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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교장들의 학교건물에 대한 생각>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잡지 편집진에서 국내의 중요한 학무당국자와 전국 각 학교 교장들에게 당시의 학교시설에 관해 세 가지의 질문지를 보낸 후 이에 응답한 학교관리자의 의견을 게재한 것입니다.

마산에서는 일본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와 한국인들이 다녔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의 교장이 이 질문에 응답하였고, 그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월영초, 위)와 마산공립보통학교(성호초, 아래)>


책에 실린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질문
1) 재래학교의 건축에 대한 감상
2) 장래 지을 학교 건축에서 개선해야할 점
3) 기타 학교 건축에서 눈에 띄는 점

■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교장 田坂松太郞(전판송태랑)의 답

1) 복도의 넓이는 적절하지만 통풍과 채광에 결함이 적지 않으며 水害를 입지 않는 장소를 선정하여 건축해야 될 것임.
2) 위 1)의 결함을 제거할 것.
3) 외관보다는 위생 및 내구성을 고려하여 건축할 것.

■ 경남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교장 上原榮(상원영)의 답

1) 
① 종래의 교사(校舍)는 복도를 6척(1.8m)으로 하여 좁으니 가능하다면 9척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함.
② 단층건물 복도 또는 2층 건물 복도는 흙 복도로 하고, 교실마다 출입구를 설치한다면 비상시에 매우 편리할 것임. (9척 중 안쪽 7척은 흙 복도로 하고, 2척은 높이 5寸 내지 7寸의 테두리로 함.)
③ 신발장은 복도와 교실 경계를 이루는 창 아래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임.
④ 창의 유리를 끼우는 방식은 나무포테(木ポテ, putty)는 쓸모가 없음. 아이들이 유리를 쉽게 빼낼 수 있어서 관리가 곤란함.

2) 근래 교사(校舍) 건축에서 일본이나 조선에서 다 함께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쓸데없이 건축미를 다투는 경향이 있는데 현재의 재정을 감안하여 매우 주의할 점이라고 생각함.
나의 교사건축에 관한 이상 안은 아연즙(亞鉛葺)구조가 적절하며 1평에 70원으로 충분할 것이고 내구적이라고 봄.

3) 교사를 증축할 경우에는 도부군(道府郡)에서 먼저 당사자인 학교장의 의견을 청취한 후 설계에 착수해야 함. 지금까지 가끔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고 설계하여 건축했기 때문에 사용상 불만스러운 점이 적지 않음.
교사건축에 관한 이상과 희망이 더 있지만, 지금은 단지 그 일부분만 답함.


두 답을 놓고 보면,
현 월영초등학교 교장에 비해 성호초등학교 교장이 훨씬 상세하게 학교시설의 상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질문과 답 만으로 당시 학교건축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좀 어렵다고 봐야겠죠? 

아무튼 이 기사를 통해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을 편찬하는 건축학자나 전문가 등 건축계 인사들이 당시 변해가는 근대건축사조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많았던 것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성호초등학교 교장의 2)번 답에서 "근래 교사(校舍) 건축에서 일본이나 조선에서 다 함께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쓸데없이 건축미를 다투는 경향이 있는데....."라는 대목을 통해, 당시 변해가는 건축계의 상황을 잘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 간단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건물의 사용과 관리의 책임을 진 학교장은 건물 기능과 관리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2. 형태 위주의 건물이 비경제적이고 관리에도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3. 설계자가 사용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 소학교의 모든 교장들도 마산의 두 교장선생님과 마찬가지로 건축물의 구조․기능․공사비․관리의 편리함 등의 측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떻습니까?
84년 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보통교육을 담당했던 일본인 교장들의 생각말입니다.

아쉽다는 생각도 드네요.
두 학교건물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당시 교육환경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좋은 사료가 되었을텐데 말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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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성호, 창신, 근대식 학교가 서다>

마산 최초로 근대식 학교가 섰습니다. 
창원군에 있던 소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개설한 공립소학교로,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입니다. 1901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국인들이 다녔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1904년에 지은 교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교사입니다.



일본인을 위한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은 마산심상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마산포일본인소학교를 세웠는데 1904년 6월 마산심상소학교가 설립되자 합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6년 9월 마산거류민단의 단립(團立)「마산심상고등소학교」로 바뀌었고 1908년 2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지어 준공했습니다.
마산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가 후에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가 됩니다.
아래 사진이 1908년에 건축한 마산심상소학교입니다.



이 두 학교 외에 1906년 5월, 마산포 성호리 교회당(현 문창교회)에 독서숙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사립 창신학교의 전신입니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1908년 9월부터 사용하였지만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규학교의 인가을 받은 것은 1909년 8월 19일이었으며 남녀공학이었습니다.

창신중고등학교가 2008년 9월에 개교100주년 행사를 가진 것은 창신이라는 교명을 사용한 날을 창신학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원조와 마산 및 부산․통영․의령․함안 등지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상남동에 양옥을 짓고 낙성식을 가졌습니다.

아래 사진은 개교 후부터 1912년 5월까지 창신학교 초등과 교사로 사용했던 마산포 교회 예배당 건물이며 그 아래는 창신학교 설립인가서입니다.



이런 공식적인 교육기관 외에 원마산(마산포) 주민 스스로 교육기관을 만들었습니다.
1907년 7월 10일 개교한「마산노동야학」이 그것입니다.
노동야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1920년대였는데 마산은 아주 빨랐습니다. 「마산노동야학」은 전국 최초였습니다.

나중에 마산 최초의 주식회사인 '원동상사'의 대표가 되는 민족자본가 옥기환 등이 설립한 이 학교는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를 수리하여 1년 과정으로 한국어․일어․산술․한문 등을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노동야학의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거나 공장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교사의 대다수는 창신학교의 교사와 마산의 청년지식인 및 보통학교 졸업생들이었는데, 무보수였고 교육방침은 억압받는 민중의 각성과 계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신학교 다음으로 설립한 사립학교는 성지학교입니다. 현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1910년 10월 24일 외서면 완월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개항과 함께 일본의 불교도 마산에 들어왔습니다.
1902년 정토종 포교소가 설치되었고 이어서 서본원사 출장소(1903년 3월), 진언종 풍산파 마산포교소(1908년 8월), 일련종(1909년 3월), 조동종 포교소(1909년 8월), 천리교 마산포교소(1910년 4월) 등의 일본 사찰이 섰습니다.
이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마산의 불교신도들에게도 포교활동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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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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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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