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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마산포 해안의 석축돌제(위)와 부두(아래)>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당시 욱일 승천의 강압세력을 가진 신마산 방면의 일인들이 음양으로 한인업계를 침식코자 하였으나 난공불락의 한인 아성에 근접도 못했으며,

실례로 길형(吉形)이라는 일인이 점포를 빌리기는 했어도 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 결과는 명약관화로 수개월간에 파산한 바 있었다.

재래의 업자 외에는 연고 없는 여하한 한인이라도 냉연히 거부함으로써 마산의 몬로집단이요, 2의 개성이라는 명예스러운 평도 받았다.

그리고 연중 행사의 하나로서 풍어를 기원하는 어민들은 별신당에서 가장 경건한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별신제의 음호(陰護)라고 할까? 그때만 해도 어업 허가는 지금처럼 남발이 아니었고 남획도 없었던 탓인지 언제이고 규격에 맞는 계절 생선이 풍요하였을 뿐 아니라 창원강(진해만 연안 즉 통영, 고성, 남해, 거제, 가덕의 통칭)의 생선은 그 진미에 있어서 멀리 동해와 서해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여 남녘 바다에서 합포만으로 몰려오는 어선은 장관을 이루었고 뭍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필의 운반 우마차가 인근 군부(郡部)로 종락(終絡)하는 은성상(殷盛相)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세의 변천과 지방의 자연 발전으로 옛날 선창 앞 해변을 매축하여 현재의 위치에 어조(漁組)의 면모가 일신하고 석일(昔日)의 어시장은 옛날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인들은 매축으로 확장된 이곳에 공동권과 우선권을 방패삼아 소위 내선합자어업조합을 강제로 조직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진주한 지 불과 1,2년 만에 총 퇴진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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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2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7) - 마산의 심장, 어시장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2 마산의 심장, 어시장

 

어시장은 마산의 심장이다.

어시장의 성쇠와 마산은 하나다. 어시장이 살아 숨쉴 때 마산은 피가 끓는 청년이 된다.

어시장의 하루는 아직도 밤이 깊은 새벽 34시부터다. 너른마당의 새벽시장에는 시골에서 지은 채소를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내리는 할머니, 전날 오후 잡은 게 한 동이를이고 나와 앉은 아주머니, 집에서 만든 고추장, 된장, 된장에 박은 고추를 수북히 담아 들고 나온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건어물가게 주인들은 멸치, 꼴뚜기 등을 수북히 담아 가게 앞에 진열하기 바쁘다.

대풍골목 앞 공터에는 횟집주인들이 56시경이 되면 수십 대의 물차에서 펄떡펄떡 살아있는 히라스(부시리), 광어, 농어, 숭어 등 제철 횟감을 구입하기 위해 손수레(딸딸이)를 끌고 나온다.

<마산 어시장 내에 있는 진동골목의 아침풍경>

 

동 골목에는 처마마다 내건 백열등 아래 전날 냉동고에 보관한 도미, 민어, 대구, 참조기 등 제수고기를 진열하는 손길이 바쁘고, 진동아지매는 일찌감치 경매 본 활어를 내 놓고 자리를 잡는다.

바다를 끼고 있는수협 본소와 남성공판소, 잠수기수협 경매장에는 중매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손가락 내기가 한창이다.

경매시간부터 경매장 인근의 바닷가는 어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국내산·수입산 냉동어류며, 선어를 파는 손길이 바쁘다. 남성동 공판소 중매인은 퍼덕거리는 아귀, 대구, 메기, 새우를 상자에 담고 손님들과 흥정을 시작한다.

이 시간 어시장은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손길과 발길이 바쁘다.

골목마다 셔터여는 소리, 짐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소리, 수레 끄는 소리, 물건을 흥정하는 소리는 살아있는 삶을 느끼게 한다.

새벽 어시장은 파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도 활기를 느끼게 한다. 어시장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자가 만나 삶의 냄새를 만들어 낸다.

시장은 모든 사람의 삶이 살아 숨쉬는 곳이면서 역사의 줄기에서는 가려지고 묻혀있다.

역사를 움직여온 수많은 민중의 살아있는 생활사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다. 시장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자가 만나는 곳이며 유통되는 곳이다.

하지만 단순히 물자만 교환되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특히 한 지역의 사회 문화적 양상과 생활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민중의 삶의 방식, 즉 민속의 집결소라고할 수 있다.

<구마산 시장의 건·염어점 / 한국수산지 제2집>

 

-조선후기 마산 어시장-

마산어시장은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어물 집산지이자 교환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시대 남해의 마산은 동해의 원산, 서해의 강경과 더불어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시장은 육로를 중심으로 한 장시와 해로를 중심으로 한 포구 두 가지 형태로 발달하였다.

마산 어시장은 마산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장으로 발달하였다.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하였던 마산포가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공납을 쌀로 받는 대동법 때문이었다.

대동미를 효율적으로 운반하기위해 1760년(영조36년)에 설치한 마산창은 인근의 대동미를 마산포로 집결시키면서 마산포에는 인근지역의 관원은 물론 객주, 여각, 경강상인을 비롯한 각지의 상인, 이웃 촌락 주민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달로 바다를 통한 전국적인 유통이 가능해 지면서 육로의 장시와 연결되면서 더욱 성하게 되었다.

렇게 번성한 마산장은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후기 15대 장시 중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마산을 남해안 최대의 상업도시로 변모시켰다.

당시 마산의 인구가 7,898명으로 창원부의 다른 면의 인구보다 대략 1,8003,500명 많을 정도였다.

창원에는 마산포외에도 지이포, 사화포, 합포, 여음포가 있었지만, 수천 척의 선박이 정박가능한 마산포가 중심포구로서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해상유통의 중심포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마산포의 시장권은 마산창의 관할구역이었던, 창원, 함안, 칠원, 거제, 진해, 웅천, 의령 동북면, 고성 동남면이었다.

이들 지역의 곡물과 기장, 울산, 평해, 강릉, 영해, 함흥 등지의 어물과 마포가 유통되었다.

특히 원산포에 집하된 북어가 마산포를 경유하여 충청도 은진 강경포까지 유통된 것을 볼 때 마산포가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포 외에도 동래의 부산포, 김해의 칠성포가 경상도의 해상유통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마산포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개포구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서해안을 연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대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5일장에서 상설시장으로-

조선 후기 마산장(어시장)은 매월 음력 5·15·25일에는 새강(지금의 오동동 어시장 부근)에서, 음력 10·20·30일에는 구강(산호동 용마산)에서 정기적으로 장이 열렸다.

쌀, 보리, 콩, 조, 면화, 어류, 마포, 모시, 비단, 종이, 유기, 소, 과실, 연료, 호초석 등 다양한 물목이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마산장의 규모는 매우 커서 1800년대 말 마산 선창의 객주가 130여호였으며, 1890년에는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마산장은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 건물이 들어서면서 상설시장이 되었고 이에 따라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새강과 구강 두 곳에서 열리5일장은 새강(어시장) 한 곳으로 모아지면서 대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히 부정(부림동), 수정(수성동), 원정(남성동), 만정(동성동), 석정(창동) 등의 바깥도로에 수많은 난전이 평일에도 부정공설시장과 연결되어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5·10의 장날에는 인근 5리에 있는 장꾼과 장보러 나온 인근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림시장과 어시장의 취급품목과 공간이 구분이 뚜렷해진 계기는 합포로가 만들어지면서부터였다.

<부림시장(1937년) / 5일장이던 구마산시장은 1926년 부정공설시장이 들어서면서 상설시장이 되었다>

 

공간이 분할된 이후 부림시장은 의류, 채소, 과일, 식품, 과자, 식기 등의 일용잡화 시장이 되고, 어시장은 생물, 건어물 시장으로자리를 잡았다.

당시 어시장은 현재 건어물상이 밀집한 곳인 동굴강과 어선창에서 부림시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부로 승격한 마산부에 철도가 부설되어 마산장은 또 한 번의 획기적 발전계기를 맞게 되었다.

통영 등의 인근 어촌의 수산물이 마산의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면서 마산장의 주요 물목은 수산물이 차지하게 되었다.

어종은 대구, 청어, 정어리, 멸치, 갈치, 새우, 명태, 문어, 해삼, 성게였으며, 대부분 말리거나 염장하여 거래되었다.

 

-대구와 북어포-

대구와 북어포는 마산 어시장의 대표적인 어물이었다.

대구의경우에는 동지에서 대한 사이에 주로 진해만에서 잡았는데, 년간 어획고 300만∼500마리 중 120만 마리가 마산포를 통해 거래되었다.

성어기가 되면 어항에서 매축지까지 대구가 쌓여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역이지만 구마산역에는 전국 13도로 운송될 대구가 산적해 있었다고 한다.

명태는 마산이 산지가 아니었지만 동해북부에서 잡은 것을 들여와 가공한 북어포를 판매하였다.

마산에서 만들어진 북어포는 조선인이 만든 명태어주식회사에서 창녕, 의령, 삼가, 합천, 진주, 사천, 고성 등의 경남일대의 유통을 담당했다.

회사가 1년간 취급하는 수량은 약 1천 톤에 달하며, 1톤에 9원 내외로 잡는다면 예상액은 100만원 이상에 이르렀을 것이다.

1929년 마산만의 수산물 거래액이 년간 500600만원으로 추정할 때 북어포 거래는 마산의 주요한 거래물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상거래를 주도하는 상인인 건어물 객주의 경우, 마산을 대표하는 객주는 멸치객주라 할만큼 멸치가 유명했다.

건어물점에는 멸치 이외에도 명태(북어), 대구, 가자미, 도미, 갈치, 문어, 상어, 가오리, 해삼 기타 패류에는 전복, 대합, 새고막 등을 팔았다.

19244월에 건어물을 경매하기 위해 조합원 수 40여 명의 ‘마산전온판매조합’이 설립되었다.

여기서 경매되는 어종은멸치, 뽈래기, 새우가 주품목이었다.

해방되기 한해 전인 1944년 마산수협의 전신인 마산어업조합이 설립되었다. 마산어업조합에는 위판시설을 기반으로 74명의 중매인과 30여명의 객주가 자금선대업을 하였다.

어종은 고등어, 정강어, 갈치, 생멸치, 대구, 조기, 잡어이다. 1950년대만 해도 멸치와 대구는 여전히 최고의 물목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70년대 어시장의 철따라 집산되는 어획물의 종류는 봄 3월부터 5월까지 숭어, 도다리, 조기, 도미, 뽈래기, 여름 6월부터 8월까지는 감싱이, 갈치, 정강어, 고등어, 가을 9월부터 11월까지 칼치, 조기, 고등어, 정강어, 12월부터 2월까지 대구, 명태였다.

2002년 겨울 어시장의 주요 거래 어획물은 아귀와 물메기이다.

70년대만 해도 버리던 것이 최고 인기 어종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환경오염과 어자원의 감소 현상으로 인해 먹는 종류가 바뀌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잡는 어종은 생태환경, 어자원의 양, 상품성에 따라 역사적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인 변화요인에 따라 해양생물의 종류와 포획빈도가 변하는 것이다.

 

-어시장, 만남의 공간으로-

마산창의 설치로 대포구로 성장한 마산포는 시대의 변화와 그 궤적을 같이 한다.

항해술과 해운술의 발달과 더불어 경상도 동해안과 남해안을 연결하고 낙동강 수운과 영남 남해안과 호남 남서해안을 연결하는 해로유통권의 중심지로서 자리매김하였고, 철도가 부설되면서 통영을 포함한 남해안 수산물의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1966년 양덕동에 한일합섬과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선 수출자유지역으로 마산의 인구증가와 자본의 유입은 상업의 발달을 더욱 부추겼다.

이런 마산 어시장은 경남의 중추로서 마산 경제의 한축을 담당해 왔으나 최근 어시장의 위축은 마산의 미래를 위해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문제이다.

어시장의 위축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대형할인점의 등장이다.

주부들의 소비패턴이 변화하고 구매의 편리함과 다양성을 장점으로 하는 대형할인점과의 경쟁은 어시장에게는 힘겨워 보인다.

둘째, 도로망의 변화이다. 철도 등의 교통의 변화에 힘입어 발전하였던 어시장이 이제는 새로운 도로망의 확충으로 유통의 중심축으로의 역할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진고속도로의 개통과 남해고속도로의 창원우회도로의 개설, 창원터널과 안민터널의 개통 등은 유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마산의 기능을 많이 축소시켰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마산만의 매립으로 인한 공간의 지나친 확장도 한 이유이다. 공간이 넓어짐으로서 상인간의 유대감이나 상인과 고객 간의 친밀감이 사라지고, 시장전체의 짜임새도 훼손되었다. 따라서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넷째, 과거에는 한 장소에서 거래되었던 채소와 과일, 수산물시장이 분리된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전문화와 현대화한 시장이 오히려 다양성을 손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전문화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마산어시장 전어 축제>

 

앞으로의 어시장은 규모의 확대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과거의 어시장이 가졌던 사회적 교환의 장소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최근의 ‘마산 어시장 축제’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으로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일 지도 모른다.<<<

 

이경미 / 당시 경남대학교 사회과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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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진섭 2015.03.10 12: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의 모든 역동성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양함과 교류는 모든 생명력의 원천일겁니다. 지금은 그것을 잃어가면서 활력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행정을 집행하는 모든 공무원들은 그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5.03.12 09:24 신고 address edit & del

      역시 마산의 중심은 어시장이죠? 방문 감사합니다.

2014.10.06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경남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18854월 마산에서 태어났다.

옥기환과 구성전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결과로 1990년에는 독립지사로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받았다.

 

 <명도석 선생의 묘역>

 

-고난에 비켜서지 않고-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구마산 어시장 상민조합의 총무를 역임한 선생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7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 부터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 이형재, 김용환,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마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312일 지역인사들과 사전에 모의하여, 321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측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여, 다행히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자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운동조직이었다. 마산지회가 만들어진 것은 1927720일이고, 모두 4차례의 전체대회가 거행되었다. 명도석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7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12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의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처럼 명도석은 신간회 마산지회가 존립하던 시기에 열린 4차례의 대회에서 매번 중요 간부에 선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간회 마산지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케하고 있다.

신간회 마산지회는‘언론·집회·출판·결사·교육의 자유 획득, 조선어 교육의 실시, 실업교육 실시, 노동·농민·청년·소년·부인 형평운동의 건’ 등과 같은 중앙의 일반적인 강령을 준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사립 마산 의신여학교 동맹휴학사건에 대한 조사 검토 건’, ‘보통학교 수업료 인상 반대의 건’, ‘일반 물가 인하[減下] 운동의 건’ 등 지역사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지역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도석은 양조장을 경영하였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19233월에는 노동자 200여 명이 모인 간담회에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명도석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지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이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회사의 수송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자, 경남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로에 위치한 명도석 선생 기념비>

 

-좌·우로부터 존경받던 민족자산가-

 

선생은 늘 “뜻은 행하되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왔던분이다.

그러한 선생의 신조 때문인지 선생은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덜 알려져 왔는지 모른다.

생은 일제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말살 당하자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는 민립대학 발기인, 마산물산장려회(馬山物産奬勵會)의 간부를 역임하고 신간회 마산지부를 이끄는 등, 실질적으로 마산의 진보주의 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성장하여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거기에서 발생되는 수익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민족자산가(民族資産家)의 표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이 조여오던 1940년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선생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해방 이후에 잠시‘건준’의 마산시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영달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택에 은거하면서 195464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허당 명도석 선생은 민족을 우선하는 선각자적 정신과 국난의 시기에 자산가들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스스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사표로서, 또 마산의 정신적 지주로서 길이 남을 만한 자취를 남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관심을 제외하고 지역사회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쩌면 지역 출신의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끝 맺고 있다.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桎梏)의 그 깊은 구렁에서 풀려날 그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회천(光復回天)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 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문은정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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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6) - 강점제3시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중앙부두 공사>

중앙부두 건설공사도 제1부두와 같이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의 삼택조(三宅組)에 맡겨 시공하여 제1부두와 같은 날인 1939년 5월 19일 준공하였습니다. 총 25,475평 규모로서 총길이 1,080m의 물양장도 갖추었습니다.

현재 이 중앙부두에는 연안여객터미널․마산지방항만청․모래부두․쌍용양회 시멘트 사일로․세관․검역소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현대아이파크 앞에 합동청사가 준공되었기 때문에 공공기관은 곧 이전할 것 같습니다.

공공기관들이 이전하고 나면 이 일대를 근래에 조성한 서항부두와 함께 해양친수공원으로 조성할 것입니다. 마산 해안에 큰 변화를 가져올 계획이므로 시민들 기대가 높습니다.

시멘트 사일로도 철거한다고 하는데 여수엑스포 때처럼 재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설계도는 중앙부두 공사 때 작성된 도면입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초량토목출장소에서 설계한 것인데 정부기록보존소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이 설계도면 좌상부에 있는 단면도를 보면 당시 해안매립지의 지반고(Ground Level)를 알 수 있습니다. 설계도를 보면 만조 시의 해수면과 지반면이 거의 동일한 위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낮게 설계된 지반고가 태풍 매미 때의 엄청난 피해를 불러왔고 지금도 어시장 해안에 사리(매달 음력 보름과 그믐날, 조수가 가장 많이 밀려오는 때) 때가 되면 바닷물이 육지를 덮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한 장의 설계도가 말하고 있는 의미는 큽니다.

일본인들이 적은 돈을 들여 마산해안을 매립하려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이 설계도는 태풍매미의 원인을 분석하는 자료로 중앙언론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매립지의 지반고를 적절한 높이까지 올리려면 엄청난 양의 흙을 반입해 다져넣어야 되는데 그러기엔 건설장비가 없었던 당시에 어려움이 많았을테고 당연히 고비용이 필요했을 겁니다. 따라서 도시의 백년대계보다는 적은 돈을 들여 당장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겠다는 판단을 했던 겁니다.

그렇게 볼 때 태풍매미 때의 피해와 지금 어시장에서 입는 피해는 일제가 남기고간 부실한 매립 탓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제1부두 2차 공사>

제1부두 1차 공사에 이어서 시행된 제2차 공사는 8,600여 평 규모의 추가 공사로 매립되어 이 이후 제1부두는 총 면적 12,000평 규모의 용지를 확보했습니다.

해안선에는 석축안벽이 설치되었고 그 외 물양장․계선장(繫船場) 등이 건설되었지만 준공되기 직전 해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두공사는 거의 끝난 상태여서 해방직후부터 부두로 사용되었으나 서류상으로는 1966년 6월 3일 비로소 지목이 설정되고 국유화가 된 땅입니다.

위치는 가고파국화축제가 열리는 바로 그 곳입니다.

위의 두 매립지 위치도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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