정월 회일晦日 ) 김경덕이 사망하게 되자 홍청삼은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지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장차 이곳을 매축하려 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인의 야망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리서의 의정부 앞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본항일본이사관(駐本港日本理事官) 삼증구미길조회(三增久米吉照會)를 접준(接准)하온즉 내개(內開)에 본방(本邦) 상인(商人) 홍청삼이가 별지(別紙)에 통()한 마산포서성(馬山浦西城)으로 오산(午山)에 지()하와 해면매축권리이전(海面埋築權利移轉)할 양() 인원서(認願書)를 제출하니 사실(事實)을 조사(調査)하여 정당(正當)하거든 별지원서(別紙願書)대로 인허(認許)하기로 부속(附屬) 서류첨부(書類添附) 차단(此段) 조회등인(照會等因)이옵기 거차사(據此査)하온즉 광무 310월에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위명인(爲名人)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오산리전지창탄(午山里前至漲灘)을 한오십파(限五十把) 퇴축(退築)하오면 무해어공(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而爲利於商民)이라 청원(請願)하자 승인허(承認許)하야 음력(陰曆) 경자(庚子) 2월 초삼일에 해() 인허장(認許狀)을 전집어일상인홍청삼(典執於日商人弘淸三)하옵고 득임(得賃) 일만오천양미보(壹萬五千兩未報)하옵고 급위신사(伋爲身死)하였사오며 해() 전집급채지홍청삼(典執給債之弘淸三)하옵고 칙척빙인허(則尺憑認許)하옵고 견립표목(堅立標木)에 장영직축(將營直築)이온바 당초(當初) 인허성급(認許成給)하온 우시감리(于時監理)는 수위상무지흥왕(雖爲商務之興旺)이오나 지금매축권리(至今埋築權利)가 이전우외(移轉于外)이온 고()로 해() 청원(請願)에 승인(承認)하옵고 김경덕(金敬悳) 청원서(請願書) () 전집표(典執票)를 등서(謄書)하와 병기매축처도회(倂其埋築處圖繪)를 자()에 첨부보고(添附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411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 주사(主事) 김병철(金炳哲)

 

의정부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각하(閣下)

 

 

그리고 위 보고서에 첨부된 김경덕의 청원서와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청원서(請願書)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우청원단(右請願段)은 제자만국통상지회(際玆萬國通商之會)하야 초범오장(楚帆吳檣)이 차제래박(次第來泊)일세 본포(本浦)를 금기설항(今旣設港)즉 상여지회집(商旅之會集)과 물화지풍비(物貨之豐備)는 이소필연(理所必然)이라 자서성(自西城)으로 이지오산(以至午山)에 방축제창탄(防築際漲灘)을 한오십파퇴축성언(限五十把退築成堰)하와 주즙왕래(舟楫往來)에 무천착지려(無淺窄之慮)하고 시전포열(市廛布列)에 면분환지폐(免粉還之弊) 칙무해어공(則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자성대의(而爲利於商民者誠大矣) ()로 회성형지(繪成形址)하와 자감점연앙청(玆敢粘連仰請)하오니 참상교시후(參商敎是後) 특위인허(特爲認許)하오셔 비위상판흥왕지지(俾爲商販興旺之地) 복망(伏望)

 

광무(光武) 310월 일

 

감리(監理) 각하(閣下)

 

指令

퇴축성언(退築成堰)이 상판(商販)에 여이(與利)함인즉 특념(特念) 인준(認准)할 사() 십월

대한(大韓) 광무(光武) 4년 경자(庚子) 2월 초삼일 홍공전표(弘公前票) 우표위사단(右票爲事段) 당차지시(當此之時) 긴유급용처(緊有急用處) 마산포양자서성(馬山浦洋自西城), 오산지방축제(午山至防築際) 창탄(漲灘) 한오십파퇴축성언차(限五十把退築成堰次) 감리서인준문기(監理署認准文記) 전집시유한전일만오천양우전출채(典執是遺韓錢壹萬五千兩右前出債) 이변칙매삭매양두(而邊則每朔每兩頭) 삼분식위정(參分式爲定) 이한칙광무(而限則光武) 6년 정월 회내(晦內) 구본이준보시의(俱本利準報是矣) 약과한불보(若過限不報) 칙우인허문기(則右認許文記) 영위허급(永爲許給) 이이차문기(而以此文記) 병위방매문기(倂爲放賣文記) 퇴축성언(退築成堰) 귀공자유(貴公自由) 임의(任意) 이일후약유잡담지폐(而日後若有雜談之弊) 칙이차표빙고사(則以此標憑考事).

 

標主 김경덕(金敬悳)

 

 

구마산 창탄을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매축하려는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港民)에게는 청천의 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당시 마산의 형편을 보면 구마산포에서 각국 조계지(신마산-편자 주)에 이르는 해안 십리는 일본 철도감부(鐵道監部)입표정계(立標定界)’하여 매축 예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마산 서성리(西城里)로부터 오산리(午山里)에 이르는 매축권이 홍청삼(弘淸三)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면 마산 창탄전역이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 된다.

 

구마산 서성리에서 오산리에 이르는 지선(地先) 해면(海面)은 넓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가(人家) 천호(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에 군집(群集)하여 있어 물화기사(物貨起卸)의 상전시사(商廛市肆)’를 설립코자 하여도 땅이 없으므로 이곳을 매축하면 상업이 크게 흥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상업발전의 최대 관건이 되는 곳이었다.

 

또 이때 구마산포의 배후 일대의 토지는 일본이 철도 부지로서 강제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구마산 창탄 매축권을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이 차지하게 되면 구마산 항민들의 처지는 장차 목이 졸려 질식하게 되는 형편에 몰릴 것이 뻔했다.

 

따라서 구마산 항민들로서는 생존권에 관계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감리서는 상부의 명도 있고 해서 홍청삼을 불러 누누이 타일렀으나 그는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빙자하여 응하지 않았다.

 

또한 김경덕은 이미 사망하였고, 원근 친척도 없었으므로 문제의 증빙서류를 고증해 볼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 진실을 캐어 보기가 실로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대한 감리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향이본항해면(向以本港海面)에 일상(日商) 홍청삼(弘淸三)이 통위매축일사(統爲埋築一事)로 보명본부(報明本府)하였삽더니 시승지령내개(施承指令內開)에 차단사항(此段事項)이 관계비경(關係非輕)이거늘 초불보명(初不報明)하고 체선인허우외인(遞先認許于外人)이 수속가아(殊屬可訝)함도격소(函圖繳消)하야 비무자안(俾無滋案)케 할 사등인(事等因)이시온바 차()를 준사(遵査)하온즉 항해매축(港海埋築)이 원계중요(原係重要)이온바 개이본항형편(槪以本港形便)으로 언지(言之)하오면 자구마산포(自舊馬山浦)로 지마산각국거류지(至馬山各國居留地)하여 연해일대(沿海一帶)에 장근십리(長近十里)는 기자철도감부(己自鐵道監部)로 입표정계고(立標定界故)로 향여십사호(向旅十四號) 보고(報告)에 회도점상(繪圖粘上)이옵고 사차이외(捨此以外)에 사합매축자(司合埋築者)는 서자서성리(西自西城里)로 동지오산(東至午山)토록 전인어총청삼(全人於弘淸三) 영축지도(營築地圖)하였삽는데 관기지형(觀其地形) 칙수미수리(則首尾數里)에 해면(海面)이 초활(稍闊)하고 해수(海水)가 초천(稍淺)하여 불비거력(不費巨力)이라도 가득실효(可得實效)이옵고 논기지리(論其地利) 칙인가천호(則人家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 이총잡착박(而叢雜窄迫)하와 선박출입(船舶出入)에 물화기각(物貨起却)의 급부상전시사(及夫商廛市肆)를 욕설무타(欲設無他)이온즉 차약증축(此若增築)이오면 상유흥왕(商裕興旺)에 최대관건(最大關鍵)이옵거늘 조속지외인(朝屬之外人)이 극계완석(極係惋惜)일뿐더러 황승엄절(況承嚴節)에 불용유홀(不容琉忽)이옵기 해홍청삼(該弘淸三)을 루경초유(屢經招諭)에 혹완혹준(或婉或峻)하야 명기불연(明其不然)하오되 업사신사(業巳身死)에 겸무원근족친(兼無遠近族親)이라 하오며 소유일절서류(所有一切書類)를 참 수제존당(漱諸存檔)에 역무가고(亦無可考)이오니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온바 기존거행(其存擧行)에 귀각시민(晷刻是悶)이옵기 자()에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62

 

창원감리(昌原監理) 이 기 (李 琦)

 

의정부(議政府) 대신(大臣) 각하(閣下)

 

 

당초에 구마산 창탄의 매축권을 감리로부터 인허 받은 김경덕이 이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의 주장으로 보아 이 무렵 일본인들이 악랄한 갖은 수법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기(前記) 감리의 보고에서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라 한 바와 같이 실로 허위 날조의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홍청삼은 현지 마산에서 구마산 항민들을 비롯한 감리의 반대로 자기의 뜻을 관철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인 이권 옹호기관의 본산(本山)인 통감부로 하여금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매축을 허가하도록 강요했다.

 

통감부의 통첩을 받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창원부윤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통하여 창탄 매축예정기지(埋築豫定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인허시(認許時) 혹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 상세히 보고케 하였다.

 

수사안당(漱査案檔)한 즉 광무 310월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 의정부(議政府)에서 전() 감리서(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해인허(駭認許)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즉 마산포(馬山浦) 재유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공동물화상륙소(船舶擊溜場共同物貨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其埋築區域及設計) ()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爲可)

 

융희원년(隆熙元年) 105

 

內閣總理大臣 이 완 용(李 完 用)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이 훈령(訓令)에 대하여 창원부윤 이기(李琦)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삼십호(現承第三十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수사안당(漱査案檔)한즉 광무 2310일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의정부(前議政府)에서 전감리서(前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인허(認許)를 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 즉 마산포(馬山浦) 재유 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船舶擊溜場) 공동물화(共同物貨) 상륙소(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등(其埋築區域及設計等)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등인(爲可等因)이시온바 훈사(訓辭)를 늠준凜准하와 해안건(該案件)을 심사(審査)하온즉 김씨에게 인허(認許)한 사()가 초무존당(初無存檔)이오며 설유전질권(設有典質券)이라도 사재광무(事在光武) 삼년도(三年度)뿐 부시(不是)오라 광무(光武) 101016일 칙령(勅令) 62호 난내(欄內)에 각종인허(各種認許)에 대()하야 일개년내실시혹착수(一箇年內實施或着手)치 못한 시()는 해인허(該認許)를 무효(無效)로 함이라 하셨사오니 해인(該人)에 차이전권(此移轉權)은 자귀무효(自歸無效)이온지라 이무경론(理無更論)이옵고 해창탄매축(該漲灘埋築)할 기지(基址)로 논()하와도 상년(上年) 62일 의정부(議政府) 지령(指令)을 승준(承准)하와 보명(報明)하였사온즉 자가동촉(自可洞燭)이 살건바 해안일대(海岸一帶)에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타인소유권(他人所有權)에 방해(妨害) 유무(有無)에 대()하야 동서(東西) 굴강(掘江)은 포칠리거민소용지지(浦七里居民所用之地) 위기선박지피풍우(爲其船舶之避風雨)이 수축처야(修築處也), 동성어선(東城魚船) 창여(艙與) 오산선창(午山船艙)은 각어물판매설점소(各魚物販賣設店所)이온즉 해창탄지긴요(該漲灘之緊要)가 기어상민(其於商民)에 최유관계(最有關係)이옵기 해기지(該基址)의 장광파수(長廣把數)를 회성도본(繪成圖本)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0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즉 이 안건을 심사한즉 김경덕에게 사실이 초무존당(初無存檔)’하고 설혹 전질권(典質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은 광무 3년도(1899)의 일로 광무 10(1906) 1016일 칙령 제62호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며, 타인 소유권에 대한 방해 유무에 관하여는 동서굴강(東西掘江)’포칠리(浦七里)’에 거주하는 항민(港民)의 소용지로서 선박의 대피지로 수축한 곳이요, 동성어물(東城魚物)선창은 오산(午山)선창과 더불어 각 어물 판매를 위해 설점(設店)을 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곳 창탄(漲灘)은 구마산 상민들에게는 가장 긴요한 곳이라 보고하였던 것이다.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통감부에 청원한 결과 통감부가 조선내각에 압력을 가하여 그에게 매축의 인허(認許)를 주도록 획책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구마산 항민(商漁民)들은 분연히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항민 박기수, 김하수 등은 서성 선창에 이르는 일대의 창탄을 합력투자(合力投資)하여 매축할 것을 결의한 후 조약(條約)을 준성(峻成)’하고 구마산 항민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창원부윤에게 제출했다. 이 일은 구마산 항민들이 경제적으로 실력 대항하려는 거사로서 실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동선창(自西城洞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이거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해안전면(該基地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요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埋築) 영업(營業)할 차()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伏望).

 

이 청원서에는 당시 구마산이 놓여있는 어려운 형편이 실로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당시 구마산 배후 일대의 전토(田土)가 모두 철도와 군용 부지로 일본에게 강제 수용을 당하고 구마산 항민이 자생(資生)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구마산 해안 일대 뿐인데, 이곳 매축을 일인(日人)이 하게 되면 목을 조르고 문을 닫게 하는 것과 같아 이곳에 사는 수천호거민(數千戶居民)’은 장차 실업으로 산산이 흩어질 뿐이라 하여 이곳 매축권은 구마산 항민들의 생존권에 관계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항민의 자체 매축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이 청원서에 접한 부윤은 1907111일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본항매축사(以本港埋築事)로 낭승(曩承) 제삼십호(第三十號) 훈령(訓令)하와 축조보명(逐條報明)이삽던바, 현접항민(現接港民) 박기수(朴基洙), 김하수(金河守) 등 청원서(請願書) 내개(內開)에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어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該基地) 해안전면(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차()로 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등인(伏望等因)이온바 차()를 사()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게 관계누중(關係累重)뿐 불시(不啻)오라 이항민공동소유지지(以港民共同所有之地)로 허항민매축업(許港民埋築業)이 식계여거(寔係與擧)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특념(特念)하시와 의원매축(依願埋築)케 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11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이 같은 부윤의 보고를 받은 내각에서는 매축할 평수와 자본액수와 매축기한 등을 세밀히 검토한 다음 일후(日後)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후에 인허(認許)하고 그것을 보고할 것을 창원부윤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부윤은 항민들로부터 제출된 창원 마산항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를 첨부하여 내각총리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오십삼호(現承第五十三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내보거실(來報據悉)인바 해탄지(該灘址)를 항민등(港民等)이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사()로 준성조약(峻成條約)이라 하였으니 매축(埋築)할 평수(坪數)는 기하(幾何)이며 소인자본(所人資本)은 기하(幾何)인데 하이변비(何以辨備)이며 매축필역(埋築畢役)할 기한(期限)은 이기허간약정(以幾許間約定)하였는지 차등각건(此等各件)을 일일확세정지(一一確細定之)하야 보무일후위오연후(保無日後違誤然後)에 내가준시(乃可准施)이니 축저보명사등인(築底報明事等因)이온바 차()를 늠준(凜准)하와 항민등(港民等)이 해탄지매축(該灘址埋築)할 사()로 예산(豫算)하온 명세서(明細書)를 수취(受取)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2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태자소사내각총리대신(太子小師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창원(昌原) 마산항(馬山港)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明細書)

 

1. 평수(坪數)는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통계일만일천오백십사평(統計壹萬壹千五百十四坪)

2. 필역기한(畢役期限)은 십이개월(十二個月)로 예정사(豫定事)

3. 소인자본(所人資本)은 사만환(四萬圜) 예산(豫算)인데 항민중(港民中) 자본가(資本家)에서 합력구취사(合力鳩聚事)

4. 자본인성명(資本人姓名)을 우개날장(右開捺章)하야 지방관청(地方官廳)에 보관사(保管事)

 

左開

이규철(李圭哲) 오천환 이상소(李相召) 오천환 손양손(孫梁損) 오천환

강홍규(姜洪奎) 오천환 김지관(金志觀) 오천환 권태창(權泰昌) 오천환

최병두(崔炳斗) 이천환 김창제(金昌濟) 이천환 김정기(金正基) 일천환

정인섭(鄭仁燮) 일천환 박기수(朴基洙) 일천환 김하수(金河守) 일천환

강성도(姜成度) 일천환 이장환(李章煥) 오백환 송치권(宋致權) 오백환

                                                                                계() 사만원(四萬圜)

    

실로 이때 사만환(四萬圜)이라는 돈은 막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구마산 항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에 관계되는 구마산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인과의 투쟁에서 단결력에 의해 또한 꾸준한 항소(抗訴) 투쟁을 전개하여 드디어는 항민 자본가들의 합력(合力) 투자한 사만(四萬)의 자본으로 매축 인허를 받게 됨으로써 통감부의 압력을 뚫고 주권의 수호에 성공했던 것이다.

 

융기(隆起)해 오르는 이러한 구마산 항민들의 저항의식의 물결을 타고 1908년 자주적 이권 옹호의 자치 기관인 마산민의소가 탄생하였다.

 

이는 국내 봉건지배층과 외세(外勢)에 대항하여 구마산 항민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대변 기관이었다.

 

그 성격은 서울에 생겨났던 독립협회와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마산민의소는 항민의 의사를 집결하여 마산항의 주권을 옹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일본에의 병합을 계기로 마산민의소도 강제 해산된 것은 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 같은 마산 항민들의 저항을 뒷받침한 현실적인 힘은 축적된 항민 자본이었고 이러한 자본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은 투쟁을 통하여 민족 주체성 가운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상인 홍청삼(弘淸三)은 그 목적한 바가 실패로 돌아가자 구마산 서성선창(西城船艙)에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의 서굴(西掘)을 재내(在內)로 하는 일부분의 매축권이라도 얻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 결과 현지 일인 이사관과 감리 사이까지에도 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당시 부윤의 보고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본부(本府) 마산항소재(馬山港所在) 창탄기지(漲灘基址) 자서성지오산선창(自西城至午山船艙)까지 매축(埋築)할 사()에 대()하여 무역항안(貿易港岸)에 공익상(公益上) 미거(美擧)됨은 본() 부윤(府尹)이오나 일이사관(日理事官)이오나 동일(同一) 사상(思想)이온데 단() 매축권(埋築權)에 재()하여는 다민(多民)에 원()을 불가부종(不可不從)하와 업사보명(業巳報明)이옵거니와 현거이사관호담(現據理事官哠談)하온즉 일상민(日商民) 홍청삼(弘淸三) 청원(請願)이 단서성선창(但西城船艙)으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 서굴강(西掘江)만 내재(內在)한 일부분(一部分)에 불과(不過)하다 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 청원(請願)한 기지내(基址內)에 포함기내(包含其內)하와 기어오십삼호지령(旣於五十三號指令)을 봉시(奉示)하와 갱보(更報)하온즉 해기지(該基址)에 매축권(埋築權)을 수모(誰某)에게든지 인허(認許)하심은 유재내각처분(惟在內閣處分)이옵거니와 항민(港民) 청원(請願) () 실업비산구어(失業俾散句語)로 통감부(統監府)에서 이사관(理事官)이 본부윤(本府尹)과 동의(同意)를 득()치 못한 양으로 해이사관(該理事官) 본부윤(本府尹)에게 유감(遺憾)이 불무(不無)이온바 대저(大抵) 본부윤(本府尹)의 보사(報辭)가 해기지매축(該基址埋築)이 불가(不可)로 성언(成言)함이 아니고, 해사업지권(該事業之權) 찬성(贊成)에 관()하여 인민(人民)의 청원사의(請願辭意)를 거보(據報)한 사()이오며 이사관(理事官)의 본의(本意)도 무론(無論) 수모(誰某)가 매축권(埋築權)을 득()하던지 내두공동이익(來頭共同利益)의 흥왕(興旺)함을 위함이온즉 본래(本來) 해안건(該案件)의 기이(岐異)한 의견소무(意見小無)하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지조통감부(知照統監府)하오셔 이사관(理事官)과 본부윤(本府尹)의 동일(同一)한 본의(本意)를 변명(卞明)케 하심을 복망(伏望). 地 呼 遽(지 호 거)

 

융희(隆熙) 217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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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3-마지막 회) - 매립의 도시, 마산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8 매립의 도시, 마산

 

19세기 말, 동성리(현 동성동)에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개항된 해인 189910월, 마산포 조창에 들어있던 창원감리서에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걸친 간석지 50파(把, 1파는 양팔을 벌린 길이)를 매립하여 선창의 혼잡을 덜고 지역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매립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항만건설과 매립사업을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에게 15,000량의 공사비를 차용하여 매립공사에 착공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망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1906년 히로시는 김경덕의 매립인허장을 저당 잡을 때 작성한 전집표에 ‘차용금을 갚지 못하면 매립권은 채권자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근거로 권리의 승계를 요구했고 창원감리서 주사 김병철은 이를 허가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은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빨리 취소하라고 엄명했고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히로시에게 즉각 사정을 통보했지만 히로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성통감부를 통해 매립 사업을 하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창원감리에게 사건의 재조사를 명했다.

이에 대해 창원감리는 ‘만약에 마산포 해안을 타인이 매립하게되면 마산포는 입이 틀어 막힌 목구멍이나 문이 잠겨버린 집과 같이 되어 마산포 수천호 주민은 결국 생업을 잃고 흩어져 비참하게 될 것이라’ 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리고 기왕 매립을 하려면 마산포 주민들의 힘으로 해야 된다고 덧붙였는데, 이때 마산포의 자본가 15명이 4만원을 모아 공동으로 매립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 공동매립 청원은 신청한지 1년이 넘도록 정부로부터 아무 해답을 못얻었으며 시간이 흘러 1910년 한일합방이 되었다.

결국 김경덕도 히로시도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지는 못했다.

 

<매립 전의 월포 해수욕장>

 

-사라진 마산포 선창-

하사마 후사다로(迫間房太郞)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하사마는 부산 제일의 땅부자로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부산 경제를 좌우한 자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고 소작농을 자그마치 2,000여호나 거느린 대지주였다.

러시아와 일본이 마산 율구미를 두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 때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 러시아의 마산 진출을 막은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한 자다.

합방 후 부산·경남 일대를 호령하던 이 하사마가 오래 전 김경덕이 꿈꾸었던 마산포 남성동 해변을 매립하게 되었다. 김경덕이 매축권을 얻은지 12년만의 일이다.

대지 8,000평 도로 3,600여평 합11,600여 평의 대규모로 1911년 착공, 19147월 준공하였다.

전주(錢主)는 하사마(迫間)였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합방 전 김경덕의 매립권을 얻기 위해 날뛰던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였다.

매립이 끝나자 이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모든 토지가 하사마의 소유가 되었으며 19362월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하사마 히데오(迫間秀雄)에게 상속되어 해방 때까지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매립 후부터 마산의 중심상권이 되었던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내내 마산포 상권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이 매립지 전체를 일제시대 내내 하사마에게 모든 상인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하였다.

이 매립으로 마산포 중심상권이 크게 변했다.

일찍이 두개의 굴강과 네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산 어시장은 전국적 규모로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하사마의 토지가 모든 해안을 차지하게 되어 굴강과 선창은 없어지고 마산포는 젖줄인 바다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어 그 중심상권이 새로 조성된 매립지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마산포 가로망(점선으로 표기된 길 주변이 변화한 곳이었다)>

 

마산만 최초의 매립은 1905년 현 중앙동 해안이 일본 군부에 의해 철로정차장 건설을 구실로 시행된 것이며 두 번째는 19097월 진해에 있던 육군중포병대대가 월영동(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쪽으로 이전되면서 이 일대 일부를 군용지 확보를 이유로 매립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에 의한 매립은 하사마의 것이처음이었다.

일본군부에서 시행한 앞의 두 매립은 그 특수성 때문에 매립의 규모와 위치 등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단지 해안선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여러자료와 철도 및 육군중포병대대 이전에 관한 기록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남성동 매립 후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선박의 접안·정박시설과 물량장이 갖추어졌으며 통영, 거제 등지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다.

 

-직선으로 변해버린 천혜의 해안-

1920년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었다.

그 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일본자본가들이 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했고 한국인도 일부 창업하면서 1920대 마산 도시는 변화를 맞는다.

마산은 한국과 일본을 손쉽게 연결할 수 있는 입지조건과 철도로 내륙까지도 손쉽게 연결되므로 타 지역에 비해 공업도시로서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마산만과 무학산이라는 배산임수의 자연조건 때문에 대규모 산업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가용부지가 부족했다.

마산과 부산 혹은 본국에 있던 일본 자본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지조성방법으로 폭 70m에서 200여m의 간석지가 있는 마산 해안의 매축에 눈을 돌렸고 이들에 의해 시행된 마산의 매립은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마산이 끼고 있던 해안의 간석지가 일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손쉽게 큰 돈을 쥘 수 있었던 투자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산 도시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립과 함께 도시가 바뀌고 매립과 함께 교통과 산업도 변화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마산매립은 마산부나 조선총독부가 전체적인 도시의 균형발전을 위해 일관되게 계획,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매립 주체인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다.

 

<매립 전의 마산만>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마산매립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927년 : 남성동 어시장 너른 마당 일대 252평이 마산부에 의해 매립되었다.

2) 1928년 : 신마산에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메가다 헤이자브로(目加田平三郞)가 우리나라 철도건설에 참여한 후 이름이 알려진 서울의 토건업자아라이(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여 본정(本町,현월남동) 앞 해면을 매립했다. 현재의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와 옛 진일기계, 유원산업주변 10,500여 평의 넓은 면적이었다. 해안선은 석축안벽으로 시공되었고 유원산업 앞에는소규모의 선착장이 마련되었다.

3) 1929년 : 오동교에서 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2,100여평이 매립되었다. 이곳은 당시 야마다(山田)장유(현 몽고간장)의 사주 야마다 노부스케(山田信助)에 의한 것이었다.

4) 1935년 : 남성동 건어물시장 일대 1,000여 평이 마산부에 의해 매립되었다.

5) 1935년 : 신포동 삼익아파트, 대우백화점, 대한통운 일대에 대지 48,000여평, 도로17,000여평, 총65,000여평의 대규모 매립이 있었다. 이 사업에 참가한 일본인은 모두 여섯 명으로 그 중 두 명은 부산, 한 명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마산매축주식회사라는 새로운 토목회사까지 설립하였으며 자산동 임야를 매입하여 그곳의 흙을 파 매립토로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마산의 도시형태는 몽고정 부근에서 해안은 깊고 환주산은 돌출해 나와 가용대지가 잘록해서 마산포와 신마산 두 도시를 지형적으로 단절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매립으로 노선(路線)만으로 연결되던 두 도시가 하나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마산 최대의 매립이었다. 이 곳은 원래 북에서 남으로 2㎞이상이나 되는 아름다운 백사장 때문에 전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월포해수욕장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6) 1931년 ~ 1942 : 창포동과 월남동 일대 13,700여 평이 7차례에 걸쳐 매립되었다. 좁게는 4~500평, 넓게는 3~4,000평 규모로 진행된 이 매립은 여러 명의 일본인들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주로 자신들의 공장이나 조선소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7) 1942년 : 마산 수협 자리와 동양공업, 신기사 등이 있던 11,800여 평이 부산의 토건업체 다케모토 구미(竹本組)에 의해 매립되었다. 일제기 마산포의 매립공사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8) 1944. 12 : 마산의 명승지 월포해수욕장이 매립된 이후 고노에가하마(近衛濱) 해수욕장이란 이름으로 이용되던 해운동 일대(전 마산화력발전소자리)의 해변 12,200여 평이 일본인 나까무라 시게오(中村繁夫)에 의해 매립되었다. 그러나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하여 해방 당시 공터로 버려져 있었고 시기를 잘못 선택해 크게 실패한 나까무라는 후에 마산에서 그이름이 회자되기도 했다.

9) 이 외에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제2부두, 제1부두, 중앙부두 등을 건설하면서 총 4차례 42,000여평이 매립되었다.

 

해방 당시, 아름답기로 소문났던 천혜의 마산 해안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직선형 호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방된 지 40년, 창포동에서 월영동까지의 서항과 오동동에서 서성동에 이르는 구항 일대의 매립공사가 1985년 착공 후 1993년 준공될 때까지 일제에 의해 조성된 이 해안은 수십년 동안 존속하였다.<<<

허정도 / 건축사, 창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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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써 43회 연재한 <마산·창원 역사 읽기>는 전부 끝났습니다.

애당초 계획대로라면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시작해야 합니다만 아직 준비가 다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다시 마산 도시의 근대기 이야기를 다룬 책, 목발 김형윤 선생님의 『마산야화 소개하겠습니다.

김형윤 선생님은 마산지역의 원로 언론인이셨고, 소개드릴 책 『마산야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산의 지난 세월을 알게 해준 고마운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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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를 복원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사정지적도 복사본을 만들어 이미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 복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번(母番)과 자번(子番)의 관계를 이용하여 가능했던 작업입니다.
최초의 사정지적도는 모번(母番) 밖에 없었고, 모번 만 있던 땅이 분할되면 자번(子番)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을 착안하여 사정지적도 상에 모번으로 구획되어진 원래의 경계선을 모두 찾아내어 복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1과 1-2와 1-3번지가 있으면 이 세 필지를 합한 외곽선을 이어서 원래의 1번지를 찾는 방법입니다.

복원된 사정지적도는 컴퓨터(AUTO-CAD)를 이용해 모사(模寫)한 후, 각 필지의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과 비교 확인하여 사정(査定) 당시에 존재했던 최초의 지적도를 복원했습니다.

이렇게 작성된 사정지적도를 관련문헌자료 등을 이용하여 보정(補正)하여 복원도의 정확성을 기했습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최종 작성한 1910년 경의 마산포 복원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던 서굴강 방파제-

복원도를 작성하고 난 뒤 사정지적도에서 나타난 도면과 그 외의 다른 자료에서 나타나는 형태가 다른 부분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서굴강 앞의 방파제였습니다.
서굴강 앞 방파제는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이용도의 작성과정 중 별도의 판단을 요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옆 그림은 이미 소개한 김경덕의 매축청원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를 활용하여

1960년대에 김용욱 부산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연구자들이 마산포 해안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토지이용도와 대조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림의 오산동은 지금의 오동동입니다.

 
이 도면은 이른바 변현되기 전의 마산포 해안선 원형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그림과 사정지적도를 비교해본 결과 해안형태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서굴강을 막아주는 방파제 부분만이 서로 다를 뿐이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지만 사정지적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일세선창 부분도 이와 유사하게 돌출된 형태이지만 김경덕과 사정지적도 두 도면에 모두 나타나 있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과 사정지적도 중 어느 것이 당시의 사실과 동일한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덕의 도면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서굴강의 방파제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습니다.

① 옆의 다른 지도(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에 나타나는 원마산 부분에도 김경덕과 창원부윤이 그

린 매축청원도와 같은 모양의 방파제가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해안의 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시장이 열렸던 지역은 건물이 없으며 중앙에 비어있는 부분이 조창부지다. 海岸線에서 點線까지가 창탄(漲灘), 즉 간석지입니다.

②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방파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굴강이란 개천․도랑못․ 해자(垓字) 등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포구를 의미합니다.

③ 조창과 서굴강의 위치를 볼 때 서굴강은 조운선 전용 굴강이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이 가능합니다. 서굴강이 조운선 전용굴강이었다고 가정하는 이유는 (가) 조창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이라는 것과 (나) 굴강의 형태가 규모 있게 의도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다) 그림3-36에서 보면 서굴강이 선창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선창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라) 당시 오산진(현, 산호동)에서 많이 사용했던 오산선창을 제외하면 세 개의 선창이 서굴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 등입니다.

④ 위 ③의 가정 하에서 보면 사정지적도 작성을 위한 측량이 시행될 시점에는 이미 조운이 폐지된 지 십 수 년이 지난 뒤라서 조운 전용이던 서굴강은 그 기능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방파시설은 관리 소홀로 인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대적 토목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파제가 유지보수를 하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훼손되었을 것이고 훼손이 심한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⑤ 만약에 방파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일본인에 의해 매축이 곧 시행될 시점이었거나 이미 매축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도로나 대지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시설물이었던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산포 항만매축공사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월일미상) 착공되어 총공사비 13,700원을 들여 1914년 7월 14일 준공을 보았습니다.

⑥ 방파제가 시작되는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방파제와 육지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추정되는 「가」부분의 형태가 뾰족이 나와 있어서 대단히 어색합니다. 그리고 방파제가 시작되는 위치로 추정해 볼만한 곳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나」부분 등이 「다」의 점선처럼 계속 이어지는 길, 즉 방파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합니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자료를 통하여 추정되는 위치와 형태를 결정한 후 복원도에 추가 삽입하였습니다.


이 외에 사정지적도 만으로 1910년 당시의 토지이용도를 정확하게 작성할 수 없었던 다른 한 가지는 1905년 개통되면서 이미 형태조차 없어진 마산선 철도부지 내의 도로와 대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로도 정확한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복원도에 그려진 이 부분의 형태는 주위에 형성되어 있는 도로 및 대지의 모양을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원도를 현재의 도시 도면과 오버랩(over-lap)시킨 것과 항공사진에 비교시킨 그림입니다. 항공사진은 1999년에 촬영한 것인데 해안의 원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길고 복잡한 작업을 통해 얻은 이 복원도를 통해 20세기 초, 더 멀리 조선시대 마산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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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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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3.28 09: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참으로 애쓴 결과입니다.
    이걸 바탕으로 당시의 마산포를 복원하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터인데..
    가능한 일이지요?

2011.03.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里)의 위치는?>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1899년 간행된「창원읍지」에 나타나는 마산포 6개리>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에서 ‘마산포가 조창 설립 이후부터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6개리가 생겼다’고만 밝혔지 6개리의 경계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지명의 연속성에 근거해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 중성리=중성동, 성호리=성호동, 오산리=오동동과 산호동 정도로만 짐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마산포의 범역 내에는 위의 동 외에 창동과 남성동․부림동․수성동․추산동 등이 있는데 이들 동과 마산포 6개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바 없습니다.

아무도 조선시대 6개리의 경계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설령 알려고 했어도  알기 어려웠을 겁니다.
6개리 경계를 추정할만한 자료 찾기도 어려웠고, 복원에 필요한 마산포 원래 모습을 알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조선총독부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위하여 1913년 12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를 통해 발행한 「마산부관할구역도」라는 지도 속에 6개리의 경계가 표기되어 있으며, 후자는 원마산(마산포)도시형태 복원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복원자료는 다음 회부터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두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김경덕의 매립청원서에 첨부된 지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에도 해변을 낀 원마산의 리(里) 경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행정구역개편이 끝난 뒤인 1910년대 중후반에 간행된 자료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료들을 교차확인해본 결과 추정할 만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산부 관할구역도」에 표기된 마산포 6개리>

착안은「마산부관할구역도」에 나타난 6개리의 경계가 도로에 의해서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의 도로 형태에 가장 근접하는 위치의 도로를 당시 「원마산 복원도」에서 찾아내어 오버랩시켜 보았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는 「원마산 복원도」에 비해 정확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근접한 위치의 도로를 기준으로 6개리의 경계를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이 이 방법으로 얻어낸 마산포 6개리 경계도입니다.

                              <사정지적도에서 재구성한 마산포 6개리>

이 그림은 1910년경에 개설되어 있던 도로를 기준으로 작성한 경계도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 후기부터 있었던 6개리의 경계와는 차이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위 그림을 이용하여 현재의「마산시가지도」에 당시 마산포 6개리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표기한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현 시가지 도면에서 추정한 마산포 6개리 경계도>

이 그림으로 볼 때,
창동 네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인 제일은행․경남은행 창동지점․대신증권과 구 극동예식장 일대가 중성동이었으며, 북쪽이 성호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종거리의 동쪽인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 네거리 일대가 동성리였고, 동성리의 동쪽이 오산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호리와 중성리의 서쪽인 구 강남극장과 부림시장 그리고 현재의 수성동일대가 서성리였으며 그 서쪽이 성산리였고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이라는 식의 조선시대 동리명과 현재의 동명을 수평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들은 옛 리(里)경계를 현재 도시상황 위에서 재현한다고 하는 기본적 한계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산이라는 근대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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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계획만으로 끝나버린 개항기의 매립 시도>


1) 김경덕의 매립 계획

개항이 되면서 외국상선들이 마산포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군함들도 가끔 들어왔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공물상인들과 잡화상들이 서부경남 각지에서 마산포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선창가에는 화물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산항의 규모와 시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산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의 네 개 선창과 동․서 두 개의 굴강이 있었지만 모두 수심이 얕아 선박접근이 쉽지 않았고 하역장소도 좁았습니다.
선착장도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초보적인 시설뿐이었습니다.
늘어가는 항만 물량을 도저히 수용할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동성리에 거주하던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마산포 앞에 매립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산포 개항 5개월 후인 1899년 10월 창원감리서에 매립청원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매축청원서’ 원문과 해석문입니다.

〈請 願 抄〉
本港東城居 金敬悳
右請願은 際玆萬國通商之會하여 楚帆吳檣이 次第來泊일서 本港을 今旣設港 즉 商張之會集과 物貨之豊備는 理所必然이다. 온 自西城으로 以至 午山해 防築際漲灘을 限五十把退築成堰하와 舟揖往來에 無淺窄之慮하고 市廛布列에 免紛還之弊則無害於公而. 爲利於商民者誠大矣고로 繪成形址하야 玆敢粘連仰請하오니, 參商敎是後特爲認許하오데 俾爲商販興旺之地伏望함.

                                                        光武三年 十月 日
                                                        監 理 暑     閣 下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이르는 창탄(漲灘, 간석지) 폭 50파(把, ‘발’의 뜻으로서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 앞에 방축을 쌓아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선창가에 늘어서 있는 노점상들의 혼잡을 덜어 상인들의 이익을 높이고 상업의 발전을 위해 이 지역의 도면을 첨부하여 매축을 청원한다」


아래 그림은 김경덕의 매축청원서에 첨부된 도면입니다.

 
위 그림을 현재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그림의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었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파란 선이 당시의 해안선이고, 노란선이 김경덕이 매립하려했던 범위입니다.



김경덕의 구상은 옛적부터 내려오던 마산포의 해안(현 남성동 지역)을 매립해서 크게 넓히겠다는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단순히 매립을 하여 땅을 만들겠다는 의미 외에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여 상인들의 이익을 높이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을 볼 때, 그는 항구도시에서 항만시설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선각(先覺)이었습니다.

이런 김경덕의 뜻을 정부가 받아드려 그에게 매축권을 주었습니다. 마산 최초의 매립허가였습니다. 

하지만 김경덕은 자금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공사에 필요한 자금 중 부족한 금액 15,000량을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에게 차용하여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김경덕이 죽은 겁니다.
마산항을 근대식 항구로 바꾸어 보겠다던 김경덕의 꿈은 채 시작도 못해보고 그 순간 끝나고 말았습니다. 
   


2) 일인(日人) 홍청삼에 의한 김경덕 매축권 승계 계획

김경덕 사망 후,
부산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은 김경덕이 받았던 매축권의 권리승계를 요구한 홍청삼(弘淸三)의 청원서를 1906년 4월 11일 창원감리서에 제출했습니다.
 
사유는 김경덕이 매축공사비 15,000량을 홍청삼에게 차용할 때 저당잡힌 전집표(典執票) 때문이었습니다. 

전집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매축인허증을 저당하여 한화 15,000량을 차용하여 그 이자로 매월 3부를 지급하고, 만약 1902년 정월 말일까지 원리금을 갚지 못하면 매축권은 채권자에게 귀속된다」

아래의 글이 김경덕이 홍청삼에게 써준 전집표의 원문입니다.

〈金敬悳 典執票抄〉
大韓光武四年庚子二月初三日弘公前票
右票爲事段當比之時有急用處馬山浦前洋自西城午山至防築際漲灘限五十把退築成堰次監理暑認准文記典執是遺韓錢壹萬五千兩右前出債而邊則每朔每兩頭參分式爲定而限則 光武六年五月晦內俱本利準報是矣若過限不報則右認許文記永爲給而以比文記倂爲放賣文記退築成堰貴公自由任意而日後若有雜談之弊則以比票憑考事

                                                                     票 主 金 敬 悳

이 전집표를 근거로 홍청삼은 매축예정지에 승인도 받지 않은 채 표목을 박는 등 공사를 서둘렀습니다. 매축권 이전 서류를 접수한 창원 감리는 상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허가를 해줘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있던 창원감리서 주사 김병철이 매립권승계에 관한 보고서를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올렸습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참정대신은「이 사항은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닌데 사전에 이를 보고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허가한 일은 적절치 못하니 빨리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창원감리는 홍청삼에게 매축권 이전이 불가하다고 전했지만 홍청삼은 창원감리의 지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성의 통감부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홍청삼의 청원을 접한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1907년 10월 5일 청원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창원감리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훈령 내용은
㉮ 창원감리 독단 인허의 문제
㉯ 김경덕에게 허가한 매립지의 규모 문제
㉰ 매립으로 인한 공동의 이익과 타인 소유권에 대한 방해 문제 등을 다시 보고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창원감리는
㉮ 김경덕에게 인허한 사실이 없었으며(허가를 해준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부인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설령 홍청삼이 김경덕의 전집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각종 인허가는 1년 내에 시행하지 못하면 무효라면서
㉯ 이 매립지역이 마산포 주민들에게 무척 중요한 땅이란 점을 설명하고 김경덕이 청원할 때 지정했던 매립규모에 관한 도면을 그려 보낸다면서 이 매축권은 마산포 주민들이 가져야 된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의 진행은 관련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매립은 결국 홍청삼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3) 마산포 주민 집단 매립 계획

같은 시기인 1907년,
마산포 주민들은 이미 일본인들에게 수많은 농토를 잃은 터라 어선창마저 일본인 홍청삼에게 빼앗긴다면 어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의 생존권까지 위협받게 될 것같아 자구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곧 매립사업을 항민(港民)들이 공동출자하여 직접 시행할 결정을 하고 이를 창원감리를 통해 정부에 청원한 것입니다.

이 청원에 대해 창원감리는 11월 1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마산포의 항민 공동 매축청원을 살펴보니 이 기지가 항민들과 관계가 매우 깊고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항민들의 공동 소유지로서 항민들이 매축하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니 밝게 살펴 보신 후 항민들의 정상을 특히 유념하시어 청원대로 매축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으로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이완용은 같은 해 12월 13일 창원감리가 제안한 항민공동매축의 명세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규철 등 15명의 마산포 주민들이 매축명세서를 다음과 같이 정부에 올렸습니다.

〈창원 마산항 탄지(灘址) 매축청원서〉
1. 평수는 서성선창에서 오산선창까지 총계 11,554평
1. 공사기간을 12개월로 예정함
1. 소요자금은 40,000원, 항민 자본가들이 합심 출자함
1. 자본인 성명은 아래와 같으며 서명 날인하여 지방관청에 보관함

이규철 5천원 이상태 5천원 손양손 5천원 강홍규 5천원 김노현 5천원 권태정 5천원 최병두 2천원 김창제 2천원 김정기 1천원 정인섭 1천원 박기수 1천원 김하수 1천원 강성도 1천원 이장환 5백원 송치권 5백원 계 4만원

마산항 발전을 위해 매립을 하되 마산포 주민들이 직접 돈을 각출해 시행하겠다는 포부였습니다.

이처럼 마산포 주민들이 생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공동매축청원 허가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나라가 국권을 잃어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최초로 시도된 김경덕의 매립구상과 이름 삼키려한 일본인 홍청삼, 그리고 이에 저항한 마산 항민들의 단결,,,,
마산포 최초의 매립을 둘러싼 각축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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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110년 전 마산포 해안

<김경덕의 매축청원도>
1900년 / 김경덕 / / / 매축청원서 첨부, 창원항안Ⅰ / 규장각

1900년에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기 위해 김경덕이 정부에 제출한 매축청원서에 첨부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1907년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형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붓으로 대략 그려놓은 지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립 전 마산포 선창과 굴강의 위치, 그리고 해안 주변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글씨는 당시 마산포 사람들이 사용했던 선창과 굴강의 명칭과 위치를 제가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오산리․동성리․중성리․서성리로 기록된 당시의 리(里)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일제에 의한 행정구획 이전의 마산포 6개리 경계에 대한 자료로 가치가 있습니다.

윗부분의「매축차정계(埋築次定界)」라는 표시로 그어 놓은 ⊓ 모양의 선이 김경덕이 매축을 계획한 범위입니다.
이 경계를 측정해 보면 도면에 나타나 있는 계획매립지의 길이는 서성선창에서 오산선창까지를 망라하여 원마산이 접하고 있는 전(全) 해안으로, 현재의 지도를 이용해 확인한 결과 약 750m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매축의 폭이 58파(把,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라고 했는데 1파를 1.8m로 보면 104.4m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런 가정으로 매립부지의 면적을 계산해 보면 78,300㎡(약 23,700평)나 되는 대규모입니다.
건설장비는 꿈도 못 꿨던 110년 전,
마산포 동성리(현 동성동)에 살았던 김경덕이란 사람의 포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마산포 해안을 정밀하게 복원하여 현재 인공위성 사진 위에 오버랩시킨 겁니다.
(옛 마산포 해안의 복원과정과 복원 결과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위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김경덕의 그림이 정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기본형태는 충분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 되어버린 옛날 마산포의 저 해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연을 안고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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