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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확정 전 3미터 폭).

그리고 어업조합에서 불종거리는 신작로가 없었던 곳이어서 선창에서 구마산역까지 어물을 운반하는 데는 겨우 지게나 작은 수레로써 전 삼각상점과 일신여관 골목길을 오르내렸다.

중성동에서 동으로 가는 길은 물론 없었고 오동동 성결교회 통로도 골목길이었다.

이처럼 구마산 주민(조선인)은 극심한 교통지옥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제4대 마산부윤으로서 사도리구(寺島利久)가 부임했다.

 

그는 한 때 프랑스 파리 주재 일본 영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 있던 사람인데, 착임(着任) 미구(未久)에 구마산 도로의 확장에다 시정의 역점을 두었었다.

그는 신문기자들에게 마산은 오동동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그러한 전망 아래 구마산의 도로 확장에 관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들과 부회의원들은 그에게 구마산부윤’ ‘도로부윤등의 별명조차 붙였던 것이다.

현재의 구마산 시가의 형태는 사도(寺島) 부윤의 소신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1900년 초기부터 60여년간의 구마산 도로의 변천상황을 회고하여 보면

구마산-북마산-상남동 개통

오동동-창동-부림동 가로 대개수

오동동 해안을 좌절(左折) 창원군과의 연락도로 개통

합성-산호동 매축지 대로 직통

마산 본역 앞 해안도로 개통

등등으로 1940년의 통계로는 국도 5.8, 지방도 1.3, 시도 72.5, 오동교-시청-제일극장 간의 간이포장 등으로 되어 있었다.

끝으로 신마산-진주간 도로는 착공 4년만인 융희 2(1908)에 준공되었음을 알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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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원문에는 1905) 5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는데 이와 전후하여 현 모 군부대에 육군중포병대를 설치하는 한편 자복포의 소부락을 강제 철거시켰다.(위치-현 한국철강 공장 오른편 산림록)

191431일 부군제(府郡制)가 선포되자 청진, 원산, 부산, 목포, 군산, 대구, 광주, 인천, 경성, 평양, 진남포, 신의주 등지와 함께 다른 군보다 인구 분포가 적은 마산포가 부()로 제정되어 말썽이 생겼는데 그로부터 마산부 행정수반은 다음과 같다.

초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 2김곡 광(金谷 光, 착임전 사망, 원문에는 金谷 充으로 되어 있음), 3대 고진우보(高津友保, 東大 卒), 4대 사도리구(寺島利久, 프랑스 영사관 서기), 5대 판원지이(板垣只二, 원산검역소에서), 6대 문협묵일(門脇默一), 7대 진내리부(陣內利夫), 8대 우야우팔(宇野友八), 9대 등강기일(藤江崎一), 10대 총본태랑(塚本太郞).

1914년부터 1945년 종전까지 30년간 10명의 부윤이 이착(離着)된 데 비해 해방 후 26년간 25명의 부윤, 시장이 이·취임하였으니 1인 평균 수명이 1년에 불과한 단명이라 할 수 있다.

 

<약진 마산의 전모(1941)에 실려있는 3~6대 마산 부윤>

 

이들 부윤 재임 시 업적과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면,

초대 삼증(三增)은 마산만에 정박하는 군함에 탑승할 때면 21발의 예포로 특대함으로써 일인들은 삼증 이사를 재인식하였고, 구마산 조선인 음식점에 주표(酒票, 자가용 면허증)를 처음 발급한 것과 조선 백채(白菜) 김치를 좋아한 때문에 삼증 아래 판임관을 지낸 장재식(고 장지연 장남)은 퇴임한 그의 우거지(寓居地)인 동경에까지 김장 선사를 하였다.

2대 김곡 (金谷 光)은 발령 받고 착임 전 서울서 사망, 3대 고진(高津)은 동경제대 법과 출신이나 부윤으로서 남긴 일도 없고 평도 좋지 않은데다가 턱에 수염이 있었기 때문에 부 협의원(府 協議員) 시절에 염소수염으로 더욱 인기가 없었다.

4대 사도(寺島) 부윤은 구마산 도로확장과 발전에 주력하였고, 현 남성동(元町) 파출소 위치 문제로 경찰서장과 대립이 생겼으나 그의 선견지명은 적중되었다(詳報 別項). 인천 부윤으로 영전되고 6대 문협(門脇)은 착임 1주일 동안 행방불명되어 일반의 염우려(念憂慮) 각 신문은 추측기사로 지면을 성진(盛賑)케 했을 뿐이다.

7대 진내(陣內)는 술 담배는 일체 못하여 취미로는 톱으로 생나무 베기와 미장이 짓이 아니면 낚시질이며 마음에 드는 청년은 주저 없이 직원으로 채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업적은 현 마산여고와 제일여고 앞 도로라 한다.

8대 우야(宇野)는 소장파 인물로서 신의주 부윤으로 영전했는데, 침착하고 사교성도 좋아 기자들에게 매우 평이 좋았다.

9대 등강(藤江)은 대체로 수재형에다 선비형이며 대인관계가 친절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재임 중 대일본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장으로 전출하였다.

10대 총본(塚本), 역대 부윤에 3대인 고진(高津)은 주책 방망이로 일인들의 지탄을 받았는가 하면 이 사람은 고등관이면서 당시 산구(山口)라는 경찰서장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면서 부 직원 중 특히 조선인에게 차별이 심했으며 취하면 파락호의 생동을 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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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5.12.03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멀리 서울에 살면서도 오히려 고향의 역사를 더욱 정통하게 배우게 되니, 기쁩니다. 때아닌 12월 비가 사람을 고두망향하게 하는군요.

    • 허정도 2015.12.03 16:2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마산 분이시군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고향이 바뀌는 건 아니죠.
      늘 건강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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