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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경남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18854월 마산에서 태어났다.

옥기환과 구성전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결과로 1990년에는 독립지사로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받았다.

 

 <명도석 선생의 묘역>

 

-고난에 비켜서지 않고-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구마산 어시장 상민조합의 총무를 역임한 선생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7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 부터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 이형재, 김용환,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마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312일 지역인사들과 사전에 모의하여, 321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측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여, 다행히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자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운동조직이었다. 마산지회가 만들어진 것은 1927720일이고, 모두 4차례의 전체대회가 거행되었다. 명도석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7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12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의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처럼 명도석은 신간회 마산지회가 존립하던 시기에 열린 4차례의 대회에서 매번 중요 간부에 선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간회 마산지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케하고 있다.

신간회 마산지회는‘언론·집회·출판·결사·교육의 자유 획득, 조선어 교육의 실시, 실업교육 실시, 노동·농민·청년·소년·부인 형평운동의 건’ 등과 같은 중앙의 일반적인 강령을 준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사립 마산 의신여학교 동맹휴학사건에 대한 조사 검토 건’, ‘보통학교 수업료 인상 반대의 건’, ‘일반 물가 인하[減下] 운동의 건’ 등 지역사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지역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도석은 양조장을 경영하였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19233월에는 노동자 200여 명이 모인 간담회에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명도석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지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이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회사의 수송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자, 경남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로에 위치한 명도석 선생 기념비>

 

-좌·우로부터 존경받던 민족자산가-

 

선생은 늘 “뜻은 행하되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왔던분이다.

그러한 선생의 신조 때문인지 선생은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덜 알려져 왔는지 모른다.

생은 일제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말살 당하자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는 민립대학 발기인, 마산물산장려회(馬山物産奬勵會)의 간부를 역임하고 신간회 마산지부를 이끄는 등, 실질적으로 마산의 진보주의 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성장하여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거기에서 발생되는 수익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민족자산가(民族資産家)의 표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이 조여오던 1940년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선생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해방 이후에 잠시‘건준’의 마산시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영달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택에 은거하면서 195464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허당 명도석 선생은 민족을 우선하는 선각자적 정신과 국난의 시기에 자산가들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스스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사표로서, 또 마산의 정신적 지주로서 길이 남을 만한 자취를 남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관심을 제외하고 지역사회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쩌면 지역 출신의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끝 맺고 있다.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桎梏)의 그 깊은 구렁에서 풀려날 그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회천(光復回天)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 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문은정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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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강점제3시기의 섬유산업>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 후 마산에 들어오기 시작한 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분야는 섬유산업이었습니다.

1923년에 설립된 마산조면공장과 1927년에 설립된 태전마산공장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섬유산업의 발전가능성을 간파한 마산상공회의소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으로 섬유산업 유치운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조선물산주식회사, 조선신흥방직주식회사 등 대형 섬유공장이 마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주류양조산업과 섬유산업의 두 축이 마산의 대표산업으로 자리를 잡게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마산에 들어 온 대표적인 두 섬유회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1939년 설립된 조선물산주식회사입니다.

오동동 2,200평 부지를 매입하여 건평 1,000평의 공장을 건설한 이 회사는 「낙낙직(樂樂織)」이라고 부른 특수직물을 제조하는 회사로, 일본 오사카의 주식회사 중미(中尾)상점계 회사가 자본금 18만원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직기 300대를 설치하고 여자공원 350명을 고용했으며, 외화획득을 목표로 수출용 카펫과 잡화 등 연간 100만원 상당의 제품을 생산했으며 사장은 중미구차랑(中尾久次郞)이었습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과 마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한태일이 사장을 했던 고려모직의 전신입니다. 한태일은 독립운동가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며 시인 김춘수의 동서이기도 합니다.

다음 사진은 해방 직후 찍은 고려모직 모습입니다.

 

다음은 조선신흥방직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1940년에 산호리에 대형공장을 세우고, 직물 누더기를 이용해 재생방직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이 공장의 시설은 일본에서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우수한 것이었습니다.

자본금 27만원으로 주식회사로 발족하여 사장에 궁림태차(宮林泰次)가 선임되었고 남여 종업원 500여 명을 고용했습니다. 현 산호동용마맨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일제기에 시작된 마산의 섬유산업 전통은 세계최대규모의 섬유공장 한일합섬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다음사은 마산 섬유산업의 마지막 자존심 한일합섬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며 마산상공회의소에서 한일합섬 터에 돌비석을 세우고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비석 바로 오른쪽 밝은 색 상의를 입으신 분이 한일합섬과 창사 때부터 함께한 한일합섬의 산 증인 손춘수 선생님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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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h.han 2015.02.26 16: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고려모직 한태일씨는 시인 김춘수씨의 사위가 아니라 동서지간 아닌가요?.....

    • 허정도 2015.03.02 11:14 신고 address edit & del

      아, 실수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김춘수 시인과는 동서지간이고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02.03 07:00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국립마산결핵병원입구(위)과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테이지>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김지하, 「가포일기」중-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

               <공용 화장실의 변기 / 건물 구조로 보니 여성용이었다>

                                    <현관 턱으로 보이는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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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3 09:0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허정도 2010.02.03 23:1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적절히 참여하겠습니다.

  2. 삼식 2010.02.03 18: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나도향이 1920년대에 이병사에 있었다면,
    과연 결핵 병원의 최초 건립역사는 언제쯤인지요?

    • 허정도 2010.02.03 23:15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
      나도향은 약 3개월 동안 노산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나눈 자료에 있더군요.

  3. 김영철 2010.02.04 17:1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고향인 저로서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네예.
    가포 결핵병원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마산의 숨은 이야기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10.02.04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혹시 숨은 이야기 중 알고 계신 것 있으면 연락 좀 주십시오.

  4. 유림 2010.02.05 13: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매번 참석을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참 큽니다.
    가포 탐방도 참 좋았습니다
    비록 신발이 엉망이 되고 온 바지에 도둑놈(?)이 붙어서 귀찮았지만..

    스잔했던 그 숲이 떠오릅니다

    • 허정도 2010.02.05 14:06 신고 address edit & de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도시탐방대 참 좋은 시됴죠?

  5. 조원문 2010.02.05 18: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끔 지나는 길인데,,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새로운 기운이 남닙다,
    회장님 정말로 마산을 많이 배우고 싶읍니다,,

    함께 많은 시간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열심히 노력 하겠읍니다,,,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 허정도 2010.02.06 10:45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
      내가 늘 신세를 많이집니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