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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명치43)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축 이전 뒤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89. 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경성지국장 임원근(이 신문은 일본 공산당 좌야학佐野學이 주재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거물급들이 속속 검거, 신의주로 압송되었다가 사건을 경기도경으로 이송한 중대 사상사건이다.

신의주 사건보다 몇 해 앞질러서 구마산 객선부두 앞 원동회사 출장사무소에서 김상주, 김형선, 윤윤삼 등이 공산당을 비밀 조직하였던 것을, 경찰은 전연 감지하지 못하였다가 101명 사건 때 비로소 발로된 것인데 이것이 전국 최초의 공산당 사건이다(당시 일본조일朝日신문 호외에 보도됨).

신의주 사건은 1925(대정 14) 121일부터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마산에서는 김상주가 1차로 검거되고, 그 다음에 김명규가, 그리고 다음 해 7월경에 이봉수, 황수룡, 김직성, 김기호, 김용찬(이발업), 윤윤삼, 팽삼진, 김종신, 강모 등이 일망타진되어 경성으로 압송, 세정(世情)을 소연케 하였다.

이들은 1년 이상 2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당원 중 김형선은 삭발하고 학생복 차림을 하고 상해로 탈출하였으며,

팽삼진과 김종신은 그들과 교우관계로 피검, 2년간 예심의 고초를 받다가 무협의로 면소(免訴) 출감되었다.<<<

<위 사건 후 1926년 상해로 탈출한 김형선이 7년 뒤 국내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아래 사진은 1933년 7월 16일자 김형선 체포관련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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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3. 어떤 일인 변호사

73. 어떤 일인(日人) 변호사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장자(莊子) () 노인은 한문학자로서 다분히 야인적 정치 색채를 띤 일종의 장한(壯漢) 타입이다.

일찍 조선 토지조사국에 봉직한 일이 있으나 언제 어떻게 되어서 법조계에 뛰어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가 오래 우거(寓居)한 곳은 장군동 3가이며 만년의 가족으로 자부(子婦)와 시부(媤父) 단 두 사람이다. 말하자면 형영(形影) 상조(相弔)라는 표현이다.

그는 사족(士族)으로 선대의 무사(武士)집 자제라고 하며 일설에는 일본의 정당인 정우계(政友系)라고도 한다. 당시 망() 70년령인데 소장(少壯) 2, 3명 쯤이야 때려 눕힐만한 건강체이고 술도 두주불사하리만큼 호주(好酒)이며 대식(大食)이다. 자기가 맡은 사건이 여의치 못한 판결이 있을 때에는 으레 집에 돌아오던 길로 며느리더러 닭을 잡아 오라 해서 무사검(武士劍)으로서 울화를 끈다고 한다.

다음은 술이다. 평소에는 홀로 있을 때나 객이 올 때나 불구하고 건너집에서 한 모의 두부로 통음(痛飮)을 한다. 법정에서도 피고인의 변론보다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태도로 법정을 소란케 한다.

이러다가 입회 검사와 논의 끝에 그날 변론은 중지라 선포하고 퇴장해 버린다. 공판이 끝나면 검사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기 마련이었다. 한번은 일본서 오래 살다 돌아온 박병주란 청년이 자기 형의 채권자를 식도로 척살(刺殺)한 상해치사 사건의 공판 때

잘하는 암성(岩城) 검사가 피고는 계획적으로 사람을 해쳐 놓고 술 취했다고 빙자함은 비겁한 일이라 하여 7년을 구형하자, 변호인 장자(莊子)는 몇 마디 변론을 하다가 검사 자신도 술 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무슨 그런 술타령을 하느냐 식으로 변론이 급선회를 하자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다는 입회 암성(岩城) 검사는 변론 중의 변호사에게

나는 법정에 나온 천황의 대리다. 무엇 때문에 개인의 인신공격을 하느냐

서로 설왕설래 예의 장자(莊子) 노인은 분연히 퇴장하였고, 이 틈에 끼었던 박 피고인은 구형보다 2, 3년 가형 판결이 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아들 없는 노 변호사는 미남의 암성 검사를 자기 아들이라고 농도 하며 뿐종 술자리를 벌였다. 자기 집에 초대되는 사람은 암성(岩城)과 그 당시 서기홍 판사 분이다. 술안주는 천편일률로 두부로써 생색을 낸다.

검사와 변호사는 법정에서는 싸워도 자기 집에서 술 마실 때는 화기애애하게 다정하다. 술이 몇 순배 되면 노인과 청년은 또 싸움이 벌어진다.

한날은 검사로서 참을 수 없이 격한 끝에 노인을 유도로써 방바닥에 때려눕히고 나가려 할 찰나에 검사의 멱살은 노인의 거센 손아귀에 잡히는 동시에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검사의 목에 견주었다. 과연 전광석화다. 손 한 번 까닥하면 검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검사의 위세고 무엇이고 얼굴은 순식간에 황토빛이다. 이때에 그 자부가 뛰어들어 사력을 다하여 만류한 끝에 권총은 떨어지고 사경에서 벗어난 암성(岩城)은 맨발로 탈출하였다.

잠시 후에 치다꺼리를 하는 자부에게

네 시부가 살인할 사람인 줄 알았느냐? 제깐놈이 검사라고 까불어대도 살려달라고 항복할 것이 아니냐 말이다. 이렇게 되면 세작(洗酌) 갱진(更進), 기쁜 마음으로 서로 담소화락(談笑和樂)하면서 화해술을 마시게 되는 것을, 술 먹는 시부의 마음을 몰라 주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였다.

장자(莊子) 변호사는 술값을 비롯해서 일상 생활 필수품의 외상값이 엄청났다고 했는데 동경에 다녀오겠다고만 하고 비밀리에 자부를 불러들인 후에 종적을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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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6) - 강점제3시기

지난 회에 예고한대로 오늘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순서는 본판 순서를 따르겠습니다.

오래된 사진이고 원판 사이즈가 가로40mm×세로30mm 밖에 되지 않아 상세하게 감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냥 1930년대 마산도시의 분위기만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1. 마산부청

중앙동 3가에 있는 현 마산합포구청, 즉 오랫동안 마산시청으로 이용되었던 위치에 있었었던 건물의 최초 모습입니다. 마산시민들에게는 약간 낯이 익은 건물일 겁니다.

 

 

2.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원으로 지방법원이 이전하기 전까지 마산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3. 마산경찰서

중앙동 2가에 있는 옛 마산경찰서, 현 마산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던 건물입니다. 마산의 일제 강압통치 중심부였습니다. 목조1층의 일식 건물이었는데 각국거류지에서 이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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