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4.09.0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6) -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9  3·15의거는 「민중」항쟁이었다

 

마산의 봄은 산등성이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의 붉음 만큼이나, 부정과 불의에 저항했던 정열에 불탔던 계절이다.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려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를 쟁취했던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마산의 지역민들은 항상 그 앞에 서 있었다.

3·15는 분단된 남한, 그 민주화의시작이었다.

1960315일 정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마산에서는 적어도 4차례의 시위가 목격된다.

314일 밤 민주당사 앞에서 일어난 시위, 315일 선거 당일 오후부터 한밤중까지 마산시 전역에서 진행된 시위와 총격발포 사건, 315일 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411일 바다에 떠오르자, 이를 보고 격분한 군중이 이날 밤에 치열한 시위를 벌이고, 경찰이 총격을 하는 사태와 이어서 통행금지 중에도 일어난 412일과 413일의 시위, 마지막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물러날 의사를 표명한 후인 426일과 27일에 부산에서 원정 온 경남고교 학생들과 군중들이 시청, 소방서, 경찰서, 파출소 등을 파괴한 시위가 그것이다.

 

-“못살겠다, 가라보자”-

1960314일 저녁부터 밤까지 오동동에 소재한 민주당사 앞에서 적게는 1백여 명에서 많게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민주당의 마이크 유세를 듣는다.

민주당은 당사 옥상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자유당의 폭정을 비난하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여기에 가세하여 군중들이 ‘협잡선거 다시하자’, ‘조병옥만세, 장면만세’를 외친다.

이에경찰이 등장하고, 경찰에 대해 모자를 빼앗아 던지기도 하고, 경남관용 290호 짚차와 공군 81항공창 본부 12호 짚차에 돌팔매질을 하고, 정복 경찰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기에 반공청년단이 들이닥치고, 경찰은 폭행용의자를 연행한다.

이에 군중들은 ‘학원에 자유를 달라’, ‘협잡선거 물리치자’라고 외치면서 석방을 요구한다.

이 때 민주당원들은 피해를 변상조치하고, 군중들의 시위를만류하여, 일단귀가한다.

<위, 부전선거 자료들 / 아래, 3.15 시위 광경>

 

1960315일 정부통령 선거일인 이날은 오전 7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하고, 민주당의 투표 참관인이 참관을 하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투표용지가 사전에 들어 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자, 마산시민들은 하나 둘, 무엇인가 촉발요인만 있으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오전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거부를 선언하고, 이어 대외적인 방송을 시작하고, 시위를 준비한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은 하나둘씩 마산시당 사무실 앞에 모이고, 이어서 남성동, 오동동 파출소, 그리고 북마산 파출소를 향해 나아가면서 돌팔매질을 한다.

경찰과 반공청년단은 주동자들을 연행하면서 곤봉, 칼빈총, 몽둥이를 이용하여 폭력적으로 대응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더욱 강하게 밀려나오면서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시청방향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오후 5시경 소방서 차량에서 빨간물을 뿜어대기 시작한다. 낮시위는여기에서 끝나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그러나 오후 6시경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될 예정인 마산시청 앞에 군중들이 다시 하나 둘 모인다.

밤 시위는 무산층의 젊은이들이 주축을 이룬다. 젊은이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어른들이 시위에 나서도록 설득한다. 물론 젊은이들중 대부분은 학생들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여학생이었다.

315일에 총상을 입은 41명중 10대가 반 이상을 차지하며, 반 정도는 학생이고, 반 정도는 무직자 내지 육체노동자들이었다. 경찰과 경찰을 상징하는 파출소, 반공청년단이 시위대의 일차적인 공격대상이었다.

1960315일 마산의거가 일어난 지 27일 만인 411일에 마산시민들은 다시 한번 일어난다.

 

<눈에 최류탄이 박힌 김주열 열사>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315일에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살해된 김주열 군의 시체가 중앙부두(지금의 대한통운 앞바다)에서 오전 1030분 경에 발견되고 참혹한 김주열 군의 시체 모습이 경찰에 의해 신고되어 감추어지기 전에 이미 촬영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에 대해 소문이 나, 삽시간에 마산바닥에 소문이 퍼져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모이게 된다.

너무나도 많이 모여든 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경찰은 공개를 결정하고 이를 보여준다.

김주열의 시체모습을 본 시민들은 모두 그 잔혹함에 눈물을 흘리며 밤시위를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김주열의 참혹한 시체는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경찰들이 자행했던 고문과 주민 살상의 한 일각이 보여진 것이라는 점이다.

315일 이후 실종된 자녀들을 찾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 그러나 경찰은 어린 자녀를 찾는 부모들을 좌익분자로 몰면서 오히려 구금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315일 의거를 좌익의 소행으로 몰려는 경찰은 마산의 이런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고 고문을 통하여 죄를 조작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무리한 조작은 마산주민들의 눈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만든다.

김주열의 시체는 바로 경찰의 잔혹함을 만천하에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좌익으로 몰려 숨을 죽이던 마산시민들은 굴종을 깨고 생존의 갈림길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날 시위에는 경찰서와 5개 파출소, 도립병원을 맴돌면서 진행된다. 412일에는 마산에 있는 7개의 고등학교 학생 5천여 명 중 대부분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도립병원은 개방되어 있고, 마산에 주재하는 2백여 경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경찰은 외지에서 도움을 받아 15백여명으로 증강된다.

오전 10시경에 마산공고생들은 마산역 광장으로 몰려오고, 창신고등학교 학생들도 뒤따르고, 오후 1시경에는 마산여고생들과 마산고교생들이 합류하고, 오후 2시에 마산상고생들이 김주열군의 시체가 안치된 도립병원에 몰려든다.

12일 밤에는 경찰들이 경찰서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마산시내는 이미 시민들이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증강된 병력과 낮의 밝음에 힘입어 13일 오전에는 도립병원을 막아서서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체를 보지 못하게 했다.

이 날은 해인대 학생들, 마산여고, 성지여고 등이 조직적으로 결합하고, 중학생들도 시위에 나서고,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시위에나선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표명하고 이화장으로 이사를 간 날, 국회에서 하야를 권고한 날 저녁때 부터 밤 사이인 426일(화) 오후 6시부터 27일(수) 하오 1시까지, 부산 경남고등학교 학생을 필두로 한 약 2여 명의 군중이 마산에 원정을 와서, 폭력 시위벌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에 마산시 의회조사단이 발표(1960. 5. 3일자 마산일보)한 바에 따르면, 공공시설 및 차량들이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마산시청의 창문 유리가 부서졌고, 소방서도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경찰서는 유리창문이 파괴되었고, 신마산 파출소의 책상 등, 북마산 파출소의 유리창 등, 남성동 파출소의 유리창 등이 파괴되었다.

관공서 및 경찰 건물 외에도, 일반인들의 피해로는 트럭, 지프, 버스 등이 파괴되었다.

이날은 관공서의 공무원들도 이러한 파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권력 공백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안전만을 감안하여 행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후에 마산시의 서류 망실, 관리들의 무책임한 피신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3.15의거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를 돕기 위해 성금을 보내왔다. 대구시민은 400만원을 모아 4월 18일 마산시장에게 전달한다>

 

-항쟁의 주체들-

민주당은 315일 낮 시위에서 중요한 촉발인자로 작용하였다.

그 이유는 민주당이 당시 부통령 후보를 내고 있었으며, 자유당의 사전투표, 선거 참관봉쇄, 민주당원에 대한 물질적 회유, 민주당원에 대한 투표권 거부 등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여 최초의 참여가 이루어졌다고 해석된다.

마산의 경우, 조직적으로 허윤수와 그의 일파가 민주당에서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함으로써, 오히려 잔류한 민주당 세력은 더욱 강하게 조직적으로 뭉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주당은 315일 마산의거 당시에 신속하게 선거포기를 결정하고, 옥외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시위가 곧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었다.

항쟁의 중심은 학생들이었다.

마산에는 당시에 15여만 인구 중에 5천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315일 의거 이전인 313일과 14에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살포하였으며, 14일 밤에는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시위에 참여했다.

더구나 선거 당일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번호표를 받지 못하고, 투표를 한 사람들도 투표함에 이미 표가 꽉 차 있다는 경험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더욱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후 315일 오전부터 시작된 오동동 민주당사 앞에서의 규탄방송은 학생들에게 모일 구심점을 제공하였으며, 이후 경찰들의 시위해산 종용방송, 민주당사 앞 시위자들에 대한 체포, 경찰과 반공청년단이 시위자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시위가 끝날 무렵 신마산으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소방차가 붉게 물든 차가운 물을 뿜어대자 315일 밤 시위에서도 가장 열렬히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한 집단이 되었다.

일반 주민들은 숫자상으로는 아마도 시위자의 60~7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발생한 낮 시위에서는 선두에 서기보다는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리고 서서히 두려움이 가시면서 시위를 따라다니고, 어둠이 깔린 밤 시위에서는 적극적으로 구호를 따라하고, 욕설을 퍼붓고, 돌팔매질을 하는 집단으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일부의 시민들은 병에 모래와 휘발유를 섞어 불을 붙여 던지는 간단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 무산층은 당시에 전체 마산시 경제활동인구의 20%에 달하는 실업자군을 비롯하여, 노동인구, 창포동에 소재한 귀환동포 수용소, 소규모 서비스 업체인 세탁소나 이발소 등에 근무하던 노동자, 신포동 철길 뒤의 매음녀도 등장한다.

물론 이들과 같이 거주하는 아주머니나 노인인구도 최후에 시위에 등장한다.

 

-독재정권이 무너지다-

315일과 411일에서 13일 사이에 일어난 마산의거는 결국 서울에서 419일 대규모 시위를 야기하여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승만의 하야가 곧 민주주의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독재권력은 무너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만들어 내었다.

이후 1979년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몰락과 뒤이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1987년 전두환군부 정권의 몰락 때 보여준 민중 항쟁의 씨앗이 바로 315일 마산의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 315일 마산의거는 한국민들이 생명을 바쳐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표출한 쾌거였다.

 

<독재자의 말로 /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시민들이 끌고 다녔다>

 

산의거는 1948년부터 계속된 이승만 정권의 독재권력을 무너뜨림으로써 전 세계에 한국민이 민주주의를 쟁취할 자율적인 힘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한국은 소위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여기에 마산시민들의 피를 머금고 민주주의의 장미가 꽃피어 났다.

이는 민주주의의 소생일 뿐 만아니라, 이를 통하여 전세계에 한민족의 소생을 선언한 셈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 체제가 부정되기 까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마산은 물론이고 한반도에 몰아 친다.

바로 315일 의거는 시대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시도에 물꼬를 튼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315일 마산의거는 통일, 계급모순, 민주주의 등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여러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마산은 항구의 도시인만큼 갖가지 사상이 유입되어 혼합되어 있었고, 시장이 발달하여 다른 지역과의 비교도 가능하고, 또한 근대적인 상인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해방후와 한국전 당시에도 6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퇴각, 일본에서의 귀환동포들의 유입과 정주, 한국전 당시의 피난민들과 이들의 정착지가 바로 마산이었다.

따라서 마산은 근현대사의 고민을 경험한 사람들이 제각기 정착하고 있는 도시였다. 이것이 마산의거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은진 /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Trackback 0 Comment 0
2014.07.07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오동동 불종거리의 민주당 마산당사를 뛰쳐나간 민주당 소속 정남규 도의원을 비롯한 간부와 당원 등 20여명은 당사 앞에 모여든 군중을 뚫고 “민주주의 만세”등 구호를 외치면서 해안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자유와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항쟁은 시작되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불발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아래 사진) 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김군의 시체에 돌을 달아 바다 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살인경찰을 잡아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해가 질 무렵 “이승만정권 물러가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계속했다.

마산에서의 1.2차에 걸친 항쟁은 전국민의 항쟁이었던 4.19로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승만정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타도했던 마산항쟁은 부산의 항쟁소식을 접한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아래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 상황으로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학생이 중심이었던 시위대들은 1979년 10월 18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 파출소를 공격했다.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이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지역보다 한층 격렬했다.

유신정권은 민중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10월 19일 마산 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항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마산의 항쟁은 이틀만인 20일 새벽에 진압되고 말았다. 조직적인 항쟁의 지도부가 없었던, 다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항쟁은 정권의 무차별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79년 10월의 부산지역과 마산지역의 항쟁은 4.19이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과 다수 시민이 봉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의 억압적 통치구조와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그 뒤 1986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계속 이어졌다.

마산.창원지역은 한국사회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그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은 한국산업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노동운동 등이 어떤 다른 지역보다 힘차게 계속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한국사회의 자주와 평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은 언제나 한국사회발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발전과 함께 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Trackback 0 Comment 1
  1. 버크하우스 2014.07.07 0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