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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마산창과 유정당>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으며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림처럼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입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창 터와 바다 사이의 '이프, 남흥양복점, 수성목욕탕, 남성동천주교회' 등이 들어서 있는 터는 조창기능을 위한 작업 및 하역공간으로 추정되는 공지였습니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마산창은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습니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 우편물취급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본당이었던 「유정당(惟正堂)」입니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었으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30일 오후 2시에 있었던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장면인데 미의회 도서관 소장 자료입니다.
(
마산포 개항 후 각국거류지 경매가 모두 다섯 차례 마산포 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회와 2회 경매까지는 당시 마산포해관으로 사용되던 조창건물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3회부터는 1901년 1월 1일 신마산으로 이전한 마산포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 정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경매 중이라 차일을 쳐 놓긴 했지만 조창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글이 두 편있습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입니다.
김이건의 시 중 양창(兩倉)과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합니다.


  漕倉 惟正堂                조창 유정당             -박사해(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 漕船歌                     송 조선가           -김이건(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웅장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시공 수준도 높았던 건물로 보입니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산도시의 발원지였던 마산창이 남겨 놓은 것은 없습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행인들은 알까요?
바로 이 곳이 오늘 마산도시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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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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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마산포에 조창이 서다>

조선은 태조 재위 중 고려 때 실시하였던 조창제도를 거의 복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전국 아홉 개 조창에서 세곡을 수납했습니다.
내륙 수로로 연결되는 조창이 충주의 사흥창(司興倉)․원주의 흥원창(興原倉)․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황해도 백천(白川)의 금곡포창(金谷浦倉)․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의 다섯 개였고,
바닷길이 연결되는 조창은 충청도 아산(牙山)의 공세관창(貢稅串倉)․전라도 용안의 덕성창(德成倉)․영광의 법성창(法聖倉)․나주의 영산창(榮山倉) 네 개였습니다.
경상도의 세곡은 충주의 사흥창에서 수납하였습니다.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조운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漕船)의 빈번한 침몰사고와 민간인에게 운임을 지불하고 운송하는 임운(賃運)이 생기면서 조창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조창이 폐쇄되거나 관할구역이 축소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조정은 민호(民戶)를 기준으로 한 공물(貢物)과세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토지기준 과세인 대동법을 실시합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며 이 때 걷은 쌀을 대동미(大同米)라 불렀습니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경기도에 처음 실시한 대동법은 이후 강원도․충청도 등으로 확산 혹은 축소되기도 하다가 숙종 3년(1677년)에는 경상도에 시행되고 숙종 34년(1708년)에 황해도를 마지막으로 100년에 걸친 시도 끝에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영조 36년(1760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이 경상도 지방의 대동미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반하기 위한 조창을 세우도록 건의하여 결정됩니다.
그 때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창원의 마산창(馬山倉)과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곧 경상도 좌우 양창(兩倉)이 설치되었습니다. 250년 전 일입니다.
5년 뒤 밀양의 삼랑창(三浪倉)을 후조창(後漕倉)으로 설치하여 경상도에 3곳의 조창을 두었습니다.


마산창(馬山倉)의 위치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지금의 남성동 파출소 일대입니다.
당시에는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해안이었지만
지금은 매립이 되어 도시 한복판입니다.
-마산창의 터와 건물 등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상세히 올리겠습니다-

마산창 관할구역은 창원․함안․칠원․진해․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동남면의 8개 읍이었는데 거제와 고성은 1765년에 위치관계로 거제 견내량의 속창(屬倉)에서 관장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진해는 지금의 마산시 진동면 일대입니다. 진해라는 명칭은 1907년 일본에 의해 당시 웅서면이었던 현재의 진해시로 넘어갔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각선도본(各船圖本)에 실린 조운선 그림과 조선시대 이용했던 조운선의 모형입니다.




그림에서는 배의 골격만 나타내었지만 모형은 섬세하게 복원하였습니다.
배의 기본 구조 위에 삼판(杉板)을 얹어 용적량을 늘린 것이 특징이며 배 안에다 세곡을 적재했습니다.

초 봄에 이런 조운선 16척이 각 읍에서 보내온 대동미 9,215석(石) 5두(斗)를 싣고 마산포를 출발하여 거제 견내량→고성 사량도→남해 노량→전라도 영암 갈두포→진도 벽파정→무안 탑성도→영광 법성포→만경 군산포→충청도 태안 서근포→보령 난지포→경기도 강화 이고지포를 지나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경 도착합니다.

1886년 일본과 미국의 차관으로 구입한 기선 해룡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세곡이 이 배로 수송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석두창 때문에 번성했던 포구였으며,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계획으로 한 때 동아시아의 군사거점도시이기도 했던 곳이 마산지역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조창 기능도 사라지고 몽고군도 떠나자 조선시대 마산포는 조용한 포구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런 마산포가 다시 도시적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마산창(馬山倉)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산창 건립은 오늘날 마산도시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마산창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집이 들어서고 길이 생겨 마산포가 도시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구도심이라 불리며 도시재생의 대상으로 거명되기도 하지만,
250년 전에 들어선 마산창 주변인 창동, 남성동, 동성동 일대는 아직도 마산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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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21 13: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림을오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역사와 어울어져 정말 멋진 자료인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21 13:50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0.07.22 23:28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009.11.23 06:00

마산도시의 발원지 「마산창(馬山倉)」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 세 번째 도시 탐방에 나섰다.
낯익은 사람, 낯선 사람 모두 30여 명이었다.
평안안과 건너 편 창동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처음 머문 곳이 마산창,
시간은 250년 전 영조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
마산포는 고려시대 조창이었던 석두창과 고려 말 몽고군의 일본정벌 시도로 북적인 적도 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는 조용한 포구였다.
마산포에 다시 사람이 모인 것은 대동미의 수납과 운반을 위한 조창, 즉 마산창(馬山倉) 때문이었다.

조용했던 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정기시장이 섰고, 전국의 다양한 상품들이 몰려왔다. 조창과 관련있는 관원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도 마산포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과 마산포 인근주민들의 왕래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민가가 들어섰다.
동성·중성·오산·서성·성산·성호 등 지금도 동명으로 사용되는 6개리가 그 때 형성되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다.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마산창과 유정당〉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경남지역 두 조창 중 하나다.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우편물취급소로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이다.

 
<마산창이 있었던 시기의 위치도 / 제일은행 자리에 유정당이 앉아 있었고 남성동 성당과 이프 등이 있던 곳은 해안공지, 남성동우체국 자리는 바다였다>


마산창의 본당은 「유정당(惟正堂)」이라 불렀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두 글이 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다. 김이건의 詩 중 양창(兩倉) 혹은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한다.


           
漕倉 惟正堂                朴師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漕船歌                    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웅장했고 시공 수준이 높아 섬세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니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원도에 의하면
유정당은 현재의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고 마산창의 정문은 현 중화요리점 북경성 자리, 거기서부터 남성동 성당까지는 해변공지, 남성동우체국 부지가 서굴강 즉 바다였으니 당연히 마산 앞바다가 보였을 것.
기가 막히는 그림이다.

아쉬운 것은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조창부지는 1910년대 초 일본인들에 의해 세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지면서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유정당은 그시기에 헐렸다. 지어진지 150년 후의 일이다.
1918년,
그 자리에는 벽돌조 1층 근대식 건물의 조선식산은행이 들어섰고 이 건물은 현재의 건물을 짓기까지 사용되었다.
지금의 큰크리트조 제일은행 건물은 1970년대에 지었다.


 <위는 유정당 / 가운데는 1918년 건축한 조선식산은행 / 아래는 현 제일은행>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쓴 『마산항지』에 의하면 개항 직후인 20세기 초,
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이 많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는 창동이라는 지명은 해방 후에 생겼는데 조창과 관련한 송덕비로 추정되는 이 석탑들 때문에 일제기에는 이곳을 석정(石町)이라 불렀다.

마산창에서는 8개 읍, 즉 창원·함안·칠원·진해(지금의 진동)·거제·웅천·의령 동북면·고성 동남면에서 보내온 대동미를 수봉(收捧)하였다.
모두 9,215석(石) 5두(斗)였다.
초 봄에 마산포를 출발한 조운선은 거제 견내량 → 남해 노량 → 전라도 영암 갈두포 → 진도 벽파정 → 무안 탑성도 → 영광 법성포 → 만경 군산포 → 충청도 태안 서근포 → 보령 난지포 → 경기도 강화 이고지포 → 한강 마포에 있는 경창(京倉)에 6월 하순 경 도착하여 임금께 세곡을 바쳤다.

사용된 조선은 판선(板船)이었고, 조세징수와 감독을 관장한 도차원(都差員)은 창원부사, 영운차사원(領運差使員)은 구산첨사였다.

조선(漕船)이 떠날 때는 풍악을 울리고 선원들에게 술을 대접했으며 대포를 쏘아 장도(壯途)를 축하했다.
그 축하의 자리가 지금의 남성동성당 터 정도 아니었을까?

                                 <매립이전 마산포의 위치도 >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올드시티(Old City)의 정체성과 한 도시공간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말 없는 몸짓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탐방이었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
무심한 길과 표정 없는 건물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그것들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끝>


                <부림시장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함께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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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부인권 2009.11.23 07: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은 옛것을 뜨올릴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창원시는 그런 그림 자체를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개발이란 이름은 사람의 추억을 파괴합니다.

    • 허정도 2009.11.23 08:37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역사문화 자산은 마산이 많은 편이죠.

  2. 유림 2009.11.23 08: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역시 선배님 이시네요
    제 글에 조금 엮어 두겠어요

    반가웠어요

    북마산 탐방에 오실거죠?
    선배님 이야기 듣고 싶네요

    • 허정도 2009.11.23 10:59 신고 address edit & del

      즐거웠습니다.
      북마산 탐방, 당연히 참석해야죠.

  3. 林馬 2009.11.23 19: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요?
    헐고 부수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자산을 찿아 보존하여 역사성을 자랑으로 여기며
    관광자원으로 삼는 것이 더 나은 지역사랑이 될것이요.
    시민이 먹고 사는데도 더 기여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모델을 어제 벌교와 순천만을 둘러보고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 왔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늦가을 순천만, 환상적이죠?
      매립해 산업단지 만들려 했을 때 시민들이 힘을 합해 살려놓은 갯벌, 지금은 순천의 보물단지가 된 것으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4. 김정수 2009.11.23 2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대단한 마산의 재발견입니다.
    탐방대에 회원가입해놓고 한번도 못갔네요.
    그날 은행나무단풍을 찍고 있었지요.
    이 앞주도 그랬고...
    12월에는 시간내서 가봐야겠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08:2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도 계획되어 있다니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 이은진 2009.11.24 13:0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도와 같이 놓으니,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 프린트 해둘려고 하니,
    하는 방식이 없군요.
    아쉽습니다.

    요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는데
    그저 그리스 부근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인데
    전세계의 사람들이 읽고
    관광을 가고는 하는군요.
    우리와 지형이 비슷한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한 곳에서
    우리도 발굴하면 많은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09.11.24 17: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프린트해서 드리겠습니다.
      올드시티의 장점을 살린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게 참 많은 도시입니다.

  6. 김판균 2010.01.07 12: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무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산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가진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강과 바다가 접하며, 삼면이 산을 이루고, 바다엔 돝섬이 파도를 막아주니...

    저의 어릴적 기억으론 마산이 전국 두번째가는 어시장으로 알고 있으며,
    당시 마산포구엔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을 하고, 진해,거제 외 남해안일대 고깃배들이
    수없이 드나들던 곳...청과시장이 같이 있어 창원,진동,함안 외 지역의 농산물이 전부
    마산으로 모였던 그런 도시가 마산인데...
    어쩌다가...지금의 마산으로!!!!!!!!!!!!!!!!!!
    도시 이야기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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