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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56, 의료기관

56. 의료기관

 

마산에 최초로 병원을 설치한 것은 1908, 9년 경 구마산 박석고개(남성동) 전 동인(同仁)병원 왼편에 일본인 판전(坂田)이란 사람이다. 원장은 그 때로 상당히 연로하였다.

다음으로 구마산 시장 입구 현재 산업경제신문 지국 아래층 자리에 홍생(弘生)병원이 개업되었다.

1909년 경에 현재 마산상공회의소 건너편 협신중화공사(協信重貨公司) 사무소에서 농업협동조합까지 광역(廣域)에 걸쳐 종합병원-마산병원이 개원되었는데 원장에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 덕영오일(德永吾一)이며 산과(産科), 안과, 외과, 내과, 소아과 등 그 당시에도 병원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전 제길윤(諸吉允) 내과의원 이전에 일인 대강(大岡)병원 그리고 대강(大岡)이 사망 후 수상(水上)이라는 사람이 경영하였다. 전기 대강(大岡), 수상(水上)은 구마산 시민극장 밑에 분원(分院)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구마산 고등(古藤)여관-시장 입구에 수성동으로 내림길 좌편에 고목(高木)이라는 득업사(得業士), 즉 한지의사(限地醫師)가 있었다.

전기(前記)한 판전(坂田)병원은 원장이 노쇠하여 사망한 후 아들이 진료를 하였으나 그는 군의관으로서 얼마 동안은 부업(父業)을 계승하다 제1차 대전 종말 때 제정러시아에 반란이 발발하여 이것을 진압키 위하여 일병이 니크리스크에 파병됨으로써 병원은 강산의전(岡山醫專) 출신 대곡(大谷)이가 고용의로서 있다가 대곡(大谷)은 독립 경영되고 판전(坂田)병원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대곡(大谷)이 내마(來馬)하기 전에 조선인으로서 강산의전(岡山醫專) 출신 의학사 김형철(金炯轍) () 영제(令弟) 형달(炯達) 형제가 191811월에 대광예식장 자리에 삼성(三省)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삼성병원 개업 4개월만인 1919년 유명한 3·1 민족 총분기 때 처참한 부상자의 치료에 전력을 다하였다.

주로 부상자 태반이 삼진(三鎭)청년들이었는데 그의 남긴 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김형철 원장과 삼성의원의 위치>

 

1921년에는 현 남성동 파출소 우측 미화사(美和社) 자리가 세브란스의전 출신 이순필의 학산의원으로 후에 현 노내과의원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다음은 경성의전 출신 하우용과 영형(令兄) 태용 형제가 현 한일은행 자리에 일신의원을 경영하다가 일본 북해도 삿뽀로로 떠나고 형 태용이 운영하였다.

지금 상은(商銀) 건너 파초여관 좌측에 경성의전 출신 김현문이 개업, 1924년에 현 일신식당 자리에 일본 명고옥(名古屋) 의대 출신 이광우의 순천의원, 지금 중앙의원 자리에는 평양의전 출신인 의학강습소 출신 한규상, 2차 대전 종결 직전에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이모(李某)가 현 후생의원을 신축, 준공 직전에 사망했다.

신마산에 1909년 경 마산병원에 근무한 일이 있던 강상의전 출신 전원(前原)이 철도병원(요양원) 촉탁 겸 산과(産科)를 경영했다.

마산병원 덕영오일(德永吾一)은 마산병원을 시가의 배액(倍額)을 붙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한바 당국은 이를 가상(嘉賞)하여 반액 정도를 사례하니 덕영(德永)은 시가에 알맞은 대가를 받은 계산이 된다.

이리하여 마산병원은 경남자혜의원(慶南慈惠醫院)으로, 다음은 경남도립병원으로 개칭, 1922년 현재 위치로 이전 신축하였다.

도립병원 말기 가까울 때 원장이던 삼구(森久) 박사 문하에 상당수의 조선인 문하생이 훈도를 받았던 그 중에 저명인사로서 고 제길윤 의사와 동인병원 조석환 내과, 소아과 전문의가 현존한데 동인의원은 천엽의대(千葉醫大) 출신의 송원의원(松原醫院) 자리에 개업한 바 개업 초에는 피진료객이 하루 평균 왕진 합쳐서 70~80명에 이르러 조 원장은 피로에 지쳐서 졸도 할뻔 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의 배후에는 은사 삼구(森久) 박사의 음덕의 공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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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일본인과 한국인의 마산상권 판도>

『마산상공회의소 백년사』에는 1939년 현재 마산에서 활동한 개인 영업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제조업과 운수업 등은 제외한 통계입니다.

이들 개인영업자 중 한국인 상인들은 주로 원마산 중심상가와 부림동 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서 곡물, 면사포 등의 포목류, 해산물, 식료품, 고무신 등 생활필수품을 많이 취급했고 대금업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상인들은 주로 건축자재, 철물, 과장, 서적과 문방구, 가구, 의복, 술과 고기, 연료, 선구(船具) 등을 판매했고 대금업도 10여명 정도 되었고 토건청부업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나타난 개인영업자의 숫자는 232명이며 영업장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이용해 232개의 영업장을 원마산․신마산․중앙마산으로 나누고 다시 각 동별로 나누어 표시해보았습니다.

다음 그림입니다.

 

전체 영업자 232명 중 한국인은 202명, 일본인은 130명 이었는데, 한국인 202명 중에서 94.5%인 191명이 원마산에서 영업했으며 중앙마산에는 2명, 신마산에는 9명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은 130명 중 원마산에 37.7%인 49명, 중앙마산에 26.9%인 35명, 신마산에 35.4%인 46명이 각각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료가 말하는 것은 한국인의 신마산 진출에 비해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이 월등히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들이 신마산에 진출하지 못한 까닭은 신마산에 비해 원마산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그 보다 신마산 일본인들의 배타적 성향이 더 큰 이유였을 겁니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풍부한 돈줄과 막강한 배후세력으로 중앙마산을 포함 도시 전역에 광범위하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중앙마산으로 설정한 지역은 중앙동․장군동․자산동․완월동을 비롯해 매립으로 조성된 월포동․신포동 등입니다.

다음 사진은 1930년대의 두월동, 즉 신마산 일본인 상권의 중심지 입니다. 지금은 통술거리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쿄마치(京町)라 불렀던 신마산 최고의 번화가였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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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강점제3시기의 섬유산업>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 후 마산에 들어오기 시작한 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분야는 섬유산업이었습니다.

1923년에 설립된 마산조면공장과 1927년에 설립된 태전마산공장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섬유산업의 발전가능성을 간파한 마산상공회의소는 1930년대들어 적극적으로 섬유산업 유치운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조선물산주식회사, 조선신흥방직주식회사 등 대형 섬유공장이 마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주류양조산업과 섬유산업의 두 축이 마산의 대표산업으로 자리를 잡게된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마산에 들어 온 대표적인 두 섬유회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1939년 설립된 조선물산주식회사입니다.

오동동 2,200평 부지를 매입하여 건평 1,000평의 공장을 건설한 이 회사는 「낙낙직(樂樂織)」이라고 부른 특수직물을 제조하는 회사로, 일본 오사카의 주식회사 중미(中尾)상점계 회사가 자본금 18만원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직기 300대를 설치하고 여자공원 350명을 고용했으며, 외화획득을 목표로 수출용 카펫과 잡화 등 연간 100만원 상당의 제품을 생산했으며 사장은 중미구차랑(中尾久次郞)이었습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과 마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한태일이 사장을 했던 고려모직의 전신입니다. 한태일은 독립운동가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이며 시인 김춘수의 동서이기도 합니다.

다음 사진은 해방 직후 찍은 고려모직 모습입니다.

 

다음은 조선신흥방직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1940년에 산호리에 대형공장을 세우고, 직물 누더기를 이용해 재생방직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이 공장의 시설은 일본에서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우수한 것이었습니다.

자본금 27만원으로 주식회사로 발족하여 사장에 궁림태차(宮林泰次)가 선임되었고 남여 종업원 500여 명을 고용했습니다. 현 산호동용마맨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일제기에 시작된 마산의 섬유산업 전통은 세계최대규모의 섬유공장 한일합섬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습니다.

다음사은 마산 섬유산업의 마지막 자존심 한일합섬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며 마산상공회의소에서 한일합섬 터에 돌비석을 세우고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비석 바로 오른쪽 밝은 색 상의를 입으신 분이 한일합섬과 창사 때부터 함께한 한일합섬의 산 증인 손춘수 선생님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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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h.han 2015.02.26 16: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고려모직 한태일씨는 시인 김춘수씨의 사위가 아니라 동서지간 아닌가요?.....

    • 허정도 2015.03.02 11:14 신고 address edit & del

      아, 실수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김춘수 시인과는 동서지간이고 허당 명도석 선생의 사위입니다.
      감사합니다

2012.04.18 00:00

마산만 매립해서 땅 장사하려는 기업들

성동산업 마산조선소가 취득한 마산 앞바다 공유수면 16,000평 매립권을 두고 장사꾼들의 농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작은 수년 전부터였습니다. 마산만 내만에 자리를 잡은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려면 바다에 접한 땅이 더 필요하다"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오염총량제 실시 이후 마산만의 매립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지만 성동조선의 요구에 대해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내놓을만한 기업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동조선이 사업을 일으키면 고용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매립을 해서라도 지역경제를 살려보라고 여기저기서 지원했습니다.

마산지역의 상공계를 대표하는 마산상공회의소가 직접나서서 “공유수면매립이 완료되면 연 매출액 1조원에 2천명의 고용이 발생할 것”이라면서 “기업이 투자시기를 놓치면 모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고 항만청에 매립승인을 독려했습니다.

성동조선과 마산시와 체결한 약정서에는 “이곳에 선박건조시설을 갖추어 고용창출을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마산시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약속에 따라 마산시도 성동조선 매립을 위한 각종 인허가 절차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산만의 매립을 절대 반대하는 시민단체도 매립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해 어쩔 수 없이 반 보 양보했습니다. 지역사회의 여론도 성동조선의 요구를 이해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마산지방해양항만청이 성동조선에게 승인한 매립허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당시와 많이 다릅니다.

성동산업은 경영상태가 나빠 이미 휴업상태입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과 하청업체들의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 지역경제에 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사정이 이런 탓에 통영에 있는 본사는 몰라도 마산조선소는 재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입니다. 2천명 고용도 1조원 매출도 모두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매립할 이유도 매립할 필요도 없어진 셈입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매립 목적이 기업의 땅 부족 때문이었는데, 휴업에 들어간 기업이 무슨 땅이 더 필요한지 매립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매립허가권은 소위 대원개발이라는 SPC(특수목적법인, Special Purpose Company)로 이미 넘어 갔고, 이 회사의 명의로 법적 만료일인 지난 3월 29일 항만청에 착공신고를 해 법절차를 밟았습니다.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시민단체가 항만청에 매립을 막아야한다고 하소연하자 마산해운항만청에서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였습니다. 심지어 시민단체 더러 “법적기관인 항만청에서 임의로 만든 시민단체의 동의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일입니다. 설령 그것이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매립허가과정에서 거친 지역사회와의 중요한 합의에 반하는 것입니다.

매립면허승인 과정에서 “해양환경의 보전과 지역경제의 활로 개척이라는 두 개의 중대한 공익이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정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매립공사 착공 전까지 환경단체 및 시민단체와 지속적인 대화와 협의를 통하여 마산만 해양환경보전을 위한 실효성 있는 결과물을 제출하여야 한다”고 합의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나 몰라라하는 식의 항만청 입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항만청이 합법을 내세우며 특정 기업에게 공유수면 매립을 빌미로 땅장사를 인정해주는 특혜로 보일 뿐입니다.

대원개발이라는 회사는 현대자동차 계열회사인 엠코라는 건설회사가 주도한다고 합니다. 하이브리드니 뭐니하면서 친환경기업임을 내세우는 대기업이 마산 앞바다를 메워 돈벌겠다고 나선 꼴입니다.

탐욕스러운 기업과 공직자의 합작으로 ‘내 고향 남쪽바다’는 또다시 찢기고 밟히게 되었습니다. 자연이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막장돈벌이는 언제 쯤 끝이 날까요?

바다를 보호관리해야할 해운항만청이 팔짱낀 구경꾼이 되었으니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저 바다와 함께 살아야할 시민 스스로 나서서 막아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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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공인 모임이 있긴 했지만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2일 마산공립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개최된 마구(馬邱/마산대구)철도촉진기성회를 조직하기 위한 부민대회에서 지역의 상공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제안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1929년 4월 24일「마산상공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마산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1938년「조선상공회의소령」에 의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설립인가가 나던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최근 마산상공회의소가 펴낸 '사진으로 본 마산상의 111년의 흐름'이라는 책에도 마산상공회의소라는 이름으로 마산의 상공인들이 단체를 만든 때가 1938년 7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회장으로 표기된 서전목총시(西田木惣市, 西田嘉惣市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는 1907년 홍문동에 설립한 서전주조장의 창업자입니다.



「마산상공회」의 회칙에 기록된 사업내용을 통해 당시의 마산상황과 주요현안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馬邱철도 부설 촉진
2) 長尾半兵衛氏 계획의 통영선 실현 촉진
3) 마산상업학교의 학년연장, 학급증가 건
4) 경전남부선 중 순천 경유를 하동, 화개, 구례 경유로 변경 청원
5) 마산-부산간 직통열차 운행 증발 건
6) 일본과의 직통항로선 운임 인하 건
7) 마산중학교 설립 촉진
8) 남지교의 架橋等背面 교통 확충 건
9) 마산항 선차(船車)연결시설 확충 건
10) 상업은행지점 설치 건
11) 일본 북구주(北九州)와의 선로 개설 건
12) 마산세관 출장소 승격 건
13) 합천 직통통로 개설 건
14) 전력요금 인하 건
15) 창원 추도(墜道) 촉진 건
16) 마산-거제도 연안 연결 항로 개설 건
17) 마산-삼랑진간 기동차 운행 건
18) 된장, 간장 운임 할인 건
19) 청주 운임 할인 청원
20) 석발미(石拔米) 증산 건의
21) 상업창고 설치 건의

이미 식민지배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다음 세대의 교육에 관한 내용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마산의 경제역량을 외부로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된 후 세 도시의 상공회의소도 ‘창원상공회의소’ 간판을 달았는데 마산상공회의소는 ‘마산상공회’로 이름을 바꾸어 마산지역을 커버한다고 합니다.
우연의 결과겠지만 1929년부터 사용했던 그 명칭이 되살아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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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rv1fhvg4y3 2013.12.11 04: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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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시장(市場)>

1920년대 마산의 대표적인 시장(市場)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서무부조사과에서 간행한『朝鮮の市場』의 내용과『마산상공회의소백년사』의 내용을 복합하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① 우선 1924년에 개설된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이 가장 큰 시장으로서 제일 붐볐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煉瓦造)의 장가(長家) 점포 3채였고 그 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서 저녁 시장 시간이면 더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朝鮮の市場』에 나타나는 「구마산 시장」은 부림동․수성동․남성동․동성동 창동의 도로(등외도로)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적과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도로연장으로 200칸(360m)내외라고 했습니다. 노상(路上)시장이었기 때문에 시장과 관련한 설비는 없었으며 개시일은 음력 5․10일로 월 6회 열렸습니다.
주요 취급품은 곡류․면류․마류․면사류․어류․기타 일용잡화였으며 상인 수는 소매상 약 300여 명으로 5-7리에서 까지 장사하기 위해 나왔다고 합니다. 시장 이용자도 부근 3 리 내외에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구마산 시장」이「부정공설시장」이란 이름으로 상설화되면서 건물도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건물을 갖춘 시장과 노상 시장의 경계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② 1923년 신마산 반월동에「선정(扇町)공설시장」이 들어섰습니다.
부지 2,281평에 81평과 25평의 건물 두 동을 지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로 적당한 크기의 도로를 내었습니다. 상설시장이었으며 주요 취급품은 야채․곡류․어류였고 상인은 소매상 28명이 있었습니다.
점포주는 모두 신마산의 일본인이었으며 이용자도 신마산에서만 오고 원마산의 한국인들은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개설초기에는 전화 주문까지 받으면서 배달도하는 등의 친절전략을 구사했지만 개설 1년도 못되어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③ 합방 이전, 일본인들이 주식회사 체제로 발족시킨 마산수산(주)를 1920년 재편성하여 창포동 3가에 경매시장인「마산수산시장」을 개설하였습니다.
사설(私設)이었으며 시설은 해면에 접한 96평 규모의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양․음력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영업하였고 해산물만 취급했습니다. 중매인 11명이 있었으며 모든 거래는 경매로 이루어졌습니다.
출품하는 사람은 진해와 거제에서 주로 왔으며 구입자는 마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마산 남성동에 출장소를 두고 영업했습니다.

④「마산 우시장(牛市場)」도 있었습니다.
사설(私設)이었고 1924년 오동동에서 마산축합조합에서 운영해 오다가 1926년부터 마산부 직영으로 바뀌어 운영되었습니다.
면적은 1,044평이었으며 주위에 목책(木柵)이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개시일은 음력 5․10일로 월 6회였으며 생우(生牛)거래만 하였습니다. 중개자 15명이 활동하고 있었고 인근 5리 이내의 사람들이 소를 매매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⑤ 중앙동 1가에 1925년 1월 사설「마산청물시장」이 개설․인가되었습니다.
89평의 부지와 64평의 건물에서 매일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장사를 하였습니다.
취급품은 야채 및 과일류였으며 중매인 11명이 종사하고 있었고, 출품자는 시모노세키와 모지 및 마산부근 일대의 과수원 경영자였고 구매자는 마산부민이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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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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