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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7. 청년들의 방역운동

 

127. 청년들의 방역(防疫) 운동

 

 

1920 (원문에는 1929년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정 9년인 1920년으로 추정되어 바로 잡음) 즉 일치(日治) 대정 98월경에 마산시내를 엄습한 콜레라로 인해서 아침에 만난 사람이 저녁이 되면 피병원(避病院, 격리병원)으로나 묘지로 가고 만다.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쓴 이스파니아독감의 맹위에 굴복된 민중들은 환자가 발생하면 약보다 기도하는 것이 만배 이상의 효능이 있다는 미신이, 현대의 예방치료나 과학을 억누르고 집집마다 샤머니즘에 젖어서 밤이나 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여기에 호역(虎疫)의 예방주사 같은 것도 일본인의 병원에는 편협한 민족 감정으로서 고의로 한인 환자에게는 차별을 하고, 심지어는 절명케 한다는 최극단의 유언(流言)이 횡행하여 일의(日醫)의 치료와 시료(施療), 격리 병사의 수용 등을 완강히 거부하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이때에 마산민의소 간부를 중심한 중견 청년들로 결속된 마산구락부 청년회에서는 화급히 마산 호역방역대(虎疫防疫隊)를 편성하여 긴급 동원을 하였는데, 방역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은 한 푼도 당국(일본인 각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당시 청년들의 방역태세를 보면, 본부의 명령에 일사불란 신속 출동으로 적십자 완장의 가운(소독복)을 입고 환자가 발생한 상당 거리를 교통 차단과 동시 석회 소독을 하여 출입제한, 혹은 이 마을 사람이 이웃 마을로 갈 때라도 예방주사 필증을 정시(呈示)치 않으면 통행은 절대로 용인치 않았다.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공동우물과 우물주변을 소독한 뒤에는 부녀자의 접근을 금하고 대원 자신들이 급수 공습하였으며, 각 가호호(家戶戶)의 음료수에 희염산(稀鹽酸)을 타서 먹게 하는 일방 출입문전에 가마니 위에다가 당시 유일한 소독약이었던 석탄 산수(酸水)를 뿌려 반드시 소독한 가마니를 밟고 출입토록 하는 등,

 

방역에 치중하던 이들의 애족심에는 감개무량할 뿐이며, 당시 활약하던 대원들 명단을 기억으로 더듬어 보자.

 

대장 ; 김무경(金武敬, 일명 태권)

대원 ; 이영재, 명도석, 나인한, 김용환, 김용선, 김태곤, 김치수, 김철두, 손문기, 김기호, 김계호, 오호봉, 명상수, 김지철, 이정찬, 김명규, 김형오, 전 석, 황태현, 이우문, 최대규, 김기성, 여병섭, 황장오(이상 전원 고인), 최철용(무순)

* ; 이상 명단 중에서 누락된 분이 있다면 양해 바람<<<

 

 

<마산민의소 회관이 있었던 옛 시민극장 / 지금은 다른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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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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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30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같은 해 11월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제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4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이 소유가 되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한 공동조계 성격이었지만, 1908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량진 사이에 건설되었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일본인의 독차지가 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구마산지역까지 일본인의 영역이 되었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진기지로 바뀌었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갔다.

<식산은행 마산지점 / 옛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거세어졌다.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었다. 또한 마산의 지역 상인들은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었다.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자본가들도 있었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독립에 대한 꿈을 계속 이어갔다. 1911년에 일어난 일본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가행진에서 일제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강점 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의 만세시위는 달랐다. 일제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조선인의 열망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도 시위는 조직되었고, 만세의 물결이 모든 거리에 넘쳐났다.

만세시위는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등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 만세시위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중심이었지만,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도 참여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월3일 두척산(무학산)시위를 시작으로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창원지역의 구창원읍(지금의 창원시 소답동)의거,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의거는 창원지역민들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 내부에서는 해방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자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산지역에서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 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 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인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회원은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출신 자본가들이었다.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이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에 결성된 사상단체 ‘신인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듬해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다.

혜성사는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민중운동 즉 노동. 농민운동 단체를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었던 ‘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당원)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친일교사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외에도 노동자.농민들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계속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10년 당시의 창신학교(지금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87번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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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원중 2014.06.30 16: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상세한 포스팅 내용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오고 있는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 허정도 2014.06.30 21:0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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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더 인공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피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