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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 마산의 무역>

무역량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는 것 같아 빼다보니 글이 짧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병참기지 기능을 맡았던 한국의 역할은 마산의 무역량을 늘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 마산항의 무역은 그 구조상 1920년대와 별 차이가 없이 수․이입에 비해 수․이출의 금액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체금액은 1930년의 730만 엔에서 1939년에는 1,770만 엔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마산항의 무역 증대는 정상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물자의 반․출입 증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제하 마산항의 수․이출, 특히 미곡의 일본 반출량 증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굶주림을 강요한 결과였으며 전쟁 중에 이루어진 기아수출이었습니다.

             (사진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쌀가마를 야적해 놓은 인천항입니다)

1940년대에도 1930년대와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일어난 소위 태평양전쟁 이후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 비축을 위해 한국산 미곡의 반출은 더욱 많아졌고, 대용식량으로 만주산 조와 대두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 한국인들은 양질의 쌀을 빼앗긴 대신 일제가 수입한 만주산 깻묵으로 식량을 대신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강점제3시기는 전시물자 부족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공출이란 이름으로 한국 가정의 식기는 물론 제기까지, 심지어 교회나 사찰의 종에 이르기까지 쇠로 만든 것들을 모조리 약탈해가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마산에서 일본이나 중국 등지로 각종 수출품을 실어낸 곳은 지금의 제1부두, 제2부두, 중앙부두였습니다. 세 항만 모두 일제가 건설했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위성사진에서 세 부두 위치를 확인해 볼까요?

다음 사진은 해방 후 찍은 항공사진인데, 바다 쪽으로 툭 나온 부두가 제2부두, 왼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중앙부두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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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산업>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923년 6월 일본 오사카의 본전안오랑(本田安五郞)이 전 조선면화 마산공장을 매수하여 그 해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주식회사 마산조면공장이 1924년 1,300평의 부지에 280평의 공장과 50평의 하치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는 태전성일(太田誠一)에 의해 창립된 태전마사(太田麻糸) 공장이 부지 5,000평에 건평 1,000평의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는 마산-진주 간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서부 경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원마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상가지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마산은 창동․남성동․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부근과 남성동 해안 매축지에서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이 즐비했습니다.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입니다.

신마산의 상가는 京町(두월동) 거리의 양쪽에 형성되었지만 일본인조차도 값이 싼 원마산에서 구매를 하였으니 상거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판매업보다는 여관․요식업․대금업 등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대상(大商) 중에는 원마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지방 농공은행이 통합하여 창설되어 전 경상농공은행이 있던 자리에 1918년 10월 개설되었다)이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이 외에 마산금융조합이 신마산에, 구마산 금융조합이 척산천 이동(以東)으로 구역을 분할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

1910년 신설된 구마산 역은 도시 범역의 확산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구마산 역 부근 시장통에는 상업조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승객의 숫자도 마산 역보다 많아 부산 대구에 이어 번성했던 역이었습니다.
화물은 경부선․호남선․경의선․진해선 등과 연결되었으며 1년간의 승차인원이 176,104명, 하차인원은 153,495명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상업학교․형무소지소․보통학교․식은지점․내서와 구마산 양 금융조합․금융회사․기업전습소․조면공장․정미소 2개․양조장 4개 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구마산 역에는 신마산과 다니는 승합차가 27대 있었으며 부외(府外)와 연결되는 자동차가 준행되고 있었다.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양조산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산전 장유양조장 / 현 몽고간장 / 1950년대 촬영>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 1920년대>

 

                                  <소화주류주식회사 / 무학주조 전신>

1926년에는 약 7,450석을 생산했으나 역시 부산의 생산량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는 당시의 조합원 12개 공장에서 세운 계획량 9,853석 보다도 1,200석이 더 많은 11,000석을 생산하여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한국의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제1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산의 청주업계는 호황을 지속했고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산의 청주는 국내 시장에 이어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 설립된 마산의 양조회사는 합자회사淸水양조장(1921년), 濱田주조장(1923년), 村崎주조장(1923년), 千島園주조장(1925년), 山邑주조주식회사마산공장(1929년), 昭和주류주식회사(1929년, 현 무학주조) 등입니다.

이 중 천도원주조장이 최근 철거된 삼광청주의 전신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일제는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면허를 발급했습니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와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영세했습니다.
한 예로 1928년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불과 1,500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마산에서 생산된 장유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일원뿐만 아니라 멀리 원산과 청진에 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장유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산의 장유 생산량은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였습니다.

일제시대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술과 간장 된장 제조업은 지금까지 무학주조와 몽고장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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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00:00

오래된 편지 한통 - 마산해양신도시


오래 전에 썼던 편지 한 통을 소개합니다.
가포신항과 해양신도시 때문에 해양수산부(현 국토해양부)의 담당사무관에게 보낸 8년 전 편지입니다. 편지를 나눈 분은 이후 고위공직자가 되었습니다.
*( ) 안은 원본에 없는 글입니다.

○○○ 사무관님께 드립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전화로 시간을 뺏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글까지 보내게 된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마산항(가포신항)의 건설과 서항매립(해양신도시)이 제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것이고, 개발의 결과는 현재와 미래의 마산시민들 삶의 질을 결정할 중요한 사안이기에 이렇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사무관님께서는 전화 통화에서 ‘서항 매립은 항만 건설과 별개(해양신도시와 가포신항은 별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형식은 별개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별개의 사업이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항이 아닌 다른 지역, 예를 들어 덕동만에 준설토 투기를 한다 할 때 항만건설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관께서는 수자원보존과 군사지역 등의 이유로 그곳은 곤란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설령 그런 사유가 없다하더라도 덕동 지역은 매립한 후 예상되는 낮은 토지분양가 때문에 필요한 비용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항만건설과 서항매립이 구별될 수 없는 사업이라는 저의 주장을 쉽게 납득하실 것입니다.
만약 저의 생각과 달리, 덕동만이라도 준설토만 버릴 수 있으면 마산항 건설이 가능하다면, 다수 시민들이 수자원지역문제와 군사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마산 신항만(가포신항)의 경제성 평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막연하게 항만을 만들어 놓으면 선박이 오지 않겠느냐, 차후 손실이 있다면 정부가 15년간 보전한다는 등의 답은 합리적인 설명이 못될 뿐만 아니라, 항만건설이 환경 훼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개발의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확실히 보장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국책사업도 아닌 마산항 항만건설이 차후에 적자가 되어 국가가 손실을 보전하게 된다면 그 자체로서 국가적 손실이기도 합니다.

2. 이 사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에는 시민의 입장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처리하고, 해당사안에 대해서 시민들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위의 두 의견이 반영되어 사업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서항매립지(해양신도시)의 공간구성에 대해서는 기본설계 수준은 지금 단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지난 토론회에서 설명된 개발(해양신도시 개발)의 내용은 정말 참담할 수준이었습니다.
공공용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논의하면 된다, 혹은 나중에 시민단체의 의견을 많이 반영하겠다는 식으로 답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비용과 토지분양가를 예측하여 매립지의 도시설계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은 확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산시가 공영개발하기 때문에 민간업자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을 사실상 임의로 할 수 있는 자치단체의 공영개발이 관리와 감독을 거치는 민간업자보다 내용이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영행정이란 슬로건이 동원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연말 보내십시오.

2003년 12월 30일
마산에서 허정도 드림

이 편지를 통해 세 가지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1. 국토해양부는 가포항만 경제성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2. 공감할만한 정보를 주지 않아 시민들이 사업 타당성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다.
3. 해양신도시 용도에 대해서 “나중에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한 점입니다.

편지쓴지 8년이 지난 지금, 마산은 이름마저 잃고 통합창원시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만 해양신도시사업은 여전히 마산에서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도시문제입니다.

이 사업에 대한 국토해양부의 최근 입장을 보면,
마산해양신도시사업은 가포신항만의 항로준설 깊이를 13m에서 12.5m로 줄여, 신도시의 규모 34만 평을 19만 평으로 축소 시행한다고 합니다.
매립지 19만 평의 형태와 용도는 창원시가 결정하되 주거나 상업용도보다는 공익적 용도를 지향하겠다면서 최종 결정은 연말로 미루었습니다. 다만 사업규모 축소로 발생하는 민간사업자의 손실을 고려한다니 일부 이윤목적의 토지이용도 생길 것 같습니다. 매립 후 서항부두나 마산항 1부두 등 기존 부두는 정부가 친수공간으로 개발하고, 연말까지 준공해야 되는 가포신항은 내년 말까지 기한을 연장하였습니다. 신항의 부두형식은 계획대로 컨테이너부두+잡화부두로 한다지만 창원시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 결정을 두고 마산상공회의소는 “이것으로 논의를 종결하자”고 했고, 물생명시민연대는 “충분한 논의가 모자랐다”면서 갈등을 예고했습니다.

8년 전 편지가 생각난 것은 이 보도 때문입니다. 34만평이 19만 평으로 줄어들긴 했지만 전체 상황은 8년 전과 비슷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① 해양신도시 용도결정을 나중으로 미룬 점, ② 컨테이너 2선석이 포함된 가포신항의 경제성에 대한 애매한 입장, ③ 이 사업에 대해 시민들이 충분히 납득하지 못하고 있 점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월이 흐르고 조건도 달라졌지만 사업의 큰 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사업자와 국토해양부가 주도하는 이 사업의 보이지 않는 메카니즘 때문입니다.

'최종결정'이라는 보도 때문에 이제는 끝난 일처럼 보이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이 사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과거 마산시는 왜 이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 사업을 통해 이 도시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내일 오후에 시민단체와 마산상공회의소가 이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는데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다른 방법이 없는지 궁리해볼 겁니다.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이 사업 끝나면, 공직자와 사업자 전부 떠나고 이 도시에는 좁아진 합포만과 매립지, 그리고 마산사람들만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립의 결과가 좋아도 열매는 마산사람들의 것이요, 결과가 나빠도 마산사람들이 감내해야하는, 마치 마산사람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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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1.04.06 11: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사람들에게는 숙명과도 같다는 말이 참 비장하게 전해옵니다.

  2. 김훈 2011.06.11 23:2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더 큰 정체를 낳을듯... 가뜩이나 마산 인구 유인요소 하나도 없는데.. 이름 바뀌었지만 뭔가 좀 매력 요소를 찾아야 될것 같다는 생각은 안하는지.. 음...
    그냥 그냥 먼가 하고 들렸다가 글 읽고 좀 짱나서리.. 환경운동하시는 분인진 모르겠지만 참 찌질하신듯.. 마산 사람은 마산 앞바다에 대해서 사실 관심 없잖아요... 볼일도 없는데.. 이제 좀 볼일 생기게 좀 합시다.. 관심이 우선이고 그 관심을 통해 긍정으로 갑시당... 두서없지만 제 생각에..^^*

  3. 아직 2011.07.06 17: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직도 마산은 인구가 줄어들므로 아파트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해와 진해와 창원은 인구가 늘어나므로 아파트가 많이 필요하구요?
    마산인구가 줄어드는 이유가 뭔지 조금도 사색하지 않는군요.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이외엔 바라보길 거부하십니다. 마산인구..그나마 내서신시가지가 건설되었기에 40만 인구유지 가능했습니다. 최근엔 메트로시티와 아이파크 덕분에 그나마 마산주거환경 이미지가 선방하는 것입니다. 해양신도시가 축소개발되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안없이 밥과 죽을 거부하니 밥도 죽도 아닌...마산에선 이제 지양되어야 합니다. 마산을 자신만의 우물단지 안에 가두어 놓지 마시길~
    초가집 기운다고 기와집 짓지말고 기와집 무너진다고 아파트 짓지마라는 그런식의 퇴보적 사고방식에 마산시민들을 가두어 놓지 마시길~

  4. 이상하네요. 2011.10.15 09:0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시민들의 납득과 동의 없이 진행된다는 점에 대해 지적한 내용에 김훈님과 아직 님 등의 정책 옹호 글은 참 이해가 가질 않네요. 업무 등 관계인으로서 쓴소리를 듣기 싫으신 입장이 묻어나는 것일까요? 친환경적이면서,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과, 인기(표몰이)나 일부의 이익을 위해서 진행되는 정책 사이에서 정작 ..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외면당하고 있는건 아닐지 생각해 보십시오. 김훈님은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인터넷 매너를 지킵시다.

  5. 신물이 납니다 2011.10.15 09: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자전거 도로를 만들면서 강에 둑을 세워서 강 경계를 콘크리트로 막아버리는 분... 마산 사람으로서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해안을 따라 있는 자연을 밀고 골프장, 랜드를 만드시겠다는 분... 나중에 ... 몇 백년 후 우리 아이들이 걱정됩니다. 역사는 평가해 줄 것입니다. 삼국시대-고려-조선-건설/토목왕국 ... 이후 한반도는 돌 무더기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자기 앞의 이익만 보는 정치인들과 일부 사람들의 신물나는 행동을 막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2010.11.0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개항직후 마산의 산업>


개항 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마산에도 근대산업의 문이 열렸습니다.
무역이 본격화되었고, 금융업과 건설업이 선을 보였습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던 장유업도 이 때 시작되었습니다.

○ 항만

『110년 전인 1900년, 마산항의 무역량은 수입 154,765엔, 수출 87,024엔으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
쌀․콩․동광(銅鑛)․사금(砂金)․소가죽․소금 등을 수출하였고 방적사(紡績絲)․옥양목․석유․솜․명태․누룩․성냥․철제품 등 생활용품이 마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 중 일부 수입품은 칠원․진주 이북 지방뿐만 아니라 전라도 상인들까지 마산포에 와서 일본에서 수입한 소비품들을 사갔다』

이 글은 1902년 일본인 향월원태랑(香月源太郞)이 1발간한 『한국안내』에 실린 기록입니다. 『한국안내』는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마산포에 대해서는 열다섯 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의 소비제품들은 마산포를 통해 한반도 내륙 깊숙이 공급되어 1908년경에는 전라도는 물론 멀리 충청도까지 판로가 아주 넓었습니다.

1910년에 들어서도 마산항은 수출액이 158,834,000엔인데 비해 수입액이 566,869,000엔으로 수입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항구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출은 주로 웅천․칠원․진해․영산․함안․창원․의령․김해․덕산․거제․사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의 大阪과 兵庫․중국의 대련․국내의 부산과 염포(울산에 있었던 포구) 등지로 내 보냈습니다.

이 때도 수입품은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소모품이었는데 수입품 중 1/3이 동경, 2/3가 오사카 제품이었으며 그것도 효능 위주의 필수품이 아닌 양산․모자․가방․넥타이와 면포․면사․솥․성냥 등 사치성 고급소모품과 고급 생활필수품 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마산항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류를 일본으로 내보내고 일본에서 생산된 소비품을 수입하는 항구였던 겁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수출입 창구였던 마산세관 뱃머리입니다. 1910년 사진입니다.



○ 금융업

러일전쟁
승전 후 한국에서 유리한 지위에 선 일본은 종전 이후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까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의 화폐개혁․금융제도, 재정정리, 교통운수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이런 정책 기조 속에서 마산에서도 일본인들에 의한 금융업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878년 일본제일은행 부산지점이 한국 땅에 들어 온 외국 금융업의 최초였습니다만 마산에는 그로부터 27년 후인 1905년 12월 25일 제일은행 마산출장소가 개설되었습니다.
마산포에 있던 제일은행 마산출장소는 1907년 현 월남동 성당 자리로 신축하여 이전하였습니다.
다음 사진이 1907년 신축 이전 기념사진입니다.


이 건물은 1960년대 중반에 현재의 성당이 거립되면서 철거되었지만 사진 속에 서있는 일본인들이 밟고 섰던 현관입구의 계단석은 성당 마당 한쪽에 보존되어 흘러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1년, 현 성당 건립 때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께서 선물한 종을 안치하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면서 그 계단석을 땅에 묻어버렸다고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랫동안 보존해왔던 의미있는 계단석인데 참 안타깝습니다.
아래 사진이 성당 마당 한 켠에 있는 기념물입니다. 이 탑 아래에 계단석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성당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나무 밑 보호석입니다. 원래 은행건물의 화단석으로 유일한 흔적입니다.



제일은행 마산출장소 외에 진주농공은행 마산출장소, 마산금융주식회사, 창원지방금융조합이 이 시기에 문을 열었습니다.
사채업자도 약 20명 있었으며 전당포 10여개소가 영업을 시작하였고 보험업도 번성하여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개설한 보험회사가 11개소나 되었습니다.

모든 금융기관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창설 운영되었으며 금융조합은 한국인이 조합장을 맡았으나 중요 업무는 역시 일본인이 맡았습니다.
사채업자와 전당업자도 전부 일본인이었으며 영업이 잘되었다고 합니다.
이율이 월 2.3%에서 7%의 고리였는데 주로 한국인들이 빌려 썼습니다.

○ 양조업 및 기타

일제시대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산의 대표적 산업인 양조업은 1904년 1월 일본인 동충용(東忠勇)에 의해 세워진 아즈마(東)양조장이 효시였습니다.
무학소주와 몽고간장으로 그 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마산의 양조업이 드디어 마산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05
년 창업한 석교(石橋)주조장입니다. 사진의 공장건물은 1914년에 지었으며 서성동에 있었습니다
.

 
일본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신마산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건설관련업체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해 1910년경에는 17명의 토목건축청부업자가 있었습니다.
전문건설업체도 많아 1909년에는 미장업 35명, 목공업 40명의 회원들이 조합을 구성할 정도로 건설관련 종사자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 거류지에는 주택임대업을 위한 임대주택 건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마산의 산업 및 상권을 주도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상품판매를 기업화시키는 일환으로 마산청과물시장과 같은 대규모 채소매장을 1910년 9월에 열었습니다.

당시 마산에는 10개의 목재상과 13개의 석유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재상들은 모두 신마산에 자리잡은 데 반해 13개 석유상들 중 11개가 원마산(마산포)에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의 양과 생활필수품의 판매량이 신마산에 비해 월등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상업에 비해 공업부분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1911년까지 정미소 6개와 소규모 비누공장과 철물공장이 각 1개씩 있었습니다.

이 외에 근대적인 주식회사 형식으로 1905년 마산수산주식회사가 창포동 3가에 설립되어 일본인들을 상대로 활어 위판업을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사(私)금융업체인 마산금융주식회사가, 1908년에는 마산곡물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개항 후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마산에 세운 공장들입니다.<<<

업종

상호

대표자

소재지

설립일

자본(원)

 청주양조업

東양조장

 東忠勇

 

 1904. 1

 

石橋주조장

 石橋市太郞

서성동

 1905. 10

 12,000

五反田주조장

 五反田富次郞

장군동

 1906. 10

10,000

水式주조장

 水式富次郞

청계동

 1906. 11

 10,000

西田주조장

 西田嘉惣市

홍문동

 1907. 11

 20,000

岡田주조장

  岡田玉吉

상남동

 1908. 9

  12,000

千鳥園주조장

 遠藤豊吉

장군동

 1909. 10

 15,000

 장유양조업

赤門장유양조장

 管式夫

신창동

 1906. 11

 10,000

 정미업

夏目정미소

 夏目哲三

남성동

 1907. 5

 10,000

松原정미소

 松原甲藏

남성동

 1910. 8

 20,000

 기타

上野제면소

 上野玄一

추산동

 1910. 7

  5,000

마산철공소

 松本多藏

월포동

 1907. 3

 10,000

瀨川하차공장

 瀨川渚之助

상남동

 1908. 4

   3,500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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