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4.10.27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3) -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6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학살’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나라, 특히 마산과 창원에서도 이를 능가하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지난 19999<경남도민일보>가 이 사실을 보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산·창원지역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다.

『마산시사』나『창원군지』, 『경남도사』는 물론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어떤 책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그럴까?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합법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불법으로 민간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는 이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까지 사형을 시키거나 감옥에 보내 버렸다.

대통령후보로서 이 문제를 제기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 씨는 끝내 사상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19604·19혁명 이후 ‘좋은세상’이 온줄 알고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유족회 간부들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두 ‘용공분자’로 몰려 구속되고 말았다.

빨갱이로 몰리지 않으려면 그저 입을 꾹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침묵하고 있는 유가족마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친지들까지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취직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나 직업군인·경찰은 물론이고, 제법 번듯한 대기업이나 은행도 경찰의 ‘신원조회’를 통과한 사람만이 취업할 수 있었다.

용케 말단 공무원에 합격을 해도 아예 발령을 받지 못하거나 승진·진급과정에서 영락 없이 신원조회에 걸렸다.

외국에도 물론 나갈 수 없었다. 유족들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1980년대 초반까지 풀리지 않았다.

연좌제 폐지로 제도적인 족쇄가 풀렸을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유족들은 이미 60대 노인이 돼 있었다. 모든 걸 체념할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정부는 그들을 놓아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자유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여차하면 용공분자로 잡아넣겠다고 을러대며 유족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또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각 읍·면 지서와 파출소에서 관리해온 연맹원들의 신원과 유가족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상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 미군에 의해 학살된 곡안리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국가기관에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1950년 한국전쟁 초기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30만명,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희생자를 합치면 무려 1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미군(왼쪽)이 지켜보고 있다>

 

이 가운데 마산에서도 1,681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됐으며, 창원과 진해에서도 숫자를 알 수 없는 민간인이 다수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와는 별도로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100명에 가까운 마을사람들이 미군에 의해서 학살된 사건도 있다.

곡안리 양민학살은 1950년 8월 11일 곡안리 뒷산 아래의 성주 이씨 재실(齋室)에 피란해 있던 마을 주민 100여명 중 83명이 미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무참히 숨진 사건이다.

미군은 학살 하루 전날 저녁 이 재실을 찾아 주민들의 정체를 확인한 후 “여긴 작전지역이니 빨리 이곳을 떠나라”고 말했다.

이에 주민들은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많아 밤중에 피란을 가긴 어렵다”면서 “내일 아침에 떠나겠다”고했다.

미군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 후 재실을 떠났다.

주민들은 밤새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다음 날 주민들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친 후 마루에 짐을 쌓아두고 미군을 기다렸다. 다시 통보가 올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 때였다. 뒷산에서 내려온 인민군 정찰대 2명이 재실 인근 대나무 숲까지 내려와 마을 앞 ‘멧등거리(묘지)’에 있는 미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미군 1명이 꼬꾸라졌다.

미군을 쏜 인민군 정찰대는 즉시 뒷산으로사라졌다.

그로 부터 약 30분이 지났을까. ‘탕’‘탕’하는 총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마루에 있던 주민 중 한 명이 픽 쓰러졌다. 재실 앞쪽 30m 전방에 진을 치고 있던 미군이 쏜 총탄이었다.

연이어 소낙비처럼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재실은 아비규환이 됐다. 주민들은 허겁지겁 양쪽 방과 부엌·마루밑·변소·돼지우리 등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사격은 계속됐다. 하늘에는 비행기까지 날면서 기총사격을 해댔다.

박격포탄이 날아들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서쪽 방 지붕이 내려앉았다. 그 방에 있던 임산부(이귀득·당시 31세)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마당으로 기어 나왔다.

그녀는 목이 타는지 “물을 달라”고 절규했지만 아무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당시 현장에서 시할아버지·시어머니와 두살 난 아들을 잃은 황점순씨는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던 중 온몸에 총을 맞고 쓰러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60년마산 피학살자 유족회 결성식장에서 오열하는 유족들>

 

또 다른 생존자 조호선씨는 큰집 장조카와 딸을 안고‘작은 전각’(재실 관리인의 집) 변소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삼진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시아버지 이교영씨와 시어머니 변담래씨, 그리고 시숙 종성씨와 동서 이귀득씨, 조카 우순, 계숙, 그리고 호적에 출생신고도 않은 조카 2명 등 모두 8명을 잃었다.

이재순씨(83)는 재실변소 똥통 속에 얼굴만 내밀고 숨었던 덕에 목숨을 건졌다. 악취는 물론이고 구더기가 입과 코로 기어오르는 속에서 하루종일을 견뎠다.

그러나 아들 상업(당시 9세)이는 척추에 총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스물 아홉에 장가도 못 가보고 죽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군의 양민학살보다 훨씬 잔혹하고 조직적이며 철저히 계획적인 학살범죄는 오히려 한국군 특무대(CIC)와 경찰이 저지른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이다.

물론 피학살자의 숫자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후자가 많았다.

4·19혁명 직후인 19606월초의 한 신문보도는 당시 마산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접 거창·함양·산청 등 경남일대의 양민학살사건이 보도 됨과 아울러 이곳 마산에서도  6·25 당시 1,500여명을 수장(水葬) 내지 총살한 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있다. 현재 유가족들은 당시의 학살자들을 찾아내어 규탄해 달라는 요구를 내건 ‘데모’까지 할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유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83년(단기,서1950년) 715일 군(CIC·HID)과 경찰에서는 시민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고 보도연맹 가입자를 포함한 양민들을 집합시켜 삽과 괭이 등을 들려 도로보수공사를 하러 간다는 구실로 추럭(트럭)에 실어서는 창원군 북면 뒷산과 진해 앞바다에서 각각 수장과 총살을 감행했다한다. (하략)「( 대구일보」1960613일자)

시민극장에서 마산형무소에 옮겨 수감된 보도연맹원들은 8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갔다.

군경은 이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앞 뒤 사람의 허리를 나일론줄로 묶었고 양 손도 결박했다. 얼굴에는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씌웠다.

마산 창포동 해안가로 끌려간 이들은 다시 LST(상륙함)에 실렸다. LST는 엔진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한참을 나아갔다.

약 한시간이 지났을까. 속도가 서서히 줄어드는 듯 싶더니 공포에 질린 연맹원들을 뱃전에 세운 후 소총 개머리판과 군화발로 바다 속에 처넣기 시작했다.

‘타타타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맹원들을 모두 바닷물에 밀어넣은 군경은 LST를 서서히 선회하며 물 위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조준사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푸른 바닷물이 피빛으로 변해갔다.(목격자 윤봉근씨(사망·1999년 증언 당시 69세·마산시 합포구 창포동)의 증언)

특히 충격적인 것은 당시 보도연맹원 중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하는가 하면, 중·고등학생도 학살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6065경남도지사실에서 열린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에서 당시 마산유족회 간부였던 김용국씨는 이렇게 증언하고있다.

51명의 여자들이 있는데 이 중 47명은 강간에 응했다고 해서 살아났고 그 거절한 4명은 즉시 없어졌습니다. 마산형무소의 담벽에 43발의 탄환자취가 있습니다. 시체의 손발을 철사로 묶어서 집단적으로 열명 스무명 수장을 했는데 죽은 시체가 사변 그 당시에 어망에 걸려들었던 일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491228일자「남조선민보」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 마산지부는 마산상고와 마산중·마산여중 교감 이상과 연석회의를 갖고, 이들 3개 학교 학생 중 보안법 위반으로 중퇴한 300여명 전부를 보도연맹에 가맹시키기로 합의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마산지역 일간지에 보도된 민간인 피학살자 명단>

 

필자가 이를 확인하기위해 마산여중 학적부를 뒤져본 결과 1948년과 1949년 각각 159명과 122이 제적 또는 자퇴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중 적지 않은 학생이 시국사건으로 경찰에 구속됨으로써 제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17세였던 박○전(마산부 표정 142) 양의 경우 “교내에 불온세포 조직하려다 경찰에 구금되어 194951일부로제적”이라고 적혀있었으며, 이밖에도 이○순(19), 강○자(19), 박○순(19), 허○아(18), 김○애(17) 양 등이 ‘불온단체 가입’ 또는 ‘교내 질서문란’ 등의 이유로 제적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당시 마산상고 재학중 보도연맹원으로 가입, 오빠(19)를 잃은 팽상림(68·현재 부산 거주)씨는“미술부원이었던 오빠는 당시 아무 것도 모르고 학생동맹에서 부탁한 포스터를 그려줬다는 혐의로 퇴학당한 후 보도연맹에 가입돼 무참히 학살됐다”면서“어린 학생들까지 사상범의 누명을 씌워 재판도 없이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

이같은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누구일까?

마산지구 양민피학살자 유족회가 1960719일자로 마산 검찰지청에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당시 학살사건의 주범으로 조영운 전 마산경찰서장(1960년 당시 경남교통협회 이사·경전여객자동차주식회사 근무), 구중억 전 마산경찰서 사찰형사, 최익주 전 형사반장, 이부종 전 형사, 강상봉 전 사찰계장, 정도환 전 사찰계장, 노장현·황임규 사찰계 형사, 이우정 전 특무대장, 이진영 전 특무계장, 노양환전 특무대 상사 등 11명을 지목하고 있다.

또 마산에서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가입을 독려했던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지도위원회(검찰지청장, 경찰서장, 시장, 창원군수, 형무소장, 경찰서, 사찰계장), 상임지도위원(김종규, 정인수, 김순정, 김종신, 최광림, 배린, 박양수, 문삼찬, 조철제, 김순명, 이석건이다. (「남조선민보」1949128일, 1950328일자)

학살이 자행된 곳으로는 마산 원전 앞바다 외에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 ‘안데미골’, 마산시 봉곡리 수원지 입구 산골, 마산시 월영동 뒷산 ‘요색고개’, 창원면남산, 창원고개, 창원군 구산면 산골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창원 성주사 골짜기에서도 진해로 끌려가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됐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보도연맹원들의 시체가 매장된 터를 5군데나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삽으로 흙을 파면 유골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구산면 심리·원전·옥계·남포·설진리 해안에는 시도 때도 없이 나일론 줄에 묶인 시체들이 떠밀려 왔다.

이 때문에 한동안 이 해안가 주민들은 끔찍한 생각에 차마 생선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과 보도연맹원들도 19507월말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기 직전 곳곳에서 집단 총살 당했다.

마산시 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골짜기에서 집단총살 당한 200여명의 민간인도 진주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이었다.

둔덕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 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저수지 옆 작은 골짜기에는 금굴이라는 폐광이 있었다. 시체는 이곳과 인근 골짜기 등 2군데로 나눠 암매장됐다.

이 가운데 한 곳은 지난 20029월 태풍으로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면서 유골이 무더기로 드러나 학살 사실을 증명해주기도 했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Trackback 0 Comment 1
  1. 김순재 2016.11.26 12:0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무섭군요

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1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