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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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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6. 줄다리기

36. 줄다리기

 

정월 대보름날, 마산의 자랑일 수 있는 행사는 부산과 마산의 줄다리기(색전, 索戰)라고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은 줄다리기가 끝나기만 하면 으레 불상사를 야기시킴으로써 중간에 와서 당국이 중지 시켰으나 마산 같은 소도시로서는 그런 일이 시종 없었다.

줄다리기 시초는 동부 소년과 서부 소년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시작하여 구마산 우편국 앞길이 신작로로서는 그 위치가 줄다리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으므로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몇 해가 지난 뒤 바다가 매축되어 공지가 12천 평이나 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여러 가지 체육행사가 벌어졌다.

1차로 하목(夏目)이라는 일인 미곡 창고(현재 尙存, 지금은 없어짐)가 들어섰을 뿐 대중을 수용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곳이었다.

 

대규모의 색전장(索戰場)은 이곳으로 결정이 되어 이 날이 오면 좌청룡(), 우백호()의 기치가 충천하고 동서 각 군부(郡部) 주민과 응원병이 늠름한 차림으로 지축을 울리며 진군하는 광경이야말로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지방 군부(郡部)의 응원 위치도 동서로 갈라지지만 김해, 창원, 진해 등지는 동부로 구산면, 삼진, 함안 등 주민은 서부로 합류하였다.

더욱이 서부에는 모든 관공서가 있었고, 또 일인 주민이 집중되어 있어 대회 전부터 본부를 찾아와서 경비 일단(一端)을 희사하기도 하며 참전을 하는데 중포병대와 철도감청(鐵道監廳)에서는 마니라 로오프의 대여와 병사까지 출동시켜 주었다.

이리하여 승리자는 개선군으로 미희를 담가(擔架)위에 태우고 패자의 부락에 시위를 하면 패자 측은 상여를 앞세우고 상복으로써 패한 것을 진사했다.

여기에 승리측의 시위 때의 구호가 우렁차고 멋이 있다.

내용인즉 이겼네! 이겼네! 서성 양반 이겼네. 썩었네! 썩었네! 대빈밀게가 썩었네

이렇게 해서 밤이 지새도록 놀이를 벌인다. 이러는 동안 매축지에 건물들이 들어서자 장소는 부득이 식은(殖銀)-남성동 파출소 도로를 분기점으로 동서 대전장(對戰場)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때 동측에서는 급경사지가 있어서 서부에 퍽 유리한 여건이 되었지만 승부 성적 통계를 보면 동부가 패한 기록이 많았다.

줄다리기에 수만 명이 운집하는 데는 반드시 보통인보다 일당천(一當千)의 숨은 역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교어(鮫魚)를 방불케 하는 줄대가리 밑에 수십조의 다리가 붙어 한 다리에 평균 백여 명의 청장년이 붙어 분전하다가 가지줄이 끊어지면 이것을 재빨리 끌어 들여 이어주는 숨은 장사도 있었다고 한다.

근대 도로가 나기 전은 이 도로가 간선도로였는데 대회 준비 중 일체의 차량이 차단되고, 미신이지만 여성은 요사하다해서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현장을 우회해야 했고, 잘못하여 줄에 저축하거나 줄을 넘는 경우 여성 군중의 징계를 받아야 하는 율법이 있었다.

진군 신호가 내리기 앞서 여성들은 꽤 무거운 돌을 치마폭에 싸서 적군이 끌어당기는 힘을 저지하는 전략도 썼다는 것이며, 노변의 2층과 지붕은 관중들이 온통 점유해도 이 날만은 가주(家主)들이 친절을 베푼다고 했다.

이렇듯 부민의 연중 행사는 우리 고장 단합정신의 요체가 되었지만, 국내 유일한 토속의 명물도 불어 닥치는 세파의 변천에는 어찌하는 수 없이 1925년 이루로는 완전 종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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