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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00:0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주거시설의 형식도 변했다.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자연조건과 생산의 수단 및 관계 변화였지만 때로는 정치 사회의 변화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거형식이 가장 비약적으로 변한 시기는 소위 근대적 건축술이 등장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술도 들어왔다.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시행되었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주택과 점포를 겸한 단층 혹은 이층의 주상(住商) 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은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 등으로 나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등장한 주택으로 대개 전통주택에 일식(日式) 혹은 서양식을 일부 채용한 형식이다.

하지만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린 도시 빈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토막(土幕)이란 땅을 파서 주거공간(움집)을 만든 뒤 짚이나 거적을 덮어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집으로 가장 열악한 주거형태였다.

1945,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이어진 전쟁은 주거상황을 더욱 깊은 질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수출중심 경제정책을 택했고 그 결과 발생한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들은 집을 마련할 경제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도심지에 세()를 얻을 형편에도 미치지 못한 가구가 많아 이들 중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했다. 무허가 판잣집과 달동네의 출현이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3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도시계획법 및 건축법, 1963년에 토지수용법과 주택자금운용법 및 국토건설종합계획법 등을 제정하여 민간부분의 주택 건설을 촉진하였다. 1969년에는 주택은행도 설립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1979년에는 토지금고(한국토지개발공사)를, 1981년에는 국민 주택기금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이 모두는 국가의 공공 재정이 아닌 민간재정을 투입하는 주택정책이었다.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마산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창원기계공단 건설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로 인해 주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마산의 석전·양덕·합성동 일대를 아우르는 동마산 개발도 이 때문에 시작된 사업이었다.

이 시기의 주거는 대부분 단독주택이었다.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미된 개량형 주택으로 취사 및 난방연료는 주로 연탄이었다.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급속히 커진 주택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 집장사가 지은 주택, 건축가가 설계한 일부 고급주택, 무허가 주택 등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주택시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집만 지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심리 때문이었다.

수요급증으로 폭등한 집값으로 무주택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게 되자 1977년 정부는 주택 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고소득층에게는 아파트를 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여 되팔 수 있는 기회로 둔갑되어 투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분양가 상한제의 또 다른 부작용은 획일화된 아파트 공급이었다. 분양가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창의적인 건축보다는 정해진 값으로 똑같은 아파트 짓기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분양가 상한제 실시 1년 후인 1978, 공동주택을 시공 단계에서 분양할 수 있는 선분양 제도를 도입하였다. 건설업자들의 재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조감도 밖에 없는 그림 속의 아파트를 사고팔았고, 그림 속 아파트 분양 당첨을 위해 가족들이 교대해가며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선분양 제도가 기업의 재투자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주택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토지확보만으로 거액의 분양수익이 창출되었던 기형적인 시스템이 기업주의 과도한 이윤욕을 부추겨 유수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성 중인 창원공단 제1단지. 창원대로와 남천이 뚜렷하다. 사진의 왼쪽하단 일대가 대원1구역 / 1976년 항공촬영, 국가기록원 소장>

 

신도시 창원은 이러한 상황과 함께 탄생하였다. 하지만 창원 신도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에 정부가 바뀌었다.

국가중공업산업의 중흥을 꿈꾸며 창원벌판에 신도시 계획을 세웠던 유신정권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고 그 뒤를 이어 제5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유신정권은 끝났지만 또 다른 형태의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경제였다. 때맞춰 불어든 3(저유가, 저환율, 저금리)현상으로 좋아진 경제사정 때문에 국내건설업계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없었다.

따라서 건설업의 국민총생산 차지비율이 높았고 타산업과의 연계효과와 고용효과도 높았다. 거기다가 사회간접자본도 현저히 부족했던 때였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인식, 경기부양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건설경기부양책을 폈다.

60년대부터 산업화되기 시작한 마산은 물론, 1980년 독립 시()로 분리된 창원지역의 건설경기가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였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아파트의 대중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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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수출중심의 산업구조를 지향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빚은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家口)들은 주택을 마련할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도심지에 세()를 얻을 형편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름 하여 달동네라 부르는 산비탈에서 도시 빈민들은 천막이나 판자 혹은 함석을 이용해 거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인 달동네는 교통이 불편하고 상하수도나 전기시설들이 없었고, 벌통처럼 밀집한 탓에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수도와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나마 이런 식이라도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최하층 도시 빈민은 이곳에서도 세()를 주고 살았다.

<달동네 아크릴화 / 부산 해운대 한 미술학원의 작품이다>

 

3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그 일환으로 1962년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도시계획법 및 건축법, 1963년에 토지수용법과 주택자금 운용법 및 국토건설종합계획법 등을 제정하여 주택 건설을 촉진하였다.

또한 1969년에는 민간자본을 최대한 유치하여 민간주택건설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주택은행을 설립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1979년에는 토지개발공사를, 1981년에는 국민 주택기금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공공 재정이 아닌 민간재정을 투입하는 정책이었다.

경남은 1962년 이후 울산공업단지 건설과 진해4비료, 마산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창원기계공단 건설 등으로 도시인구가 급증(연평균4.7%)함으로써 주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경남도가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해가 지날수록 주택난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이후부터 한일합섬과 자유무역지역 등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된 마산지역의 택지난이 더욱 심각하였다.

<마산수출자유지역(현 마산자유무역지역) 퇴근 시간 / 1970년대>

 

이에 마산시와 민간사업자는 1967년부터 1985년까지 산호지구 외 12개 지역 623를 개발하여 부족택지 공급 및 공공시설용지를 확보하였다. 대부분 30-40평 규모의 단독택지로 분할된 이 구획정리지구 내의 택지들은 개인들에게 분양해 민간주택건설을 유도하였다.

이곳에는 조적조 1-2층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셋방을 여러 개씩 둔 다중주택형식의 주택이 대거 건설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주거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의 수와 연령의 변화로 새로운 공간이 필요해지거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셋방 한 칸이라도 놓을 요량으로 좁은 마당을 막아 블록 벽에 함석과 슬레이트를 얹어 방을 넣는 집들이 늘어났다.

이런 현상은 마산의 회원동·교방동·상남동·양덕동 등 자연발생취락지역에 많았는데 가뜩이나 집들이 빼곡했던 마을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 갔다. 그 중 상당량은 지금까지 잔존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진주시 여러 곳에서도 토지구획사업이 진행되었다.

68년에 시작된 상평 1차사업을 필두로 장대동, 서부, 칠암, 상평2, 나불천, 남강, 봉원, 상평3, 92년부터 94년까지 시행된 호탄지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토지구획사업들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토지구획사업 외에 주택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저리 융자금을 받아 초가지붕을 스레이트 혹은 기와로 개량하기도 했다.

한편, 진주시에 아파트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711121일에 세운 옥봉남강아파트(옥봉동 805-3번지)30세대 규모의 3층이었고 한 세대의 분양면적은 20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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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0 06:00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마산을 염려하는 분들이 늘 하시는 말입니다.

‘한 때 전국 7대 도시였던 우리 마산이 이제는 경남 7대 도시가 될 판이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슴 아픈 호소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산을 고향으로 둔 내 마음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마산뿐 아닙니다.
한 때 잘나갔던 도시라면 어디 할 것 없이 이런 식의 한탄 한마디는 다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목포시의회 부의장에게 들은 말인데, 목포 사람들은 지금도 ‘전국 6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한답니다.

전국 7대 도시 마산········.
어릴 때부터 많이도 들었던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전국에서 일곱 번째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 도시에 어떤 조건과 결과를 주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전국 7대 도시’란 말을 들으면서 어린 기분에 약간의 자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가 든 후,
건축가로서, 대학에서 도시학을 강의하면서, 언론사 대표로 이런저런 정보를 접하면서, 내 고향 마산이 ‘전국 7대 도시’였다는 사실에 대해 자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 동안 이 도시가 겪었던 영광과 좌절의 부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미래를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7대 도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성찰해보았습니다.


이 글은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던지는 ‘전국 7대 도시 마산’에 대한 질문과 답입니다.
행정구역을 통합하는 마당에 이런 글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통합이 되던 안 되던 마산의 문제는 마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마산도시 한복판을 관통하는 임항선 / 남루하게 방치되어 있다>

 
       <남성동 해안 / 시민들의 접근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회원천 / 부패된 물이 도시 복판을 흐르고 있다>


-마산이 '전국 7대 도시'가 된 까닭-


마산은 근대기라 일컫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외세의 파도가 이 도시를 뒤덮으면서 시작된 변화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도시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궤적들이 이 도시를 관통했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도시변화의 주역은 물론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변화는 일본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그들만의 잔치였습니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했을 뿐 다른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든 단 한 번도 공익적 관점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바라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도시는 단지 그들에게 이익을 퍼주는 식민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떠났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동포들이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 목포와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이 도시에 넘쳤습니다.
갑자기 도시가 커진 겁니다. 
내 부모님께서도 그 때 마산부두에 내려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시에 들이닥친 '귀환동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지 이를 패러디하여 '우환동포'라고도 불렀습니다.

해방 5년 후 전쟁이 나자 피난 내려 온 동포들이 또 한 번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이 도시에 넘쳤고, 도시가 또 한 번 커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피난민들을 상대로 행상을 하며 호구를 연명했습니다.
나는 일본군이 군용 마구간으로 사용하던 회원동 500번지에서 전쟁이 끝나갈 즈음 태어났습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두 번의 격랑을 거치면서 마산에 사람이 들끓었습니다.
내 노라 하는 문화예술인들도 마산거리에 허다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덕분에 얻은 도시 이미지 중 하나가 ‘문화예술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만 많았을 뿐 사람들을 받아드릴 도시기반시설은 전무했습니다. 단지 생존에 대한 욕구와 열정으로만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도시의 결정적인 변화는 60년대 후반부터 생겼습니다.
한일합섬, 수출자유지역, 한국철강 등 굵직한 산업시설들이 다투어 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마산으로 마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도시에 사람들이 넘실거렸습니다.
도시가 젊어졌고, 또 한 번 커졌습니다.

동마산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생겼으며 버스가 다닐 수 있는 간선도로가 여기저기 뚫렸습니다. 전세방 달세방이 동이 나자 너도나도 집을 지었습니다.
온 도시가 공사판처럼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조그만 설계사무소 직원이었습니다. 제도판 위에서 밤늦게까지 쉬지않고 설계도를 생산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도시의 팽창으로 남성동 창동 오동동 일대에만 모여 있던 중심상권이 분화되어 월영동과 합성동에 두 부심이 생겼습니다.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을 중심상권이 모두 받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의 규모와 소비수준이 일약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국 7대 도시’는 지금까지 말한, 해방이후 이 도시가 겪었던 격랑과 성장의 과정에서 나온 마산의 압축된 표현입니다.


     <마산이 번성했던 7-80년대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다시 생각해야될 전국 7대 도시-


나는 생각합니다,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7대 도시’가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 ‘7대 도시’의 영광과 저력이 이 도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뚜렷한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조건들이 7대였다면, 그리고 그것을 지켰더라면, 비록 사람 수는 수십대로 밀렸지만 자부심은 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 도시를 생각합니다.
지금은 도시수준이 경제력과 도시발전을 이끄는 시대입니다.
생활의 질을 따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밥공기의 크기를 보지만 배가 불러지면 쌀밥 보리밥을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의 여러 도시들이 도시를 확장보다는 삶의 질을 우선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오두막에서 맑은 물만 바라보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맑은 물이 돈이 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마산에 생산시설이 적어 인근 도시로 인구가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산시설만으로 마산사람들이 떠났다고만 보면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2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이해 못한 탓입니다.
미국의 자동차도시 디트로이트의 쇠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도시적 상황은 방치한 채 생산시설만 있으면 발전된다는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80년대 쯤 주장해야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산업시설과 도시환경이 동반되어야하는 시대입니다.

도시환경에 대한 대책 없이 생산시설만 유치하면, 그것 때문에 인구 100명 늘어날 때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110명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산업이 도시를 만드는 시대에서 도시가 산업을 만드는 시대라는 사실을 입증한 일본의 가나자와를 비롯해 영국의 밀턴케인스, 브라질의 꾸리찌바, 이태리 볼로냐와 라벤나,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등 세계의 유수한 도시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가 다시 ‘전국 7대 도시’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만 되면 한없이 기쁘겠지만 그러기에는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것 같고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그래서, 이 글을 빌어 ‘신(新) 7대 도시’를 감히 제안합니다.

양이 아니라 질적인 ‘7대 도시’로 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람 수가 ‘전국 7대’가 되기는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을 ‘전국 7대’로 높이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교육, 문화, 예술, 환경은 물론이고 공기, 인심, 물맛, 거리와 가로수, 공원, 경치 등 사람 사는데 정작 필요한 ‘도시수준이 7대’가 되도록 만들자는 말입니다.

임항선을 그린웨이로 만들어 키 큰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걷고,
파란 물 바닷가 잔디 위에 벤치가 놓이고 자전거가 달리고,
유모차를 밀고 나갈 꽃 가득한 공원이 도시 곳곳에 들어서고,
곧 추진될 생태하천으로 시내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른다면········.
첨단의 로봇랜드가 머지않아 들어온다니 금상첨화일 테지요.

이렇게만 된다면 이 도시를 떠난 사람 중 다시 돌아 올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좋은 도시에 좋은 산업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도시에서 입증된 사실이니까요.


               <해안도시의 특성을 잘 살려 개발한 벤쿠버>


‘도시수준 전국 7대’
얼마나 행복하고 희망 가득한 미래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못해낼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슴아파말고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찾아야합니다.
해낼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면 흩어진 힘도 모을 수 있습니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는 뼈아픈 호소가,
‘양의 7대 도시에서 질의 7대 도시로 가자’라는 희망찬 외침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이 도시에 살았던 선인들이 양적인 ‘7대 도시’를 물려주었으니, 우리는 질적인 ‘7대 도시’를 후손에게 물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도시수준 7대’는 ‘경제수준 7대’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행복수준 7대’로 이어집니다.
구호 속의 일류도시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일류도시로 이어질 것입니다.

소년 시절, 청년시절,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 도시에서 수 없이 들었던 ‘전국 7대 도시’라는 말이 우리 다음 세대에게 똑 같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드리는 간절한 제안입니다.

인구는 ‘7대 도시’가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은 ‘7대 도시’만이 아니라 힘을 모아 ‘1대 도시’까지 갈 수 있는 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마산사랑모임’에서 낸 『마산의 희망 마산의 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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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송순호 2009.10.20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의견에 적극 동감합니다.
    그런 새로운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수고하십시오.

    • 허정도 2009.10.20 14:44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죠.

  2. 박력 2009.10.21 13: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지금은 수원에 살고 있지만 바다를 보고 살았던 그때의 감동이 살아지지 않는군요..

    • 허정도 2009.10.21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좋은 계절, 즐겁게 보내십시오.

  3. 유림 2009.11.17 19:3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글을 따라 왔지만..
    마산을 생각했던 저의 마음 같습니다.

    너무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마산을 지켜낼 방법은 없을까...생각만 했는데..

    정겨운 도시 마산을 꿈꿉니다.

    • 허정도 2009.11.18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리더의 생각과 판단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각성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민 참여 없이 좋아진 도시는 없거든요

  4. 2010.05.24 01:2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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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2 창원 신도시에 주거용 건물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

<이번 포스팅은 창원 의창구 대원동에 재건축 중인 '꿈에그린' 아파트 부지(아래 그림의 붉은 밑줄친 부지)에 존재했던 현대사원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아파트들에 대한 내용이다. '마을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리했던 글이다.> 목차..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