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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17. - 창원부 地乘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17. - 창원부 地乘地圖

 

昌原府 지승지도(奎15423)/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지승은 군사요지인 일부의 관방처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7.0*19.0cm이다.

1책에는 경기도, 2책에는 충청도, 3책에는 경상도, 4책에는 전라도, 5책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6책에는 함경도와 강원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구도와 내용은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필사본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제작 시기는 빨라도 177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면이 나타나 있다.

중심이 되는 읍성을 지도 중심에 크게 배치하고, 주변에 산세, 물길, 도로망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북쪽방향으로 칠원계에 면하여 茂陵山이 있으며, 아래로 철마봉과 백월산, 천주산이 있으며,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堀峴이 있다.

서쪽 방향으로 산은 두척산과 성황봉 및 고운대가 표기되어 있다. 고개길은 함안방향으로 伊里峴, 구병영성에 내서로 가는 방향에 斗尺峴이 있다.

동쪽 방향으로 전단산과 김해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露峴이 있으며, 남측방향 웅천으로 가는 방향에 장백산이 있다. 읍성 아래 남측에서 반룡산이 합포만에 면하고 있다.

 

읍성의 배치를 살펴보면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대문이 설치되고, 굴현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성내를 관통하여 남측으로 흐르고 있다. 건물로는 衙舍가 3동, 客舍 1동, 倉舍가 1동이 있으며, 중앙 부분에 方池를 두고 蓮亭과 四美堂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 주변 건물로는 전단산 아래 봉림사 자여역이, 웅천가는 길목에 안민역이 있다.

향교는 서면 구병영 인근에 있으며, 서원은 고운봉 아래 배치되어 있다.

해안변에 창사 및 선소와 월영대가 있다.

사찰은 무릉산 아래 영암사, 백월산 아래 남백사, 서쪽 두척산 뒤로 광산사가 있다.

봉수는 내포향에 있는 여포봉과 두척산 이래 성황봉 2개소가 나타나고 있다.

주요 나루터로는 밀양으로 향하는 낙동강변에 孫津이 있다.

 

주요 도로망을 살펴 보면

북측방향 도로는 굴현을 지나서 북면 온천으로 가는 길에 우측 방향으로 백월산(420M) 앞 월백리 마을을 통과해 밀양으로 향하는 나루터 孫津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며, 조금 더 지나 무릉산(556M)을 끼고 좌측 방향으로 해서 칠원으로 가는 길과 우측으로 철마산(지금의 마금산 280M)을 돌아 영산으로 향하는 나루터로 향하는 길이 있다. 지금의 길에서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측 방향의 길은 읍성 동문을 통과해 동읍을 지나, 진례로 넘어가는 고개인 露峴을 거쳐서 김해로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남측 방향의 길은 현재의 창원 중심지를 통과해서 안민고개를 넘어서 웅천으로 향하는 길이 나타나 있다.

서측 방향으로 가는 길은 대략 두척산을 경계로 내서면으로 향하는 길과 외서면(구 마산 시가지)방향으로 향하는 길로 나누어 진다.

구병영이 있는 합성동을 지나 석전동에서 길이 나누어져 회성동을 지나 중리를 거쳐 칠원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좌측으로 꺽인 길은 내서읍을 통과해서 마산대학교 앞 신당고개(伊里峴) 넘어 함안 산인으로 가는 길이 있다.

석전동에서 아랫방향으로 나타난 길은 양덕을 지나 어시장을 통과해서 신마산을 거쳐 밤밭고개(栗峴)를 넘어 진동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또한 중리에서 남측으로 향한 길은 감천을 지나 쌀재고개를 넘어 현동에서 합류되는 길이다.

 

창원부 내의 물길(하천)을 살펴보면

크게 읍성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 2방향에서 흘러내려 봉암만에서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연결된다. 당시의 하천은 약간의 선형의 개선은 있었지만, 현재의 하천과 큰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봉암갯벌에서 좌우로 창원천과 남천으로 구분되어 흐르고 있다. 좌측의 창원천은 차상사거리에서 좌측의 내동천과 합류되는 분기점이다. 지도상에서 성곽 좌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이 내동천으로 볼 수 있다. 내동천의 시작점은 소계동 소계천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창원천이 여기에서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파티마 병원을 지나 대원교 지점에서 촤측의 하남천과 창원천 본류가 합류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하남천의 상류는 현재 도계동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지도상 성내을 통과하는 하천은 천주산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 하천으로 볼 수 있으나, 현재 인 하남천으로 판단되나, 현재 창원초등학교 옆에서 흐르는 하천은 성밖에서 좌측으로 굴절하여 내동천과 합류되는 형태이다.

이것은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하천의 선형을 개선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동측부분을 하천을 살펴보면 현재의 旃檀山(현재의 정병산)을 기점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창원천으로 볼 수 있다.

우측 하단의 하천은 현재 공단을 가로지르고 있는 南川이며, 바로 위의 하천은 토월천으로 판단된다. 물론 당시의 물길 선형은 도시 조성시 직선화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승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내면, 동면, 북면, 서면, 남면

5

자연지리

산천, 고개

두척산, 고운대, 무릉산, 천주산, 백월산, 전단산,반룡산, 장백산

두척현, 이리현, 굴현, 노현

12

島嶼, 나루터

손진

1

인문지리

읍성

아사3동, 객사, 창사, 시미당, 연정, 4대문

11

교육

향교, 서원

2

사찰

광산사, 영암사, 백월사, 봉림사

4

역원, 烽燧

자여역, 안민관,

여포봉, 성황봉

4

기타

倉舍, 船所, 古兵營, 월영대

4

 

전체 지도의 구성의 특징은 타 지도에 비해 부내 도로망을 상세히 표현하였다. 인접 군현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나타내었다. 지금의 도로망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地圖地志에는 지도상에 표기 하지 못한 지역사회, 경제, 군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7,704호

- 인구 : 28,282명 (남자 11,890명, 여자 16,938명)

 

군병

- 各色軍 : 3,846명

- 京各司諸色軍 : 1,213명

- 監營屬 ; 285명

- 統營續 : 1,627명

- 右兵營屬 : 837명

- 左水營屬 : 9명 반

- 金海鎭屬 : 1,088명

- 烽軍 : 25명

= 합계 8,930명

8

기타시설

- 烽(燧) 合 13庫, 驛 4庫, 寺 4庫, 倉 2庫,

- 邑城周面 2,004尺

  5

경제

元田沓

- 6,292結11負9束,

(전2,670결80부67속, 답3,622결60부6속)

 

實結

- 4,606속62부6속

(案田1,720결80부7속, 案畓2,855결81부9속)

 

곡물

- 別餉米 : 1,104석 14두

- 元會米 : 38석 8두

- 各樣雜穀 : 1,101석 5두

- 監營米 : 44석, 잡곡 2,319석 14두

- 統營米 : 1,551석, 잡곡 2,477석 7두

- 私賑雜穀 : 3,309석 2두

- 帖價雜穀 : 601석 7두

- 備荒租 : 463석

- 浦項雜穀 : 1,791석 8두

- 華山劃付雜穀 : 3,100석

- 儲置米/저치미 : 486석 6두

- 戰舡價價 : 65석 10두

- 除留米 : 169석 5석, 太 : 1석8부

- 各樣軍作米 : 217석 1두

- 射木作米 : 27석 1두

- 作租 : 151석 2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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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13. - 창원부 조선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13. - 창원부 朝鮮地圖

 

창원부 조선지도(奎16030)/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본 지도는 전라도를 제외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의 고을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목차 부분에 ‘備邊司’라는 도장이 찍혀있어, 비변사에서 보관하며 사용하던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제작시기는 1750년에서 1768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지도는 4.2cm의 方案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안은 縮尺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 모든 고을이 동일한 축척 아래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지도책이다.

동일한 정보는 동일한 기호로 표시하는 범례도 고을의 읍치와 감영·병영·수영,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찰방역, 군사시설인 鎭堡와 烽燧, 稅穀의 저장과 운반을 위한 倉庫 등의 7개 부분에서 모든 지도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일반 고을의 邑治는 붉은색의 큰 동그라미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는 검은색 테두리의 원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각 고을의 監營은 붉은색의 정사각형으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에는 성곽 모양을 표시하였다.

兵營과 水營은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에는 파란색 테두리의 사각형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찰방역의 경우는 붉은색의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하여, 고을의 읍치와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사시설인 鎭堡는 푸른 색 마름모(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통일하였으며, 倉庫는 건물 모양으로, 烽燧는 불이 펴져 있는 봉수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16개 면(運)이 표기되어 있다. 북1,2,3운, 서1,2,3운, 동1운, 동2운 2개, 동3운, 신풍(면), 도하1,3운, 남1,2,3운으로 나뉘어져 16개면이 나타나 있다.

(조선후기에 面 명칭의 다른 표기로 運, 坊, 社 등을 사용하였다.)

중심이 되는 읍성은 읍치를 나타내는 붉은 색 동그라미로 표기되어 있으며, 북측에 주산에 해당되는 檐山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북측방향으로 칠원계에 면하여 茂積山이 있으며, 아래로 철마봉과 백월산이 있다.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堀峴이 있다.

서측 방향으로 구병영성의 진산에 해당되는 청룡산이 있으려 아래로 두척산과 성황봉대가 연이어 있으며, 서2,3운에 걸쳐 匡山, 生蕫山이 이어져 있다. 생동산을 마주한 해안변에 船頭山이 있으며, 이곳에서 남측방향 진해계와 칠원계에 면하여 고개길 大峙가 있다.

동측 방향으로 진산인 첨산에 이어져 염산, 봉림산, 전단산, 불모산이 남측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섬은 합포에 猪馬島(현재 저도)로 표기되었다.

주요 건조물로 읍성 아래 盤倉, 남측 합포에 면한 곳에 海倉, 漕倉이 건물그림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원으로 자여역은 찰방이 파견된 역을 나타내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으며, 이 외에 안민역, 근주역이 있다.

이 외에 구병영, 회원서원이 서1,2운 지역에 표기되어 있다.

주요 도로망은 남측으로 웅천으로 향하는 안민령 방향 길고, 자여역을 지나 김해부로 향하는 길, 굴현을 지나 청룡산을 넘어가는 칠원으로 향하는 길, 남서방향으로 진해로 향하는 4방향 길이 표기되어 있다..

주요 나루터로는 북측으로 낙동강 변에는 분2운 지역에 孫哥津이 있다.

봉수는 남측방향 해안변에 떨어져 잇는 내포에 여음포와 두척산 아래 성황산포 2개가 나타나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북1,2,3운, 서1,2,3운, 동 1,2,2,3운, 남1,2,3운, 도하1,3운, 신풍(면)

16

자연지리

산천, 고개

무적산, 철마봉, 백월산, 첨산, 염산, 청룡산, 두척산, 광산, 생동산, 선두산, 봉림산, 전단산, 불모산

대치, 굴현, 안민령

16

島嶼, 나루터

저마도, 손가진

2

인문지리

읍성

읍치

1

교육

회원서원

1

사찰

-

-

역원, 烽燧

자여, 안민역, 근주역,

여음봉, 성황산봉

5

기타

盤倉, 海倉, 漕倉, 古兵營

4

 

전체 지도의 구성이 매우 간결하다.

먼저 수계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물길과 해안은 청색으로, 산세는 산형으로 방향성만 묘사하고 청색을 채색하여 산세의 흐름을 나타내었으며, 외방에 면하는 주요 간선도로는 적색으로 표기하였다.

몇가지 범레, 읍치는 큰 붉은원, 찰방파견 역원은 작은 붉은 호를 사용하였으며, 각종 창고는 집그림으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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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2. 돝섬의 전설

52. 돝섬의 전설

 

돝섬은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섬, 일명 월영도(月影島)라 부르기도 한다.(행정구역 상 월영동에 속해 있기 때문)

1910년경에는 인가가 불과 7,8호였으나 지금은 20여 호. 아동 10여 명의 초등학교 분교장이 있고, 주민은 대개 영세 어민으로 섬의 동남 비탈에 보리와 채소를 가꾸기도 한다.

멸치 어장막이 있어 신·구마산 어판장과의 사이에 배의 왕래가 잦고 여름 한 때는 낚시꾼들과 피서객들이 득실댄다.

섬의 형상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오리()가 먹이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인도산 코브라가 염소()를 삼킨 것과 흡사하다.

 

일본인들은 이 섬이 일본의 비파(琵琶)와 같다 하여 그 어음(語音)에 비겨 미화(美和)라 했으며 마산만의 공원지로 지정하고 매번 벚꽃 묘목을 심었으나 바다의 염풍(鹽風)관계(?)로 자라지 않아 실패한 적이 있다.

이 섬을 어찌하여 돝섬(猪島)이라 하였는지 이 섬에 얽힌 오랜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김해 가락왕의 총애를 받던 미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홀연 그 흔적이 없어졌다.

왕은 낙담 번민한 끝에 사람을 사방에 파송하여 상금을 걸고 수색을 벌였는데, 우연히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가 골포(骨浦, 마산의 古名) 앞바다의 조그마한 한 섬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절색 미녀를 봤노라 하기로 왕에게 상주했다.

왕은 급히 특사를 파견하였더니 과연 이 섬의 등()에 미희가 배회하고 있음을 보고 환궁하기를 재촉하였으나, 미희는 눈을 부릅뜨고 홀연 금빛의 늙은 도야지로 화하더니 일성(一聲) 포효와 동시에 먹구름이 충천하는 가운데 두척산(무학산) 상봉의 큰 바위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특사는 기급하여 왕에게 자초지종을 상주했다. 왕은 의심이 덜컥 났다. 당시 백성 가운데 온데간데 없어지는 예가 자주 생겼는데 밤마다 금도야지가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가되, 특히 어린 계집아이나 젊은 부녀자를 좋아한다는 풍설이 퍼져서 왕의 귀에까지 들린 터였다.

왕은 느낀바 있어 군병을 동원하여 두척산의 바위를 포위했다.

활과 창을 비껴들고 일제히 산이 진동하는 고함을 지르며 포위망을 압축, 바위에 육박해 가자 홀연 암상(岩上)에 염연(艶姸)한 자태의 미희가 나타났다.

군병들은 엎드려 환궁할 것을 청하자 순간 늙은 도야지로 화하여 영악한 형상에 날카로운 이빨로 군병에게 달려들 기세라 군병들은 활, , , 돌로써 쏘고 찌르고 내리쳤다.

드디어 도야지는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한줄기 요운(妖雲)이 아지랑이 같이 그 섬으로 뻗어 사라지고 말았다. 바위 틈 굴 안에는 인골이 수북히 쌓여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케 했다.

그 후 그 섬 근방에는 밤마다 도야지 우는 소리와 함께 괴이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신라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골포의 산수를 즐기려고 월영대에 향학(鄕學)을 설치하고 기거하던 무렵 어느 초승달 밤에 이 괴이쩍은 현상을 보고 그 섬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괴이한 광채는 별안간 두 갈래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고운 선생이 그 섬에 건너가 화살이 꽂힌 곳에 제를 올린 뒤로는 그러한 현상은 없어졌다 한다.

이 섬이 바로 돝섬(猪島)인 것이며 고운 선생이 제를 올린 곳(위치 미상)에 기우제를 올리면 영험이 있다 하여 후세에 오랫동안 그 풍습이 이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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