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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00:00

창원도시철도, 바로 알고 바로 하자 - 5

BRT(Bus Rapid Transit)란?

BRT는 급행버스교통체계(Bus Rapid Transit)라는 의미로, 버스에 철도와 같은 운영개념을 도입하여 통행속도, 정시성, 수송능력 등 버스의 서비스를 도시철도 수준으로 대폭 향상시킨 저비용·고효율의 첨단 대중교통시스템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선진국에서 개발되어 개발도상국으로 기술이 이전되었지만 이 시스템은 정반대였습니다.

남미의 대도시인 브라질의 꾸리찌바, 콜롬비아의 보고타, 에콰도르의 키토 등에서 시작하여 선진국의 도시계획가와 교통계획가들로 부터 '땅 위의 지하철'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후 세계 여러 선진 도시들이 이 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BRT가 각광 받는 이유는 엄청난 재정적자 때문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지하철이나 경전철을 대체 혹은 보완하는 교통수단으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말이죠.

흔히들 버스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말합니다만 BRT는 버스를 기존과 다른 개념으로 접근한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BRT는 쉽게 운영되어지지 않습니다. BRT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정도의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 배타적 전용차선 설치

- 편리하고 안락한 환승정류장과 승강장

- 버스 우선 신호체계

- 대용량에 저상으로 운영되는 굴절버스 도입

- 신속한 승하차 가능 시스템

- 컬러로 부호화된 노선체계

- 지능형 교통시스템(IST)을 활용한 버스정보 안내

- 버스요금 선지불 시스템

- 친환경적인 고급버스 도입

- 간선과 지선의 편리한 연결

알다시피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이고 온갖 최첨단 철도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마저도 고비용 교통체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 오래 전부터 BRT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십수 년 전부터 미연방대중교통청(FTA)이 BRT시범도시를 선정 지원하며 보급 확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시범 도시에 선정되지 않았지만 독자적으로 BRT를 가동하는 도시도 많습니다. 그 중 한 도시가 자동차의 도시 로스엔젤리스입니다.

 

우리 도시에 BRT를 적용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을 겁니다.

- 투입 비용 절감

- 공사 기간 단축

- 기존 시내버스 업체와 협의 용이

- 시행 후 운영비 절감

- 차후 개통될 터널 및 교량 이용 용이

- 노선 확산 편리 등등

공익이 개인의 이익에 앞서는 것이라면, 무엇이 가장 효율적이며, 무엇이 가장 경제적이며, 무엇이 가장 우리 도시에 맞는가? 라는 질문에 적합한 시스템을 택해야 합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도시의 모습이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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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교육 2013.08.08 13: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세종시에는 BRT버스가 인깁니다.
    세종시 첫마을에서 대전 반석역까지ㅡ 또 세종시 첫마을에서 정부청사 오송역까지. 이렇게 20분마다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몇달은 무료로.. 지급은 시내버스보다 싼 요금으로 쾌적하고 빠른 이동으로 인기를 얻고 있답니다.

2009.07.03 11:18

중세시대 도읍형태를 재연한 주상복합단지

 파벨라


파벨라의 어원은 우리가 ‘리우’라고 부르는 히오데자네이루의 언덕에 있는 ‘파벨라 브랑까(흰 파벨라 나무)’라는 아름답고 낭만스러운 고유명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허가 판자촌이 난무하기 전까지만 해도 히오의 언덕은 탐스런 하얀 꽃을 피우는 콩과식물 파벨라 브랑까로 뒤덮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꽃동산이던 히오의 해변 언덕이 판자촌으로 탈바꿈하게 된 시기는 대략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6년 바이아 주에서 발생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반란을 평정했던 공화국 군대가 당시 브라질의 수도였던 히오로 철수하여 이 해안 언덕에 하얀 천막을 치고 머물기 시작한 것을 두고 하얀 파벨라 브랑까와 비슷하다 하여 파벨라로 불렀다. 그 이후 도시를 찾아 농촌을 떠난 이농민이 군인들이 떠나고 없는 이 해안 언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는데 그 이후 파벨라는 나무 이름 대신 빈민촌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굳어지면서 전국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파벨라를 보고 싶다는 여행자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택시 운전기사는 파벨라에서 걷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엄살을 떨었다.

때 마침 우리가 찾은 파벨라에는 많은 사람들과 경찰이 웅성이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아마 총기사고가 난 것 같다고 하면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나 운전사가 권하는 대로 내리지 않고 천천히 택시로 동네를 돌았다.


여느 빈민촌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 더러운 하천, 좁은 골목길, 윗도리를 벗은 아이들과 남자들, 씻지 않은 얼굴, 지저분한 빨래, 꾸리찌바에도 파벨라는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두 번째 찾은 파벨라는 ‘빌라 데 오피시오스(Vila de Oficios)’라 불리는 주상복합 주택단지가 있는 곳이었다.

꾸리찌바 시가 빈민의 주택공급과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서 일층에는 가게를, 이층에는 살림집을 넣어 만든 주상복합 건물인데 중세시대의 도읍으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영감을 받아 시행한 것이라 했다. 2층에는 부엌, 목욕탕과 두 개의 침실을 갖춘 40㎡규모의 주택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건축했다고 하는 이 주상복합단지는 지금도 당시의 건설의도를 잃지 않고 사용되고 있었다.

대출을 이용한 자비 부담이어서 감당할 수 있는 서민들만 입주했다고 하는데 일층 가게의 종류는 제빵, 카펫제작, 전기제품 수리, 자전거 수리, 양복, 미용 등 실제 필요한 가내수공업종의 점포가 들어있었다.


이곳에서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전기료와 관리비 등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불하면서도 아내와 남편이 같이 일하므로 불필요한 통행수요를 유발치 않는다는 이점까지 있다고 건립목표를 세웠으나 막상 건립 후 모든 것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IPPUC의 리아나 벨리쉘리씨의 설명에 의하면 설립초기에는 그들의 생활과 관계없는 주점을 개업했다가 터무니없이 실패한 후 지금의 용도로 바꾸었는데 조금씩 나아진다고 한다.


이를 두고 흠집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계획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이메 레르네르는 이런 지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미리 알려고 하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이 반입니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실패 없이 일을 실천할 수 없듯이, 실패는 창조의 한 부분입니다. 시민들을 통해 알게 되는 도시의 잘못된 점과 시행착오를 꾸준히 고쳐나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공업단지


1970년대 들어서면서 꾸리찌바는 경제적 혜택을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해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시의 남부에 위치한 광활한 지역에 IPPUC의 계획에 의해 1973년부터 공단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공업단지로 선택한 이유는 지형, 물, 배수와 풍향을 감안하였고 특히 정유공장과 가깝다는 이유도 작용하였다.


1975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 공업단지는 ‘공단이 하나의 공원이자 정원이어야 한다’는 자이메 레르네르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서, 한마디로 ‘자연공원 안의 공업단지’이다.


공단에 입지한 대부분의 회사들은 시가 제공하는 높은 삶과 교통의 질 때문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자료에 의하면 꾸리찌바 공업단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상 파울로의 노동자보다 출퇴근에 3시간이나 적게 소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1주일에 20시간, 1년에 1,000시간, 연령을 72살로 볼 때 평생으로 치면 9년이나 적게 소비하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광활한 지역이라 걸을 수도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때때로 차에서 내려 관찰한 정도다.


예상했던 대로 이곳 공단은 눈에 익은 우리의 공단과 달리 각 공장들이 녹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정책도 정책이었겠지만 광활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라고 하는 자연조건이 더 큰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수목으로 담장을 조성한 것이나 기존의 수목을 보호하면서 조성한 공장시설은 바둑판 식의 삭막한 우리 공단과는 많이 비교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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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6 07:00

전신주를 기둥으로 재활용한 환경개방대학

<관련기사>
2009/06/18 - [도시 이야기] - 지구 반대편, 꿈의 도시를 찾아가다
2009/06/19 - [도시 이야기] - 생각이 도시를 바꾼다, 꾸리찌바의 거리와 광장
2009/06/22 - [도시 이야기] - 도시문화의 혁명, 빠이올 극장
2009/06/24 - [도시 이야기] - 지혜의 길로 안내하는 도서관


꾸리찌바 이야기 5 (건축물3)

상 로렌소 창조성 센터


                           



빠이올 극장과 마찬가지로 원래 상 로렌소 공원에 있는 양초와 아교를 생산하는 공장을 1974년에 창조성 센터로 전환시킨 곳이다.

이곳에서는 ‘유아 및 청년 환경교육프로그램’과 지역사회의 빈민 어린이, 일부 학생과 강사들에게 꾸리찌바 시의 전통적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교육을 시킨다.


마침 토요일 오후라 사용자는 없었고 문도 잠겨있었다. 관리를 맡고 있다는 6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자신도 2개월 전에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고 했다.

건물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창조성 센터로 전시와 교육을 하며 한 건물은 극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건물관리는 시에서 하는데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어린이 놀이터와 몇 개의 보조 건물들이 함께 있었다.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나온 40대 남자를 만났다. 조그만 건설업체의 직원이라면서 가까운 곳에 살지만 직접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라며 묻는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꾸리찌바에는 85년부터 살았다면서 매우 좋은 도시라고는 생각하지만 도시정책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고 했다.



 환경개방대학


꾸리찌바에서는 도시의 환경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지속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 성인들을 위한 중요한 환경 교육장으로 1992년 환경개방대학(ULMA)이 설립되었다.

자이메 레르네르의 작품인 이 혁신적인 통나무 건축물은 보스께 자니넬리 공원의 환경지구 내에 있는데 기둥은 통나무로 제작된 폐전주를 재활용한 것이다.






이곳은 비단 꾸리찌바 뿐만 아니라 브라질 내에서도 환경의식과 환경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환경교육의 메카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개인은 물론 모든 단체에 개방되며 도서관도 마련하여 환경관련자료 및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지속가능한 개발에 관한 연구와 친환경적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환경산업 부분의 시장조사와 기술자문도 수행하고 있다.


                               




우리를 태우고 다닌 택시운전기사도 이곳에서 일주일 간 교육받은 적이 있다면서 교육의 내용도 좋지만 교육공간이 아주 좋은 곳이라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환경교육 공간답게 입구부터 달랐다. 좌우에 키 큰 열대림으로 꽉 찬 약 100m 정도의 꾸부렁한 작은 협곡이 진입로였는데 폭이 미처 2m 밖에 되지 않았다. 이 협곡의 바닥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위로 판자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것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상적인 진입이었다. 서늘한 기운을 받으며 더위를 잊은 채 걸었다.

진입 후 나타난 첫 장면은 채석으로 깎여진 절벽과 그 아래의 큰 연못이었다. 절경이었다. 채석장이었던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물가에는 가족과 연인들이 몇 쌍 조용하게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운전기사가 뭐라 말하며 황급히 손짓해 가보니 오리 한 쌍이 갓 부화한 새끼 대여섯 마리와 숲 자락에 웅크리고 있었다.

석산개발이 끝나 버려진 땅이 되어버린 장소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명소로 바뀐 것이다.


                            



 

기둥으로 받쳐 공중에 지은 몇 개의 작은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순 목조였다. 건물을 빙빙 돌면서 오르는 경사로를 몇 바퀴 돌아서 오르면 입구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자그마한 강의실과 사무실을 갖추어 놓았으며 건물의 관리와 운영은 환경단체에서 한다고 했다. 가장 친환경적인 건축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있었으며 시설 자체가 좋은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전신전화국 전망대


                                                       

시내의 북쪽에 위치한 이 전망대는 꾸리찌바 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전망대에서 다섯 개의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중심상권과 고층 건물이 형성된 꾸리찌바 도시체계를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독 주택지에 얼마나 숲이 많은지 도시 스카이라인이 얼마나 잘 보호되고 있는지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의 경관 관리가 왜 필요한지 말없이 설명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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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09.06.26 10:1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생각이 도시를 바꾼다' 참 마음에 와 닿는 말 입니다. 그런데, 꾸리찌바 이야기를 읽어보니 '도시가 바뀌면 사람도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시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유와 즐거움 이런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 허정도 2009.06.26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렇습니다.
      '도시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으로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꾸리찌바의 도시행정 목표가 '존경받는 시민'이니 당연히 도시에 대한 만족감이 높겠죠.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시민들의 생각이나 행동양식도 그렇지 않은 도시와 달라지겠지요.

2009.06.24 07:00

지혜의 길로 안내하는 도서관

<관련기사>
2009/06/22 - [도시 이야기] - 도시문화의 혁명, 빠이올 극장
2009/06/19 - [도시 이야기] - 생각이 도시를 바꾼다, 꾸리찌바의 거리와 광장
2009/06/18 - [도시 이야기] - 지구 반대편, 꿈의 도시를 찾아가다

꾸리찌바 이야기 4 (건축물2)

지혜의 등대, 도시의 등대


도시의 주거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 시설은 꾸리찌바 시가 빈민들에게 ‘지혜의 길로 안내하는 도서관’을 제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등대이다.

이곳에서는 학생과 빈민들에게 아침 8시부터 반 9시까지 도서를 대여해 주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각 등대 당 약 3천여 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으며 책은 한 달에 최고 4만 7천권이 대여된다고 한다.


박용남은 ‘지혜의 등대’를 두고 꾸리찌바 시가 소외된 도시 빈민과 서민의 가슴속에 희망을 싹틔운 ‘문화의 나무’라고 했다. 그는 어느 ‘지혜의 등대’ 책임자의 말을 빌려 표현하기를 ‘지역 주민들에게 이 도서관은 선물이다. 시내에 공공도서관이 있지만 이용하기가 힘들다.

이 지혜의 등대는 초등학생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민들이 이용한다. 책을 빌리고 조사도 하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에게 이 등대는 문화적 혜택을 골고루 나눠주는 횃불인 셈이다’라고 소개했다.



3층의 철골구조물로 건설된 이 건축물의 기능은 단순했다. 외형은 바닷가의 등대를 모방해 설계했지만 불과 30여 평에 높이 16m의 건물이었다. 1층에는 책이 진열된 선반과 책상 등이 있고 2층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조용한 방과 몇 개의 탁자 및 다섯 대의 컴퓨터가 갖춰져 있다. 등대를 중심으로 원통을 4분의 1로 자른 형상으로 직면은 채도가 높은 짙은 푸른색의 막힌 벽이, 곡면은 유리로 처리하여 낮에는 채광을, 밤에는 조명효과를 노린, 철골조의 심플한 구성이었다.

자동차로 꾸리찌바 시를 다니는 내내 지혜의 등대를 여러 개 볼 수 있었다. 지혜의 등대는 시내 초등학교의 도서관을 학교 담장 밖으로 끌어낸 어린이와 주부를 위한 공공 문화시설로서 꾸리찌바 시 전체에 5-60개가 있다고 한다.




등대 속에 설치된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면 경찰관 한 명이 밤 9시부터 근무하는 망루가 있고 비상전화도 가설되어 있다. 지혜를 밝혀주는 등대가 밤이 되면 지역사회에 아름다움과 안전을 제공하는 ‘치안의 등대’로 변하는 것이다.


한 조용한 마을의 ‘지혜의 등대’를 찾았다.

토요일 오후라 문은 잠겨있었지만 마침 열 서넛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한 명 앉아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 아이는 이곳을 자주 찾는다면서 이 동네 아이들 모두 여기에 자주 온다고 했다. 인터넷을 주로하며 책도 간혹 빌려본다면서 지금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자기들의 놀이터이자 모임장소라고 했다.





‘도시의 등대’란 ‘지혜의 등대’와 모양과 기능은 비슷하지만 규모가 조금 큰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꾸리찌바에 단 한 채가 있다. 동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토요일에는 오후 1시까지만 운영을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찾은 시간이 아직 일러 관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 관리인 ‘호사우바’씨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였고 익숙한 태도로 건물의 용도를 설명하였다. 등대 이용자는 주로 학생과 주부들이며 한 달에 2천여 명이 사용한다고 했다. 지혜의 등대에는 인터넷과 책이 있지만 이곳은 인터넷과 비디오테이프가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1인당 하루 1시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으며 3장의 프린트까지 무료라고 했다. 1995년에 건축하였으며 자신은 이곳에서 6년 째 근무 중이고 공무원이라고 했다. 총 6인이 하루 3교대로 두 명씩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근무하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매우 보람 있으며 즐겁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하는 동안, 실내에는 한 모녀가 비디오를 감상하고 있었다.


등대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는 높았다. 동네가 한 눈에 시원하게 내려보였으며 동네에서도 이 건물이 잘 보이게 설계되어 있었다.

건물은 쇠와 나무를 이용하여 간단하게 지었으나 건물의 조형성과 공간 구성, 색채를 사용한 것을 보아 매우 수준 높은 건축가가 설계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간단하고 검소하며 건축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시설물, 익히 알고 있었던 꾸리찌바의 도시행정 철학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복합근린시설 - 시민의 거리

 

                                                 


도시를 위한 혁신적인 사업이 개시된 이래, 꾸리찌바 시는 주택, 하수도망, 학교, 보건 및 데이 케어 센터와 같은 다양한 사업에 역점을 기울였다. 그 중 두드러진 사업 중 하나가 하파엘 그레까 시장(1993-1996년)이 추진했던 ‘시민의 거리’였다.

내가 찾은 ‘시민의 거리’는 1995년 3월 29일 최초로 개장된 것이었다.


 


 

꾸리찌바 도시 전체에 다양한 형태로 여덟 개나 지어져있는 이 시설은 시내버스의 터미널기능과 공공업무 기능 그리고 근린생활을 위한 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공간이다.

여러 종류 버스의 종착역 혹은 환승역으로 사용되는 점에 착안하여 건물 외부에 원형 도로가 외부도로를 연결하고 있었으며 원형도로를 로터리로 이용하여 다시 출발할 차들이 원 내부로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는 시스템이었다.



지면에서 원활하게 버스를 출발시키기 위해 절반으로 나누어진 두 건물을 공중(2층)에서 브리지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들었는데 철골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건축했으나 건물이 기대하는 의도는 특별하였다.

한쪽 건물의 용도는 공공서비스의 분산화를 위한 공적인 업무들, 즉 은행, 각종 서류발급, 청소년 상담실 등이 있었고 다른 한쪽의 용도는 부식가게 채소 혹은 과일가게, 슈퍼마켓 등 사적인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농구와 미니축구를 할 수 있는 규모의 실내 체육관이 별도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 시설은 원거리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공적인 업무는 물론 별도로 도심으로 나갈 필요 없이 필요한 것들을 원 스톱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착안이었다.

철판 곡면지붕에 노란 색을 칠하여 건물의 인지도를 높인 점과 간편하면서도 사려 깊게 이용자를 배려하고 있는 경사로, 영역을 구획하는 긴 벽과 체육관의 곡선지붕 등 건축 계획이 탁월했다. 책에서 제공된 사진 외에도 건물이 더 증축되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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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8 09:08

지구 반대편, 꿈의 도시를 찾아가다

꾸리찌바 이야기 1 (프롤로그)

‘꿈의 도시’로 알려진 브라질의 꾸리찌바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소개한다.

지구 대척점에 위치한 이 도시를 굳이 경험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박용남선생이 쓴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책 때문이었다.  그 책을 통해 우리의 도시가 꿈꾸어야될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경제’라는 명분아래 점점 사정이 나빠지는 이 도시가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발전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 도시를 불과 며칠동안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그 내용을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지만, 본 만큼 느낀 만큼만 소개하려 한다.





2002년,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창원에 온 박용남 선생을 직접 만나 꾸리찌바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고, 당시에 내가 칼럼위원으로 있던 경남도민일보에 ‘꾸리찌바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도 했다.

2003년, 박용남 선생은 책의 그림을 흑백에서 칼라로 바꾸고 내용도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 이 책을 사서 또 한 번 읽었다. 꾸리찌바에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은 증보판을 읽고난 이후다.


이 글의 내용 중 객관적인 자료를 설명한 것은 모두 박용남 선생님의 책에서 옮긴 것임을 밝힌다. 글은 내가 경험한 각 시설 별로 정리하였다.



출발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여행경로는 인천 - 런던 - 상 파울로 - 꾸리찌바로 이어졌는데 혼자 떠난 길이라 엄청 지루했다. 
런던까지는 대한항공을 이용했지만 런던에서 브라질 살 파울로 까지는 
BA(브리티시 에어라인) 항공으로, 상 파울로에서 꾸리찌바까지는 브라질 VARIC항공을 이용했다.

브라질의 1월은 한 여름이어서 날씨 적응이 쉽지 않았다.


꾸리찌바(Curitiba)

꾸리찌바 시는 상 파울로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빠라나 주의 주도이다. 평균 고도 908m의 아열대 지방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총면적이 432㎢(대략 남북 35㎞, 동서 20㎞)로 우리나라의 대전시보다 100㎢ 정도 작지만 이용 가능한 토지는 대전보다 약간 큰 도시다. 인구는 270만 명(광역 도시권 인구)이다.


16세기 중엽 포르투칼 식민주의자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꾸리찌바는 원주민과 비싼 금속을 찾아 상 파울로 주에서 온 개척자들이 탐험을 하는 곳이었다. 그 후 1693년 남부로 가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포르투칼 당국에 의해 소 도읍으로 분류되었다가 1842년 공식적인 시로 승격되었고 시의 인구가 6천여 명에 이르렀던 1853년에 빠라나 주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 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유럽 인들에 이어 1915년부터는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뒤를 이어 레바논과 시리아인들도 들어 와 20세기 중반까지 경제가 호황을 이루었다. 자국인 이주는 1950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현재 시 인구의 약 31%를 차지하고 있다. 1950년 당시 인구는 18만 명이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이었던 1964년부터 1979년까지는 정권의 속성상 해외자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도시지역에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때 대부분의 브라질 도시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자가용 통행을 위해 육교가 건설되는 등 자가용 이용이 조장되는 상황이었다. 꾸리찌바 역시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다. 심지어 도심의 사적지까지 훼손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런 도시적 위기상황이 자이메 레르네르의 출현으로 1962년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꾸리찌바 도시의 산 증인이자 연출자이다. 한 도시를 보존하면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을 봉사했던 그의 헌신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은 현대 도시사의 빛나는 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세 번이나 시장을 역임했던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관료제에 물든 기존의 관행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언제나 시민과 함께 하려는 공직자들의 헌신과 꾸리찌바 시민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1998년 6월 8일자에서 꾸리찌바를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도시(Smart Cities)’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흔히 진보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1인당 소득수준이나 소득 분포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도시와 비교해 본다면 꾸리찌바는 그다지 내세울만한 도시가 아니다. 게다가 꾸리찌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처럼 아름다운 해변은 물론이고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꿈과 희망의 도시라는 애칭을 얻으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꾸리찌바에 대한 나의 질문이다.

 




도착

꾸리찌바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낮 12시 경이었으며 호텔까지는 미니버스를 이용했다.

모든 도시경관이 낯설었지만, 한 가지 눈에 익은 광경은 책에서 본 파인 너트였다. 나무의 아래 부분은 몸통만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윗부분에만 가지와 잎이 달린 잘 생긴 나무다.


빠라나 주에 많이 서식하는 그랄라 아줄(Gralha Azul)이라는 까마귀 과의 새가 겨울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여름 내내 땅 속에 이 나무의 씨를 묻고는 정작 필요할 때 자신이 묻었던 위치를 찾지 못해 여기저기서 솟아 자라나는 나무다.

1971년 꾸리찌바 시장에 당선된 자이메 레르네르는 시민들에게 그랄라 아줄과 같이 행동할 것을 제안하며 시 전역에 6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면 시원한 그늘과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서 ‘그늘과 신선한 물’이라는 프로그램에 착수한 바 있다.


숙소는 도심 한 복판의 로얄그랜드 호텔로 정했는데 유명한 ‘24시간 거리’ 는 호텔 바로 옆  길이었으며 ‘꽃의 거리’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장을 푼 뒤 나의 꾸리찌바 도시여행은 바로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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