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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혹은 소위 조선인 연맹 이사장이니 또는 동·반장이란 감투로 크게 우쭐거리던 천식배(淺識輩)들의 강제 동원에 시달려서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값싼 친일배가 아니면 경찰 끄나풀들이 참배치 않은 사람을 밀고하여 욕보이기도 했다.

이외에 이주회(唎酒會 / 술맛 콘테스트 ; 옮긴 이)가 있을 때는 부내(府內)의 양조장과 다수 지방 유지들이 몰려와서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 앞에서 성대한 제를 드린다. 이리해서 세월은 흘러 만주, 지나사변을 일으키자 신사는 물론 조선인 전국 사찰에까지도 타도(打倒), 귀축영미(鬼畜英美) 기무운장구(祈武運長久)를 대서특필하였고, 조석으로 염불하였던 것이다,

전국 각지 일제히 기독교 신자들만 꼬집어 신사 참배를 폭력으로 임하였으나 백중구구(百中九九)는 굴하지 않았다.

마산도 예외일 수 없고 헌병대, 경찰서 고등계에서 불굴(不屈)하는 기독교계 학교는 모조리 폐쇄령을 내렸고, 신자들은 걸리는 대로 고문과 투옥으로 불행하게 옥사한 신자도 상당수였던 것이다.

마산 신사는 지금 제일여중·고가 되어 있다.

 

<강점기의 신사 정문과 현재의 제일여중고 정문>

 

 

26. 도리이(鳥居)를 닮은 문

 

마산 신사 정문으로 향하는 참도(參道)에 당시 조선 총독 제등실(齊藤實)의 휘호로 높은 석조 도리이 좌우 기둥에 ‘봉납(奉納)’이란 음각이 있었고 정문에도 도리이가 있었다.

종전 직후 얼마 동안은 수십 주의 벚꽃나무가 온존(溫存)하였으나 어느덧 도끼날의 서리를 맞아 자취를 감추었고, 도리이도 무참히 도양(倒壤)되었다.

진정한 배일 민족 사살의 발로라고 할까? 신사 본전은 지금은 윤환(輪奐)의 미를 자랑하는 모 여자 중고교가 자리 잡고 있다.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인데 그 정문은 어떠한가를 한번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도리이란 한국의 홍문(紅門)과 흡사하여 한국의 경우로 말하면 국가의 고관이나 왕과 왕손의 능에 한하여 세워지는 것이지만, 이와 달리 일본의 도리이는 일본 독특한 신을 상징하여 이를 숭앙하기 위하여 세워지는 것이며, 일본인들은 해외에 살더라도 그 집단권에는 반드시 규모 여하를 막론하고 신사를 조영(造營)하여 그 앞에 도리이를 건립함으로써 대화혼(大和魂)을 함양하게 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출입하는 전기(前記) 학교의 정문이 선입관 때문인지는 모르되 도리이의 모양을 닮았다는데 있어 구안자(具眼者)로 하여금 다소 회의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날 기존하던 도리이라면 과거를 회상하여 수긍이 갈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30년이 가까운 오늘에 와서는 일본의 잔조(殘糟)란 모조리 불식되고 없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록 신사의 본전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 도리이를 너무도 닮은 문이 과거의 신사를 연상하게 함은 심히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식민지였던 암흑시대, 무수한 조선인,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신사 참배 문제로 하여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고초를 상기해 보았다면 필자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신사 앞을 통과할 때 직립부동(直立不動)의 자세로 최경례(最敬禮)를 올리지 않으면 일경(日警)에 붙들려가서 매를 맞아야 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의 우상 숭배 배척 관념에서 오는 신사 불참배 문제는 전국에 비화(飛火)하여 최고형을 받고 옥사한 목사의 순교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지 아니한가?

가까운 일본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각 소·중학교정에 있던 덕천(德川)막부 시대의 이궁존덕(二宮尊德)이나 충군의 권화(權化)라는 남정성(楠正成)의 동상 같은 것도 모조리 철날(撤捏)하였다는 판국인데, 하물며 한국의 남단 마산의 한 학원에서 일본 패전 전의 복고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처사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교 당국의 좀 더 적극성을 띤 도의적인 관여가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현재의 정문이 일본 수만처(數萬處)에 현존하는 도리이 중 명신신사(明神神社)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하여 둔다.

(주 ; 위 제일여고의 설립자 이형규 학원장에 의하면 이 문은 도리이를 본뜬 것이 아니고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 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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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9) - 강점제3시기

오늘도 그림 석장 소개합니다

 

41. 합성리 정동행성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창원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성리 정동행성지는 바로 그 합포성을 말합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어느 주택의 담벼락으로 아직 남아 있는 합포성의 성곽입니다.

 

42. 월영대

월영대는 경상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현재 경남대학교 정문 옆 진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습니다. 
이 곳에는 현재 높이 2.1미터, 폭 35
센티미터의 ‘월영대(月影臺)’
새긴 화강암 비석이 있는데 최치원 선생이 직접 쓴 글입니다.

 

43. 마산신사

마산신사 정문 사진입니다.

『마산항지』의 기록에 의하면 마산신사는 1909년 일본인 홍청삼이 ‘거류민으로서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 으로 건립했다고 합니다.

위치는 바로 지금의 제일여고 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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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병원, 방송국, 신사>

마산 최초의 의료기관은 1904년 덕영오일(德永吾一)이 설립한 사립마산병원인데 1925년 도립마산의원으로 변경된 이후 1926년 신축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다음 사진입니다.

 

 

1941년 당시 마산의사회 회원은 12명이었습니다. 이 중 한국인이 운영하는 의원은 삼성의원․학산의원․순천의원과 창동의 동인의원․중앙의원․평안안과의원과 중성동의 대동의원 그리고 수산의원․삼광의원 등 9개의 의원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의사가 경영한 의원은 대곡(大谷)․전원(前原)․수상(水上)의원 등 3개소였습니다.

강점말기 마산의 치과의사는 한국인이 4명이었으며 일본인 치과도 이와 비슷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치과에 환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강점 말기, 마산에도 방송국이 설립되었습니다. 조선방송협회에서 노비산에 자리잡고 있던 호주선교사의 건물을 빌려 마산방송소를 1942년 2월 20일 개소한 것이 그것입니다.

출력은 50w 밖에 안되는 미약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마산 최초의 방송국입니다.

1944년 1월에 마산방송국으로 승격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일황의 항복방송 중계를 끝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1909년에 들어섰던 마산신사(神社)는 해방되고 난 뒤인 9월 4일의 승신식(昇神式) 때 없어졌습니다.

해방 후 전국의 신사 중 방화 및 파괴를 당한 곳도 있으나 마산 신사는 해방 다음 달인 9월 4일 승신식에서 품위있게 불태워져 37년간의 위용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마산신사 사진과 마산신사 착공할 때 제를 지내는 장면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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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셔버리자. 공출미는 우리 마을의 공동책임이니 하루라도 빨리 공동출하합시다" 라는 문구가 있네요.

 

 

그런가하면 마산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기업 중 조선업․철공소․방직공장 등 주요 산업들이 군수산업체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악랄한 식민 정책들 때문에 전쟁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휘발유로 움직이던 택시나 버스 등의 모습은 사라졌으며, 마산에는 신마산역에서 구마산역을 거쳐 북마산역으로 운행되던 시내버스 대신으로 마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화물자동차와 시외버스는 목탄을 연로로 하는 목탄차나 카바이드차로 바뀌었습니다.

전쟁 지원을 위한 학생 동원령 이야기도 많습니다.

평생 지역사 연구에 헌신하신 고 이학렬 선생님께 직접 들은 이야깁니다. 이야기 몇 토막을 옮겨보겠습니다.

강점 말기, 마산의 두 남자중등학교였던 마산중학교와 마산상업학교에 동원령이 자주 내렸는데 한국인 학생이 많았던 상업학교 학생들에 대한 강제 노역과 군사훈련이 더 많았고 강도도 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노역은 월영동 중포병대대 고사포 진지공사․마산중앙부두의 하역작업․철공소의 선반공․군수공장 건설노동자로 다양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천비행장까지 끌려가 노역을 한 학생도 있었답니다.

덧붙여서, 1년에 한두 켤레씩 배급받는 일본식 작업화를 기우는 노상수리공들이 번화가인 창동 거리 여기저기에 있었노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압통치 속에서도 마산의 항일운동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간단한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937년 12월 17일 중일전쟁 중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마산의 일본 관리들은 승전을 축하하는 제등행진을 벌이도록 시내의 학교와 각 단체에 지시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학생들과 단체 대표들은 시내 행진에 나섰으며 대열이 현 제일여고 자리에 있던 신사 앞을 지날 때 모두 머리를 숙여 참배했습니다.

이 때 신사 앞을 지나던 창신학교 학생들이 참배를 하지 않고 머리를 든채 행진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악명 높았던 남성동 파출소장 시마다(島田) 순사부장이 이를 제지,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창신학생들은 참배강요를 끝내 거부, 경찰과 2시간 이상 대치했던 사건입니다.

식민지 시대 창신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항일운동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하나 둘 쌓여 결국 조선총독부는 결국 창신학교 학생들을 공립 마산보통학교로 전학시키고 1939년 7월 20일자로 폐교 시켰습니다.

이 외에도 비록 그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신간회 마산지회를 비롯한 민족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지하조직의 확산 등 마산에서의 민족 사상의 고취와 배일사상의 확산을 위한 운동은 강점기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도시변천이 글의 주제인 까닭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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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찬주 2013.01.23 11:2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기사. 확실히이 웹 사이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2.07.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역 광장, 신사, 월영대 사진>

오늘은 1920년대 초에 마산의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엽서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우선 이 엽서들이 들어 있었던 봉투를 보겠습니다. 반도의 낙토, 마산명소 그림엽서, 동경당 발행(半島の樂土 馬山名所繪葉書, 東京堂發行)이라고 적혀있고, 벗나무와 마산만과 마산 전경이 그려져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역이 있었던 역전광장 사진입니다.

광장 제일 안쪽에 있는 단층 건물이 역 청사인데,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지금의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우체국입니다. 건물은 다시 지었지만 지금도 저 자리에는 합포우체국이 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신사입니다.

제일여자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는데, 마산공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산공원 마산신사’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건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만, 제일여고 교정에는 신사가 있었을 당시에 심어 놓은 나무 몇 그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세운 월영대 터입니다.

왼쪽에 돌비석에 月影臺라고 새긴 글은 고운 선생 친필이라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위 세 사진을 찍었던 자리의 현재 위치입니다. 역전광장이 뿕은 색, 마산신사가 푸른 색, 월영대는 노란 색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2012/0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2012/03/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9) - 강점제2시기

2012/03/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2/03/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2012/03/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2012/04/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2012/04/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4) - 강점제2시기

2012/04/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2012/04/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2012/04/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2012/05/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8) - 강점제2시기

2012/05/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2012/05/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2012/05/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1) - 강점제2시기

2012/06/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2) - 강점제2시기

2012/06/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2012/06/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4) - 강점제2시기

2012/06/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5) - 강점제2시기

2012/07/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6)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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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2.07.09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참으로 귀한 사진 건졌구려.
    진품을 함 봅시다. ^^

  2. 스튜던트 2012.08.10 10: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엽서 봉투에 그려진 마산만만 봐도 마산인걸 알것 같아요/

2012.01.0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문화정치가 시작되다>

3․1운동을 정점으로 시작된 문화정치가 마산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마산에서도 소위「문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운동이란 실업과 교육 장려를 맨 앞자리에 내 세워 회사와 학교의 설립과 확충을 통하여 대중을 조직화하고 강연회․토론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서구적 근대의식을 계몽한다는 사회운동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20년 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을 표방한 마산구락부가 300여 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참여자 중 간부들의 상당수가 원마산 어시장의 객주를 비롯한 상업자본가였습니다.
이들은 세대와 이념 전력 등의 차이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에 많은 힘을 쏟아 그야말로 문화운동을 실감케 했습니다.

이 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마산의 경제인들은 학교설립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표적인 사업이 1922년에 수학연한 3년제 실업계학교로 설립한 마산공립상업학교의 설립을 지원한 일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마산학원(마산구락부에서 1920년 설립), 배달학원(불교진흥회에서 1921년 설립), 월영노동야학교(신마산청년회에서 1921년 설립)도 들어섰습니다.

이 밖의 교육시설로 1924년에는 의신유치원이 개원되었고, 1915년 개교했던 마산공립실과여학교는 1921년 마산고등여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마산고등여학교는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1922년 설립된 마산공립상업학교 / 전 마산상업고등학교, 현 용마고등학교>

                      <1921년 개교한 마산고등여학교 / 현 마산여자고등학교>

교육운동 뿐만 아닙니다.
19세기 말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일본에서도 전개된 폐창(廢娼)운동도 마산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
1924년 마산청년회에서 미신타파 및 공창폐지운동을 한 것이 그것입니다.

마산청년회는 일본인 송본다장(松本多藏)이 설립한 민간단체로, 회원 수가 많았고 회원간의 친밀도도 높았다고 합니다. 명치절에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벚꽃이 필 무렵에는 마산시내에 벚꽃 장식을 하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일본인들의 사회봉사 단체였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20일자 3면 7단에 「마산청년회, 미신타파․공창폐지 결의」라는 제목으로 마산청년회의 활동이 기사로 나와 있습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적 추세였던 사회주의자운동과 노동운동 및 청년운동이 마산에 그 첫 선을 보인 것도 이 때였습니다.

개항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일본인의 포교에 힘입어 1920년대에는 상당한 규모와 종류의 일본 종교가 마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마산신사(1909년 3월)를 필두로 조동종 무학산복수사, 서본원사파 승원사, 마산정토종 포교소, 일련종 묘국사, 환주산 홍법사, 일련정종 등이 그것입니다.

                                             <일본 사찰 복수사>

이처럼 문화운동이 활발했지만 1922년 후반부터 마산학원의 경영난과 기독교회의 보수화, 특히 1920년경부터 시작된 전후 불황이 지역경제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조금씩 침체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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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합포만 내려다 본 일본 신사(神社)>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산항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청삼은 ‘거류민으로서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 으로 신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산이사관이던 삼증(三增)이 해관장의 사택 예정지를 신사 부지로 내놓았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일여고 교정입니다.

도시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았던 자리로 아래 그림의 위치입니다.
밑의 사진은 1910년대에 발간된 마산지도에 나타난 '마산신사'입니다.

 

 

 


일제기 마산신사 전경입니다.


 

 

신사건립을 위해 1909년(명치 42) 2월 8일 마산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일본인 유지 백여 명이 모여 마산신사 창건위원 10명을 선출하였습니다. 그 중 전전(前田) 민장이 위원장에, 뒷날 『마산항지』를 펴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지진제(地鎭祭)의 신관(神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지진제는 3월 3일 삼증 이사관, 전전 민장, 홍청삼 민회의장, 민회의원, 상업회의소의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으며 전전 위원장은 신사 창건기부금 5천원의 모금계획을 이사관에게 신청, 인가를 얻어 즉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신사 지진제를 거행하는 장면입니다.

 

 


공사는 마산에 거주하던 말광기오랑(末光磯五郞)이라는 장인이 맡았습니다.
공사장에는 욕조를 두어 직공들과 함께 매일 아침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산신사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봉안한 본전 외에 술 만드는 신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도 있었습니다. 송미신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36년에 증설하였습니다.
1920년 대 이후 번성했던 마산의 주류산업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 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제일여고 주변에는 당시의 신사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문 안과 바깥 돌계단이 옛 신사입구 계단입니다. 이 돌계단은 일제기 마산포 주민들이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정의 정원석으로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 사용되고있으며,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이 음각된 돌도 박혀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기 마산신사 입구 모습과 현 제일여고 정문 사진입니다.

 



정문 앞 계단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제일여고 교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모방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에서 설립자인 이형규 이사장이 제일여고 교문은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수당문)을 모방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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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0.11.29 20: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 못보던 사진도 올라왔군요. 특히 지진제 사진....
    어디서 구하셨나, 저 진귀한 사진을.....
    그리고 추방사랑의 일본훈은 '수와(Suwa)입디다.

    • 허정도 2010.11.29 21:37 신고 address edit & del

      우리가 몰랐던 자료도 참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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