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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馬山***>

1937년 / 馬山府 / 馬山府 / / 觀光の馬山 / 우무석 所藏

 

 

1937년 마산부에서 제작한 관광안내용 책자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이와 똑 같은 형태의 지도가 다른 도시에서도 발간되었습니다.

이 자료의 소장자는 시인이자 불휘기획 대표인 우무석 선생입니다. 마산역장을 역임한 우 시인의 외조부 문판개 선생의 유품이라고 합니다.

지도의 영역은 당시 마산부 경계를 기준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자복포의 육군중포병대대(옛 한국철강 터)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현 상남동 일대까지입니다.

포켓 형식으로 된 안내서의 표지에는「觀光の馬山」이라는 제목과 함께 산을 배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에 벚꽃이 만개한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 청주 통을 그려 놓아 당시 마산의 관광 상품이 무학산과 마산 앞바다 그리고 벚꽃과 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입니다.

 

이 지도는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부내의 관공서․기업․종교시설․학교 등의 건물과 시설 다수의 위치와 명칭을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당시의 도시윤곽과 중요시설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요긴한 자료입니다.

또한 간선도로와 철도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으며 건축물을 이용한 도시영역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 시기까지 완공한 매립지가 모두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신포동 중앙마산의 해안에 마산매축주식회사에서 시행한 66,000여 평은 매립공사 후 건물도 모두 들어선 것으로 과장해서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시기에 매립은 완료되었지만 건물은 다 들어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1950년대에 찍은 아래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 항공사진을 보면 매립지에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서지 않아 대부분 빈 공지 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50년은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 때문에 마산의 인구가 급증하고 난 뒤인데도 아직 이 지역에 공지가 많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관광안내도가 그려질 당시에는 당연히 이곳에 건물이 없었을 것이라 보는 겁니다.

추정컨데 아마도 이 지도가 관광안내용이기 때문에 조금 과장해서 그렸거나 장래의 계획까지 포함해 그렸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오류 외에도 실제로는 그 당시 도로가 없었던 자산동 지역까지 격자형의 반듯한 도로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이렇게 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도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마산의 해안은 인공으로 조성된 직선호안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삼택조(三宅組)가 1936년 10월 착공하여 1939년 5월 준공한 신포동과 월영동 일대, 즉 마산역 아래 부분 해안의 중앙부두 축성을 위한 매립공사는 ‘매립공사 중’이라는 표시가 뚜렷이 되어 있습니다.

하천은 남쪽으로부터 창원천․신월천․장군천․척산천․교방천․회원천이 나타나 있으나 회원천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와 동일한 지면에 마산의 건축물과 유원지․명승지 등 각종시설 사진이 55매 수록되어 있으며 별지로「馬山案內」라는 문서가 첨부되어 있는데 당시의 마산을 설명해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지도는 1930년대 마산을 가장 상세하게 잘 보여주는 자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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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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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시도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조약체결 직후부터 마산에는 일본군인과 군량 및 마량(馬糧)을 실은 일본군함이 무시(無時)로 드나들면서 유린했는데 이 시기에 철도용지 명목으로 토지를 압수했던 겁니다.

압수 면적은 일본인 대지주 박간(迫間)의 개인사유지를 제외하고도 12만평(1,210斗落)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산합포구청이 된 옛 마산시청 일대의 중앙마산지역이었습니다.

토지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합니다.

1904년 7월 일제는 점찍어둔 철도부지에 입표(立標)하고, 마산포 내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제 점용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마산포 주민의 안녕을 책임진 감리가 도면을 그려가면서까지 그 부당성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생활근거지를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우롱하였습니다.

창원보첩 四, 광무 9년(1905년) 2월 5일자 감리보고 제8호에 나와있는 철도규칙의 내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이런 악랄한 규정 때문에 억울하게 재산 뺏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당시 철도용지 수용 방해자 학살장면입니다. 1906년 찍은 사진인데 마산에서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주였지만 토지의 매매와 경작은 물론 심지어 출입까지 통제 당했던 마산포 주민들은 이 악랄한 일제의 탈취에 격분하여 창원감리에게 사정을 호소하였고, 창원감리 현학표는 이런 사실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에 대해 외부대신은 지령을 통해 간섭 의사를 밝혔으며 이때부터 이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감리는 뒤늦게 철도부지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인(日人)들이 토지를 강탈하면서 당시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이 일본인 박간(迫間)의 하수인 홍청장(弘淸藏,)
과 공모하여 한국인 손덕우를 앞 세워 한국인 토지주들을 회유했던 겁니다.  철도부지와 관련된 기록에는 모두 홍청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弘淸藏은 후에 남성동 매립 때 박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당시 마산의 유지 일본인 홍청삼입니다
)

한국인 손덕우는 구한말 창원 감영의 감찰사 역임한 지역 유지로, 마산민의소 의장, 마산구락부 초대부장, 마산정미소 중역, 창신학교 부교장, 기독교 장로, 한말 박영효의 지인으로 창신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1910년대에는 마산부 참사와 학무위원을 지낸 사람입니다. 마산포 사건 때도 박간(迫間)의 요구에 응해 박간이 원하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주를 찾아 통영까지 가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지역에서 덕망은 높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덕우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손덕우를 통해 토지 가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여 토지주의 서명날인을 받아 표목까지 박았지만, 뒤에 가서 이 약속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손덕우만 구금되는 수모를 겪고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은 그 책임을 서로 전가시키며 발뺌을 했다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본군(日本軍)의 마산철도용지 강점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입니다.
김용욱과 김준의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을 옮겼습니다.

이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철도용지 강점 계획이 일본의 의도대로 쉽게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911년 간행된『馬山と鎭海灣(마산과 진해만)』에서 나오는 통계와 다른 여러 자료에서도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아도 을사조약 직전에 일본군부의 의도대로 마산의 철도용지가 결정된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만, 그후 제작된 사정지적도와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본 결과,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 원래 그들이 계획했던 규모와 형태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탈취한 토지 중 일부는 나중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의 자녀 교육비 충당을 위한다는 명복으로 일본거류민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1908년 일본거류민단은 예산의 상당부분을 점하는 교육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철도용지를 싸게 대부 받아 원하는 사람에게 전대(轉貸)함으로써 연간 10,000원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백미가 1石當 19원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빼았은 땅을 임대하여 후세교육비로 사용했던 셈이죠.

강압적으로 무상 탈취한 토지를 철도용지란 이름으로 20여 년간 소유한 일본 군부는 1920년대에 들어서 입장이 바뀝니다.

1920년대 들어서자 마산부민들이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철도용지가 마산의 도시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마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상 불편했던 관아건물의 위치에 대하여 불만 때문에 관아건물을 중앙지역으로 옮기자는 요구가 일었습니다.

이런 여론에 따라 일제는 철도용지를 마산부에 불하하게 되었고 마산부는 이 토지 중 상당 부분을 기업과 개인에게 불하하는 한편 마산의 중요한 광공서를 이곳으로 이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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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마산시의 첫 지도-

<마산부 관할구역도 / 馬山府管轄區域圖>

1913년 / 조선총독부官房總務局 / 조선총독부 / /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목적으로 1913년 12월 29일자로 발행한 것입니다.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부(府)와 (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 등에 관한 조정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개편된 마산부가 사실상 마산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도는 마산시의 첫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이 행정구역개편에서 마산부에는 관할구역으로 마산포각국거류지일원, 외서면의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 자산리, 서성리, 성호리, 중성리, 성산리, 동성리 및 오산리, 상남리, 교방리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지명을 이렇게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앞서 포스팅했듯이 1910년부터 이미 원마산에도 한국식 지역지명 대신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변경되어 있었습니다.
2011/02/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같이 단행된 관할구역 획정에서 창원군 부분에는 마산부 부내면, 상남면, 하남면, 동면, 북면, 내서면, 구산면, 대산면, 진동면, 진북면, 진서면, 양전면, 웅읍면, 웅동면, 천가면, 진해면, 웅서면, 외서면 중 마산부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관할구역에 관한 지도이기 때문에 마산부의 경계가 뚜렷이 나타나있습니다.
이 지도에 의한 마산부 경계는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을, 남쪽으로 율구미, 북쪽으로 오동교부터 노비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나 서원곡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범례에서는 마산부의 경계선 및 도로․철도와 정차장․논․밭․산악․하천․바다․건물 등을 표시하고 있는데 도로와 건물 표시 때문에 당시 신마산의 원마산 쪽 진출 정도를 약간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마산경찰서 부근까지만 개설되어있던 중앙간선도로를 보면, 1910년에 원마산까지 3m폭으로만 개설되었다가 1912년에 15m 폭으로 완전 개통되었는데 그것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 역 앞에서 장군교 방향으로 사선형의 직선도로 서편 안쪽은 건물이 대부분 들어선 것으로 나타나 있고 조계지의 고지대는 고운로(孤雲路) 아래까지만 개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의 마산부 경계를 현재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지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이 있기 전 원마산 6개리를 비롯하여 교방리․상남리 등과 완월리․신월리․월영리의 위치와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된 남성동 매립공사는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나 공사중 임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미 육군중포병대대 입구(현 남부터미날부근)에서 시작해 신월계라 불렀던 전 마산극장 앞까지는 해안에 직선의 호안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마산상황을 알 수 있는 참 좋은 자료인데, 흠이 있다면 동쪽을 북쪽이라고 나타낸 방위표시의 오류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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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ood pellet mills 2011.08.02 19: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음.. 공감합니다. 어서 우리도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할 텐데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크게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일에 세계인이 알도록 홍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해야합니다. 언론사, 정부, 국민....

2011.02.16 00:00

'고향의 봄' 창작지에서

설을 앞둔 지난 1월 28일 마산지역 출판기획사인 '불휘'의 우무석 시인으로 부터 급한 전화 한통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감점시기때의 마산부 오동리 71번지의 위치를 찾을 수 있냐고?
그 주소지가 이원수선생이 16세때에  '고향의 봄' 을 만든 창작지라고 한다.
 마산 마산원도심의 지적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터라, 그간에 지번이 변경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말떨어지기 무섭게 다음날 현장을 안내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토요일 오동동 현장을 안내하게 되었다.
현재의 지번도를 통해 과거의 지번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행여 도로라도 개설되어서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히 골목안에 있던 필지라 필지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당초의 골목길이 6미터 도로로 확장되어 필지가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의 봄’ 창작지 현재의 모습
현재의 위치는 구. 오동동파출소에서 오동동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중간쯤 삼거리가 있다. 거기에서우측방향, 고려모텔로 향하는 길로 약 50미터정도 가다보면 골목 4거리가 좌측에 면한 상가건물이 당시 오동리 71번지이다.
현재는 필지가 71-1,2,3,4번지로 4개로 분할되어, 개별 주택과 상가가 지어져 있었다. 당시의 주택의 모습이나 흔적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나 주택이 있었던 지번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행한 관계자들은 매우 감개무량해 하는 것 같았다.
71-4번지에 해당되는 모서리 부분에 세탁소가 있었으며, 나머지 필지에도 주택 및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오동세탁소가 창작지 71번지이다. )


(사거리에서 어시장방향 골목전경) (오동동 하천방향 골목전경)
(사거리에서 패션호텔방향) (고려모텔 방향 골목전경)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
당시 1920년대 원도심의 사회상은 마산 지역도시사를 정리한 허정도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원마산 지역의 상가는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었다. 이밖에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다.
1926년경 신마산의 대성동과 장군동의 전답 지가는 평당 2원 4-50전이었으며 비싸도 삼원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원마산의 오동동 방면은 평당 20여원이었으며 전답도 4-6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가격이 치솟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차 원마산 지역이 크게 발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땅 값은 이렇게 높았지만 원마산의 도시 시설의 정도는 그 때도 매우 낮았다. 원마산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초가였으며 아직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1920년대의 원마산 변화를 지적도에서 찾아내어 1930년 당시 원마산을 복원한 도면이 다음의 지도이다.


(1920년대 원도심 지도 : 붉은색 부분이 오동리 71번지) (구글 지도상의 오동동 71번지 :감색부분은 매립전의 원도심이며 청색부분은 포구였다. )

당시의 사회상
당시의 상황을 위의 자료를 통해 정리해 보면 주변 환경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볼수 있을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오동리는 원도심의 변두리 지역에 해당되었다. 주변에 인가가 적은 논밭으로 되어있었으며  원도심(현 고려모텔)방향으로 논두렁 같은 길이 나 있었다.
오동동 하천하류 방향으로 구.오동동 파출소에서 아케이드로 내려오는 길 주변에는 제법 많은 주택가가 형성되었음을 당시의 지도현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하천이 주거지를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공공시설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원도심의 대부분 주택은 초가였으며, 전기 공급은 신마산 조계지에만 공급되던 시절이라서,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던 시기였었다.
오동리 71번지는 당시는 원도심 외곽지역이었으나 도심지역이 확산되면서 중심가로 변모 하였던 것 같다.
한편 일본이 마산설 철도부설시 건설인력들과 함께 묻어 들어온 기생, 이를 교육하고 공급하는 조합에 해당되는 '남선권번'이 오동리에 있었다.
이원수선생이 오동리에서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닐 적,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 문학 소년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누나 덕분이었는데, 바로 그 누나가 오동리에 있던 권번에서 교육을 받고 기생이 되어 동생을 키웠다고 한다.
오동리가 가졌던 장소적 특성과 가족사적인 애환이 그의 생애에서, 작품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논란
올해가 이원수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이원수 선생을 재조명하는 상황에서 상반된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 뉴스 1 >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흉상 제막식'이 24일 오후 창원시 팔룡동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열렸다.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사)고향의봄기념사업회 주최, 주관으로 열린 이 행사에서 "이원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창원시를 '동심의 고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문학과 도시의 가치연결된다"면서 "이 일이 통합 창원시의 가치를 부여하고, 도시의 브랜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선포식과 흉상 제막을 시작으로, 오는 4월 학술세미나와 '고향의 봄 어린이잔치', 10월의 '이원수문학상 제정 및 시상'과 기념집 <겨울나무의 노래> 발간 등으로 이어질 계획이란다.

< 뉴스 2 >
창원시의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열린사회희망연대(공동대표 이동근 외 4명)가 문제를 제기했다.
"통합 창원시가 친일 문인 한 사람을 끌어들여 시의 가치를 보태야 할 정도로 초라하고 구차한 도시인가"라고 지적했다.
문제 제기의 근거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사실과 함께 1942년 이원수 선생이 조선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시 '지원병을 보내며' 일부를 공개했다.
"진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며 그를 기리는 일에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기념사업을 하겠다는 그 몰염치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문제제기 배경을 밝혔다.

역사적 재조명에 대하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논의의 대상 밖으로 제외시키기 보담은 두 가지 측면을 다 재조명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며, 하나는 문학적 성과에 대하여는 학문적 입장에서 재조명하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부분으로 인해 나머지 한부분에 대한 공과가 희석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민족적인 행위를 통한 역사적 진실은 후세에 그 만큼 희생이 따른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문학적 성과에 대한 부분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정확하게 정리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부분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아니면 대비를 통해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원수선생의 역사적 재조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Trackback 1 Comment 2
  1. 2011.02.16 03:21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신삼호 2011.02.16 10: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따님도 연세가 좀 될터인데---
    하지만 조금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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