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4.08.0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의 황폐화를 가져와 삶의 터전을 잃고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고려 민중들에게, 일본정벌은 이들을 다시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의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일본정벌은 정복전쟁이라는 민족적, 국가적 사업이기 전에 민중들에게 또다른 고통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지휘하에 4만의 군사가 900척의 전함에 나눠 타고 합포항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정벌에 나선 여원(麗元) 연합군의 우렁찬 항진이었다.

이제까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만 했던 고려가 비록 원나라의 강요때문이기는 하였지만, 원정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고있었던것이다.

 

-합포, 고려의 군사항으로 떠오르다-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오늘의 마산, 곧 합포(合浦)는 그 전진기지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항구였던 합포가 제국을 건설하려는 몽고의 의도에 따라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합포는 오늘날 김해지방인 금주(金州)의 속읍이었다. 신라때 골포현(骨浦縣)이라 하여 오늘날 창원의 속읍이었던 합포는 고려에 들어와서 김해의 속읍이 되었고 뒤에 가서야 감무가 파견되는 정도였다.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원의 지배가 시작될 무렵 합포는 이에 저항하는 삼별초 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원종 12년(1271) 2월에 삼별초가 합포에 출몰하여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원종 13년(1272) 11월에는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전함 22척을 불사르고 몽고의 봉졸(烽卒) 4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원종14년(1273) 1월에 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전함 32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명을 잡아 죽였다.

이같이 삼별초가 세 차례나 합포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해안 연안 고을이 그 영향권에 들어갔고 주민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합포가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서 역할한 것은 그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남해안에서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몇 안되는 고장이었다.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는 데다,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하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조류를 감안할 때,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巨濟)를 거쳐 대마도-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정벌이 있기 전, 일본을 초유(招諭)하기 위한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일단 이곳으로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에도 다른 연안지역보다는 훨씬 유리하였다.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합포를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조운로와 조창>

 

-일본 정벌의 험난한 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충렬왕 즉위년(1274)의 제1차정벌과 충렬왕 7년(1281)의 제2차정벌이 그것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정벌에 앞서 여러차례 일본을 설득하여 무력사용없이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회유를 위한 사신을 자주 파견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원종11년(1270) 경부터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흑산도를 비롯한 고려의 연해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기도 하고, 김해지방 등 10여 곳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고려정부에게 군량을 보조하도록 하고 전함의 건조를 독촉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여몽연합군은 일본정벌을 시작하였다. 본래 이 해 7월에 출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5월에 이미 연합군이 합포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원종이 6월에 사망함으로써 연기되었다가 장례를 마치고 이때에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1차정벌에 동원된 여몽연합군은 군사 약 4만, 전함 90척이었다. 군사는 고려에 주둔해 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몽고에 귀부한 군인으로 구성된 몽한군(蒙漢軍) 25천명, 고려 군사 8천명, 뱃사공 67백명 정도였다.

지휘부는 원나라 홀돈(忽敦)이 도원수, 홍다구((洪茶丘)가 우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좌부원수였고,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도독사, 김신(金侁)이 좌군사, 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일 합포항을 출발한 연합군은 거제도를 거쳐 5일 밤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서해안 사스우라[佐須浦]로부터 공격을 개시, 대마도를 정벌한 뒤 14일에는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구주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19일 하카타만[博多灣]으로 들어가 20일 미명에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만인 21일 연합군의 선단이 하카타만에서 사라졌다. 여원연합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절반이 넘는 13500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1차정벌을 일본에서는‘문영(文永)의 역(役)’이라 부르고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여원연합군의 일본공격 루트>

 

1차 일본원정이 이렇게 실패로 끝났음에도 원 세조는 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충렬왕 2년(1276) 예부시랑 두세충(杜世忠)을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는 한편, 전쟁준비를 계속지시하였다.

충렬왕 5년(1279)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 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다시 일본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書省)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원나라는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여원연합군은  동로군(東路軍)·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여·원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4만명에 전함 9백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전함과 사공 15천명, 군량 11만석, 무기 등은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강남군은 총병력 약10만 명에 함선 약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512일 합포를 출발, 거제도에 15일 정도 대기하여 있다가 526일 대마도에 도착한 후,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출발이 늦어진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730일 저녁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밤중이 되자 폭풍우가 일면서 다음날인 윤 71일 하루 내내 폭풍우가 밀어닥쳐 연합군을 강타하였다.

2차원정도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전함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당시 북구주의 해안에는 파괴된 선박과 익사한 시체가 겹겹이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원사』일본전에는 10만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3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는 원정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 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각각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 몽고군에 의한 우물이라고 알려진 마산 자산동의 몽고정 표지석>

 

-정벌이 드리운 그림자-

두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조는 여전히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해지방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전함과 군량을 준비하게 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살피는 등 제3차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에서는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고려에는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동계(東界)로 침입해 철령을 넘어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휩쓸고 충청도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강화로 피난하는 한편, 원나라에 원병을 청해 여원연합군으로 연기(燕岐)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몰아냈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는 합단이 침입해 사태가 복잡해진데다가 세조가 죽음으로써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벌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원, 고려, 일본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시도한 것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국가 목표를 실현하자는 것이었고, 고려와 일본 모두를 견제·약화시키면서 동아시아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벌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목표와 위신에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고려는 주도적으로 정벌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 역사상 최초의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오히려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에 따른재정적 부담을 안아야했다. 물론이 모든 것은 민중의부담으로돌아오는것이었다.

일본은 여원연합군의 대함대를 막아냄으로써 일단 원에 의한 종속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태풍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신풍(神風)’의 가호를 받는 나라로 이미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마도의 경우가 더 심했다. 연합군이 들이닥쳤을 때 보이는 사람은 모두 타살되었다 하며, 처자를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가 숨으면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목졸라 죽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의 마산, 곧 합포는 일본정벌 기간 동안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함 건조 등 요즘으로 치면 군수업체가 생겨났을 것이고, 이곳 저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게다가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충렬왕이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마치 임시수도와 같은 규모였을 것이다.

정벌이 끝난 후 정부에서 합포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현령을 파견한 것도 그 공로를 인정해서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국왕, 고급관료, 장수들의 왕래가 결코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포를 비롯하여 인근지역은 정벌준비에 쉽게 동원되어 가혹하게 조세를 부담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원감국사 충지는 일본정벌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남의 쓰라린 모습 /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 역역은 삼년에 걸쳐 /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Trackback 0 Comment 2
  1. 김원중 2014.08.06 13: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오늘도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2. 박진섭 2014.08.16 11:4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언제나 경천애민의 마음을 가질수 있을까요?

2011.04.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구의 두 굴강과 네 선창>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는 곳으로서 방축 위에는 수 백년된 포구가 무성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 남성동 우체국 지점이 된다.

동굴강(東掘江) 역시 서굴강과 같은 부두로서 북선(北鮮)서 온 명태 배가 풍랑을 피하기 위해 정박한 곳이다」

복원도를 놓고 보겠습니다.


복원도에 나타난 굴강의 위치․규모․형태를 보아 마산창 앞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서굴강은 마산창과 관련한 관용기능을 하던 인공 굴강이었고, 동굴강은 민간인들의 영업과 관련한 민용 기능을 담당했던 자연굴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민구분 사용은 조운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였습니다.

서굴강과 동굴강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약 500m의 해안에 걸쳐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이었고 그 위치와 형태는 위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이라는 특이한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일세(百一稅)가 아니라 ‘백일세(百日稅)’라고 하면서 이를 2월에서 5월까지 백일(百日) 내에 세(稅)를 서울 선혜청에 수송하기 위한 선창이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일세선창을 조창부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일반적으로 백일세(百一稅)란 수입의 백분의 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면서, 예로써 군산항의 객주가 내장원에 백일세를 납부한 일이 있었다고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1907년 11월 1일 창원부윤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과 관련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보고 제3호에 첨부된 마산 해안도면에 ‘百一稅船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百一稅라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간척사업과 제방공사의 효시로 고려 고종 35년(1248) 김방경(金方慶)에 의한 평안도의 위도(葦島) 간척사업을 듭니다만, 마산포 복원도를 보면 마산의 해안에도 석축호안(石築護岸)과 방파시설(防波施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 그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 곳곳에 자연발생적 형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될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석축호안과 방파시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더 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 석축돌제(石築突堤)가 있었다는 기록과 『창원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고려시대 석두창(石頭倉)에는 조곡(漕穀)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여섯 척이, 조선시대 마산창에는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스무 척과 이 배들을 운행시킬 조군(漕軍) 구백육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지(간석지역)는 다음 두 그림에서 해안선과 인접해 그려진 점선 부분까지였습니다.
해안에서 가장 근접한 수심선에 1/2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조선 3대 포구였던 남해의 마산포 해안은 한일병합 1년 후인 1911년,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착수한 매립공사에 의해 그 모습을 잃게됩니다.

동굴강 서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은 바다를 떠나 육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림에서 본 당시 해안의 석축들은 지금도 마산도심 땅밑에서 잠들고 있겠죠.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항구가 보존된 도시는 없다는데, 발굴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Trackback 0 Comment 0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