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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 변태성 고리업자, 3. 포주의 횡포

2. 변태성 고리업자

시내 서성동(幸町) 일인 간수(看守)부락에 천기(川崎) 모(某)라는 60대 고리대금 업자가 있었다.

집에는 6개월 혹은 길면 1년마다 젊은 여자가 교체된다. 직업은 조선인을 상대하는 고리대금업이다.

일본 은어(隱語)로 고리업이나 창기업(娼妓業) 혹은 호색자(好色者)를 시계의 4시 40분 혹은 8시 20분이라 하여 위의 눈꺼풀이 좌우로 처진 때문에 그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이라고 한다.

천기(川崎)의 눈도 그러하였다. 피부 빛깔은 검붉어서 고리업자로서 일목(一目) 직감된다.

고리업자나 전당업자는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음음(陰陰)함은 상통하여 채무자가 기일을 어길 때는 인정사정 헤아리지 않고 즉각 법적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천기(川崎)의 경우는 다르다. 채무자가 이자나 원금을 환불하려고 하여도 출입구가 밤낮 밀폐되어 있으므로 자연히 기일이 초과된다. 이자가 하루만 늦어도 노발대발이다.

그의 마음보를 아는 채무자들은 이웃 일본인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문은 잠겨 있어도 실내에는 천기(川崎) 노(老)와 40대의 여자가 운우의 극치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자기들의 흥분에만 몰입한다.

40대의 여성으로서 70대의 노옹(老翁)에게 최대의 봉사를 하고 사지가 굴신도 못할 정도로 늘어졌건만 그 자는 매양 부족을 참지 못하여 궁리 끝에 기머리등(성호동)에 사는 조선인 홀어미를 알게 되었으나 홀어미도 처음에는 억지 봉사를 하였다.

도수가 한이 없어서 실증을 내자 즉석에서 지게꾼을 불러 자기가 사준 쌀과 나무를 뺏아갔다는 이야기다.

그 후에 들려온 말은 천기(川崎)에 시달리다 못견디어서 떠나는 여자가 “여자로서 도저히 배겨낼 수 없는 것은 반구속 상태로 잠만 깨면 행동을 개시하는데 일일 평균 5회 내지 6회 그것도 부족하여 외식(外食)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변태더라”고 이웃 일녀(日女)들에게 울면서 실정을 토로하였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채무 기일이 일실(逸失)되고 담보한 가옥전지(家屋田地)를 경매당한 피해자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래 그림의 국내 대부업계 1, 2위가 일본 기업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대부업체의 이자율도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다 / 아이엠피터 자료)

 

3. 포주의 횡포

구마산 수성동(壽町) 일대에 1915년 경부터 일본에서 가장 하급층에 속하는 자들이 동네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농촌 빈민촌의 딸자식을 마구 싸구려 식으로 사들여 년계(年季)를 제멋대로 정해 가지고는 창루업(娼樓業)을 시작했는데 이 딸아이들의 대부분은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배짱 검은 뚜쟁이 놈에게 속아서 따라가 보면 인육시장이란 함정이었다.

이곳에 한번 몸을 빠뜨리면 몸을 움직일수록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 갈 분 영 헤어나지를 못한다.

부채라는 것도 화장품대, 의복대, 검진비 등등을 공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3, 1제로 분배를 하니 상환할 길이 요원한 것이다.

최초에 젊어지게 되는 몸값이라는 것도 용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16,7세로부터 35,6세까지의 여인들로서 평균 150원에서 200원이 제격이고 많은 것은 7,8천원 짜리도 있다고 한다.

계약 연한은 3년에서 5년인데 이것이 대충 인육시장의 시세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기에 흡혈귀인 포주를 상대로 단연 분기, 각성한 18세의 소녀가 있었으니 도변(渡邊)이란 일인이 경영하는 수루(壽樓)란 청루(靑樓)에 속아서 팔려온 최모 양은 몇 푼 안되는 몸값으로 5년 계약을 강요당한 채 고통을 겪어오다가 용감히 포주에게 선언을 하고 마굴(魔窟)을 버리고 나와 버렸던 것이다.

도변(渡邊) 포주는 창기 取締(취체)규칙을 가지고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최 양은 즉결 구류처분으로 10일간 구속이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조선인 식자(識者)는 물론 일인 유지들까지 여론이 분분하였다.

당시 가등(加藤)이란 일본 서장도 일선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 대차관계로 인신구속을 못한다는 일본 최고재판소인 대심원 판례에 따라 최 양을 석방, 이상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당시 조선인 유곽 여성이 포악한 포주와 항쟁하여 승리를 거둔 첫 케이스라고 하였다.<<<

 

공인된 창기업(매춘업)의 집단 지역이 곧 유곽이다. 최초의 유곽은 일본 부산영사관에 의해 부산에서 처음 생겼다. 1905년 생긴 신정 유곽(현재 필동과 쌍림동 사이)은 서울의 대표적 유곽으로서 그 영업은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대부분의 도시에 유곽이 생겼으며 서울에는 신정 유곽과 더불어 용산 彌生町 유곽(현 용산 도원동 주변)이 유명하였다. 위 사진은 서울의 신정 유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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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 수전노 2제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 이야기,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馬山野話』를 포스팅하겠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마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도시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마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수록되어있어서 이 도시의 한 시대를 이해하기에는 이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초판본은 목발 선생이 돌아가신(1973. 8. 7 작고) 후인 1973년 말에 출판되었고, 재판은 1996년 ‘도서출판 경남’의 수고로 나왔습니다. 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바꾸었을 뿐 원문을 손대지 않아 초판과 재판의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글『馬山野話』는 재판본을 그대로 싣는 겁니다. 원문 그대로이며 혹 탈오자가 있으면 바로 잡겠습니다. 글이 모두 141꼭지라 짧으면 1년6개월, 길면 2년 정도 걸릴 분량입니다.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의 해방 이후 부분은 준비 중입니다. 이 글 연재 끝내고 포스팅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馬山野話』의 초판과 재판본입니다.

 

 

 

1. 수전노 2題

<第1題>

 

마산부 내 완월동 2구 전 마산 세무서 관사 건너편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면 나지막한 초가집 부엌방에는 나이 40이 넘은 일본인 홀아비가 세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되나 직업은 마산부청(현재 창원군청) 사환이다. 그리고 공휴일은 물론이지만은 여기 있는 대로 조선인을 상대로 구차한 석유나 실, 빨래비누 같은 것을 자기 이웃과 가까운 촌으로 행상을 하며 믿음직한 집에는 외상 거래도 했다. 현금보다는 비싸게 준다. 그의 식생활을 보면 아침은 보리밥에 다꾸왕 몇 조각이며, 점심은 감자 두 개 내지는 세 개, 저녁밥은 죽 아니면 간혹 밥이다.

신문은 부청을 쉬는 날 마산역에 비치한 것을 보며, 자기가 거처하는 방이나 창문은 캘린더를 떼어 바를 뿐 아니라 밤에는 아무리 방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않고, 외상장부를 볼 필요가 있을 때만 잠깐 호롱불을 켰다가 용건이 끝나면 꺼버린다.

술은 좋아하는 편이나 공짜가 아니면 어림도 없고, 마시기는 막걸리를 마시되 대단한 용기와 각오로 일전(一錢) 엽잔을 때로는 두 잔을 비우고 나면, 이것이 즉 그에게는 대용식이 된다. 이렇게 해서 먹을 것도 굶으며 의복도 내의 외는 사 입지 않는다. 그때는 관청이나 큰 기업체에 취직이 된 급사나 사환에게는 제복은 춘추 두 차례씩을 급부하는 은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골똘한 검약의 표본 같은 생활을 하는데 저축이라도 하느냐 하면 그것은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돈이라도 있는 냄새가 외부에 풍기는 날이면 도독이 붙을까 염려인 듯 누가 보아도 거지와 사촌벌은 될 것 같다.

이리해서 몇 해를 한집에 지내던 그는 외상값 받으러 촌으로 갈 일이 있어서 이웃에 있는 조선 아이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가 문득 머리에 번갯불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뿔사! 아이를 촌에까지 심부름을 시키려면 삯돈을 주어야한다. 큰 손해가 날 뻔했구나 생각한 그는 날을 보낼 것을 취소하고, 자기가 가기로 하는데 그것도 왕복비용이 나니 석유 양철통에 실, 성냥 등을 싣고 행상을 하면 몇 십전이라도 남을 것이라고 주판질을 했다가 돌아오는 날 갑자기 급성폐렴에 걸려서 온 방 안이 그으름에 덮인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비참하게 숨졌다.

이렇게 철저한 수전노가 죽은 뒤 수사 당국에서 그의 유품을 샅샅이 뒤졌으나 고인을 위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남았다는 것은 헝겊 같은 의복 몇 벌이 버들상자에 있을 뿐이었다.

이내 낙담한 후견인 격인 수사원들이 그 의복을 주물럭거리니 뜻밖에도 그 속에서 마산우편국 저금통장이 발견되었는데 그 액수를 보니 놀라지 마라! 당시로 봐서, 대금 일만 몇 천원이 기입되어 있지 않겠는가?

수사 당국은 고인의 고향으로 조회를 해보았으나 가까운 일가 친척이라곤 없고 천애 고독으로 먼 친척뻘로는 조카 되는 자가 북해도 모처에서 석탄광부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 피맺힌 돈 일만 몇 천원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 조카에게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계산이 어긋난 수전노의 검약이라고나 해둘까.

<김형윤(왼쪽) 당시 마산일보 사장과 변광도 편집국장. ‘지방신문의 편집자’ 캡처 화면. 경남신문 인터넷 자료. 마산일보는 경남신문의 전신>

 

<第1題>

아무도 모르게 마산우편국에 대금 일만 수 천원을 한푼 안 쓰고 고스란히 남겨둔 채 죽은 마산부청 수전노 행적이 일본 전국의 주간 잡지를 장식케 한 6,7년이 지난 뒤 그와 유사한 인물이 역시 완월동에 살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이름은 中村 某로서 마산고등학교 입구 도로 왼편에 있던 양철집이 그의 거처하던 곳이다.

그가 어떻게 마산으로 굴러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절도죄인가 사기죄로 마산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옥칙을 잘 준수한 모범죄수로서 가출옥과 동시에 재수자(在囚者)의 제2작업장인 완월동 벽돌공장 관리자로 지정된 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 같다.

그가 입옥 전에 약간의 전답이 근교 농촌에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생명보다도 돈을 소중히 여긴 때문에 벽돌공장 관리자로서의 수당은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서 재산은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게다가 고리대금을 해서 추수 때면 농촌에서 상당한 수곡이 있었고, 부내에서도 들어오는 금리로 식생활을 하고도 남았지만 그 식생활인 것이 극히 제약되어 있어서 반은 굶는 상태였다.

홀아비가 되어서 그런지 부엌에서 연기나는 것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물욕에 정신이 혼미한 그인지라 원금 환납 기일이 하루라도 늦어지는 경우에는 연체 이자는 물론이고 가차 없이 지불명령을 띄운다. 소작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소작료 계약이 너무 가혹하므로 소작인들은 감세(減稅)를 해서 남과 같이 해달라고 호소를 하면 연기는 해주되 감세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이리해서 많은 소작인과 채무자들을 울리곤 하였다. 게다가 그의 홀아비 신세를 동정하기 보다 가엾은 조선 여자의 빈공을 면해주기 위해서 그에게 중신을 해 준 일도 수차례 있었으나 오래 동서를 하지 않고 헤어지고 만다.

원인이란 별 것이 아니다. 쫓겨난 2,3명 여자의 경우가 똑 같다. 문제는 밥을 많이 먹기 때문이란 것이다. 즉 식량을 소비하는 게 아깝다는 것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로 하던 2차 전시 때만 해도 배급 1인분 식량이 너무나 적고 귀해서 목구멍에 넣기가 아까웠던지, 배급 쌀은 큰 자루에 모아 두고 가까운 탁주 양조장을 찾아가는데, 공장에서는 공짜로 막걸리 몇 사발이 통하는지라 얻어 마셔 놓고는 돌아올 때 두서너 되를 사가지고 와서는 막걸리를 대용식으로 삼는 것이다.

이렇게 점약을 해 오는 동안 홀아비로는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지만 다만 없는 것이 꼭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사람,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그가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소작인 상대의 법적 대리인인 소출(小出)이란 변호사 한 사람 뿐이었으나 이웃은 아니었다. 결국은 외로웠다.

세월은 흘러갔고, 그가 병들어 누었을 때도 약 심부름을 할 사람조차 없었다. 이리해서 극도로 인생의 허무와 재행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느끼고 탄식함이었든지 자기 집 복도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다.

창문을 연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무언의 죽음을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아래 사진은 산호공원에 있는 김형윤 선생의 불망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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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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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