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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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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00:00

살아있는 박물관 '근대산업유산' 재생


- 살아있는 도시박물관 -


두 사진은 일본 키타큐슈 모지항에 있는 주차장 벽체 사진입니다.
위의 사진은 주차장 내부에서 찍은 것이고, 아래 사진은 외부에서 찍은 겁니다.
원래 공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벽만 남겨 놓았습니다. 홀로 남은 벽체가 쓰러질까봐 철골로 보강하면서 그걸 디자인 요소로 삼았습니다.

나는 이 벽체를 보는 순간, 그들의 도시개발 수준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모지항의 오래된 과거, 그 긴 시간의 궤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래된 건 모조리 헐어내고 새걸로 바꾸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새 담장보다 효율도 떨어지고 돈도 더 많이 들었을텐데 이렇게라도 모지항의 역사유산을 살리려는 그들의 자세를 배울만 하지 않습니까?

문화든 역사든 시설이든, 지역자산을 도시발전에 이용하려는 노력이 이곳저곳에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남 앞에 내놓을만한 것이 있으면 어떤 내용이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설화나 전설까지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황과 문화와 역사는 도시마다 다른데, 각 도시가 내 놓는 콘텐츠들은 대개 엇비슷합니다. 의도와 방법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유수한 도시들이 오래된 산업시설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한 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기능이 저하되거나 정지된 다양한 산업시설들을 문화관광자원으로 재생시키는 작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개발과 건설’이라는 기존의 틀을 벗고 ‘보전과 재생’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의도인데 역사가 깊은 도시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근대산업유산재생’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새로운 시도가 세계적으로까지 지목받는 이유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했던 산업시설의 재생이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시대정신에 부합될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사람의 감성을 일으키는 특수한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쇠락해가는 도시를 회생시키는 역할도 톡톡히 합니다.

가까운 일본에서 유난히 이 시도가 많았습니다. 위의 사례뿐 아닙니다.
일본열도의 도시재생시도는 위로 삿포로맥주공장에서부터 아래로 나가사키전찻길에 이르기 까지 방직공장, 군수창고, 광산, 항만, 운하, 심지어 마을길까지 다채롭고 풍부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이 여관마을 쯔마고와 관광휴양지 유후인, 기타큐슈의 모지항과 요코하마의 미나도미라이21까지 탄생시켰습니다.

돈 있고 마음 있으면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을 앞질러 만들 수 없습니다. 남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서부개척시대의 술집 따위까지 함부로 철거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의 정책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어느 나라할 것 없이 도시근대화는 공장, 항만, 수도, 교통, 창고 등의 산업시설들이 들어서며 진행되었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시내 이곳저곳에 흔적으로 혹은 사진으로 남아있지만 양과 질에서 다른 도시에 뒤지지 않는 근대산업시설들이 한 때 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편리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별 생각 없이 그것들을 없애버렸습니다.

마산과 떼 놓을 수 없는 단어를 하나들라면 ‘근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세계사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된 ‘근대’였지만 ‘근대’를 빼고는 문화와 역사뿐 아니라 마산정신까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산의 '근대’ 는 마산역(현, 중부경찰서 앞)에서 삼랑진을 거쳐 경부선

으로 연결되었던 마산선 철로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경부선과 시기를 함께한 마산선 철로 개통(1905년)은 이 도시를 일약 전국무대에 드러냈습니다.

마산선 개통 20년 후(1925년)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기 위해 건설된 경전선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항선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마산시내 한 복판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철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마산시민의 애환이 서린 몇 안 되는 근대산업유산 중 하나입니다.
이 임항선을 철로로서가 아니라 마산의 역사로, 문화로, 관광자원으로, 나아가 마산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주장되었던 일입니다.

개통 80년이라는 긴 시간이 이곳을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움직이는 도시역사’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가깝게는 광주, 멀게는 뉴욕과 파리에서 ‘폐선 도심철로의 공공적 가치’의 결과를 이미 증명했습니다.

마산의 거리거리에서 확인한 여러 시설들, 그 방치되고 있는 역사의 자취와 현장들을 다시 살려내어야합니다.

도시는 역사를 담는 그릇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성숙한 문화의식이 도시의 질을 높입니다.
지금의 우리와 다음의 우리가 모두 행복한 도시는 새 것과 큰 것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Old City의 경쟁력은 Old City의 특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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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정건 2010.06.23 15: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 한일합섬 공장을 일부라도 보존을 하지 못 한 것이 아쉽네요, 그 넓은 부지에 기껏 아파트라니

    • 허정도 2010.06.23 15:42 신고 address edit & del

      한일합섬 부지 개발 때 섬유박물관이라도 남겨놓아야 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만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도시 이곳저곳에 아쉬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2. 옥가실 2010.06.24 09: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글은 매우 빛나는데,
    현실은 매우 암담합니다.

    새 시장이 취임하면 좀 나아지려나요?

    • 허정도 2010.06.24 10:33 신고 address edit & del

      글쎄,,, 기대하면서 기다려 봅시다.

2009.11.02 01:00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현 마산의 무학소주도 일제기였던 1929년 설립한 소화(昭和)주류주식회사에 그 뿌리가 닿아, 일전에 창립8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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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에 설립된 소화주류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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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당시 주조방식을 생각해 보면, 술의 질은 물맛과 기후 그리고 양질의 쌀이라는 세 가지로 결정되었을 텐데 마산은 그 중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에는 각 지역마다 유명한 전통주가 많았다.
그 중 일본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는 14세기경에 시작된 최고급술 나다자케(灘酒)가 있었다.
명실 공히 당시 일본 최고(最高) 최고(最古)의 술이었다」


1931년,
우리로서는 기억도 하기 싫은 만주사변을 일제가 일으켰다.
전장에 나섰던 조선과 일본의 젊은이들을 위해 공급된 술은 주로 조선 땅에서 담당했고, 조선 각지에서 생산되던 모든 술들이 공급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술들 중 마산 술의 향과 맛이 최고라면서 마산 술을 ‘조선의 나다자케’라고 부르면서 즐겨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마산 술이 만주에 까지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술의 도시’라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말기 바란다.
그것은 곧 마산이 맑은 물의 도시요, 기후가 좋은 도시요, 좋은 쌀이 생산되는 비옥한 땅이라는 뜻이다.
한 때 마산이 그렇게도 살기 좋은 도시였다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 꽃의 도시 마산 -

‘꽃의 도시’는 무슨 말인가.

그 옛날,
마산의 봄은 지금의 문신미술관 부근 환주산 일대를 비롯해 시내 전역에 벚나무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흔히 일본인을 통해 이 땅에 벚나무가 들어왔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마산에는 벚나무가 많았다.

시내의 가로수는 경술국치 이전인 1908년에 마산이사청(현재 의미로는 시청)에서 심었는데 그 중 창원천변의 벚꽃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창원천은 대곡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으로 전 마산시장 관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현재 문화동인 이 일대의 지명을 사쿠라마찌(櫻町, 벚나무동네)라 불렀으니 벚나무의 위세를 알만하지 않은가.

‘술과 꽃의 도시’ 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로 1937년 마산부가 만든 관광홍보용 리플렛 「관광 마산」의 표지가 있다.

거기에는 마산을 둘러싸고 있는 무학산과 마산앞바다, 그 가운데 두둥실 떠있는 돝섬, 그리고 마산만을 통해 일본을 오가던 큰 배들이 그려져 있다.
바로 그 옆에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식 술통과 함께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을 묘사하여 마치 마산을 꿈의 이상향처럼 소개하고 있다.


                    <1937년 마산부가 제작한 리플렛 '관광의 마산'>


일제기 마산에서 활동을 많이 한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당시 마산의 술과 꽃을 찬양하며 노래하던 시구(詩句)를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인들이 부른 노래라 달갑지는 않으나 당시 마산의 분위기를 알 수 있어 소개한다. 번역은 경남대 배대화교수가 하였다.

꽃의 마산이냐 마산의 꽃이냐            花の馬山か 馬山の花か
가을 깊어가는 달의 포구                  秋は冱えたる 月の浦

술의 마산이냐 마산의 술이냐            酒の馬山か 馬山の酒か

꽃도 술술 피어나고 물은 용솟음치네  花もさけさけ 水はこんこん


                            <1929년경 창원천가에 만개한 벚나무>

『마산현세록』이라고, 일본인이 쓴 책이 있다.
1929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목차에「술의 마산」과 「꽃의 마산」이라는 항목이 들어있어 ‘마산의 술과 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창원천 벚꽃은 4월 7일경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일-11일에 70% 개화(開花)하고 13일-14일부터 만개하여 17일-18일경까지가 절정이었다.
특히 창원천의 맑은 물 위에 떨어져 흘러내려가는 낙화가 일품이었다고 적혀있다.

이 절경을 구경하기 위해 매년 4월 10일을 전후해 부산 대구 대전 서울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임시열차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마산의 봄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시내 전역이 붐볐다.
진해 벚꽃보다 수 십 년 전의 일이다.

맑은 물, 맑은 공기, 아름다운경치.
이 도시의 자랑은 영원히 지나가버린 한 순간의 우연이었을까?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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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3 20: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09.11.03 23:2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 노상완 2010.03.22 2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곳이 창원천이라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하천 상류에 있는 다리가 月見교 경교 월남교
    마산교 순으로 되어 있던데...(중간에 다리가 하나 더 있나? )

    지금 하천 주변의 벚꽃은 너무 초라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심의 쌈지터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허정도 2010.03.23 08:3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창원천 외에 대곡천 등 명칭이 몇개 더 있었습니다.

  3. 우의영 2012.06.10 23: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간장도 유명하죠??

    • 허정도 2012.06.11 14:17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럼요, 간장도 유명했습니다. 지금의 몽고간장도 일본인이 경영하던 야마다장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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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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