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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사업에 융자하기 위한 노청(露淸)은행의 설립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이 노청(露淸)은행 자본금 15백만 루불은 1895년 말 대 중국 자본 수출을 목적하고 불국(佛國) 금융자본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식민은행이었다.

 

·일전쟁 후 노국이 대일 배상금 지불 제1회의 인수를 맡아 점차 상해를 비롯하여 일본의 장기(長崎)지점 수표로 조선정부에 납입되었고, 마산포 개항 후 이 거대한 투자는 노청은행의 전통적인 금융자본이었다.

 

그 뒤 이 노청은행의 자매 은행이 노국의 유류, 사탕 등을 판매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노국의 무역업자들은 가는 곳마다 그림자를 나타내어 그 자본가들은 광산을 채굴하고 제분소를 세우는 등 분주하였다.

 

1900년 말부터 노국은 소위 노청조약 체결을 통한 특수적 권익 범위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 노청 조약이 열강에 알려지게 되자 미···일 등 열국은 중국에 대하여 일국(一國)과 특별 협정을 맺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이익옹호를 도모하였다.

 

19013월 일본은 단독으로 노국 정부에 대하여 노청밀약(露淸密約) 같은 것은 이를 열국 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중국 정부에 대하여는 밀약에 조인하지 말라고 통고하는 등 극력 그 성립을 방해하였다.

 

노국은 일본의 항의에 따라 밀약을 포기하였으나, 북경의 주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만주 점령 계속을 선언하였다. 일본이 중국, 조선에 대하여 태도를 급격히 적극화시킨 것은 1902년 영·일동맹의 성립부터였다. 우리나라 마산포를 비롯한 남해안에서 노국 세력이 후퇴한 것도 극동 정세의 반영에서였다.

 

영국은 이 영·일동맹의 체결에 따라 청일전쟁 후 급속히 팽창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인도에 대한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노국 진출로 인한 중국에 있어서의 이권 침해를 막으려 하였다. 일본은 노국이 추진하고 있는 만주와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자국의 침략 의도를 수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제정 러시아로 하여금 시베리아로부터 중국으로 맹진케 한 힘은 기술한 바와 같이 불국(佛國) 금융자본이었다. 노국(露國)과 불국(佛國)을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배후의 압력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제국주의였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 전환기에 있어 이미 세계 식민지 영역의 분할은 거의 완료하고, 각국은 보호 관세가 점차 높아가는 상태에 있었다.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조직의 발전에 의한 끊임없는 압박력은 신진 제국주의 독일로 하여금 삼국동맹(····)의 힘을 이용하면서 발칸반도의 자본주의적 침략의 길을 필연케 하여, 그 결과 이 같은 세계 부분에 걸쳐 이전부터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노불(露佛) 양국을 위압하면서 그 정책은 점차 동방, 즉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방책도 취하였다.

 

이 같은 사정은 특히 독일과 격렬한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으로 보아 근동(近東) 문제에 있어 독일의 압력은 그 대보고(大寶庫)인 이집트 및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중국에 있어서 새로운 불·로국(·露國)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 사면초가의 정세 가운데 소위 영국의 명예와 고립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드디어 영·(·) 동맹의 결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대립의 필연적 소산이었다.

 

영일(英日) 동맹의 성립은 일본으로 하여금 자신 있는 태도로 노국과 교섭할 수 있게 하였다. 1902915일부터 시작된 노국의 만주 철병은 107일에 완료하였으나, 2기 철병기 19034월에 이르러 태도는 일변하여 드디어 군대를 북한지역에 이동시키고 압록강 상류의 삼림벌채를 개시하여 더 한층 조·(·滿) 경영에 노력하였다.

 

이에 노국의 경영 정책은 더욱 노골화 되어, 1903812일 노국황제 니콜라이는 극동위원회와 그 지령을 극동에서 실행하는 극동 총독 설치의 인칙(認勅)을 내려, 알렉세이브를 극동 총독으로 임명하고 문무일절(文武一切)의 전권(全權)을 부여했다.

 

이 극동위원회는 내각 이외의 직할 관청으로 하고 극동의 경영을 한속에 쥐게 하여 일거 만주 병합의 실현을 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노군의 만주 철퇴를 요구하면서, 그 동안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추어 용암포(龍岩浦) 사건을 계기로 190426일 무력적 해결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8개월간의(19042~19059)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포츠마츠조약이 체결되고 노국의 동방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결과 그들의 지위는 태평양 강국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승리한 일본의 최대의 수확은 조선의 완전한 획득(통감기를 거쳐 병합=1910) 반독점지(半獨占地) 만주의 획득(만주 선후조약善後條約에 의해 노국이 청국으로부터 얻은 일절一切의 계승)

 

·(·)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1905년 혁명이 일어나 동양으로의 야심은 물론 신흥 독일 자본조의의 약진을 가져와 세계 자본주의의 최대 대립은 영·(·)로부터 영·(·)으로 옮겨져 1914년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점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의 부추김으로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을 풍자한 그림. 영국이 “네가 뿔을 잡아당기면 내가 꼬리를 잡을게”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 지식산업사)>

 

 

이상은 마산포를 둘러싼 근대 노일관계를 고찰함에 앞서 1900년 전후 조선을 둘러싼 극동의 국제관계를 극히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한편 노일전쟁 직전의 노국 궁정의 내박을 보면, 19038월 니콜라이를 회장으로 하고 외무(外務), 대장(大藏), 육해(陸海) 각 대신을 위원으로 하여 극동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극동의 광대한 영역에 대한 행정권, 극동 육·해군 전반에 걸친 사령권과 한··청과의 외교의 지배권을 가진 극동 총독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노국 내 수뇌 간에 대립 항쟁의 극치가 있었다. 베즈브로크파가 일본과 타협하여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비터 캄스드트로프킨등 일파를 봉쇄하고 그들의 모험주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베즈브로크파에 의해 극동총독으로 임명된 알렉세이브는 육군에 대해서는 물론 해군에 대하여서까지도 극동의 난관에 처할 식견과 수완을 갖지 못해 황제의 총애에만 의존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대일 정책에 있어서도 사태의 병화에 적응된 정책을 취하지 못하고 황제와 전문(電文)의 왕복에 긴박한 시일만 공비(公費)하였다.

 

제정로(帝政露)는 이같이 외관상으로는 세계의 강국으로 보였으나 내부적으로 대두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에 의해 동요하면서 수뇌부 내부의 대립 항쟁 가운데 열강의 여론이 무시된 채 강경개전(强硬開戰)으로 돌진했다.

 

이들은 대일전(對日戰)에 근소한 승리로 위엄을 보지(保持)하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부 정세는 노일 전쟁 개시 후 작전 수행에도 영향을 끼쳐 총사령관 알렉세이브와 만로(滿露) 군사령관 크로프도킹 사이에 심한 대립이 일어나 전략상에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로프도킹은 노국이 전쟁 준비가 정비될 때까지 일본군과 근소의 전투를 하면서 하르빙까지 퇴각하여 전투력을 강화한 후 맹공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알렉세이브의 적극적인 주장에 눌려 드디어 여순(旅順), 요양(遼陽), 봉천(奉天)의 패전을 초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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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7.03.08 13: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지금의 한반도 상황이 그때의 긴박함과 비교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듯 합니다. 다만 지금은 정세에 어두웠던 그때와 달리 정보통신의 발달로 국민이 이 사태를 시시각각 주시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 허정도 2017.03.09 18:08 신고 address edit & del

      맞는 말씀입니다. 나라 일이 걱정입니다.

2017.01.3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근거지로 획정하여 우리 국민들의 가옥을 철거하게 하고 전답을 점령하였다.

 

광무 89월에 그들은 소위 해군 방위대 본부를 거제군 송진포에 두고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일본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 군령을 공포(광무 8927일 감시 보고 제58호에 의거)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에 제재를 가하였다.

 

 

방비대 군령

 

대일본 해군 방비대 사령관이 군대를 안전케 보지(保持)함을 위하여 각하(刻下)에 긴급한 좌개군령(左開軍令)을 제정하여 지실(知悉)게 하니 이등(爾等) 국민은 능히 준봉(遵奉)하여 만약 위범자가 유()하면 속히 아군위(我軍衛)에 신고함이 가().

 

명치(明治) 378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防備隊) 사령관(司令官)

 

군령

 

1조 결당(結黨) 반항(反抗)을 기도하며 기타 군대와 군함(軍艦)과 군용 선박에 대하여 적항소위유(敵抗所爲有)하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2조 방비지역과 수역내(水域內)에 가설(架設)한 군용 전선에 가해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3조 간첩(間諜, 탐지군探知軍) 행실(行實)이 유()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4조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5조 군사 시행(施行)함을 방해하는 자를 군벌(軍罰)에 처함이라.

 

6조 군용지(軍用地) 영조물(營造物)과 선박과 도로와 교량과 정천(井泉)과 수도를 비해(備害)하고 또 파괴오탁(破壞汚濁)케 하거나 또 병기탄약(兵器彈藥) 군수물건(軍需物件)盜奪毁損(도탈훼손)하는 자는 군벌에 처함이라.

 

7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 수륙형상(水陸形狀)을 측량(測量)촬영하게 사형녹취(寫形綠取)하거나 우간연(又干連)한 도서를 발간함을 금함이라. 우범(右犯)한 자를 군벌에 처하되 기제출물(其製出物)과 범행지용(犯行之用)에 공()하는 물건은 몰수(沒收)함이라.

 

8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로 출입하야 방비상 현상과 지형을 시찰하는 자를 군벌에 처함이라.

 

9조 방비수역내(防備水域內)에서 방비대사령관(防備隊司令官) 허가를 득()하지 못하고 일반 어장과 채조(採藻)함을 금()함이라. 우범()한 자를 군벌에 처하고 기범행시(其犯行時)에 공용(供用)하던 물건을 몰수함이라.

 

10조 방비 수역 내에는 일본제국 관선(官船) 이외 방비대 사령관 허가 없이 선해급(船海及) 정박(碇泊)함을 금함이라. 우범(右犯)한 자는 군벌에 처하고 기선박(其船舶)을 몰수함이라.

 

11조 자제일보(自第一條) 지제사조(至第四條)를 범()한 자는 정범종범(正犯從犯) 교사자(敎唆者) 범행(犯行) 기수자(己遂者) 미수자(未遂者) 기타 예비(豫備)와 모사(謀事)만 하는 자를 물론하고 기정장(其情壯)에 유()하여 사형에 처하되 혹은 감등 처분함을 득()함이라. 정장(情壯)을 지()하고 전항(前項) 범행자(犯行者)를 장닉(藏匿)한 자도 역이동벌(亦以同罰)로 논()함이라.

 

12조 전조(前條) 범행자를 체포하여 내고(來告)하는 자에 금이십원(金貳拾圓) 이내로 상여(賞與)함이라. 우범자(右犯者)를 밀고하여 체포케 한 자에는 금십원(金拾圓) 이내로 상여(賞與)함이라.

 

13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에 가설(架設)한 군용전선 보호는 공전선(共電線)이 통과하는 동내(洞內)의 책임으로 하고 각 동리에서 존위동(尊位洞)을 수석(首席)으로 하여 위원(委員)으로 설치하여 전선 보호를 담당함이 가(). 보호위원의 태만으로 군용 전선에 손해가 날하면 기보호위원(其保護委員)을 태형(笞刑) 혹은 구수(拘囚)에 처하되 동내(洞內)에서 기가해자(其加害者)를 체포하여 내고(來告)하면 기형벌(其刑罰)을 면제케함.

 

14조 본회 중 군벌이라 칭함은 사형 감금(監禁) 축방(逐放) 과료(過料) 태구수(笞狗囚)라 하되 필요에 응()하여 벌명(罰名) 변개(變改)함을 득().

 

군령 시행법 중 중요한 조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3조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봉엄도(峰嚴島) 한산도(閑山島) 부근에서 어장 채조(採藻) 등 사업을 경영하고자 한 다는 거처, 성명, 연령을 기록하여 주마산제국영사관(駐馬山帝國領事館)을 경유하여 방비대사령관처에 청원하고 기허가(其許可)를 득()한 후 어장 채조(採藻)를 시행 작업할 시()는 반드시 허가표를 대행(帶行)하여야 한다.

 

4조 어장 채조 허가표는 목판에 청원자 거처, 성명, 연령, 어장과 채조할 허가 문자를 명기하고 기외(其外) 가근거지방비대(假根據地防備隊) 사령관인(司令官印)을 압날(押捺)함이라.

 

5조 어장과 채조 허가표는 일장일인(一張一人)을 한하되 가족과 종자(從者)가 항상 가주(家主)나 주인에게 반종(伴從)하여 어장과 채조에 참여하려면 일장(一張) 청원서에 각자 거처와 성명, 연령을 열기(列記)하여 일장(一張) 허가표 수용함을 득()하되 차장합(此場合)에는 허가표에 수반자(隨伴者) 씨명(氏名)을 열기(列記)함이라.

 

6조 어장과 채조허가표(採藻許可票)는 표기인명 외에 통용함을 득()치 함이라.

 

7조 어장과 채조허가표(採藻許可票)를 대지(帶持)아니하고 채조한 자로 인()하면 속히 제지(制止)하여 역외(域外)로 퇴거(退去)케 함이라.

 

이와 같이 군령이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국민(我國民)이 얼마나 속박을 당하였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광무 1013(감리보고 제2) 군용전선을 절단한 아국인(我國人)20년간 경상도 외로 추방한 일까지 있었다. 또 일본 방비대의 요새지 부근에 우리의 무기고가 있으면 우리 국민이 그들에게 봉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서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전략(前略) 거차조회우주(據此照會于駐) 본항일영사(本港日領事)······ 현접(現接) 해영사(該領事)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의 회복내개(回覆內開)에 웅천군수(熊川郡守) 권석구(權錫九)에서 동군가덕면(同郡加德面) 병천역면(並天域面) 소재(所在) 군기고지(軍器庫之) 무기고류(武器庫類)를 일본인이 취거(取去)한 지의(旨意)를 통보(通報)에 접()하여 우환부사조회(右還付事照會) 제오호(第五號) 양실(諒悉)인바 가덕도 일부를 일본 육군에서 수용하여 기이방비(旣以防備)를 요새지대(要塞地帶). 우지대부근(右地帶附近)에 무기고지존재(武器庫之存在)라 함이 혹도민지간(或島民之間)에 불은(不隱)을 유기려(誘起慮)가 유()하니 방비지배치상(防備之配置上)에 직()히 방애(妨碍)한지라. 동도(同島) 요새관헌(要塞官憲)에 우등(右等) 무기(武器)를 일시 영지(領置)하였사오니 양지상성도(諒知相成度) 회답등인(回答等因)이옵기······.

 

이 같이 거제도 일대를 해군 방비대 가근거지로 삼고 그들은 야비한 약탈 행위를 하였고, ·러 전쟁이 일본 승리로 돌아가자 일본국은 본격적으로 동아침략(東亞侵略)의 근거지로 해군 공항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진해만'이라고 불렀던 범>

 

 

 

2. 진해만 일본 군항

 

광무 10820일 재정 의정부 훈령 제3호에 의하면

 

경상남도 진해만(鎭海灣)을 군항(軍港)으로 예정(豫定)하고 국군비(國軍備)가 충실(充實)하기까지는 일본 정부에 행장위탁설비(行將委託設備)이기 경계(境界) 도면급준수사항(圖面及遵守事項)을 당경반포(當經頒布)이니 준차양실(遵此量悉)하려니와 당선(當先) 해지역내토지(該地域內土地), 가옥 기타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매각(賣却), 교환양여당(交換讓與當)하거나 혹한(或韓일관헌(日官憲)에 허가를 불경(不經)하고 대여(貸與)함을 금()한 사()로 별회(別繪) 도면(圖面)하고 준변(遵辨) 사항을 훈령(訓令)하니 조량신변(照諒迅辨)하여 무혹만환(無惑漫患)함이 위가(爲可).

 

광무 10820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 김서규(金瑞圭) 귀하(貴下)

 

좌 개(左 開)

진해만 군항 예정지내(豫定地內)에서 별지(別紙) 도면에 적선(赤線)으로 기재(記載)한 토지 중 수수(手授) 절차(節次)

 

1. 일본 정부에 인도(引渡)를 수()할 구역내(區域內)의 사유지는 본국 정부에서 매수하고 기대가(其代價)는 일본 정부가 본국 정부에 지변(支辨)할 사().

 

2. 양국 정부 간에서 전기(前記)한 토지의 수수대금(受授代金) 지발기타(支撥其他)에 관한 상호간 귀결(歸決)은 별위(別爲)함을 요함으로써 마산 이사청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과 협의하고 실행에 당()케 하기 위하여 상당한 권한을 당해 관헌에게 부여(付與)할 사().

 

3. 전기(前記) 양항(兩項)을 실시함에 대하여 내외인의 교회(狡獪)한 획리수단(獲利手段)을 예방하기 위하여 별지(別紙) 도면에 적선(赤線)으로 기재(記載)한 지역은 현금간(現今間) 매매(賣買), 교환, 양여(讓與), 당대차(當貸借)를 금지할 사()로 관계 관헌급 국민에 대하여 지급(至急) 발령(發令)할 사() 광무 10815일 진해 요새지대 취체규칙(取締規則)과 진해 요새지대 시행세칙(施行細則) 및 요새지대 내 세입취체규칙(歲入取締規則)을 별책(別冊)과 같이 규정하여 시행하다.

 

이렇게 당시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창원감리 김서규에게 훈령을 내렸다.

 

한편 군항 예정지를 일본 통감부에서 일방적으로 선정한 위원으로 하여금 실지 입회하여 조사 정계(定界)한 다음 입계표(立界標)를 세워 군항 경계를 획정(劃定)토록 하고 그 위원인 해군 중좌(中佐) 삼월즉(森越卽)과 해군주계중위(海軍主計中尉) 영본요랑(鈴本要郞)이 광무 1098일에 본항(本港)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동() 14일에는 마산 이사청(理事廳) 일본 이사관(理事官)(三增久米吉)과 참원감리(金瑞圭) 입회하에 진해군항 예정지를 획정하고 입계표(立界標)를 세웠다.

 

그러나 군항 요새지로 획정(劃定) 정계(定界)한 범위가 주위 2백리, 7·8()이 이에 포함되므로 경내(境內) 주민들의 소요(騷擾)와 의구(擬懼)가 반드시 일겠기로 정계위원(定界委員) 삼 중좌(森 中佐), 영목(鈴木)중위, 삼증(三增) 이사관, 경 경부(境 警部), 창원감리 등은 이들 주민을 열유위무(說諭慰撫)함에 주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창웜감리의 보고에 의하면

 

해단항지(該單港地)에 대하여 일반사무(一般事務) 창원감리(昌原監理)가 담임(擔任)토록 지령(指令)하였으나 본부(本府)에서는 기무특정권한(旣無特定權限)이옵고 후운(後云) 담임(擔任)이 이난청종(理難聽從)이옵고 본서무항(本署務煩)’에 불가구광(不可久曠)이옵거날 여욕전력해지(如欲專力該地)오면 동다체애(動多滯碍)이오며 차이(且以) 요새지대(要塞地帶) 실선이내(實線以內)로 언지(言之)하오면 주긍(周亘) 이백리(二百里)에 범입(犯入) 7,8()하오니 수비현행미수(雖非現行買收)이오나 기어정계(其於定界)에 필히 소요(騷擾)할 것이고 이적선이내(以赤線以內) 1(第一區)로 말하면 민유토지(民有土地)를 일병(一幷) 매입하고 급기(及其) 해당지내(該當地內) 가옥(家屋)을 철리(撤利)하게한 바 언념중정(言念衆情)에 조현어우(鳥䮄魚喁)는 여소필지(廬所必至)라 이에 위무(慰撫)하여 아국인민(我國人民)들의 전답(田畓), 가옥수용조치(家屋收容措置)‘(광무 1095일 감리보고 제42, 동년 98일 동보고同報告 42호 의거)

 

그리고 동년 916일 동보고(同報告) 45호에 의하면 전기(前記) 삼 중좌(森 中佐), 영목 주계(鈴木 主計), 삼증 이사관(三增 理事官), (경희명 경부)境喜明 警部는 기선(汽船)을 타고 웅천군에 와서 경계 적선(赤線) 내의 이이동민(二二洞民)에게 일장효유(一場曉諭) 비진형(備陳形)하온즉 처음 의구(疑懼)다가 종내위안(終乃慰安)하여 거개(擧皆)가 환영(歡迎)’하였다 하며 그 효유(曉諭)의 요지인즉 다음과 같다.

 

1. 진해만은 일한 양국의 국방을 위하여 군항을 작()할 필요를 한국 정부의 인()한 바에 의하여 827일 관보에 공보하였음.

2. 한국은 국력이 아직 자위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방상 필요한 군비를 충실하기까지 일본 정부에서 제반 경영을 하여 차()군항을 사용할 사()로 협정하고 일본 정부는 필요한 설비를 하기로 승인하였음.

3. 관보에 기재한 군항 예정 지역은 확대하여도 인민의 재산급 생활상 등에는 하등 구애에 영향도 피함이 무()하고 단 해()구역 내 토지를 외국인의 소유에 귀()치 홀()할 뿐 사().

4. 군항 예정지역 내에 모도(毛島)로 행암리(行巖里)까지 급기(及其) 부근토지(附近土地)는 일본 정부에서 해군에 필요한 설비(設備)를 위하여 외국인은 물론하고 한일간에라도 매매(賣買)든지 기타 소유권의 이동에 관한 소위(所爲)를 금지할 의()로 이() 중앙정부로 훈령이 유()한바 상이승지(想已承知)하여야 함.

5. 토지수용에 관하여 상당한 가액(價額)을 차하(次下)하기로 가령 대가(代價)를 차하(次下)하여도 기()이 사용치 아니할 부분은 종전과 같이 거주급(居住及) 경작을 허()하되 그 부분이 다대(多大).

6. 가옥급(家屋及) 묘지이전비(墓地移轉費)는 전기(前期)하여 비득(費得)한 가격을 정치(定置)하였다가 이전함을 명할 시()에 차하(次下)할 사().

7. 여의(汝矣) 등은 이상 주의(注意)에 불편함이 무()케 수용법 집행에 상좌(相左)가 무()할 양()으로 수용 당사자는 명령을 종()할 사().

 

만약 우진(右陳)한 훈의(訓意)를 불수(不守)하고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혹 교활한 수단을 구성하여 국가에 불충(不忠)한 사()가 유()할 시에는 중벌을 난면(難免)하고 본관도 상당한 책임 유()하니 만일 해득(解得)하여 무지위배(無至違背)케 함이 위가사(爲可事).

 

이리하여 광무 11113(감리보고 제2)에는 최종적으로 진해만 군항의 설정경역(設定境域)을 정하였으니 이에 대한 감리 보고를 보면

 

본월(本月) 13일에 진해만 군항정계사(軍港定界事)로 해군참모(海軍參謀) 삼 월태랑(森 越太郞)의 청요(請要)를 거()하와 본 부윤과 해() 참모(參謀) 삼급웅천군수(森及熊川郡守)로 회동(會同) 전주우(前住于) 본부(本府) 상남면 불모산리(佛母山里)(김해경金海境 3리허三里許 웅천경熊川境 7리허七里許)하여 군항(軍港) 요새지대(要塞地帶) 한계(限界)를 시자(始自) 해리(該里)로 역지(歷至) 우본부하남면월촌리(于本府下南面月村里)(남접웅천경南接熊川境)이 간간(間間) 착주(着株)하옵고 우어(郵於) 16일에 본 부윤과 해참모(該參謀) ()도 본항(本港) 아국(俄國) 거류지(居留地) 율구미(栗九味) 서남(西南) 지진해경(至鎭海境)이 간간착주(間間着株)하옵고 우자해착주처(又自該着株處)로 역진해서남(歷鎭海西南) 지고성군(至固城郡) 대울비기(大鬱飛崎)히 각해군(各該郡) 평대동(平帶同)하와 연락(連絡) 착주(着株)하옵고 해착주내(該着株內) 지형회도1(地形繪圖一本)을 제우본부(除于本府)하올 태()로 담청십해참모(談請十該參謀)하였사온즉, 대기도본부래(待其圖本付來)하와 갱위(更爲) 점보계료(粘報計料)하오며 자선(玆先)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광무 11120)

 

당시 군항 내 가입(加入)하온 지명 및 평수급(坪數及) 본도(本圖) () 기요새지대(其要塞地帶)의 전부도본(全部圖本)을 점부(粘付), 보고(광무 11521)를 보면 진해 군항이 일본국의 국방과 동남아 침략을 위한 그 근거로 삼으려는데 있다.

 

그리하여 종전 조계장정(租界章程) 조항을 보면 조계(租界) 10리 이내라는 규정은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위와 같은 경위를 거쳐 일본국은 진해군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1914년 준공한 진해요항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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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식민지배의 상징, 마산 이사청>

1876년 최초의 개항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완전 강점당할 때까지 34년간은 이 땅 안의 모든 기존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되는 시기였습니다.

이 재편 과정에서 신도시(新都市)가 생겨나기도 하고 반대로 많은 전통적 도시들이 상대적 또는 절대적인 쇠퇴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자는 마산을 비롯한 개항장 소재지들로서 외국인거류민들을 중심으로 통상 무역이 활발히 전개되던 신도시들이었고 후자는 지방행정의 중심으로서 1,000여 년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래의 도시들이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마산․인천․군산․목포․부산․진남포․신의주․원산․청진 등의 9개 도시와 후자에 속하는 도시 중에서 경성․대구․평양의 세 도시가 1914년 부(府, 현재의 시)로 바뀝니다.

개항 이후 국제 사회에서 한국 내 지배력을 강화해 온 일제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을사조약으로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 식민지화를 구체화시켰습니다.

특히 노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7월, 미국 국무장관 태프트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가쓰라(계, 桂)-태프트’ 비밀협상을 맺었습니다.

이 협약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이 인정함을 전제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노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정책을 미국이 방조하고 협력한 협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05년 8월 22일에는 제2차 영일동맹까지 맺었습니다.
이 동맹에서 영국은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특수한 이익을 가지며 영국은 일본국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 대해 취하는 것을 승인’ 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 5일 노일전쟁의 종결을 위해 중재한 포츠머드조약에서도 이 점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일본은 국제사회에서의 실력과시는 물론 한국식민지화를 공공연히 사실화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참담하고 억울한 일이지만 당시의 우리 사정은 그랬습니다.
국제정세가 이랬기 때문에 을사조약으로 설치된 통감부는 한반도의 식민통치를 위해 행정권을 철저히 장악, 지배력을 강화했습니다.

먼저 각 지방에 이사청을 설치하였습니다. 마산 이사청도 이 때 설치되었습니다.

마산 이사청 건물입니다. 
1899년부터 있었던 영사관건물을 헐고 1908년에 지어 이사청으로 사용했습니다. 목조2층 건물로 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구, 창원군청)에 있었습니다.
창원군청 초기까지 원형이 남아 있었는데 건축적 가치도 없는 현재 건물로 개축하면서 철거되었습니다.
남아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근대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을 것 같은데 아깝습니다.

아래 사진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큰 나무가 위 흑백사진에 보이는 저 나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산이사청의 관할 구역은 부산이사청과 대구이사청 관할구역 이외의 지역, 즉 경남서부일대지역이었습니다.
지청(支廳)으로 진주지청이 1907년 1월 5일 설립되었고, 진주지청에서는 마산이사청 관할구역 중 좌측, 즉 경상남도 서남부 일대인 진주․사천․곤양․남해․하동․의령․초계․협천․삼가․단성․산청․함양․안의․거창 등을 관할했습니다.

통감부는 이사청 뿐 아니라 외청(外廳)으로 철도관리국․법원․재정감사청․관측소․영림창(營林廠)․우편국 등까지 설치함으로써 사실상 한국의 행정․입법․사법의 전권을 장악했습니다.
마산의 우편국은 이보다 훨씬 빠른 1899년 11월 16일 현재의 남성동 제일은행 터에 있었던 구 창원감리서에서 개설되었습니다. 개항에 필요한 시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제의 횡포로 인해 전국적으로 배일사상이 팽배해지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1907년 6월 하순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황제 양위(7월 20일), 한일신조약(韓日新條約, 丁未7조약, 7월 24일), 언론 탄압을 위한 신문지법(新聞紙法) 제정․공포(7월 24일), 한국군대 해산(7월 31일), 연호 변경(광무에서 융희로 변경, 8월 2일) 등 일련의 조처를 불과 일 주일 남짓한 사이에 해치워버렸습니다.

그 중 신문지법(新聞紙法)은 광무 황제의 법률 제1호로 이것이 이른바「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입니다. 일제하는 물론 8․15 후까지도 효력을 지니고 있었던 우리나라 언론탄압의 효시였습니다.

일제는 이처럼 한반도 통치의 내적 조건을 조성하면서 장차 다가올 식민지배의 기반구축사업인 사회기반시설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철도는 1899년 경의선 일부 개통을 시작으로 1905년 경부선과 마산선(마산-삼랑진), 1906년 경의선과 경인선, 1910년에는 평남선까지 설치하였습니다.
간선도로는 1907년부터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외채차입금 총 공사비 293만 여원을 투입하여 진남포-평양선을 위시한 14개 노선 총 연장 1,993㎞를 뚫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06년에 착공한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청진․ 목포․ 신의주․ 성진 등 여러 개항장들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을 개축하고 세관설비공사도 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의 기반시설을 조성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지은 러시아영사관 건물입니다. 
현 월포초등학교 부지에 있었으며 목조2층 건물로 양식적 특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 건물이 그 자리에 존치되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의 건물이 서로 경쟁하듯 인근 지역에 서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을 때,
인근 월영리 주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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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27 11:07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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