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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8) -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1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연일 계속되는 고성과 난투장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 언제 그랬냐는 듯 품위와 위엄으로 재무장(?)하고 마치 일월의 야누스인 양, 두 얼굴로 웃고 화내고, 타협하고 뒤돌아 서고...........

누구의 일상일까? 아마도 현재만이 아닌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진 이래 계속되어 온 평상의 모습은 아닐까. “정치집단” 혹은 “정치제”하고 명명되는 이러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일까?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이들의 역할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그 존재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 될 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원시 공동체사회라고 얘기하는 집단과 “정치집단”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가장 먼저 언급될수 있는 것이 그 사회 내에서의 계급의 유무이다. 즉, 한 사회 조직에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느냐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헌기록이 거의 없던 시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겨놓은 물질자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물질자료는 무의식적으로 남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전래된 사례도 적지 않다.

즉, 어떤 집단이 한 지역에 살다가 이동하였거나 화재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나 외부침입등과 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더 이상 원래의 터전에 머물지 못하였을 때 그곳에 남겨진 흔적들이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무덤이나 제단 등에 바쳐진 물건들은 후자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질자료는 생산물의 잉여가 가능해지면서 더욱 증가하였을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위협수단으로서의 도구, 즉 무기의 본격적인 생산과 그 기능의 증대는 한 지역 내에서의 우월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담하였을 것이다.

우월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더 많은 부의 추구를 위해 그 조직을 공고화시켰을 것이고, 그러한 모습의 일부가 발굴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인 것이다.

유적과 유물은 무덤이나, 사람들의 주거, 생산과 관련된 삶의 터전을 보여주며,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수준, 사회적 위치, 문화적 맥락이나 계통 등 삶의 상태를 추론하고 복원할 수 있다.

 

- 나라가 들어서다 -

마산과 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의 형성을 보여주는 유적은 어디에서 확인 될 수 있을까?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었던 고인돌을 통하여 정치집단의 형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양태가 너무 개별적이어서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나 의식을 위한 본격적인 이익집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정치집단의 모습을 추론하기는 쉽지 않다.

1988년 우연한 기회에 알려지게 된 주남저수지 인근의 창원시 동읍 다호리 무덤군(사적 327호)은 정치집단 형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호리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남긴 이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유구가 거의 무덤이기 때문에 무덤이라고 하는 매개물이 지니는 특징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생전의 삶의 일부를 옮겨 놓기를 희망하던 고대인들의 습속으로 인해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을 통해 우리는 훌륭한 물증을 찾을 수 있다.

영생의 관념은 각 개인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들을 통해 생전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우열의 차이를 보여주게 하였다.

무덤의 크기나 축조방법의 차이, 그 안에 매납된 유물의 질적,양적 차이는 거의 그대로 묻힌 사람들의 생전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만 하는 거대한 구조에,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축조방법, 그리고 휘황찬란한 고급의 부장유물들을 간직한 무덤들. 이에 반해 간단한 구조에 껴묻거리가 거의 없는 초라한 무덤들.

이러한 인위적 등급차를 지닌 무덤들은 같은 무덤구역 내에서 뒤섞여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부류의 것들끼리만 무리 지어 분포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여러 등급의 무덤들이 존재하였던 사회라면 그 사회적 분화 정도가 상당히 고도화된 경우일 것이다. 반면, 단순히 상급과 하급 등으로 단순 분류될 수 있는 무덤들을 양산해 낸 사회라면 그 분화정도가 미약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산.창원지역의 고인돌 자료를 통해서는 후자의 면이 강한 반면, 경주지역의 신라고분이나. 공주.부여지역의 백제고분을 비롯하여, 저 유명한 장군총을 간직하고 있는 집안지역의 고구려 고분들에서 전자의 모습을 유추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창원 다호리 일대>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묘에서 1988년 출토된 통나무 목관. 20년간의 보존처리 및 복원과정을 마치고 2008년 11월 24일 공개됐다. 다호리 1호묘는 기원전 1세기 전후 한반도 남부 철기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분으로 이 통나무 관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관이다. 참나무로 만든 관이 2000년 넘게 썩지 않은 것은 저습지 토양에 묻혀 있어 밀봉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7차에 걸쳐 조사된 다호리유적은 불과 너비 약 30〜40m, 길이 약 150m의 범위인데도 불구하고, 목관묘, 옹관묘 등 7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상당부분 도굴과 경작 등으로 훼손되었으며, 또한 한정된 지역만이 정식조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적은 구룡산(433) 북서 줄기에서 이어지는 약 20m 정도의 야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대로 조사 당시에는 논으로 경작되던 곳이었다.

입지조건과 발견된 유구의 모습에서 보듯이 이 곳은 인근에 있었을 정치집단의 공동무덤구역이며, 당시로서는 지배계층의 무덤들이 주로 조성된 구역 이였다.

아직까지 이들 무덤을 축조한 집단들의 생활근거지(주거지, 생산유적 등)와 또 다른 등급의 무덤유적을 찾지 못하여 당시 정치제의 명확한 모습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덤자료가 지니는 장점으로 인해 이들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당시의 모습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 곳에서 주로 확인된 목관묘는 우리나라 고대의 무덤양식 변천과정에서 본다면 고인돌이나 석관묘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여 다음 단계의 목곽묘로 이어지는 중간단계의 무덤형식이다.

이 곳에서 함께 출토되는 토기에서도 전시기의 무문토기와 그를 뒤이은 이른바 고식와질토기가 동시에 수습되고 있는 것은 이 유적을 남긴 집단의 발전 단계상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특히, 통나무를 반쪽으로 쪼개어 만든 관의 형태는 이채롭다. 또 관 밑바닥 아래 중앙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많은 유물을 넣은 대나무상자를 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예이다.

다호리유적에서 수습된 유물은 재질에 따라 칠기류, 목기류, 청동기류, 철기류 및 토기류 등 다양하다. 칠초동검을 비롯하여 동검, 철검 등 다양한 무기류와 철제의 따비, 철부 등의 농공구, 우리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훗날 가야 고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칠기 제기, 그리고 붓 등의 존재는 이들이 상당한 문화적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조금 뒷 시기에 등장하는 목곽묘는 구조가 훨씬 복잡. 고도화되고 부장유물도 대량화되어 그 피장자가 상당한 세력을 지닌 대군장 또는 왕이라 할 만한 지배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호리유적과 같이 보다 이른 시기의 목관묘를 조성하면서, 철기와 더불어 아직도 청동제품을 쓰던 사람들은 흔히 ‘소국’이라고 알려진 초기단계 정치제의 지배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덤구조와 그 부장유물들로 보아 이들 다호리유적의 피장자들이 활동한 시기를 주로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남부지방에 존재한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 갈대밭 속의 나라, 그 모습은? -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활동하였을 이들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알려줄 수 있는 옛 기록이 없어 부득이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지금의 경상도 일원지역에 변한.진한 24국이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얘기하는 삼한사회의 모습은 대부분이 이 책이 편찬되었던 무렵의 상황, 즉 기원 후 3세기만 전후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의 중심시기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에서 전하는 사회단계보다 약간 덜 발달한 모습을 상정해 보면 다소나마 다호리유적 조성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지』에서는 변한과 진한의 소국 안에는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그 우두머리를 거수라 했다. 그 중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 그 다음으로 험측, 번예, 살해, 그리고 읍차가 있었다고 한다.

큰 나라는 4,000〜5,000가, 작은 나라는 600〜700가였으며, 변한. 진한에 총 4〜5만가가 있었다고 한다. 변한만을 생각한다면 약 2만여가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의 인구변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아마도 전단계인 다호리유적 조성시에도 비슷한 인구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집단의 규모는 위에서 얘기하는 작은 나라의 정도, 혹은 그보다 약간 작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하는 3세기말의 변한의 정치집단은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작은 정치체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안에 있다는 여러 작은 별읍들이 바로 전시기의 개별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구를 5인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작은 나라의 경우 약 3,000〜3,500명의 인구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체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겠지만, 대략 인구 3,000명 내외의 규모를 가지고 다호리를 중심지로 하여 인근을 지배하면서 존재하였다가 나중에 목곽묘를 주 묘제로 하는, 보다 큰 인근의 정치집단으로 발전하였거나, 혹은 그러한 집단에 통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다호리의 정치집단은 그들이 남긴 유물들에서 살펴보건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과 같은 유물의 존재는 이들이 중국문화와 밀접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또 다른 연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한나라시대 화폐 오수전. 오수전(五銖錢)은 동전의 앞면에 ‘오수(五銖)’라는 글자가 표기된 화폐이다. 수(銖)는 무게 단위이며, 1수(銖)의 무게는 약 0.65g으로 오수(五銖)는 3.25g이다. 오수전은 B.C. 118년 중국 한(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에 주조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수대(隋代)를 거쳐 621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오수전은 무늬의 위치에 따라 천상·천하·천방으로 분류되고, 무늬의 형태는 월아문·일성문·사결문 등으로 분류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전한시대 청동거울인 성운문경. 중국 전한경(前漢鏡) 가운데 성운문경은 전한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청동거울이다. 성운문경은 한국에서 평양 정백동 3호묘·토성동 4호묘, 창원 다호리 1호묘, 밀양 교동 3호묘, 경산 임당 E-58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거울 뒷면의 중앙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그 바깥으로 16개의 연호문(連弧文)이 시문되어 있다. 그 바깥의 주문양대에는 4개의 유(乳)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원추형의 소형 유가 7개씩 서로 연결된 성운문이 시문되어 있다. 외곽 테두리 주연부는 16개의 연호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 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인근의 성산패총은 당시 이 지역에서 직접 철을 다루었던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가야라는 대규모 정치집단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다호리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던 초기 정치집단들이 그 기반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지병목 / 당시 문화재청 학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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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3) -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3 고대사회의 마산과 창원은 가야의 영역이었다

 

고려군읍」 연혁도칠폭, 채색필사본, 19세기 이후,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 단군조선 이후 고려까지 각 왕조의 강역을 그린 일종의 역사지도.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도성을 비롯한 주요지명의 위치를 이 지도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중국의 정사서인 “삼국지”에는 마한(지금의 경기도,충청도,전남지역), 진한(낙동강의 동쪽), 변한(낙동강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이들 삼한에는 다양한 이름의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나라 외에도 다른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들장하고 있다. 포상팔국이 대표적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이 “삼국유사”에는 합포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세 곳이다.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이다.

따라서 합포가 마산만이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다호리유적이 있는 창원의 동명일대도 정치집단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집단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다호리 유적에서 조사된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라는 것은 정치집단이 존재했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성산패총은 철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에 있었던 골포국 등의 나라들은 4세기대를 지나면서 다른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집단은 탁순국이었다.

4세기대가 되면 백제국과 사로국은 인근 지역으로의 진출을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백제.신라로 발전해 나갔다. 변한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가야지역에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13개의 나라가 있었다. 고령의 가라국, 김해의 남가라국, 함안의 안라국등이었다.

탁순국은 창원지역을 포함하는 정치집단이었다.

탁순국의 성장과 발전을 보여주는 유적은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마산의 경우 고성과 인접한 진동쪽의 대평리유적을 비롯하여 현동유적, 자산동고분군이 있고 창원에는 주남저수지와 인접한 야산과 저지대에 넓게 형성된 다호리유적, 도계동고분군, 가음정동유적, 삼동동 옹관묘유적, 반계동유적, 천선동고분군, 창곡동유적등 10개소에 달한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가야지역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기울였다. 하지만 신라의 끊임없는 가야지역 진출과정에서 김해의 금관국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6세기 중반경에 신라에 자진 투항하고 말았다.

신라가 가야지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던 것은 6세기대에 접어들어 신라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부터였다. 법흥왕은 금관국을 함락(532년) 시켰고, 562년 고령의 가라국이 신라에 정복됨으로써 신라는 가야의 전역을 차지 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7세기 중엽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일부 영역도 차지하게 되어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통일후 신라는 새로이 확보된 영역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685년 신문왕은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주-군-현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마산과 창원지역은 이미 신라가 탁순국을 정복하여 굴자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이 의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소속된 지역은 칠제현(함안군 칠원면), 합포현(마산시), 웅신현(진해시 성내동)의 셋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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