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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민주당 정권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초기 유화 국면이다.

그러나 의거가 발생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정권과 특히 경찰 조직의 속성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증언할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하에서 315의거와 4월혁명은 사실상 잊혀진 사건이었다(남부희, 1995; 이은진, 2004; 남재우, 2005).

다음, 1987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무너진 후 처음으로 노태우 민선정부가 들어서고 뒤이어 김영삼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여당의 집권 연장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31019315의거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지만 유공자 발굴 사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하상칠은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했다.

2002년 이른바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증언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데는 무엇보다 전라도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한몫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같은 해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자 국립묘지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증언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지만 이걸로는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2010년에 “315의거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비로소 국가가 기념하는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이 에피소드는 정치권력이 개인에게 가한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장기 지속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말하기를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 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 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증언록, 478).

이 진술은 그의 진심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녹취를 풀어낸 사람이 지어낸 미사려구일 것이다.

 

<회갑연 때 아내 신을순과 함께 / 1985년>

 

필자는 그가 말하지 않은 속내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더니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염려되고 또 자신의 묘 자리에 관심이 커졌는데 유공자가 되면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부언하기를 자신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자손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고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또 자손들에게 마지막 교훈도 남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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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10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명의 학생들은 어느 대학생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와 나가자!”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민주회복’, ‘학원자유’, ‘독재타도’등의 구호가 뒤따랐다.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마산지역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 모순의 중심, 마산-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철저한 사회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 선출은 국민 직선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6년으로 연장시키는 동시에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하여 영구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의 안정, 정권의 안정이라는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70년대 박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한 것은 긴급조치였다. 9호에 걸친 긴급조치는 각종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1975년부터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온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하면서 침묵하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긴급조치에 해당하는 내용은 광범위하였다.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학생들의 불법집회·시위·정치간섭행위,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는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의 정치질서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마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말로 합리화했다.

이 개념은 국민대중에게 광범위하게 교육·선전·계몽됨으로써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중들의 반독재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극단적 기아를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도성장이라는 미명아래 빈부격차는 확대되었고,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아만 갔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1979년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 조차 보장받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마산지역 또한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지닌 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산·창원지역은 산업화과정에서의 한국경제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지역이었다.

1970대 초부터 수출자유지역, 창원기계공업공단 등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면서 상공업도시로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농촌지역의 노동력이 대량 유입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저임금구조를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층과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한 도시빈민층이 확산되었다.

1979년의 불황은 이 지역에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경기침체에 따라 휴업, 폐업, 노동자 감원, 조업단축, 임금체불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체불, 실직자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노사분규는 급증했다.

이것이 마산지역에서의 항쟁이 노동자가 적극 참여했던 원인이었다.

<항쟁 당시의 신문 보도(1979. 10. 21)>

 

-초기 시위 주도했던 대학생들-

경남대학을 빠져나온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쪽으로 진출했다.

오후 53·15의거 탑 주위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시위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 없었다.

오후 7시무렵 시내진출, 수출자유지역 진출과정에서 저지·해산된 200여명의 학생들이 창동네거리로 몰려 들었다.

마산의 중심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고 최루탄이 터지자 주위의 군중들도 자연스럽게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중들의 수는 불어나 학생의 비율은 줄어들고 행동의 주도권은 학생에서 시민대중의 손으로 옮겨갔다.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화당사로 가자”라는 선동에 산호동 공화당사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공화당사는 파괴되었다.

양덕동파출소, 산호동파출소가 불탔다. 북마산파출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시위는 19일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산호파출소>

 

시청, 파출소, 방송국 등의 공공건물에는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장갑차와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정부는 마산지역의 항쟁을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하면서 재발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언론은 그날 밤의 일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9일 저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시내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관제언론의 상징인 MBC방송국과 경남매일신문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시위군중들은 통금시간이 지난 11시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하다가 경찰과 군인의 진압부대가 총공세로 나오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20일 새벽까지 시위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전날과는 달리 대학생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10대후반, 20대초반의 실업자, 노동자들이었으며, 고등학생들도 많이 가담했다.

20일 정오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민중들의 의로운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민중들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국내정치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026일 유신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마산 시위에서 발견된 사제소총. 경찰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민중의 참여로 이어지고-

항쟁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됐다.

물론 그 전부터 은밀히 시위가 계획되고 있었으나 16·17일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시작되자 당초 예정됐던 22일의 경남대생 궐기계획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항쟁의 불길은 대학생들이 붙였지만 그 이후의 거리시위는 노동자와 점원, 상인 등 일반시민이 주도했다.

실제로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46명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자영업자 4명, 실업3명, 학생 18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민간재판에 회부된 구속 학생 5명을 포함하면 대학생의 수는 23명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명단이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연행자 454명은 대부분 일반시민들로 추정되고 있다.

항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 공격적인 참여자라 할 수 있는 연행자, 검거자 중 대다수가 민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다는 점은 항쟁의주체가 누구였던가는 명확하다.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는 1979년 상반기에 휘몰아친 제2차 석유파동과 정부당국의 부가가치세제 강행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YH사건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이 노동자들에게는 또다른 생존권의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항쟁의 주체는‘유신대학’이라는 오명 속에 분노를 삭여온 대학생들, 왜곡된 경제구조 속에 생존을 위해 허덕이던 민중들이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투쟁의 질을 높였다. 

<1999년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마산 서항 근린공원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

항쟁은 끝났다. 아쉬움도 컸다.

민주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변혁운동으로서의 지향으로 정립되지 못한 채 지배집단의 물리적 대응에 쉽게 굴복했다.

어떠한 사회운동도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집단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전망, 실천적 행위가 통일되지 않을 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커다란 교훈이었다.

폭발된 민중들의 힘을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전국 차원의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마산·부산 지역에 그쳤다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마산·부산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내부 분열로 치달았고 10·26에 의하여 그 막을 내렸다.

10월의 부마항쟁1970년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1980년대 5월의 광주항쟁과 함께 한 단계 질적으로 진전된 민족·민주운동의 모태였다.

그리고 항쟁은 마산시민에게는“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자부심을 다시 한번 심어줬다.

3·15이후 처음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한국 민중들의 지향점인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10·18마산민중항쟁은 3·15 의거와 함께 우리 마산시민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다-휴화산 속에 끓는 마그마가 간직되어 있고, 마른 개천 아래 복류천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이라했던 어떤 이의 예측은 19876월항쟁으로 분출됐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기득권층의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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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4.09.16 20: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심이 뛰네요.

    • 허정도 2014.09.18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잘 계시죠?

2014.05.26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1) -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예고해 드린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의 역사서  마산·창원 역사읽기」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 택했습니다

이 책은 전공분야가 연구분야가 다른 31명이 함께 쓴 책입니다. 저도 함께 했습니다.

이제는 도시통합이 되었지만 원래 책 제목대로 이 글 제목도 마산·창원 역사읽기」로 하겠습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한 꼭지에 5-10개 정도의 작은 꼭지가 있기 때문에 약 40 꼭지 정도 됩니다만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해방 이후 부분이 준비될 때까지만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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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1.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마산.창원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은 한반도의 전체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부정선거에 저항했던 3.15의거는 마산지역만의 문제였을까?

그렇지 않다.

3.15의거는 이승만 독재로 인한 자유와 민주가 탄압받던 한국사회의 모순이 마산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인 형태로 전개된 하나의 실례이다. 의거는 마산에서 비롯되어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던 4.19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지역은 해당 시기의 사회적 모순이 응집된 현장이며, 지역민의 의지가 한국사회전체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즉 지역사의 발전은 한국사의 발전과정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집권의 오랜 전통 때문에 지역민들조차 지역은 관심 밖이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면 제주도로.....” 라는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앙이 아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다.

한국사 교육이 한민족의 구성원으로 가져야 할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지역사 교육을 통한 지역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전근대사회나 일제시기에도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역사는 지역이 주체가 되는 한 시기, 한 지역의 역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서나 읍지가 많이 편찬되었지만,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보수집(조세원.군역담당자의 확보.공물의 수취 등)을 위한 것이었다.

일제시기에는 도사.부사 등이 쓰여졌지만 식민지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자료집에 불과했다.

해방이후에도 지역사는 시사.군지라는 이름으로 쓰여져 왔지만 지역민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 시키지 못했다.

최근 들어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방자치제의 실시라는 현실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중앙중심의 획일적 통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특수성, 지역사회의 과거와 현재적 조건이 인정되지 않고서는 국가 전체의 발전도 보장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나는 마산·창원 지역)

 

바람직한 지역사 연구는 지역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역사는 한국사의 발전과 다르지 않다. 지역사를 연구하는 것 그 자체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첫째, 지역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오늘 우리사회는 자본주의의 기형적 발전과 파행적인 정치운영으로 지역문제가 사회적 갈등 요인의 하나이다. 각 지역의 발전과정을 개별적으로 살피고, 각 지역의 특수성을 인정함으로써 지역의식의 심화, 지역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지방자치제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중앙의 지방정책에 종속되어 움직이던 지방행정조직이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일정정도 지역민의 삶을 책임질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경제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 국가와 국가간의 교섭이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해당 지역이 지니고 있었던 경험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셋째, 삶의 터전인 자신의 고장에 대한 올바른 자긍심을 가지게 할 것이다. 지나치게 자기 지역만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주관적인 향토애착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향토사랑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각 국가나 민족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사회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국가에 있어서도 지역문화의 다양성과 독창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은 해당 시기 국가사회의 과제가 응집되어있는 삶의 현장이며, 이러한 과제의 해결도 지역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과거의 역사적 경험은 잘 보여주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지역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나아가 국가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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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07: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무학여고 뒷산에서 나온 붉은 항아리>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
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위에 산화철을 바른 토기입니다.
회원동에서 멀지않은 자산동 환주산성에서도 이와 같은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이 균형미 좋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항아리는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3,000년이라는 그 아득한 과거의 시간에 누군가가 남긴 이 작은 항아리 한 개가 마산이라는 도시에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마산·창원·칠원지역을 일러 삼한시대의 변한 13부족 중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김해)과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함안)의 사이에 있었던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원대 남재우 교수는 주조마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
창원 다호리와 덕천리에서 발견된 묘와 그 부장물로 보아 이 지역이 변한제국(弁韓諸國) 중 하나의 나라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은 이러하지만,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마산지역의 정치집단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는 원시적 부족국가 '골포국(骨浦國)'입니다.

포상팔국은 글의 뜻처럼 바닷가에 자리한 여덟 개 나라였습니다.
그 중 골포(骨浦)는 마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으며, 칠포(柒浦)는 진동만을 중심으로, 고사포(固史浦)는 현재의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습니다.
이 외에도 사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물국(泗勿國)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보라국(保羅國)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국가는 기록에 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가라(加羅=阿羅, 함안)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응한 신라에 의해 포상팔국이 패퇴합니다.
3년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복수를 준비한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固史浦) 세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킵니다만 또 다시 신라에게 철저히 괴멸 당하고 맙니다.

이 처절한 전사(戰史)를 통해,
비록 패하긴 했으나 강대국 신라를 상대로 보복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골포, 칠포, 고사포 3국도 상당한 세력을 갖춘 나라였다는 추정은 가능한 것 같습니다.

3세기말에 발생한 이 '포상팔국 전쟁' 이후 마산지역에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재편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탁순국(卓淳國)'이라는 정치집단이 마산 창원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이 국가는 진해의 웅천지역과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고자 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도 활발했습니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끝임 없는 세력 확장정책에 밀려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탁순국은 스스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라에 자진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시기는 신라가 김해의 금관국을 복속시킨 532년 이후에서 541년 이전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있었던 포상팔국의 '골포국'과 뒤를 이은 '탁순국',,,,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살았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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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배유림 2010.04.13 12: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제 시작이네요..
    흥미진진합니다.
    마산의 과거...다음편을 기다립니다

    • 허정도 2010.04.13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지겨운 글을 기꺼이 '흥미진진'이라는 용어로 포장해 주어 고맙습니다.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올려볼 생각입니다.
      후배님, 봄꽃맞이 안가세요?

  2. 이진규 2010.04.13 17: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의 고대사는 수많은 가능성의 시대이자 다양성의 시대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가야를 비롯한 포상팔국은 그 건국과정에서부터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이는듯 합니다. 위치적으로도 한반도 남단에서 바다와 접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지금 제가 컴터를 두들기고 있는 이곳 용마산 도서관 언덕은 저 아득한 선사시대를 거쳐 골포국의 누군가가 마산만을 바라보며 한세월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정도 회장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충성!

    • 허정도 2010.04.13 18:1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가워.
      용마산 도서관에는 왠일로?

2009.12.13 21:11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다섯 번째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내서읍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창원읍성의 서쪽지역 중 내륙 쪽은 내서(內西)면, 바닷가인 현재의 마산시내지역은 외서(外西)면이라 불렀다.
외서면은 마산부가 되어 실명(失名)했고 내서만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리’라고 알려진 내서읍에는 현재 중리, 안성리, 평성리, 호계리, 용담리, 상곡리, 원계리, 삼계리, 신감리, 감천리 모두 10개 리가 있다.


                         <1926년 조선교통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1956년 한국지형일람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집결지는 중리 역,
12월 12일, 오후 1시반이었다.
탐방은 중리역을 기준으로 광려산 쪽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아래 호계리 쪽은 시간이 없어 포기하였다.
탐방대원들의 얼굴을 밝았고,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인원도 늘어 모두 3-40명이나 되었다.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시간을 내 해설을 맡았다.
내서읍에 아파트가 들어섰던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게 초빙 이유였다.
“선진도시에서 살아보려고 창원으로 갔는데 통합된다니 괜히 옮긴 것 같다”는 조크로 시작된 남 교수의 내서 설명은 넓고 깊었다.

중리 역에서 길을 건너 함마대로(마산 함안 간을 연결하는 큰 길이라는 뜻 같다)를 따라 동신아파트 쪽으로 간 후 광려천을 따라 걸어 올랐다.

내서에서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처음.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와보았지만 차속에서만 옮겨 다녔지 길게 걸어본 적은 없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동신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의 악취였다.
모두 코를 막으며 불쾌감을 노출했다.
오수 우수를 분리하지 못한 결과일 터.
어디가나 이 문제에 자유로운 하천이 없다.

광려천 변의 간선도로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라 걷기도 힘들었고 걸을 수 있는 조건도 좋지않아 뒷길로 들어섰다.
차로에 비해 턱 없이 좁은 보도도 문제였지만, 그 좁은 보도에 시설물이 버티고 있어서 걸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뒷길은 괜찮은 편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서읍에 존속했던 자연마을의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산자락도 가까워 걸을 만한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아무렇게 쳐 놓은 텃밭 경계막이 분위기를 망쳤다.
학교 인근이었는데 아이들을 보더라도 어른이 할 짓은 아닌 듯싶었다.



상곡리와 삼계리를 걸으면서 그간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았다.

상곡리의 서대(西臺)는 처음 보는 형식의 재단이었다. 
망국의 한을 애통하며 1937년에 세운 재단이다.
비석 곁에는 마치 나라 잃은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군듯한 또 다른 비석 서대기(西臺記)가 있어서, 당시 식민지 백성의 비통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삼계리에서는 잘 알려진 마을 숲(삼풍대공원)에 가 잠시 앉았다.
생태해설가인 최승미 선생이 실력을 발휘, 수종과 수령 그리고 나무에 깃든 새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가운데 선 느티나무는 족히 2-300년 되었다니, 망해가는 조선과 일제기와 전쟁기 등 격동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본 나무 아닌가.
공원 복판에는
‘삼풍대’ 비석 곁에는 ‘광려산 철쭉 입에 물고 삼풍대 천년 숲 바람에 땀 식히던 곳······’ 으로 시작되는 근대 마산의 대표적 시인 월초 정진업 선생님의 ‘삼풍대소사(三豊臺小史)’라는 시가 돌에 새겨져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은 달성 서씨 집성촌이었던 원계마을.
지형상 한쪽으로 비켜있어서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지 않고 단독주택지로 이용되면서 원형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일부 담장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이끼 낀 낮은 담들이 ‘원계마을’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레이트 지붕이라 원형이랄 수는 없지만 초가였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낮은 산들과 그 안에 옹기종기 어깨 맞대며 앉아있었을 집들과 집, 원계마을의 옛 모습이 상상되었다.
새로 지은 콘크리트 단독주택들의 부조화가 눈에 거슬렸다.

시간 탓에 신라고찰 광산사까지는 가지 못했다.
탐방을 끝내고 내서를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오래된 습관이다.

사람이 자그마치 8만 명이다.
함안군이 6만 6천 명, 의령군이 3만 명이니 내서읍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시로 승격된 밀양시 인구가 11만 명밖에 안 된다.

60년 대 이후부터 시작된 도시의 인구집중화 현상은 곳곳에 소위 주거형 인공도시를 탄생시켰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된 서울의 잠실 대단지를 시작으로 인근의 일산, 분당, 광명, 부천 등 인구100만을 넘나드는 대 도시들의 탄생배경이 모두 그렇다.
우리 지역에서는 김해시의 장유와 마산시의 내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베드타운이라 일컫는 소위 주거형 도시는 산업과 주거를 분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도시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지역은 산업지역대로, 주거지역은 주거지역대로 그 목적에 맞는 자연적 환경적 최적상태를 유지시킴으로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시도된 도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직주분리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엄청난 양의 자동차가 필요했고 대량의 연료가 소비되었다. 광대한 도로가 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환경과 에너지문제 등에서 지속가능한 도시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개념이 자족형 도시다.
직장과 주거가 동시에 가능하고 교육과 문화시설도 충분히 갖추어진 도시를 말한다.

내서읍의 도시적 성격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적절한가?
주거형 도시인가? 자족형 도시인가?

아파트가 숲처럼 들어차고 주민 대부분이 내서읍이 아닌 곳에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주거형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마산벨리와 내서공단 등을 생각하면 자족적 성격이 없지도 않다.

미래의 도시발전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도시의 성격규정은 내서읍이 처해있는 입지조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서읍은 일부 자족형 성격이 있지만 주거형 도시로 규정하고 발전 방향을 잡는 것도 좋다고 본다.
주거에 필요한 공간 외에 일터를 더 이상 갖추기에는 공간적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거도시가 산업도시에 비해 조성과정이나 조건이 손쉬운 것 아니냐고, 경쟁력이 낮은 도시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다.
주거도시야 말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로 채워져야 될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다.
교육, 문화, 예술, 복지, 체육, 휴식, 유통, 위락, 심지어 종교시설까지 충분히 갖추어야 되는 고급도시가 주거도시다.

과연 이런 시설들이 내서읍에 충분한가?
아니면 충분히 갖출 여건은 되어 있는가?
그도 아니면 주거형 도시조건을 갖출 준비는 하고 있는가?

답은 ‘아직’이지만, 주거형 도시로서의 조건은 좋은 편이다.
내서를 아우르고 있는 산과 물의 자연조건과 인근 마산 창원 함안과의 적당한 거리 등 입지조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얼마든지 품격 높은 주거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 뿌리쳐야할 것이 있다.

'인구의 유혹'이다.
더 이상 사람을 끌어드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람 수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인구의 유혹'에 빠지면 내서읍의 미래는 어둡다.
단지 잠만 자는 하나의 거대한 주거용 게토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을 늘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시설을 늘여야 한다.
인구 조절에 실패하면 제아무리 시설을 공급해도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되어 부러움을 살 것인가?
앞뒤가 막혀 버린 거대한 숙소가 되어 눈총을 받을 것인가?
그 선택은 행정과 주민의 손에 달려있다.

초겨울 토요일 오후,
당산나무 아래서 탐방대원들과 함께 원계마을의 옛 돌담을 바라보며
‘10년 100년 후의 이 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한가롭게 상상했다.

겨우 5시 반인데 산 밑이라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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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서 삼계 주민....(학생) 2009.12.13 22:2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글 잘읽었습니다. 오늘 다녀 오셨다 가셨나요..? 진짜 내서 인구는 많긴 많은것 같습니당... 삼계 호계 중리만 합쳐도 이건뭐....옛날부터 여기 살았는데 옛날엔 광려천에 깨끗한 물도 많이 흐르고 했는데 요샌 많이 없어졌네요...ㅠ.ㅠ 이 시골마을도 점차 커진다는것에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씁쓸하네요.....좋은 자연 환경이 많이 사라진다는것에 대해서...

    • 허정도 2009.12.13 23:06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내서가 좋은 도시로 변하기 바랍니다.
      자연조건은 정말 좋았습니다.
      원계마을 흙담이 눈에 선하네요

  2. wonhaw 2009.12.14 10:1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네요.
    마산에서만 30여년을 살다(그중 5년은 중리현대거주) 타향살이 하는 40대의 아줌마입니다.

    회원동 500번지, 내가 다니던 회원국민학교 인근이겠죠?

    화란주택 -국민학교 때 담임이 거주하던곳인거 같은데.

    삼풍대,광교천 , 동신아파트 ....

    옛생각을 잠시 하게 하네요.

    • 허정도 2009.12.14 11:06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는 회원국민학교 20회입니다.
      500번지에사 태어났고요.
      방문감사드립니다.

  3. 똑바로 2009.12.14 10:3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꼭 함께 하고 싶었는데 아이 둘을 데리고 갈 수가 없어 맘을 접었습니다.

    글을 보니 참가 했었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허정도 2009.12.14 11:07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니 '누구실까?' 궁금하네요.

  4. 천부인권 2009.12.14 12: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희미해지는 기억의 한켠을 보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대의 비석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 허정도 2009.12.14 12:53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우리 주변에 재미있는 것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5. 노치환 2009.12.14 15: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올리시는 글 너무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오래된 자료들 구하시는게 보통 일이 아니실텐데
    마산을 연구하시는 그 마음 너무나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찾다 보면 개발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와 얘기거리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도시이야기에 흥미를 더 가지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 지역의 좋은 이야기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09.12.14 16: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고맙소.
      함께 마산 걱정합시다.

  6. 김성준 2009.12.14 18: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내서를 방문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고생많으셨구요!
    내서에서 초,중학교를 다닌 저로서도 머리로만 걱정해온 한사람으로서,
    내서읍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모습에 부끄럽기도하지만,누군가가 해야할일이라면
    너와 내가있을수없다는 생각에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허정도 2009.12.14 18:08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내서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니 물어보겠습니다.
      오래 전에 '내서동중'이라고 있었는데 혹시 그 학교 출신인가요?
      그 학교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요?

  7. 김정수 2009.12.14 23:1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도시탐방대에 가입만해놓고 한번도 참석못한 불량회원입니다.
    내서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풍경들이 많네요.
    서대와 원풍대공원, 증산서원은 아직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인데...
    나중에 시간내서 한번 가봐야겠네요.
    참, 배울게 많은 탐방길인데 시간내는게 쉽지 않네요.

    • 허정도 2009.12.15 08:36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다음 여섯번째 탐방에는 꼭 참석하시죠.
      참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8. 주민 2011.01.29 11:5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나무를 찍은사진에 저희아파트가나왔네요 반갑기도해서 글적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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