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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0. 미궁에 빠진 대금 도난 사건

100. 미궁에 빠진 대금(大金) 도난 사건

 

 

1932(소화7) 18일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재고금(在庫金) 450만원 중 78만원(중량 796-두 지게)이 하루밤 사이 감쪽같이 없어진 일로,

 

조선 내는 물론 만주에까지 수사망을 펼치는 일방 길천(吉川) 경찰서장의 직접 지시로 용의자를 시내에서 탐색 중 의외에도 시내 진정(賑町, 유곽촌-대동강 반각도半角島 우측 소재)에서 송지가(松之家)라는 요정의 포주 좌나전심길(左奈田甚吉) 5명이 주 공범으로서 수사 인원 130, 범행 발생 42시간 만에 타진하였다.

 

현금 소비 만원을 제하고 77만원을 회수한 사건 후로 각 은행마다 가까운 경찰본서와 파출소에 비상 신호기를 비치한 일이 있었다.

 

평양사건이 발생한 지 23년만인 1955321일에 마산시 남성동 소재 저축은행 지점(현 제일은행)에도 22일 개점 즉시,

 

평시같이 출납에서 지출하려 하자 금고 내에 두었던 천환권, 백환권을 넣은 상자가 파괴되고 재고금 중 330만환이 없어진 사고를 알게 되어 행내(行內)는 물론 수사진을 놀라게 한 일로서,

 

은행 월편(越便)에 있는 남성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두고 범인 색출에 갈팡질팡하다가 용의자로 지목한 변모(卞某) 대리, 안모(安某) 대리를 구속 송검하였다.

 

그런데 이 두 대리는 평소에 권기상(權璣相) 지점장과 불화하였던 일에 앙심을 품고 수사원에 모략한 것이 밝혀져 무혐의로 석방되고,

 

지점당국도 이들에 동정하여 본점에 근무케 한 후 지점장으로 승격시킨 일인바 사건 발생 18년이 흘러간 오늘날까지 사건은 영구히 미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미궁에 빠져버린 현금 도난사건의 현장이었던 남성동 저축은행(당시 사진, 현 스탠다드 차타드은행 마산지점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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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6, 의료기관

56. 의료기관

 

마산에 최초로 병원을 설치한 것은 1908, 9년 경 구마산 박석고개(남성동) 전 동인(同仁)병원 왼편에 일본인 판전(坂田)이란 사람이다. 원장은 그 때로 상당히 연로하였다.

다음으로 구마산 시장 입구 현재 산업경제신문 지국 아래층 자리에 홍생(弘生)병원이 개업되었다.

1909년 경에 현재 마산상공회의소 건너편 협신중화공사(協信重貨公司) 사무소에서 농업협동조합까지 광역(廣域)에 걸쳐 종합병원-마산병원이 개원되었는데 원장에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 덕영오일(德永吾一)이며 산과(産科), 안과, 외과, 내과, 소아과 등 그 당시에도 병원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전 제길윤(諸吉允) 내과의원 이전에 일인 대강(大岡)병원 그리고 대강(大岡)이 사망 후 수상(水上)이라는 사람이 경영하였다. 전기 대강(大岡), 수상(水上)은 구마산 시민극장 밑에 분원(分院)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구마산 고등(古藤)여관-시장 입구에 수성동으로 내림길 좌편에 고목(高木)이라는 득업사(得業士), 즉 한지의사(限地醫師)가 있었다.

전기(前記)한 판전(坂田)병원은 원장이 노쇠하여 사망한 후 아들이 진료를 하였으나 그는 군의관으로서 얼마 동안은 부업(父業)을 계승하다 제1차 대전 종말 때 제정러시아에 반란이 발발하여 이것을 진압키 위하여 일병이 니크리스크에 파병됨으로써 병원은 강산의전(岡山醫專) 출신 대곡(大谷)이가 고용의로서 있다가 대곡(大谷)은 독립 경영되고 판전(坂田)병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대곡(大谷)이 내마(來馬)하기 전에 조선인으로서 강산의전(岡山醫專) 출신 의학사 김형철(金炯轍) () 영제(令弟) 형달(炯達) 형제가 191811월에 대광예식장 자리에 삼성(三省)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삼성병원 개업 4개월만인 1919년 유명한 3·1 민족 총분기 때 처참한 부상자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였다.

주로 부상자 태반이 삼진(三鎭)청년들이었는데 그의 남긴 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김형철 원장과 삼성의원의 위치>

 

1921년에는 현 남성동 파출소 우측 미화사(美和社) 자리가 세브란스의전 출신 이순필의 학산의원으로 후에 현 노내과의원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다음은 경성의전 출신 하우용과 영형(令兄) 태용 형제가 현 한일은행 자리에 일신의원을 경영하다가 일본 북해도 삿뽀로로 떠나고 형 태용이 운영하였다.

지금 상은(商銀) 건너 파초여관 좌측에 경성의전 출신 김현문이 개업, 1924년에 현 일신식당 자리에 일본 명고옥(名古屋) 의대 출신 이광우의 순천의원, 지금 중앙의원 자리에는 평양의전 출신인 의학강습소 출신 한규상, 2차 대전 종결 직전에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이모(李某)가 현 후생의원을 신축, 준공 직전에 사망했다.

신마산에 1909년 경 마산병원에 근무한 일이 있던 강상의전 출신 전원(前原)이 철도병원(요양원) 촉탁 겸 산과(産科)를 경영했다.

마산병원 덕영오일(德永吾一)은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액(倍額)을 붙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한바 당국은 이를 가상(嘉賞)하여 반액 정도를 사례하니 덕영(德永)은 시가에 알맞은 대가를 받은 계산이 된다.

이리하여 마산병원은 경남자혜의원(慶南慈惠醫院)으로, 다음은 경남도립병원으로 개칭, 1922년 현재 위치로 이전 신축하였다.

도립병원 말기 가까울 때 원장이던 삼구(森久) 박사 문하에 상당수의 조선인 문하생이 훈도를 받았던 그 중에 저명인사로서 고 제길윤 의사와 동인병원 조석환 내과, 소아과 전문의가 현존한데 동인의원은 천엽의대(千葉醫大) 출신의 송원의원(松原醫院) 자리에 개업한 바 개업 초에는 피진료객이 하루 평균 왕진 합쳐서 70~80명에 이르러 조 원장은 피로에 지쳐서 졸도 할뻔 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배후에는 은사 삼구(森久) 박사의 음덕의 공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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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58) - 강점제3시기

<원마산(마산포)의 변화 - 시가지의 확산>

오늘부터는 1930년~1945년의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대규모 매립이 시행되어 규모도 커지고 근대식 도로망도 확산되는 대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1945년 사이의  원마산에는 한국인 상인들에 의해 부림동 시장과 남성동 해안 일대에 걸쳐 곡물․면사포 등의 포목류․식료품․고무화․기타잡화 등 생활필수품을 판매하는 소점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상인들도 원마산에 많이 진출하여 건축자재․철물․과자․서적과 문방구․가구․의복․주류․육류․연료․선구(船具) 등을 판매했습니다. 대금업자도 10여명에 달했으며 건축 붐을 타고 토건청부업도 호황을 누렸습니다.

1931년에 간행된『경상남도 통계연보』에서는 당시 마산 토지 중 대지․논․밭을 종류별로 나누어 매매가격과 임대가격을 기준으로 등급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지중 상등지는 남성동 141번지(현 남성동 파출소 앞 네거리의 대각선 방향 토지)였으며 그 다음은 남성동 187번지(현 남성동 지하도와 연결되는 속칭 돼지골목 주변)와 두월동 1가5번지(현 식당 함흥집의 옆 대지)였습니다.

토지가격으로 보나 이 지역이 마산에서 가장 상업적 가치가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원마산은 범역이 확산되어 북쪽으로 상남동․교방동․오동동을 넘어 산호동 일부까지 시가지가 연결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서원곡으로 올라가는 구 성호동사무소 앞 도로가 1938년 개설되는 등 도시변화 때문에 필요해진 도로도 개설되었습니다.

해방기에 이미 산호동의 마산용마고등학교(전, 마산상고)로 가는 직선도로 등이 개설되어 있었으나 등기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930년 이후 원마산의 도시구조 변화를 지적도와 관련자료 등을 통해 확인한 후1945년의 도시구조를 복원한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1930년 토지이용도를 기준으로 그 이후 15년 동안 시행된 매립과 도로의 개설 및 폐쇄, 대지의 분할과 합병, 소유 변경 등의 변화를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이용하여 실증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매립지역의 도로 축과 기존 원마산에 개설된 도로의 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립지역은 최초의 남성동 매립지역 도로와 동일한 축을 형성하며 도로가 개설된 반면 기존 원마산의 도로는 1910년대에 개설된 최초의 도로축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지역의 도로 연결은 일정한 체계 없이 기존 지역과 매립지역간의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성된 원마산의 해안은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사용되어 1985년 매립공사(오동동에서 서성동 해안까지의 구항 297,512㎡와 창포동에서 월영동까지의 서항 382,069㎡의 매립공사. 1985년 11월 23일 착공하여 서항은 1992년 10월 13일, 구항은 1993년 10월 4일에 준공)가 착공되기까지 원형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도로 역시 1968년 현재 간선도로인 합포로가 매립지역의 도로 축에 맞춰 건설된 것 외에는 별 다른 변화 없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위 그림의 직전 상황, 즉 1930년의 마산포(원마산) 도면이며 그 밑은 1920년, 제일 아래가 1910년 매립과 도로개설이 있기 전 원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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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마산포에서 제일 번화했던 곳은?>

1910년 경 마산포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어디일까요?

복원도에 나타나는 1,157필지를 각각 그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 각 토지를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결과를 그림으로 나타내 당시 도시상황을 확인하였습니다.

토지과세가격과 비교하여 토지등급으로 지가(地價)를 분류해도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은 남성동(당시 元町) 1번지의 사정토지대장입니다.
노란색 원 안에 등급이라는 표기가 되어있는데 등급이 몇 차례 바뀐 흔적이 있습니다.




복원도의 땅 1,157필지는
최저 17등급에서 최고 77등급까지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여 그림으로 나타내 보았습니다.
 색깔이 짙을수록 비싼 땅, 번화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 마산창을 중심으로 서굴강과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남성동 해안 일대가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남성동 파출소 아랫길(전 중소기업은행 앞 도로)이 가장 요지(要地)였는데 이 도로변에 1920년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 「원동상사」가 창업하여 20년대 말 사옥을 신축하였습니다.

중심상권은 중국인 땅이 많았던 부림동과 창동의 경계가 되는 현 경남은행 부림동 지점 앞길로 이어져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창동 네거리의 동서방향 도로변도 지가가 높았습니다.

이러한 중심상권의 영향으로 창동․수성동․부림동․중성동으로 상권이 확산되어 있었지만, 마산포의 동쪽지역인 동성동 일대는 토지등급이 낮아 당시에는 주거지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지난 주에 포스팅한 일본인토지소유상황도와 비교해보면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매입 현상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비교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그림을 올리겠습니다.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어선창 일대 좁은 지역의 소규모 고가(高價)대지들은 한국인의 소유로 남아있었습니다만 요지(要地)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지가가 높은 51등급 이상의 많은 땅들을 비롯해, 특히 71등급 이상의 초고가 대지의 대부분이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한일병합은 1910년 되었지만, 그 시기에 이미 마산포는 이만큼 일본인들에게 먹혀있었던 겁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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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2011/04/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2011/04/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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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마산창과 유정당>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으며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림처럼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입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창 터와 바다 사이의 '이프, 남흥양복점, 수성목욕탕, 남성동천주교회' 등이 들어서 있는 터는 조창기능을 위한 작업 및 하역공간으로 추정되는 공지였습니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마산창은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습니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 우편물취급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본당이었던 「유정당(惟正堂)」입니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었으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30일 오후 2시에 있었던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장면인데 미의회 도서관 소장 자료입니다.
(
마산포 개항 후 각국거류지 경매가 모두 다섯 차례 마산포 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회와 2회 경매까지는 당시 마산포해관으로 사용되던 조창건물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3회부터는 1901년 1월 1일 신마산으로 이전한 마산포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 정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경매 중이라 차일을 쳐 놓긴 했지만 조창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글이 두 편있습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입니다.
김이건의 시 중 양창(兩倉)과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합니다.


  漕倉 惟正堂                조창 유정당             -박사해(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 漕船歌                     송 조선가           -김이건(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웅장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시공 수준도 높았던 건물로 보입니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산도시의 발원지였던 마산창이 남겨 놓은 것은 없습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행인들은 알까요?
바로 이 곳이 오늘 마산도시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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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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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Ⅴ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

건축의 외형 - ‘새둥지’ (Bird's Nest)

동굴에서의 삶을 시작으로 인간의 주거는 자연을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현재는 완전히 인공적인 삶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형태들은 완전한 인공물인 건축의 형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의도되었든 ..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Ⅳ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건축의 외형 - ‘원통’ (cylinder)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도형들 중에, 언제나 주변에 있어서 오히려 존재감이 낮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원통' 이 그런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원통형 물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

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Ⅲ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

건축의 외형 - ‘타공판’ (perforated board)

사람이 건축의 외형을 인지하고 기억할 때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특정 건물은 가장 부각되는 특정 요소로 기억하게 되는 듯 합니다. 규모나 재질, 기하학적 형태, 조..

2018년 새해인사

새해 인사드립니다. 꿈 꾸는 것과 희망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해가 되기 바랍니다.

건축의 외형 - ‘액자’ (frame)

미술의 역사 만큼이나 액자의 역사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회화의 전시, 보존 등을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한 액자는 사진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등으로 현재는 picture frame 만이 아니라 photo frame, d..

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Ⅱ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

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더 인공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피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