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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1910년대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은 ?>

1910년대 초,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직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직업을 보면 그들의 산업도 알 수 있는 것, 오늘은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미 작년 10월 11일자 제27회 글(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에서 일본인 이주 초기인 1902년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을 포스팅 한바 있습니다. 모두 46종류였으며 겸직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8년의 세월이 흐른 1910년경에는 양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업종도 169종으로 다양해 졌을 뿐만 아니라 종사자도 1,821명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시작된 이주로 일본인의 숫자도 많아졌지만 식민지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던 시대상황의 작용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의사․변호사․측량사․치과의사․수의사 등 전문직뿐만 아니라 관리․교원 등의 공직자 그리고 미장과 목수를 비롯한 건설 기술자와 청부업자까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당포․숙박업․목욕업․무역업 등의 서비스업은 물론 소매업․도매업․제조업 그리고 이발사․전화교환수․사진사․표구사(表具師)․대서사(代書士)에다 인부와 작부(酌婦)까지 각양각색의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직업분포는 이 시기에 마산은 이미 전통도시의 옷을 벗고 근대도시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합니다.
이런 현상은 마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가 된 이 땅 모든 도시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1911년 일본인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쓰고 마산에 있던 빈전(濱田)신문점이 발행한 『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에 보면 당시 마산의 일본인들 직업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아래 글입니다.
읽어봐도 무슨 직업인지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옛글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꽤 많이 아는 분들도 해득하지 못한 직업도 많습니다.

관리(官吏) 69명 / 공리(公吏) 10명 / 은행 및 회사원 22명 / 교원 12명 / 의사 8명 / 변호사 1명 / 주류상 6명 / 청물상 4명 / 식염상 1명 / 연초상 2명 / 채자(菜子)상 16명 / 금전대부업 23명 / 금물(金物)상 4명 / 활우(活牛)상 1명 / 약제사 4명 / 수의사 1명 / 치과의사 1명 / 산파 7명 / 무역상 5명 / 청물(靑物)상 1명 / 약종상 6명 / 건구상 2명 / 가구상 1명 / 오복태물(吳服太物)상 5명 / 이물(履物)상 5명 / 고물상 15명 / 초자물(硝子物)상 2명 / 곡물상 33명 / 장유(醬油)상 3명 / 재목상 9명 / 어류상 17명 / 잡화상 56명 / 신탄(薪炭)상 4명 / 회엽서(繪葉書)상 3명 / 육군용달 1명 / 화(糀)상 1명 / 사탕(砂糖)상 3명 / 관힐(罐詰)상 1명 / 미숀기계상 1명 / 서적상 2명 / 우육상 4명 / 도기상 6명 / 건물(乾物)상 3명 / 우유상 1명 / 반물행(反物行)상 1명 / 지류(紙類)상 2명 / 석유상 1명 / 여인숙 및 하숙 16명 / 질(質)상 9명 / 미증화상 / 총포화약상 2명 / 선구상 1명 / 어구상 2명 / 채자(菜子)소매 53명 / 소간물(小間物)상 2명 / 시계상 5명 / 사립물(仕立物)상 5명 / 주류소매 4명 / 계육(鷄肉)행상 1명 / 잡화소매 30명 / 야채소매 24명 / 두부소매 10명 / 램프행상 1명 / 온돈(饂飩)소매 1명 / 어류행상 13명 / 우육소매 1명 / 석유행상 1명 / 매약(賣藥)상 1명 / 화본(貨本)상 2명 / 식목(植木)상 1명 / 우피(牛皮)상 1명 / 잡화행상 2명 / 포모(蒲鉾)상 3명 / 과물(果物)상 4명 / 피복인구입업(被服人口入業) 1명 / 하수문(荷受問)업 4명 / 운송업 8명 / 철공업 1명 / 토목건축청부업 29명 / 좌관(左官)청부업 1명 / 주류양조업 9명 / 장유(醬油)양조업 5명 / 탁주양조업 2명 / 와(瓦)제조업 1명 / 연초(煙草)제조업 5명 / 차(車)제조업 1명 / 粉접구(粉摺臼)제조업 2명 / 빵제조업 1명 / 조선업 2명 / 단야옥(鍛冶屋)업 4명 / 페인트업 3명 / 염물(染物)업 2명 / 세탁업 4명 / 활판인쇄(活版印刷)업 3명 / 양복사립(洋服仕立)업 4명 / 지물(指物)업 7명 / 화공(靴工)업 1명 / 석판인쇄(石版印刷)업 1명 / 세장(洗張)업 3명 / 석감(石鹼)제조업 2명 / 통준(桶樽)공업 5명 / 관힐(罐詰)업 2명 / 첩(疊)공업 4명 / 승(繩)제조업 6명 / 제등장(提燈張)업 2명 / 철력세공(鐵力細工)업 3명 / 삼미선(三味線)장업 2명 / 사진사 5명 / 표구사 3명 / 탕옥(湯屋)업 8명 / 이발업 14명 / 여발결(女髮結) 14명 / 필(筆)제조업 1명 / 인각사(印刻師) 6명 / 철력(鐵力)직 2명 / 좌관(左官)직 14명 / 단야(鍛冶)직 4명 / 목만(木挽)직 54명 / 화직(靴職) 2명 / 대공(大工)직 103명 / 선대공(船大工)직 7명 / 석공직 65명 / 주괘(鑄掛)직 1명 / 관아용인(官衙傭人) 2명 / 통신(通信)인부 6명 / 우편집배인 6명 / 통공(桶工)직 3명 / 연와(煉瓦)직 1명 / 첩(疊)직 6명 / 활판(活版)직 3명 / 사립(仕立)직 5명 / 죽세공(竹細工)직 2명 / 요리옥(料理屋) 11명 / 음식점업 21명 / 과자(菓子)직 13명 / 입치(入齒)직 1명 / 선원 5명 / 어부 41명 / 주부(舟夫) 11명 / 상가고인복비(商家雇人僕碑) 279명 / 소송대리인 3명 / 유기장(遊技場)업 6명 / 어업 2명 / 농업 15명 / 도수(屠獸)업 1명 / 승려 5명 / 간호부 8명 / 전화교환수 10명 / 관아고인(官衙雇人) 21명 / 신문통신원 4명 / 측량사 1명 / 예기(藝妓) 61명 / 중거(仲居) 20명 / 일고가(日雇稼) 18명 / 생화사장(生花師匠) 1명 / 안마침구술 3명 / 체송(遞送)인 2명 / 대서업 5명 / 토공 20명 / 우차만(牛車挽) 27명 / 인력차부(人力車夫) 40명 / 마차만(馬車挽) 7명 / 요리직 13명 / 중사(仲仕) 32명 / 유예순장(遊藝順匠) 5명 / 작부(酌婦) 21명 / 매복자(賣卜者) 1명 / 잡업 35명 / 대변(代辨)업 2명

어떻습니까? 참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지 않아습니까?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마산의 일본인들,,,,
이 사람들이 활보했던 1910년대 후반의 신마산 쿄마치 입구(지금의 두월동 통술거리) 사진입니다.
거리 풍경으로 보아 무슨 축하행사기간으로 보입니다.

다음 사진은 이 거리의 현재 사진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옛 모습과 똑 같아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일제시기부터 있었던 위 건물이 워낙 멋있다 싶어서 건물주가 옛 건물을 본 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음 사진은 같은 시기의 창원천(옛 마산시장 관사 앞 하천) 부근과 현재 모습입니다.
비슷하긴 합니다만 위치가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기에는 이 다리를 무학교라 불렀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에 이름이 새겨져 있지는 않습니다.
옛 사진은 4월에 찍은 야경 같습니다.
활짝 핀 벚꽃과 거리를 밝힌 가로등(가스등)이 눈부십니다. 화려했던 거리로 보입니다.

 
위 두 사진을 찍은 위치입니다. 노란색이 위 사진, 푸른색은 아래 사진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Trackback 0 Comment 6
  1. 옥가실 2011.06.20 09: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두월동 입구의 쭈구미집 건물이 꽤나 오래된 것이군요.
    지나갈 때마다 그 연혁이 궁금했는데, 고맙습니다.

    • 허정도 2011.06.20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

  2. 장복산 2011.06.20 10: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박사님ᆞ진해국밥이 맛이있던가요? 너무메몰차게 거절을 해서 서운했습니댜 ㅎㅎㅎ

    • 허정도 2011.06.20 17:22 신고 address edit & del

      폐가 될 것 같아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 ^

  3. 신월동 2011.12.02 13: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쭈구미 간판 그자리는 옜날 아시아 다방 자리네요.

    • 허정도 2011.12.02 22:2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런가요?

2010.10.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마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일본군이 이 땅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였습니다만 일본 민간인이 공식적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1884년에 착수한 그들의 공사관(公使館) 신축 때 들어 온 직공(職工) 70여명이 최초입니다.
그 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상인 약간 명이 잠주(潛住)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남산 밑에 일본인 거류구역이 설정된 1885년 후였습니다.

이로부터 10여 년 후인 1894년, 일본 정부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서 일본인의 한국 이주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합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되도록 속히 한국 땅에 이식시키는 일,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계책이다. 한국 땅 이식 사업은 한반도를 개척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기적 대책이다. 한국 땅으로의 이식은 국부의 증진 도모에 크게 족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이권을 차지하는 데도 또한 이 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조선도항자편리(朝鮮渡航者便利) 22편-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국 땅에 이주한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인 거류지가 장차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평정빈부(平井斌夫)와 구관정이(九貫政二)가 함께 1911년에 펴낸『마산과 진해만(馬山と鎭海灣)』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은 개항하던 해에 33호 103명이었으며 이들은 생업 때문에 대부분 원마산(마산포)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1년이 되어서야 부산 등지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인구도 80호에 259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가 개항이후 12년 간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 들의 수 입니다.

년도별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호수

33

70

80

99

95

154

340

677

868

989

1,132

1,548

인구

남자

87

189

160

203

191

359

717

1,233

1,826

2,009

2,360

3,163

여자

16

61

99

130

136

270

531

937

1,393

1,678

1,961

2,778

합계

103

250

259

333

327

629

1,248

2,170

3,219

3,687

4,321

5,941


이 통계를 보
면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인은 불과 77명밖에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03년에 327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04년에는 629명으로 302명이 증가하였고 이어서 1905년에는 619명, 1906년은 922명, 1907년은 1,049명, 1908년은 468명, 1909년은 634명, 1910년은 1,62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개항 당시 103명이던 마산의 일본인이 1910년에 무려 5,941명으로 급증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1905년경부터 시작된 급격한 일본인 증가현상은 1905년 10월 노일전쟁 승리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1906년 2월 1일 마산에도 이사청이 설치되어 종래 창원감리가 행사하던 지방통치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해 9월 1일「일본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마산의 일본거류민회는 「마산일본인거류민단」으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마산일본인거류민단이 발족할 당시의 일본인 거류민 수는 660호에 2,433(남자 1,452명, 여자 981명)명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미곡상을 주업으로 하는 송원조장(松原早藏), 구중감작(久重勘作), 산본호장(山本好藏) 등을 비롯하여 216호 700명이 원마산에 정착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개항 다음해인 1900년 마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송원조장 씨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그가 이주해온지 29년 뒤인 1929년 발간된 '마산현세록'에 실린 것입니다. 나이는 나와있지 않지만 사진으로보아 꽤 젊은 나이에 마산으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마산포(원마산)에 거주했던 까닭은 그들의 주업종인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영업 활동 때문에도 개항 이전부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마산포를 근거지로 삼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 ) 안은 겸직입니다.

무역상 1

중매상 6(4)

약종상 5

잡화 27(6)

술소매 2(1)

도기 (5)

일상잡화 (1)

주물상 (1)

옷가게 3(2)

부엌잡화(1)

양주(2)

담배 (4)

과자상 3(2)

설탕상(2)

석유상(1)

장유상(2)

의사 2

문옥(問屋)1(1)

회사 2

여인숙(1)

야채상 1

두부 1

요리점 1

떡집 2

푸줏간 1

세탁업 1

일고(日雇) 5

예기 1

선원 (1)

목수 15

석공 6

미장 2(1)

철력세공 1

대장간 2

이발관 1

미용실 1

된장 (2)

일용노동 22

토목청부 1

정미상 (1)

식빵 1

대궁(大弓)(1)

페인트칠 1

작부 3

선두(船頭) 3

광업 2

 

러시아 : 호텔업1, 잡화상1

중국 : 잡화상7,잡화행상3

독일인 : 선교사


이 표는 1902년 당시 마산에 거주한 일본인과 그 외 외국인들의 직업입니다. 이들의 직업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그 중 건설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가 50여명이나 되어 새롭게 조성되는 조계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겸직이 많았다는 사실과 직업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이주가 극히 초기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알아보려고 노력해보았습니다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짐작하기로는 문옥(問屋)은 건설관련, 일고(日雇)는 일용노동, 대궁(大弓)은 조선목공, 선두(船頭)는 선박업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뒷날 봉암동 수원지를 건설한 본전추오랑(本田搥五郞), 경찰서와 일본인 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등을 건축한 천해신시(淺海新市) 등의 토목․건축 청부업자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이들은 거류지 내에서 일기 시작한 각종 건설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아래 사진이 본전추오랑 씨와 천해신시 씨입니다.
이런 일본인들이 개항된 마산을 휘어잡았습니다.


당시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수에 대한 통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자료에 나타나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이 시기 마산에 살았던 한국인 인구와 일본인 인구를 나타낸 것이 다음 표입니다.

년도

총인구

일본인

기타

한국인(추정)

출처

1899년

 

103

 

호수 : 2,000여호

香月源太郞, 韓國案內

1907년

11,881

3,219

80

8,582명

손정목, 도시사회경제사연구

1909년

11,022

4,321

 

6-7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1910년

16,657

5,941

52

10000-11000여명

홍경희, 한국도시연구

당시 마산에 거주했던 한국인은 을사조약 전후에 6,000-8,000여명이었다가 1910년 경에 10,000여 명을 조금 넘긴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합친 총 16,000여 명의 마산 인구는 1910년대에 내내 14,000명에서 16,000명 정도로 큰 변화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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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31 10:5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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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