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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4) - 강점제3시기

<토지 이용>

3) 다섯 문헌에 나타나는 동(洞)별 개체 건물용도

여기서 말하는 다섯 문헌은 馬山市史, 馬山商工會議所百年史, 馬山と鎭海灣, 馬山案內, 경상남도통계연보 등을 말합니다

 

이 다섯 문헌을 분석대상으로 선택한 기준은 타 문헌에 비해 필요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타의 다른 기준은 없었습니다.

각 시기의 필지별 건물 용도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부득이 마산관련 각종 문헌에 단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개하는 문헌의 성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양에서 우선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시기별 용도에 대한 구분이 되지 않아 중복이 되거나 부정확 혹은 누락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자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이 통계가 당 시기의 각 지역 건물 용도의 양에 대한 표본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토지이용 구조를 파악할 소재로서 일정한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표가 이런 방법으로 집계한 통계표인데 용도는 상업용과 공업용 건물만으로 나누었습니다. 세분하여 교육 및 공공시설까지 나눌 수도 있었지만 교육시설의 경우 그 숫자가 많지 않아 직접 표기가 가능하므로 제외하였고 공공시설은 업무용으로 보아 상업시설에 포함시켰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합계의 의미는 크게 없습니다. 각 문헌에서 찾아낸 시설들이 중복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것 중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통계치를 만드는 것은 이 자료를 표본적 성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시설에 포함한 용도는 점포․인쇄소․교통관련시설․사무실 등 업무시설․공공업무시설․경매장․시장․의원 등입니다. 공업시설에는 제조공장․양조장․조선소․철공소․제재소․항만․창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업시설의 분포를 보면 원마산은 남성동을 중심으로 창동․부림동․수성동이 밀도가 높았고 신마산 방면은 두월동과 월남동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업시설은 상업시설에 비해 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공업시설의 특성상 숫자에 비해 규모가 보다 규정적이기 때문에 지역 구분에 있어서 숫자개념은 적절한 접근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출처

馬山市史

商工會議所

百年史

馬山と

鎭海灣

馬山案內

慶尙南道

統計年報

합계

지역

위치

1

2

3

1

2

3

1

1

2

3

1

2

3

남성동

6

2

3

2(2)

 

2(1)

3

110(7)

14(1)

2(2)

 

1(1)

4

 

20(1)

7(4)

10

112(9)

창 동

1

 

1

1(2)

 

 

 

41(1)

2

 

 

 

(1)

1(1)

3

 

1(1)

43(4)

중성동

1

 

1

1(2)

 

 

 

12(3)

 

 

 

 

1

(1)

1

 

2

13(6)

수성동

1

 

1

2

 

 

 

16(1)

5(1)

1(2)

 

 

 

 

6(1)

1(2)

1

18(1)

서성동

1

1(1)

 

 

 

 

(1)

6

6

 

 

 

 

 

8

1(1)

(1)

6

동성동

 

1

 

1

 

 

1

15(1)

3

 

 

 

1

 

3

1

2

15(1)

부림동

 

 

2

1

 

(1)

 

41(5)

 

 

 

 

 

 

 

(1)

2

42(5)

추산동

1

 

(1)

 

 

(2)

7(1)

7(4)

2(1)

2(2)

1

 

 

 

4(1)

2(4)

7(2)

7(4)

오동동

 

 

1

(2)

 

 

 

14(5)

 

 

 

 

 

 

 

 

1

14(7)

상남동

1

 

1

 

 

 

 

4(8)

 

 

 

 

 

(1)

1

 

1

4(9)

성호동

 

 

 

 

 

 

 

1

1

 

 

 

 

 

1

 

 

1

교방동

 

 

 

(1)

 

 

 

(1)

 

 

 

 

 

 

 

 

 

(2)

소계

12

4(1)

10(1)

8(9)

 

2(4)

11(2)

267(36)

33(3)

5(6)

1

1(1)

6(1)

1(3)

46(3)

12(12)

27(4)

276(48)

중앙동

1

(1)

(2)

1

 

(1)

(3)

7(1)

9

1(1)

 

(1)

2

 

10

1(4)

2(5)

8(1)

1가

 

 

2

2

 

1

 

17(2)

6(1)

1(2)

 

 

 

 

6(1)

2(2)

2

19(2)

2가

 

 

1

 

 

 

(1)

3(1)

4(2)

2(2)

 

 

 

 

4(2)

2(2)

1(1)

3(1)

3가

 

(1)

 

1

 

 

 

(1)

 

 

 

 

 

 

 

(1)

 

1(1)

장군동

1

 

(1)

(1)

 

 

(2)

1(2)

8(1)

(3)

 

 

(1)

 

9(1)

(3)

(4)

1(3)

1가

 

 

(1)

 

 

 

(1)

2(1)

8(5)

(2)

 

 

 

 

8(5)

(2)

(2)

2(1)

2가

 

 

 

 

 

 

 

2

2(2)

1(2)

 

 

 

 

2(2)

1(2)

 

2

3가

 

 

 

 

 

 

 

5

3

(2)

 

 

 

 

3

(2)

 

5

4가

 

 

 

 

 

 

 

1(1)

2(2)

(1)

 

 

 

 

2(2)

(1)

 

1(1)

5가

 

 

 

 

 

 

 

2

1

(2)

 

 

 

 

1

(2)

 

2

신포동

 

 

 

(1)

 

 

(1)

3(1)

 

 

 

 

 

 

 

 

(1)

3(2)

자산동

 

 

 

 

 

 

 

1

 

 

 

 

 

 

 

 

 

1

완월동

 

 

 

 

 

 

 

1

1

 

 

 

 

 

1

 

 

1

월포동

 

 

(1)

(5)

 

 

 

4

5

(1)

 

 

 

 

5

(1)

(1)

4(5)

신흥동

 

 

 

 

 

(1)

 

1(1)

(1)

(2)

 

 

 

 

(1)

(2)

 

1(1)

소계

2

(2)

3(5)

4(7)

 

1(2)

(8)

50(11)

49(14)

5(20)

 

(1)

2(1)

 

51(14)

6(25)

5(14)

54(18)

두월동

2(1)

 

 

1

 

 

 

4

5

 

 

 

 

 

7(1)

 

 

5

1가

 

 

 

 

 

 

 

13(1)

17(1)

2(1)

 

 

 

 

17(1)

2(1)

 

13(1)

2가

 

 

 

 

 

 

 

5

37(4)

4(1)

 

 

 

 

37(4)

4(1)

 

5

3가

 

 

 

 

 

 

 

2

11(1)

 

 

 

 

 

11(1)

 

 

2

신월동

 

 

 

 

 

 

 

 

(1)

 

 

 

 

 

(1)

 

 

 

월영동

 

 

(1)

 

 

 

 

1(1)

1(1)

 

 

 

 

 

1(1)

 

(1)

1(1)

대성동

 

 

 

 

 

 

 

 

 

1

 

 

 

 

 

1

 

 

1가

 

 

 

 

 

 

 

 

 

 

 

 

 

 

 

 

 

 

2가

 

 

 

 

 

 

 

 

 

 

 

 

 

 

 

 

 

 

반월동

 

 

 

 

 

 

 

7

(1)

 

 

 

 

 

(1)

 

 

7

월남동

2

2

(1)

 

 

 

(1)

1

6

 

 

 

1

 

8

2

1(2)

1

1가

 

 

 

 

 

1(1)

1

4

3(2)

 

 

 

 

 

3(2)

1(1)

1

4

2가

 

 

 

1

 

 

 

7

9(3)

2(1)

 

 

 

 

9(3)

2(1)

 

8

3가

 

 

 

 

 

 

 

7

24(1)

(1)

 

 

 

 

24(1)

(1)

 

7

4가

 

 

(1)

 

 

 

 

1

1

1(2)

 

 

 

 

1

1(2)

(1)

1

5가

 

 

 

 

 

 

 

 

2(1)

(1)

 

 

 

 

2(1)

(1)

 

 

창포동

1(1)

1

(1)

(1)

 

 

 

1(2)

7

 

 

1

(1)

 

8(1)

2

(2)

(1)

1가

 

 

 

 

 

 

 

 

3

1

 

 

 

 

3

1

 

 

2가

 

 

 

 

 

 

 

(1)

1

 

 

 

 

 

1

 

 

(1)

3가

 

 

 

 

 

 

 

(3)

1

(1)

 

 

 

 

1

(1)

 

(3)

홍문동

(2)

 

 

 

(1)

 

 

1(1)

6(6)

1(4)

 

 

 

 

6(9)

1(4)

 

1(1)

대외동

 

 

 

 

 

 

 

(1)

 

 

 

 

 

 

 

 

 

(1)

청계동

 

 

 

 

 

 

 

 

1(2)

 

 

 

 

 

1(2)

 

 

 

신창동

(1)

 

(1)

 

(1)

 

(1)

3(1)

1(1)

1(1)

 

(1)

1

 

1(3)

1(1)

1(2)

3(1)

평화동

 

 

 

 

 

 

 

 

1

 

 

 

 

 

1

 

 

 

문화동

 

 

 

 

 

 

 

 

 

 

 

 

 

 

 

 

 

 

대창동

 

 

 

 

 

 

 

 

 

 

 

 

 

 

 

 

 

 

화영동

 

 

 

 

 

 

 

 

 

 

 

 

 

 

 

 

 

 

유록동

 

 

 

 

 

 

 

 

 

 

 

 

 

 

 

 

 

 

대내동

 

 

 

 

 

 

 

 

 

 

 

 

 

 

 

 

 

 

해운동

 

 

(1)

 

 

 

 

1

 

 

 

 

 

 

 

 

(1)

1

소계

5(5)

3

(6)

2(1)

(2)

1(1)

1(2)

58(11)

137(25)

13(13)

 

1(1)

2(1)

 

142(32)

18(15)

3(9)

6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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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1920년대는 마산포에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삼성생명에서 대신증권까지로 이어진 도로가 아직 매립이 안됐던 동굴강까지 이어졌다.

④ 1913년 신마산에서 조창을 관통하며 개설된 현 남성동파출소 앞 도로는 그림4-20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정차장을 끝으로 막다른 형태의 도로였으나 이 도로가 1927년 오산선창이 있던 오동동 해안까지 연결 개통되었다.

⑤ 토지이용도의 우측 상부 모퉁이, 즉 현재의 「프라자일번가」 건물 앞에서 오동교까지에 이르는 도로가 확장되었다.
이 도로공사를「부군연선도로개수(府郡連線道路改修)」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의 마산부 경계가 오동교까지였고 오동교를 넘어서면 창원군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⑥ 1927년에는 동굴강이 부분적으로 메워지면서 대신증권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었다.

⑦ 같은 해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 해안으로 연결된 도로와 남성동파출소에서 해안까지 연결된 도로가 이어졌다.

⑧ 1930년에는 오동동 파출소 앞을 남북으로 지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⑨ 토지이용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현 로얄호텔에서 전(前) 북마산파출소에 이르는 도로가 1924년에「구마산시구개정인가(舊馬山市區改正認可)」신청을 하여 이후 시행되었다.

이 도로공사는「停車場連線道路新設」이라고 했는데 이 도로가 교차하고 있는 현재의 육호광장이 바로 구마산 역(철도정차장)이었으며 이 길이 북마산 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시 날로 늘어나는 구마산 역의 통행량 때문에 도로가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기록보존소 문서「도시토목공사(구마산시개정인가)」의 「문서번호 87-702, 필름번호 87-747」에 의하면, 이 도로 개설계획을 하는 이유에 대해 ‘구마산 시가는 대체로 도로가 협소하고 꾸불꾸불한 것이 심하며 차마(車馬)가 다니는 노선이 겨우 2-3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창원군 웅남면에 통하는 부군연선도로(府郡連線道路) 연장 309칸(間) 및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과의 연선도로(連線道路) 연장 207칸(間)은 그 일대의 교통상황을 고려해 볼 때 시공이 급하다고 판단되어 1924년 실행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서 도로의 세부적인 구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도로는 위치상 당시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을 연결하는 도로였는데 이를 보아 두 역세권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도로가 신설 혹은 확장되면서 도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위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도로 개설 이후 토지 소유권 변화가 생겼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①에서 설명한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변(현재 마산에서 가장 번화한 도로 중 하나)의 일본인 소유 대지가 1920년에 비해 1930년의 토지이용도에서는 늘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의 원마산은 근대적 도로의 확산기였습니다.

1910년대가 창동과 남성동 지역에 한해서 도로망이 건설된 시기였다면 1920년대는 중성동․오동동․동성동으로 도로망이 확산되면서 원마산 외곽으로 계획도로가 뻗어나간 시기였습니다.

이로써 이전까지 근대식 도로로 구획된 지역의 외부에 머물렀던 동성동이 구획 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동성동에서 오동동으로 연결되는 지역, 즉 현재의 오동동파출소 부근까지 원마산의 도심권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회사령 철폐 이후 급증한 도시인구에 부응하고 자동차라고 하는 유통기구에 적절하도록 도시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앞에서 이미 밝힌바와 같이 1910년대 초반에 매립을 비롯한 도로개설사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된 원마산에는 그 뒤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수성동에 일부 도로의 폭이 확장된 것 외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23년 이후부터 급속히 도로개설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유는 당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구개정사업 때문이라 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마산시사』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서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산부윤이던 사도리구(寺島利久)가 원마산의 도로망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원마산 도로 개설공사를 시행하였으며 이 시기가 원마산 도로 개설의 절정기였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마산시사』,『마산개항백년사』,『마산관련 논문』 등 여러 자료에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이 주장의 근거는 추방사랑이『마산항지』에서 「마산부윤으로 사도리구 씨가 부임한 이래 도시가 현저히………그의 치적은 영구불멸…(馬山府尹寺島利久氏の着任以來の顯著なる․․․․․․寺島府尹の治積は永久不滅たり…」라는 내용 때문입니다.

물론 이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920년도의 토지이용도와 1930년도의 토지이용도를 비교해 보면 이미 1910년대에 이미 가장 중요하고도 중심이 되는 도로가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동과 남성동지역에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고 이 도로들이 매립지역의 신설도로와 연계되어 격자형의 도로구성이 시작된 것이 1910년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1920년대를 도로개설 절정기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많다고 봅니다. 도로개설의 절정기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1910년대에 개설된 근대 도로망이 확산된 시기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1930년 기준으로 마산포의 도로율은 23.24%로 1910년의 14.57%, 1920년의 21.42%에 비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부윤 寺島利久의 의지로 시행된 원마산의 집중적인 도로망 확산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위 도면에 나타난 지역의 현재 모습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2012/0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012/03/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2012/03/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2/03/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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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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