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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0. 신문기자 대회

 

120. 신문기자 대회

 

 

1919년에 제등 실(齊藤 實)이 조선총독으로 칙임 후 종래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탈피함으로써 총독부 어용지 경성일보(日文) 외 각 도마다 일인이 경영하는 신문은 있어도 한국민 민영지는 전혀 없었다.

 

제등(齊藤)은 선심이나 쓰는 양으로 우리 민간지로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분자 민원식이 국민신문을, 그리고 시대일보(후에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등으로 어두웠던 근역(槿域) 삼천리의 언론계에 처음으로 일조(一條)의 여명이 비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방방곡곡에는 언론에 갈증 났던 열혈청년들이 솔선하여 각 사의 지국을 설치, 신문기자의 홍수시대를 이루었다.

 

때는 경향각지에 사회주의 사상이 팽창한 시절이라 조선일보 본사 간부급 대부분이 좌경사상에 침윤된 관계로 그러려니와 지국 기자라면 반드시 사회주의자이며 혹은 표면이라도 사회주의자 행세를 하지 않으면 진보사회에서 탈락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배일 감정을 가미한 사회주의라는 점에서 일경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한다. 이 점을 냉철하게 검토 분석하여 보면 묘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 윤곽과 핵심은 다음 신간회부(新幹會部)에 미루어 두기로 한다.

 

1924년에 제1회 전선(全鮮) 일간 신문기자대회가 경성 청년회관에서 이상재 사회로 개최될 때 철도국에서 기자대회에 참가한 수백 명 기자에게 할인 5할로 파천황(破天荒)의 환대도 하였다.

 

이듬해 25년 벚꽃이 만발한 4월에는 마산에서 경남기자대회가 지금은 없어진 수좌(壽座, 옛 시민극장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참가 기자 대부분이 경성대회를 방불케한 조선일보 기자와 사회주의자였는데 초일(初日) 강연회 연사는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 시대일보 편집국장 홍남표(공산당), 개벽사 주필 이돈화이며 임석경관은 제3부 경시 고등과장인데 이날 밤 안재홍 1명만 1회의 주의를 받았을 뿐 무사히 마쳤다.

 

3일째는 사회주의자 중에서 명하였던 김해 인동철의 사회로 회의한 뒤에 분과별로 회의를 하였으나 이날 임석이 거부된 고등계 형사들의 초조함을 가위(可謂)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마산대회 뒤 군북에서 회의를 가졌었다. 동아일보도 경남지국의 기자만으로 마산에서 간담회라는 명목으로 개최하였는데 참석자는 사장 송진우, 편집국장 이광수 등이었다.<<<

 

 

<19241회 전선(全鮮) 일간 신문기자대회가 열린 경성 청년회관(현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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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향토의 교통도(鄕土の交通圖)>

1932년 / 마산공립보통학교 / / / 鄕土の硏究 / 경남대학교 박물관

 

 

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필사본으로 당시 마산상황을 정리하여 간행한『향토의 연구(鄕土の硏究)』에 수록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입체형식으로 그린 일종의 조감도인데 당시 마산의 도로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제기 마산 이야기 중 많이 등장하는 월포해수욕장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 이 지도의 자랑입니다.

월포해수욕장의 위치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이 많습니다만 이 지도를 보면 해수욕장의 위치가 신포동 매립지 쪽이 아니라 제2부두에서 중앙부두 쪽(현, 쌍용 시멘트 사일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어 달 전, 제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배두이 선생님에게서 월포해수욕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주 어렸을 때, 흐릿한 기억으로 너덧 살 때였을 거라 했습니다. 현 장군교 인근에 집이 있었는데 가끔 해수욕장에 나간 기억이 난다고 하면서 위치는 전 마산시의회 바로 아래였다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기억과 이 지도에 나타난 위치도 동일합니다. 맑은 물에 반짝이는 금빛모래의 잔상이 지금도 선생님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월포해수욕장과 관련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먼저 1931년 7월 19일 자 3면입니다. 아래 기사가 당시 신문의 원본입니다.

『마산 월포의 해수욕장 개시』라는 큰 제목 아래 「욕객에겐 긔차임도 할인, 아동 수영소도 별설」이라는 작은 제목이 있으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후와 공기가 온화하고 명미하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마산 월포해수욕장이 개시되었다. 지난 10일 오후 1시 마산신사(현 제일여고)에서 부윤(현, 시장)을 비롯한 5-60명의 관민이 모여 월포해수욕장의 개장식을 마쳤는바 연일 비가 계속되었으므로 해수욕장은 자못 한산하여 있던바 지난 15일부터는 욕객이 모여들어 번창한 중에 있다. 특별히 아동수영소를 별립하였으며 각지의 욕객을 흡인하기 위하여 욕객에게는 기차임금까지도 할인하는 동시에 시내버스를 욕장 입구에 까지 운전하는 중인바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수질과 모래 및 공기 모두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하여 있으므로 금년 하긔(여름)에도 자못 번창할 것을 예측한다고 한다」

해수욕장의 개장식을 신사(神社)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다른 기사는 1934년 7월 5일 자 5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당시 기사의 원본입니다.

 

『때 만난 마산월포해수욕장』이라는 제목의 사진기사인데, 내용은 「여름의 바다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떠들썩거리는 판인데 마산 진해 해수욕장에도 벌써부터 남조선 각지에서 욕객이 모여드는 판이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 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하여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 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위 두 기사를 보아 월포해수욕장은 당시 최고의 여름 휴양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월포해수욕장은 중앙부두 건설이 시작된 1936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 이 지도에는 각 동(당시는 町)과 주요 건물이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약도 형식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도시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는 아닙니다.

신마산 부두에서는 대판과 고베 등 일본으로 가는 항로가 있고 마산포(원마산) 부두에서는 진해와 부산으로 연결되는 항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2012/10/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2/11/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5) - 강점제3시기 

2012/11/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6) - 강점제3시기 

2012/11/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7) - 강점제3시기

2012/12/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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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마산을 바꾼 '시구개정사업'>

1920년대 마산의 도시 변화는 회사령 폐지로 시작된 산업 변화와 중앙마산의 형성 및 매립, 그리고 시구개정 사업으로 인한 원마산의 도로망 확산과 경남선 철도 개설 등이 큰 흐름입니다.

1923년 9월 1일 동경과 요코하마를 비롯한 관동지방에 대규모 지진, 즉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에 돌연히 동경과 요코하마 및 관동지방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가옥을 비롯한 지상시설물을 도괴(倒壞)시켰을 뿐 아니라 해일(海溢)과 3일간 계속된 대 화재로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망91,344명 행방불명13,275명 부상51,074명 가옥전소38,090채 가옥반소517채 전궤(全潰)83,819채 반궤(半潰)91,233채 유실1,390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동경의 피해가 가장 커서 全시의 44%가 소실되고 249만의 인구 중 158만 이상이 재난을 당했습니다.
특히 이 소란 중에 한국인이 난동을 부린다는 낭설이 돌아 무차별로 학살되는 비극까지 겪었습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은 일본 전역에 도시연구의 관심을 고양시켰습니다. 도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예로써, 1924년 동경제국대학에 도시계획 강좌가 개설되고, 같은 해 일본정부 내 도시계획 실무자들로 구성된 도시연구회가 회지『도시공론(都市公論)』을 발간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동경시정조사회가 월간『도시문제』를, 대판시가『大대판』을 발행함으로써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열기는 한반도로 이전되었습니다.

이미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시행되고 있었습니다만 전국 각 도시는 물론 지방도읍들까지 시구개정사업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던 것입니다.

당시의 이런 분위기를 전하는 신문기사 중 마산관련기사를 소개합니다. 모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馬山市區改正 着着進行中(1926년 1월 24일자 4면)
馬山府에서는 馬山府를 大都市로 建設할 計劃 下에 數年 前부터 市區改定에 着手하야 公設市場 及 道路擴張 等에 注力하야 오는바 대정15년도(1926년)예산으로는 2만3천6백원(6천원은 道補助金) 공사비로 萬町(동성동) 新築 警官派出所前부터 午東洞 明太庫間 前까지 230間 거리의 창원군 내서면 산호리를 직통하는 6間 1등 도로공사를 착수할 터인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야 工事完成期는 대정16-17년(1927-1928년)도까지 연장되리라더라.

馬山市區改正 工事는 來年부터(1926년 6월 23일자 4면)
馬山府에서는 市區改正에 留意하고 每年 着着進行中인바 新舊馬山을 連結시켜 大都會馬山을 建設할 計劃 下에서 12萬圓의 工事費를 정하여 市區를 改正하기로 결정되었다는바 工事費 12만원 中 국고보조금이 4만5천원 지방비 보조금이 3만7천5백원 府費編入金 3만7천5백원이라는데 國庫補助金은 方在申請中이라하며 工事着手는 대정16년(1927년)도부터 할 豫定이라더라.

工事着着進行 舊馬山市區改正 (1926년 12월 2일자 4면)
馬山府에서는 朝鮮人多數가 住居하는 舊馬山市區改正이 不完全함을 有感으로 여겨오던 바 最近에 이르러 府 當局으로부터 舊馬山市區改正에 特히 活力하여 온다함은 旣報한바이거니와 馬山府 萬町前으로부터 午東洞 淸水精米所까지 距離6十間 廣 5間半 府外連結道路工事는 近近히 着手하야 15年度(1926년)末內로 竣工하기로하고 土地買收에 府當局에서는 勞力 中이라는바 工費 豫算이 6천원에 不過함으로 土地所有者의 特別한 同情을 希望한다더라.

이들은 모두 이미 1910년대에 시행된 1차 도로개설로 생겨난 원마산의 도로망을 더 확산시키자는 의미의 기사입니다.
신문의 내용을 보면 마산의 도시 규모를 키우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발행된 신문에서는 마산 외에도 경남지방에는 진주․밀양․진영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전국 각지의 소읍들까지 시구개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도시계획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마산도시변화연구과정에서 1920년대 중반기에 마산에서 시행된「구마산시구개정(舊馬山市區改正)」에 관한 자료 일부를 찾았습니다.
시구개정사업으로 시작된 마산의 도시변화는 나중에 별도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당시 마산의 시구개정사업 중 하나인 현 중앙동 일대의 도시계획도면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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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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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